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19화 (119/203)

< 119화_TWF END. >

1.

-끼익. 쿵.

헨더슨과의 비밀스런 대화를 끝내고 체육관 밖으로 나온 빌리.

“...”

-꾹. 띠링.

그의 손에는 녹음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창이 뜬 스마트 폰이 들려있었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핸콕의 이야기와 레이첼과의 만남. 그로 인해 빌리는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꾸욱...

주먹을 말아 쥐는 빌리. 흔들리고 있다고 해서 그의 분노가 사그라들거나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분노가 표출될 방향이 조금 달라지고 있을 뿐.

“스읍- 후우.”

크게 한번 숨을 들이키고는 다시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는 빌리.

일단 헨더슨과의 대화를 녹음하긴 했지만 이걸 어떻게 사용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즉흥적이게 행한 녹음이었고 헨더슨의 제안 역시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으니까.

다만 체육관 안으로 들어선 빌리는 예전처럼 강해서를 뚫어지게 쳐다본다거나 적개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

-부스럭. 부스럭.

일과 훈련이 모두 끝나고 난 뒤.

TWF 참가자들과 몇몇 코칭 스태프들은 TWF 홈으로 돌아와 휴식 및 전력 분석 등 숙소에서의 스케줄을 보내고 있었다.

‘이건가.’

TWF도 이제 마지막 8강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팀 강해서 소속의 도전자 6명과 팀 헨더슨 소속의 도전자 2명.

여기서 승리하는 각 체급 상위 2명씩 4명만이 TWF 31 파이널 매치 무대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빌리의 손에 들린 것은 팀 강해서 소속 선수인 알레이즈와 가마쉬의 도시락이었다.

TWF의 도전자들은 개개인의 목표에 따라 밀프렙 형식의 정해진 식단을 제공받는다.

“...”

TWF 홈에는 입구부터 시작해 여러 곳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전자들이 훈련 중일 때 혼자 숙소에 숨어들어올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도전자들에 섞여 자연스럽게 TWF 홈에 들어와야 했고, 다행히 그들의 식사가 보관된 냉장고 쪽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면 문제가 되니 얼른 해치워야 하는데 일말의 망설임 때문에 빌리는 주저하고 있었다.

“거기 누구 있나?”

그때 주방 입구 쪽에서 들리는 굵은 목소리.

‘이런.’

빌리는 황급히 알레이즈와 가마쉬의 도시락을 챙겨 다시 보관 냉장고에 넣어둔 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목소리에 대답했다.

“맥주가 어디 있는지 대체 찾을 수가 없군.”

“...빌리?”

주방으로 들어온 인물은 팀 강해서의 코치이자 WFC 웰터급 챔피언인 최두호였다.

“미스터 최? 자네도 맥주를 찾으러 왔나? 그러면 내 것도 좀 찾아주면 좋겠어.”

“...”

빌리는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했지만 최두호는 그런 빌리의 모습을 보며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빌리는 어두운 실내에서 봐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당황한 표정에 진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애초에 소심하고 낯가림이 많은 빌리가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대처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어? 나랑?”

“그래.”

최두호는 굳은 얼굴로 빌리를 데리고 주방을 나섰고 빌리는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

“...”

TWF 홈은 야외에 수영장과 온천이 있는 큰 저택과 같은 곳이었다.

방도 많고 화장실과 주방도 여러 개가 있는 이곳 숙소에는 야외에 마련된 벤치도 많았다.

“그래서. 알레이즈와 가마쉬의 도시락에. 이걸 넣으려고 했다?”

“...”

최두호에게 붙들려나온 빌리는 결국 그의 추궁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하려던 부정행위를 털어놓고야 말았다.

“후우. 고마워.”

“...어?”

“망설였다며. 그 망설임이 알레이즈와 가마쉬. 그리고 빌리 자네까지 구했어. 나는 그 망설임에 고마움을 표하는 거야.”

“...”

당연히 질책과 질타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따뜻하게 다독이는 최두호의 담담함에 빌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빌리. 네 형의 이야기는 들었어.”

“...”

“해서 그놈이 엮여 있었다는 것도.”

“...”

“만약 네가 오늘 그들의 도시락에 손을 댔다면. 그들은 네가 느꼈던 절망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절망을 느껴야 했을 거야. 네가 형에게 의지하는 것 만큼이나 그들 또한 TWF의 무대를 간절히 바라고 의지하니까.”

“미안해.”

“그리고. 분명 너 또한 불행해졌을 거다. 일말의 망설임을 가졌던 너라면. 오늘의 부정이 걸리든 걸리지 않던 깊은 죄책감을 느꼈을테니.”

“...”

-툭.

“별로 대화는 나눠보지 않았지만. 너.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닐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성실하게 샌드백을 두드리는 녀석이 나쁜 녀석일 리 없으니까 말이야.”

꽤나 가볍게 웃으며 빌리의 어깨를 툭 치는 최두호.

“...”

그에 결국 빌리는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

WFC 라이트헤비급에서 연승을 달리고 있는 선수. 최두호는 자신보다 더 큰 체구를 가진 거구의 백인 선수가 갑작스럽게 눈물을 보이자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가 어떤 감정일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최두호는 감히 그걸 판단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처음엔 조금 눈물을 내비치던 수준에서 나중에는 정말 끅끅 거리며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빌리.

“후우...”

이제 조금 마음이 안정됐는지 빌리는 깊은 숨을 내쉰 후 꽤나 맑아진 눈으로 최두호를 바라봤다.

“미안해. 못난 모습을 보였어. 내가 이렇게 울고 앉아있을 입장이 아닌데 말이야.”

“무슨 말이야. 빌리 넌 아직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다 큰 사내가 그렇게 크게 운건 조금 창피한 일이겠지만 말이야.”

“하하.”

빌리는 최두호에게 차마 ‘TWF에 와서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껴서 울어버렸다. 네 말에 형이 생각났다.’ 라는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헨더슨도 핸콕도. 그리고 헨더슨의 체육관 코치들도. 모두 빌리를 필요에 의해 영입한 팀원으로 여기며 지시하고 지적질 하기 바빴다. 그러다보니 빌리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도전자들 또한 빌리를 코치라기보다는 도우미에 가까운 개념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6월부터 시작된 TWF촬영. 빌리는 근 두 달이 넘어가는 기간동안 이곳 라스베이거스에서 꽤나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형을 위해서. 강해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 마음 하나로 버텨왔지만,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들로 그 또한 희미해진 상황.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그를 다독이는 따뜻한 말을 듣게 되자 마음보다 먼저 눈물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고마워.”

“응?”

“미스터 최. 네가 그 때 주방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쩌면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도 몰라.”

“하하.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지금 너랑 이야기를 하면서 난 알았어. 내가 그때 주방을 들어가지 않았어도 우리 팀 도시락엔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는 걸.”

“뭐?”

“넌 결국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장담하지. 넌 좋은 녀석이니까.”

“하하하하.”

최두호의 진심어린 말투에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진 빌리.

“이제 그만 들어가지. 밖에 너무 오래 있었어. 촬영 팀들도 슬슬 철수할 시간이야.”

“그러지. 나는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 테니 먼저 들어가봐.”

아직까지 촉촉한 빌리의 눈가를 보며 최두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뒤 숙소로 들어갔다.

그런 최두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스마트 폰을 꺼내드는 빌리.

그는 지난번 헨더슨과의 대화가 녹음된 파일을 어디론가 전송하기 시작했다.

“... 미스터 최. 미안하지만 자네는 틀렸어. 나는 소심하긴 하지만... 그렇게 좋은 녀석이 아니거든.”

2.

-팀 강해서! 가마쉬 승리!

-우와아아아아아아!!!!!

우리 팀의 라이트 헤비급 선수 가마쉬의 승리로 팀 헨더슨의 모든 참가자들은 탈락하게 되었다.

TWF 전 시즌을 통틀어도 유래가 없는 전승.

우리 팀 강해서의 도전자들은 적어도 팀 헨더슨에게는 단 한 번의 패배도 내어주지 않고 전승을 거두었다. 그 마지막 경기가 조금 전 끝난 라이트헤비급 4강전이었고.

“팀 강해서 헤비급의 알레이즈. 그리고 도널드. 라이트 헤비급의 가마쉬, 몬타나. 각 선수들은 촬영이 끝나는 대로 강해서 코치의 인솔하에 2층 회의실로 모이도록.”

꽤나 길었던 TWF 31의 촬영이 드디어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TWF 프로그램으로 방영이 되는 건 오늘 있었던 4강전까지였다.

파이널 매치에 올라간 각 체급별 두 선수의 시합은 TWF 31이라는 동명의 이벤트 경기에서 치러지고 도전자들은 수만은 관중과 카메라 앞에서 마지막 우승자를 가리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처음 보는 것 같네요. 헨더슨의 저런 표정.”

“그렇지? 이렇게 전패를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테니까.”

“쩝. 애들 도시락에 약 타려고 했던 증거 영상만 있었어도 아주그냥 골로 보내버리는건데. 이렇게 우리만 아는 미수로 그쳐서 아쉽네요.”

나는 두호 형을 통해 며칠 전 미수로 그친 헨더슨의 부정행위를 전해 들었다.

물론 그날 밤 두호 형과 빌리 사이에 정확히 어떤 대화들이 오고갔는지는 듣지 못했다. 두호 형은 그런 개인적인 부분은 절대 공유하지 않으니까. 다만 그날을 기점으로 빌리의 눈은 더 이상 나를 쫓지 않았다.

물론 체육관을 오가며 마주치더라도 살갑게 인사를 하거나 갑자기 관계가 좋아지는 등의 일은 없었지만.

“이제 미스터 강. 너만 잘 하면 돼.”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브라이언이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지금부터 체육관에 복귀해서 시합모드로 훈련에 들어갈 거야. 당연히 다음 상대는 미스터 강. 너겠지.”

“하하. 벌써? 언제 시합이 잡힐지 모른다고. 헨더슨과의 시합도 아직 3개월이나 남았는데.”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으니까. 걱정 마. 이번에는 절대 부상당하지 않을 거야.”

아직 헨더슨과의 타이틀전도 한참 남았는데 브라이언은 벌써부터 날 상대로 상정한 훈련에 들어갈 거라는 이야기를 하며 꽤나 신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텔론이랑은... 좀 풀었어?”

“... 그와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아. 어쩔 수 없지.”

텔론의 이름이 나오자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는 브라이언.

애초에 브라이언과 텔론의 마찰이 있었던 이유는 두 사람의 성향이 너무 달라서였다.

비즈니스적인 마인드가 강한 텔론과 교과서적인 정론을 이야기하는 브라이언.

이렇게까지 서로가 다르다면 어느 한쪽이 조금 굽히면 될 텐데 여기서는 또 둘의 모습이 비슷했다. 꺾일지언정 절대 숙이지 않는 모습.

사소한 마찰들이 반복되며 브라이언과 텔론은 서로가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고, 텔론은 브라이언이 결코 자신의 말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걸 깨닫게 되었다.

그게 텔론이 브라이언에 타이틀 샷을 주지 않기 위해 일 년이 넘도록 시합을 매치시켜주지 않은 이유였다.

챔피언이라는 자리는 어찌됐든 흥행을 위해 본인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달리 움직여야 하거나 보여줘야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브라이언은 그런 쪽으로는 전혀 타협이 되지 않는 선수였으니까.

“그리고 난 지금도 나쁘지 않아.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라이트헤비급의 수준은 브로일러가 WFC보다 더 높은 것 같거든.”

“어허? 그건 조금 위험발언인데?”

“하하하. 여기서 핸콕과 헨더슨을 보고나서 확신이 들더군. 라이트 헤비급 만은 WFC가 브로일러에게 한수 뒤쳐진다는 걸.”

브라이언은 이런 걸 가지고 농담을 할 줄 아는 녀석이 아니었다.

얘가 이렇게까지 말 한다면 진짜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뜻이겠지.

“그 WFC 라이트 헤비급엔 내가 있는데?”

“음... 미스터 강. 네가 라이트 헤비급에서 뛰는 모습을 아직 한 번도 못 봐서 뭐라 답을 하기 어렵네. 하지만 나는 절대 너한테 져줄 생각이 없다고.”

이번에는 꽤나 도발적으로 날 바라보며 말을 뱉는 브라이언을 보며 깨달았다.

요 몇 달간 같은 팀으로서 지내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브라이언 제프 이 녀석이야 말로 헨더슨보다 더 위협적인 적이었다는 걸.

*

-WFC 283의 출격 선수들! 일정과 대진표를 살펴보자!

-헨더슨과 강해서! WFC 283에서 맞붙는다!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걸고 한판 승부!

-TWF 31. 유래 없는 시청률 고공행진. 초반부터 팽팽한 두 팀의 신경전! 핸콕을 잡아낸 브라이언은 누구?

-팀 강해서. 팀 헨더슨에게 전승을 기록하며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나?

-굴욕의 헨더슨. 1승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

TWF31 프로그램의 촬영이 모두 끝난 지도 벌써 꽤나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방송은 12회차 중 10회차까지 방송이 되었고 겨우 두 개의 에피소드만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헨더슨과의 타이틀전을 위해 한창 라스베이거스에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고 무더웠던 여름 날씨는 어느새 추운 겨울이 되어 있었다.

“야! 해서야! 이것 좀 봐!”

꽤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달려오는 필승 형.

형이 보여주는 스마트 폰에는 조금 전까지 내가 보던 WFC 관련 인터넷 기사들이 있었는데

“이거. 이걸 보라고.”

거기에는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기사가 있었다.

-TWF 31에 출연한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헨더슨.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부정행위를 계획했다?

-팀 헨더슨의 팀원이자 객원 코치였던 빌리의 양심 고백. 그날의 녹음 파일도 가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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