< 122화_ Vs.헨더슨 END. >
1.
-툭.
심판의 수신호에 맞춰 헨더슨과 글러브를 맞댄 후 케이지 양끝으로 거리를 벌렸다.
“후우.”
군데군데 핏자국이 보이는 케이지 바닥.
번잡스러운 객석의 환호.
나와 헨더슨 사이 어디쯤엔가 서 있는 심판.
이 모든 것들이 하나씩 지워졌다.
보이는 건 오로지 헨더슨 하나.
들리는 건 단지 나와 그의 호흡 뿐.
-퉁
케이지 양 끝으로 거리를 벌인 것이 무색할 만큼 나와 헨더슨은 빠른 속도로 센터 싸움을 시작했다.
-훅. 훅. 훅.
가볍게 뻗어오는 잽.
헨더슨의 키는 196으로 나보다도 몇 센티는 컸다.
거기에 윙스펜도 긴 편이었기에 나보다 몇 센티는 먼곳에서 펀치를 뻗어왔다.
정말 단 몇 센티.
10cm도 안 되는 그 차이 때문에 내 주먹은 헨더슨에게 닿기 전에 방어를 위해 다시 돌아와야 했다.
-퍽. 퍼퍽.
다행히 서로 초반이라 견제성 펀치들을 뻗었기에 그리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가벼운 블로킹으로 처리해낼 수 있는 정도.
-휘잉-
하지만 저건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쩌억!
펀치 연계를 이어 정확하게 내 왼쪽 허벅지에 꽂힌 헨더슨의 라이트 레그킥.
저걸 피하자면 중심이 무너져야 했기에 알면서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리에 충분히 힘을 주고 중심이동을 하면서 타격 포인트를 흩트렸기에 당장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 같은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으면 문제가 생길수도 있겠지.
미첼과의 시합 때도 그랬지만. 하체를 노리는 레그킥의 빈도가 높아진 것 같았다.
혹시 레그킥이 내 카운터 공략으로 떠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슥. 스슥.
일단 헨더슨과의 거리를 좁히며 ‘나만 맞던 거리’ 에서 ‘나도 때릴 수 있는 거리’ 로 우리 둘 간의 스텐스를 조절했다.
-툭. 퍽!
내가 다가가는 만큼 물러서려는 헨더슨의 동선에 왼손을 뻗어 잡아두고는 그대로 라이트 펀치를 뻗었다.
클린히트를 넣지는 못했지만 그의 살짝 스치듯 그의 머리를 가격한 펀치.
그래도 어느 정도 충격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생각보다도 더 터프하네.’
196의 키에 긴 팔다리. 근육질의 몸을 가진 데릭 헨더슨은 누가 보더라도 ‘단단하게’ 생겼다.
앞선 그의 시합영상들 또한 빠짐없이 찾아봤기에 그가 얼마나 빠르고 강한 선수인지 충분히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것보다도 빠르고 강하며. 튼튼한 느낌이었다.
‘브라이언을 걱정할게 아니라 눈앞의 헨더슨을 걱정해야겠네.’
이러든 저러든 헨더슨은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이었고, 장기집권이라 할 만큼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결코 만만하게 볼 선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후웅!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헨더슨의 펀치.
지금 나는 집중력을 꽤나 끌어올린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다는 것은 그만큼 헨더슨의 핸드 스피드가 빠르다는 말이었다.
‘스피드 훈련을 조금 더 했어야 했어.’
TWF가 끝나고 근 3개월의 기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준비 기간이었지만 내게는 짧아서 아쉽기만 한 기간이었다.
라이트 헤비급에 맞는 육체의 밸런스도 잡아야했고 끊임없이 조정해야했다.
제한이 없는 헤비급이면 차라리 나을 텐데 라이트 헤비급은 미들급보다는 낫지만 분명 체중의 제한이 있었다.
스피드와 파워.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었기에 적절한 중간치에서의 타협을 보고 그에 맞는 몸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3개월은 너무 부족한 시간이었다.
TWF 촬영기간인 6월 달부터 시작했으니 어찌 보면 6개월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충분치는 않았으니까.
-휘익. 휘익!
그래도 헨더슨의 움직임은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스피드였다.
‘이정도 집중력에. 이정도 스피드면... 브라이언에겐 두드려 맞겠네.’
지금은 헨더슨의 움직임이 시작되면 그걸 보고 피하는 정도의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집중력을 더 끌어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렸으니까.
사실 미들급 때는 지금 수준의 집중력도 오래 유지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라이트 헤비급으로 체중을 올리면서 훨씬 상황이 나아진 것이었다.
-휘익! 휙!
이번에는 라이트 펀치에 이은 라이트 킥까지.
뒤로 크게 물러서며 헨더슨의 공격을 피해냈다.
‘1라운드 종료까지... 2분 정도 남았나? 집중력 좀 끌어올려볼까.’
서로 간에 정타 없는 타격만으로 어느새 3분 가량이 흘러갔다.
이런 재미없는 시합은 내 취향도 아니었고 내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의 취향도 아닐 것이다.
남은 1라운드라도 화끈하게 들어가봐야지.
-타탁.
“후우-”
헨더슨과의 거리를 살짝 벌린 뒤 낮게 심호흡을 하며 조금 더 또렷이 상대를 바라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웅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더욱 느리게 느껴지는 시간.
관중들의 대화소리도 늘어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사라졌다.
오롯이 헨더슨과 나. 단 둘만 남은 듯 한 분위기.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다.
-꿈틀.
-스팟.
내게 접근하는 헨더슨의 몸 움직임이 하나하나 뇌리에 새겨질 듯 눈에 박혔다.
그의 어깨 근육의 갈라짐. 가슴 금육의 수축. 축발의 발목 각도. 앞다리 허벅지의 갈라짐. 그의 눈동자의 흔들림 하나까지.
조금 전까지 그의 움직임을 보고 피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그의 ‘행동을 예측해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레프트 잽. 다음은 라이트.’
왼쪽 겨드랑이가 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허리가 뒤틀리고 오른쪽 바깥 가슴근육이 수축을 시작했다.
단순히 레프트로만 끝나는 게 아닌 다음 동작인 라이트 펀치까지 이미 헨더슨의 몸은 ‘준비’하고 있었다.
-휙. 휘익 뻐-어억!
알고 있는 펀치를 상대하기에 가장 좋은 건 역시 카운터지.
나는 헨더슨의 레프트 잽을 상체를 숙이는 걸로 피하며 거리를 좁혔고 예상했던 라이트 펀치가 뻗어오는 타이밍에 라이트 오버핸드로 헨더슨의 안면에 정확히 카운터를 꽂아넣었다.
-와아아아아아아!!!!
-들어갔어! 제대로 들어갔다고!
카운터펀치를 기점으로 집중력을 풀어내며 다시 들리기 시작한 주변 관객들의 환호성.
“크흡...”
그리고 놀랍게도 헨더슨은 뒤로 조금 비틀거릴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았다.
‘... 다운시킬 생각으로 제대로 꽂아 넣었는데. 맷집 하나는 대단하네.’
나라고 지금 수준의 집중력을 계속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벌써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는 것 같았으니까.
이렇게 과부하 걸릴 정도의 집중력을 끌어다 쓰면 ‘적당한 수준의 집중’도 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니 정말 아껴쓰듯 확실한 기회에만 써야했는데 헨더슨이 생각보다 터프해서 이번 시합에서는 조금 더 신중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흡!”
뒤로 비틀거렸지만 바로 마주펀치를 뻗어오는 헨더슨.
이건 날 때리거나 반격을 하겠다는 의도보다는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추가타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방어적인 의미로 뻗어내는 펀치였다.
이 정도는 집중력을 크게 끌어올리지 않아도 충분하지.
-휘익. 쩌억!
이번에는 내 쪽에서 헨더슨의 왼쪽 허벅지에 레그킥을 꽂아 넣었다.
-후웅. 텁!
비틀거리지도 않고 레그킥을 맞은 상태에서 왼팔을 뻗어오더니 오른팔까지 뻗어 날 부둥켜안는 헨더슨.
안면 정타에 이은 레그킥에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보였지만 그 데미지만은 착실히 쌓인 듯 했다.
이렇게 달라붙어 몸싸움을 하면서 정신을 차리려는 걸 보니까.
-흡. 퍽!
내게 달라붙은 한 팔로 목을 잡고 한 팔로 날 밀어내 공간을 만들더니 냅다 무릎을 차올리는 헨더슨.
“흐압!”
나는 내 목을 감싼 헨더슨의 팔까지 함께 감싸듯 그의 목을 잡고는 허리에 힘을 줘 상체를 숙였다.
강제로 씨름하듯 상체를 숙이게 된 헨더슨.
그 상태에서 오른팔과 왼팔의 포지션을 변경해 그의 머리통을 붙잡고 내 상체 아래로 밀어 넣으며 그의 백포지션을 잡으려 했는데
-텁! 후웅!
내가 밀어 넣는 힘을 이용해 오히려 앞으로 더 들어오며 내 왼쪽 다리를 잡고 원레그 테이크다운을 시도하는 헨더슨이었다.
-텁! 쿠웅!
한쪽 다리가 잡혀서 공중에 뜬 찰나의 순간.
나는 그의 상체를 잡고 있던 팔을 옮겨 헨더슨의 머리통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운 채 초크 포지션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헨더슨은 내 왼쪽 다리를 붙잡은 채 들고 있었고 나는 그의 머리에 초크를 넣은 상태.
-뿌득. 뿌득. 파앗!
떨어지는 충격으로 초크가 살짝 풀려버려 헨더슨은 그 틈으로 머리를 빼냈고 나 또한 머리를 빼내기 위해 헨더슨의 힘이 빠진 틈을 타 왼 다리를 빼내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아아아아아!!!
짧은 순간의 치열한 공방.
확실히 헨더슨의 베이스가 레슬링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될 만큼 능숙한 그의 대처에 최대한 몸싸움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격은 순간의 힘을 폭발시키면 된다지만, 그라운드는 싸움 내내 온 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지끈 지끈.
원레그 테이크다운에서 스탠딩 포지션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짧은 순간.
아주 잠시 집중력을 높였을 뿐인데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온 몸으로 힘을 쓰며 집중력을 유지하는 건 에너지 소비가 배 이상으로 큰 느낌이었다.
‘그라운드에서는 집중력을 높이는 걸 최대한 조심해야겠네.’
클린히트가 들어갔다고 나도 흥분했었나보다.
헨더슨은 쌍코피가 터졌는지 얼굴이 피범벅이었지만 어느새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맞은 놈도 차분한데 때린 내가 흥분해서야.
-삐!
다시 헨더슨에게 접근하려는 찰나 울리는 1라운드 종료 신호음.
“잘했어. 잘했다 해서야.”
“저래보여도 분명 데미지는 있을 거야. 그라운드보다는 타격으로 풀어야해.”
“파고들되. 잡히지 말고. 오케이?”
세컨드 석으로 돌아가자 필승 형과 창섭 형은 내 땀을 닦아주며 이것저것 좋은 이야기들을 해줬다.
딱히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준비된 물로 입을 헹군 뒤 근육을 잠깐 풀어주고나니 휴식시간이 끝났다.
“읏차-”
1라운드는 서로 간에 탐색전일 뿐이었다.
클린히트를 내가 하나 더 맞췄을 뿐이지 아직 이렇다 할 승부의 방향이 나온 건 아니었다.
‘이제는 승부의 방향을 보여줘야지.’
오늘 시합은 아름이도 직관하고 있는데. 더 두드려 맞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잖아?
“후우-”
-툭
링 중앙에서 가벼운 글러브 터치와 함께 바로 시작된 2라운드.
-휙!
헨더슨은 1라운드 후반의 데미지를 거의 다 털어낸 듯 다시금 펀치를 뻗어왔지만
-찌릿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내게는 보였다.
그의 밸런스가 이동할 때 왼쪽 다리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는 걸.
-휘익. 쩌억!
2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헨더슨의 왼쪽 허벅지에 제대로 꽂아 넣은 오른발 레그킥.
-휘청
이번에는 확실히 눈에 보일만큼 휘청거린 헨더슨이었다.
-스슥
그리고는 오른발을 끌어당겨 왼발과 같은 선상에 두기 시작했다.
보통 오른손잡이의 파이팅 포즈에서는 왼발과 왼손이 앞으로 나오는 게 정상인데 지금 헨더슨의 모습은 마치 가라데 선수나 태권도 품세를 하기 전 자세처럼 양발이 나란히 선 모습.
한마디로 몸을 내게 정면으로 두고 섰다는 말이었다.
‘그래봐야 소용없지만.’
몸통이 정면이라면 내 입장에서는 땡큐였다.
때릴 면적이 넓어지니까.
-휙. 툭. 휘익 퍼억. 퍽!
안면으로 왼손 잽을 던진 후 오른손 바디. 바로 이어 왼손 바디까지 꽂아 넣어 그의 가드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휘익. 휙.
급하게 뻗어오는 그의 레프트 잽을 피해내며.
-후웅! 쩌억!
레프트 잽을 뻗느라 조금 앞으로 전진한 그의 왼다리 허벅지에 다시 한 번 레그킥을 꽂아넣었다.
-휘청. 쿵!
이번에는 균형을 잃고 슬립다운처럼 바닥에 넘어졌다가 다급히 일어서는 헨더슨.
어후. 어느새 퍼렇다 못해 검붉게 부어있는 그의 왼다리를 보니 지난 미첼과의 시합이 끝났을 때의 내 다리가 떠올랐다.
그때 아름이가 멍든 다리를 마사지 해주...
훠이. 갑자기 딴 생각을 하다니. 시합에 집중해야지.
나는 헨더슨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파이팅포즈를 취하는 걸 보고는 그의 왼쪽. 내 기준 오른쪽으로 스텝을 밟으며 펀치를 날렸다.
이미 왼쪽 다리가 엉망진창이 된 헨더슨은 왼쪽으로 도는 내 움직임을 따라 오기가 버거웠다.
-휘익! 쩌억!
이번에는 그의 사이드에서 왼쪽 다리 뒤쪽 허벅지를 제대로 찼다.
-쿵!
이번에는 왼쪽 무릎 하나만 꿇은 자세로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헨더슨.
-휘익! 퍽. 퍽!
그대로 달려들어 아직 일어서지 못한 헨더슨의 안면에 밑에서부터 위로 올려치는 듯한 어퍼컷 형태의 펀치를 꽂아넣었다.
가드를 올려 머리를 감싸 쥐고는 웅크리듯 방어하는 헨더슨.
어떻게든 일어나보려 하는 것 같은데 왼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게 보였으니까.
-휘익. 텁!
계속해서 쏟아지는 내 펀치 하나를 잡고는 내게 기대러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 헨더슨.
나는 그 의도를 알았지만 순순히 그가 일어나도록 내버려 뒀다.
-탁!
내 몸을 몸을 세운 그가 제대로 일어선 뒤 그의 팔을 뿌리치고는
-쒸이익. 쩌어억!
그대로 그의 왼쪽 허벅지에 온 힘을 다해 레그킥을 꽂아넣었다.
“큽!”
-쿵!
일어나자마자 바로 다시 바닥으로 쓰러지는 헨더슨.
이번에는 한쪽 무릎을 꿇는 정도가 아니라 허벅지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스탑! 스탑!
이윽고 선언되는 심판의 스탑 사인.
“으아아아아아아!!!!!!!!!!!!!”
그에 맞춰 나는 하늘에서 매달린 스포트라이트를 향하듯 고함을 내질렀다.
-휘이이익!!!
-미쳤어! 수준이 완전 다르잖아!
-미스터 갓! 내 팬티를 가져!!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전은 2라운드 2분 11초. TKO 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