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_WFC 283 >
1.
-코치로서의 역량 증명? 팀 헨더슨과 차별된 팀 강해서의 강점은?
-헨더슨. 빌리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일. 억지일 뿐이다.
-끝나지 않는 복싱계와 종합격투기계의 신경전? 이번엔 미들급이다.
-팀 헨더슨. TWF 시즌 사상 최악의 팀? 전패의 역사를 다시 쓰다?
-헨더슨의 음성 녹취록을 공개한 빌리. 과연 그 진실은?
-WFC 미들급 파이터 브래드. IBC 프로 복서 자칼에게 1라운드 KO패?
-헨더슨. 비슷하지만 내 목소리가 아니다. 자신을 노리는 악의적인 공격이다?
= The World Fighter의 최신 시즌은 방영과 함께 화제가 되었다. 우선 무패행진을 기록하고 있는 파이터이자 이제는 신예라는 말이 조심스러울 정도의 커리어를 쌓은 WFC 미들급 챔피언 강해서의 출연부터 격투기 팬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거기에 상대 팀 코치로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인 데릭 헨더슨이 출전하며 두 사람의 코치 전은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전으로 점쳐졌다. (중략)
하지만 뚜껑을 따보니 두 팀의 운명은 극과 극을 달렸다. 팀 강해서의 완승이자 팀 헨더슨의 완패. 거기에 더해 데릭 헨더슨은 같은 팀 코치였던 빌리(WFC 라이트 헤비급)의 양심선언으로 인해 진실 공방을 치르는 중이었다. (하략)
└데릭 팀 한번도 못 이긴 거 실화냐? TWF 시즌 사상 최초 아냐?
└역대 최악의 팀이자 코치로 낙인찍히겠네
└헨더슨이 이 오명을 조금이라도 벗어내려면 미스터 강과의 시합에서 승리하는 수밖에 없겠어.
└그런데 헨더슨과 빌리의 진실은 뭐지? 헨더슨이 정말 알레이즈와 가마쉬의 도시락에 장난을 치려 한 걸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헨더슨 팀은 단 한 번의 승리도 얻지 못했었고 그에겐 승리가 간절했을 테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헨더슨과 비슷하긴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 목소리더만. 이건 분명 미스터 강이 빌리를 매수해 헨더슨에게 누명을 씌우는 걸 거야
└헨더슨이 그 정도로 막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분명 어떤 음모가 있을 거야
└ㅋㅋㅋ누가들어도 헨더슨의 목소리던데? 알레이즈와 가마쉬의 시합 내내 헨더슨의 표정은 마치 이럴 리가 없는데? 하는 표정이었다고
└이러든 저러든 헨더슨은 곤욕을 치르고 있겠어. 방어전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안타깝게 됐어.
인터넷에는 TWF31과 관련된 기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 가장 뜨거운 주제는 아무래도 헨더슨과 빌리의 진실 공방이었다.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는 음성 녹음파일이 있었지만, 반대로 증거로 내세울 게 음성 녹음파일밖에 없다 보니 양측의 대립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요즘은 워낙 기술이 좋아서 음성 카피 같은 거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며 헨더슨이 강력히 부인하고 있었거든. 아무래도 챔피언인 헨더슨과 비 방어자인 빌리의 발언력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고.
헨더슨 측에서는 악의적인 루머라며 빌리를 향해 법적 절차를 밟겠다는 강수까지 두고 있는 상황이니 상황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했다.
뭔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을 테지만. 당장 그들 사이에서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쾅!
헨더슨과의 시합을 치열하게 준비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만. 그만. 내일모레 시합 뛸 놈이 무슨 훈련을 그렇게 과격하게 해?”
“하하. 별로 과격하게 안 했는데.”
라이트 헤비급 한계체중에 맞추기 위해 지난 6월부터 몸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미들급에 맞추느라 억지로 줄여뒀던 근육을 다시 키우는 작업부터 그에 걸맞은 속도를 얻기 위한 훈련까지.
지난 복싱 시합 때처럼 아주 말끔한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아주 양호했다.
현재 체중은 101킬로. 라이트 헤비급 한계체중인 93킬로에서 8킬로 정도 오버해있었지만 계체 전까지 충분히 커팅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근육이 늘어난 만큼 극단적으로 빼낼 수 있는 수분이 많았고, 지금은 수분 커팅을 위해 일부러 수분을 과다할 정도로 보충해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나저나. 헨더슨은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흠. TWF에서 본 멘탈로 생각해보면 별 타격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지. 시합 직전이나 감량 시기에 유독 예민해지는 파이터들이 있으니까.”
“하긴.”
필승 형의 말에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헨더슨은 이번 오픈 워크아웃에도 불참을 선언하며 참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고 시합 전 입이나 조금 털어볼까 했는데 아쉬운 일이었달까.
“계체 끝나고 바로 기자회견 있지?”
“네. TWF31 시합 직전에 있어요.”
이번 WFC 283은 TWF31의 연장선에 반쯤 걸치고 있는 시합이었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TWF31의 계체가 있고, 토요일 오후에는 WFC283의 계체가 예정되어 있었다. WFC 283 계체 이후 잠깐의 시합 전 기자회견이 있은 후 바로 이어 TWF31 시합이 진행될 예정이었고.
“그때 볼만하겠어. 파이터가 파이터에게 고소 드립이라니.”
“하하하. 그렇긴 하죠.”
헨더슨이 빌리에게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에는 수많은 조롱 댓글이 달렸었다.
격투기 선수들과 트래쉬 토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는데 헨더슨 또한 예전에 수위를 넘나드는 트래쉬 토크를 했던 이력이 다수 존재했다.
그런데 이번 빌리의 발언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니. 물론 헨더슨 측에서는 이게 트래쉬 토크가 아닌 악질적인 음해이며 법적인 선을 넘은 사항이라며 못 박았지만, 다수의 대중에게 놀림감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벨트 얻어내면. 올 한해에 두 체급을 석권하는 게 되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2에 즉흥적으로 참가했던 것을 계기로 종합격투기라는 스포츠에 발을 들인지도 벌써 햇수로 3년 차였다. 이번 시합이 끝나고 내년이 되면 벌써 4년 차.
시간 참 빨리 간다는 말이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서른 살의 늦깎이 파이터였던 나는 어느새 32살의 챔피언이 되어 있었다.
내년이면 벌써 서른셋.
‘아. 그러고 보니.’
아름이에게 연락한다는 걸 깜박했다.
생각과 동시에 필승 형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밖으로 나와 스마트 폰을 꺼내 아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헨더슨과의 시합을 준비한다고 하반기 들어서는 아름이와의 시간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여름 휴가 시즌에 짧게 얼굴을 봤지만, 그 이후로 근 3개월 가까이를 목소리만 듣고 있는 상황. 연말은 꼭 같이 보내자 약속했고, 그를 위해 이번 헨더슨과의 시합을 보러 라스베이거스로 오기로 했었다.
-여보세요?
“어. 아름아.”
잠깐 상념에 빠진 사이 아름이가 전화를 받았고 그 반가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도착했어?”
-응! 이제 막 도착해서 폰 키구 캐리어 기다리는 중!
“미안해. 못 나가봐서.”
-괜찮아. 괜찮아. 시합 끝나고 보자 우리는!
“...고마워.”
나보다 더 바쁘면 바빴지 결코 한가하지 않은 아름이가 날 보기 위해 열 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런데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지도 못했고 시합 끝나기 전까지는 만나지도 못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가득할 수밖에.
-대신. 맛있는 것도 사주구. 손도 잡아줘.
“응?”
-지난여름에는 사람들 때문에 숨어다녔잖아...
“아.”
지난여름.
한창 TWF31 촬영 중에 아름이는 유안이네와 함께 라스베이거스를 찾았었다.
해외이니만큼 편하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라스베이거스에는 한국인이 많았고, 나를 알아보는 격투기 팬들도 많았다.
결국, 더운 여름날에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쓰고 서로 거리를 둔 채 데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야.
“어?”
-나도 이제 곧 서른셋이야.
“...”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했던 생각을 너도 하고 있었구만?
-내 친구 중에 결혼 안 한 애를 찾기가 더 힘들다? 나 조카도 많아.
“어...”
-근데 난 남자친구랑 손도 못 잡니?
“넌 연예인이잖아.”
-연예인은 사람 아냐? 난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니까? 우리 소속사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나도 이제는 연기자로 집중하고 있고.
“...알겠어. 미안해.”
-또. 또. 알겠어 미안해. 가 아니라. 알겠어. 손잡자. 가 돼야지.
“하하. 알겠어.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키스도 해줄게.”
-...흠. 흠. 뭐. 그거면 됐어. 헤헤.
꽤나 엄했던 아름이의 목소리는 어느새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있었다.
이러니까 또 보고 싶네.
타이틀전이 끝날 때까지는 조금 참아야겠지.
WFC 283.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매치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
-...강해서 선수. 204 파운드. 통과!
-...데릭 헨더슨. 204.3 파운드. 통과!
이번 WFC 283의 계체량은 특별한 문제 없이 흘러갔다.
나와 헨더슨을 포함해 다른 출전 선수 중에서도 계체량을 통과하지 못한 선수는 없었다.
-찰칵. 찰칵.
계체를 마치고 가벼운 인사와 함께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포토타임을 가지고는 바로 옆에 마련된 기자회견 테이블로 이동했다.
보통 시합 전 기자회견은 오픈 워크아웃 때, 혹은 따로 일정을 잡아서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고 지금처럼 계체량 이벤트 때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시합의 모든 메인 경기가 시합 전 기자회견을 하는 건 아니었다.
세간에 이슈가 되는 경기나 라이벌전. 혹은 이번처럼 타이틀전 정도 되면 이런 기자회견을 가지는데 헨더슨과 나는 TWF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이슈가 있었기에 기자회견이 준비되었다.
텔론이 직접 테이블 중앙에 앉아 기자회견을 진행했는데 처음에는 가벼운 근황이나 시합 준비 중 특별히 신경 쓴 부분들을 묻고 답변했다.
-그러면. 미스터 강. 이번 시합에서 가장 많이 신경을 쓴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어진 텔론의 질문.
순간적으로 뭐라고 답변해야 센스 있다고 소문날까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음. 식단입니다.”
-...식단이라니. 특별히 식단을 신경 썼다는 말인가요?
“아뇨. 혹시 누가 제 식사에 이상한 장난을 치지는 않을까 싶어서. 이번 시합을 준비하면서 항상 그 부분을 신경 썼어요.”
-찰칵 찰칵
-와하하하
기자회견 앞 기자석과 관중석에서는 연신 카메라 셔터음과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뒤에서 빌리 또한 내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그 말은. 내가 상대 선수의 식단에 무슨 수작질이라도 한다는 건가? 미스터 강?”
“응? 나는 헨더슨 네가 그런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 혹시 모르니 조심했을 뿐이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을 겪고 있는지 알면서 그런 발언을 했다는 건. 그 뒷감당을 할 자신도 있다는 거겠지?”
“혹시 나한테도 소송하려고? 이런. 텔론. 혹시 유능한 변호사가 있다면 연락처 좀 알려줘요. 저기 소송의 프로페셔널이 날 고소할지도 모르니까.”
“...”
텔론을 중간에 두고 양옆에 앉아있던 나와 헨더슨.
헨더슨은 꽤나 태연한 듯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귓불과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그나저나. 오늘 TWF31 시합은 보고 갈 거지? 헨더슨? 물론 네 팀원은 없겠지만 말이야.”
“...”
“혹시 너희 팀 소속 도전자들. 연락은 와? TWF가 끝나고 우리 팀으로 연락이 온 너희 팀 소속 도전자들이 꽤 있더라고.”
진짜였다.
상대 팀이었던 팀 헨더슨 소속의 도전자들이 TWF 촬영 이후 훈련 관련으로 우리 체육관에 문의를 한 경우가 몇 건 있었다. 그 외에도 안부성 연락이 온 경우도 있었고.
“중요한 건 팀원들의 승리보단 코치들의 승부지. 내일이 지나면 지금까지의 여론은 한순간에 반전될 거야.”
“그건 네 희망 사항이지. 내가 잘못된 음식을 먹고 탈이 나지 않는 이상 헨더슨 네가 이길 일은 없을 거야.”
“... 넌 아직 애송이야. 너희 팀이 이길 수 있었던 건 그냥 뛰어난 도전자들이 너희 팀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라고.”
“결국, 자신의 팀원들이 뛰어나지 않았다고 매도해버리는군. 다들 잘 들었죠? 헨더슨이 자기 팀원들은 뛰어나지 못해서 졌다고 징징거리는군요.”
-쾅!
결국, 테이블을 내려찍는 헨더슨.
언제까지 능글능글한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인내심이 그리 깊진 않았네.
아니면 감량이나 시합 전이라 예민한 건가.
“텔론. 기자회견은 여기까지 하지. 내일 시합을 위해 슬슬 움직여야겠어.”
헨더슨은 텔론에게 일방적으로 기자회견의 끝을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헨더슨. 미스터 강.”
기자회견 마이크의 전원을 모두 끈 뒤 나와 헨더슨만을 나직이 부르는 텔론.
“지난 TWF. 주방에도. 체육관의 모든 방에도. 카메라가 있었어.”
시합을 하루 앞두고 텔론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
“한마디로. 나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거야. 헨더슨.”
“...”
헨더슨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텔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번 시합은 중요해. 그래서 이걸 터뜨리지 않았어. 물론 미수에 그쳤기에 도전자들에게 어떤 피해도 없어서 터뜨리지 않은 것도 있지.”
“...”
“하지만. 헨더슨 자네가 더 이상 챔피언이 아니게 된다면. 이걸 터뜨리지 않을 이유도 없지.”
“... 내가 계속 챔피언이라면?”
“나는 내 손으로 WFC의 챔피언을 잘라낼 생각은 없어. 네가 계속해서 챔피언 자리에 앉아있다면 이 영상이 빛을 볼 일은 없겠지.”
와우.
텔론은 헨더슨의 약점을 잡고는 거의 협박에 가까운 발언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미스터 강. 이 영상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면. 헨더슨을 꺾어. 그러면 타이틀과 명분. 그리고 브라이언과의 시합까지 모두 가질 수 있을 테니까.”
“... 그건 좀 구미가 당기네요.”
안 그래도 질 생각은 1도 없었지만. 더더욱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제안이었다.
WFC 283까지 하루.
모든 문제의 매듭이 풀리기까지 단 하루가 남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