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_홀리데이 >
1.
"... 이거 참."
텔론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방적인 스파링 결과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세계 최고의 종합격투기 단체 랭킹 1위가 저토록 무기력하게 무너지다니.
물론 스파링이 아닌 진짜 시합이었다면 그 양상이 조금 다를 수 있었다. 맞고 빠지는 게 아닌 죽어도 들어간다는 느낌이 있는 시합은 수많은 변수가 있었으니까.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문제는 이 모든 장면이 TWF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방송될 텐데 그들도 텔론과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브라이언. 난 놈은 난 놈이야.'
과격하거나 넘치지 않는 플레이.
종합격투기의 교본이 있다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기본에 충실한 격투 스타일의 파이터였다.
-슥. 슥.
상념에 빠진 채 브라이언과 강해서를 번갈아 훑어보는 텔론.
지금 그의 머릿속엔 이번 스파링 영상을 그대로 내보냈을 때의 리스크와 리턴을 계산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잡느라 아주 복잡했다.
그리고 텔론과는 달리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인물이 있었으니 핸콕의 팀 코치인 헨더슨이었다.
'브라이언...'
과거 브라이언이 미들급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헨더슨은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자신과 체급이 다른 미들급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브라이언이 동체급은 라이트 헤비급으로 월장을 한 지금은 아예 단체가 달라졌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시합에서 어느 정도 기량을 보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냉정히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수준이야.'
선수마다 스파링과 본경기의 기량 차이는 다르기 마련이었다.
스파링에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실전에서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스파링에서는 과감하고 준수한 경기력을 보여주던 선수가 실전에서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브라이언은 적어도 전자는 아니었다. 그는 검증된 파이터로 WFC를 거쳐 브로일러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증명을 마친 사내였다.
'어쨌든. 팀 위신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핸콕이 이걸로 리타이어 할 걸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는 않군.'
애초에 핸콕과 빌리를 팀원으로 끌어들인 것 자체가 TWF의 흥행과 방어전의 흥행을 위해서였다.
핸콕을 이용해 강해서에게 한 방 먹이면 재미있겠지만 헨더슨은 결코 과정에 매몰되어 목적을 잊어먹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핸콕이 하차하는 것만으로도 자신과 강해서는 표면적 대립 구도를 가져갈 수 있었고 프로그램의 흥행과 타이틀 방어전의 흥행에 도움이 될 테니까.
-와아아아!!!
물론 반대편에 위치한 팀 강해서의 함성 소리를 듣는 건 썩 즐겁지 않았지만.
*
"진짜? 그렇게 인터뷰했다고?"
나는 스파링 이후 인터뷰를 다녀온 브라이언을 잡고 재차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그렇게 심한 시비도 아니었고. 선수들끼리 스파링 한번 하고 나면 풀리는 거지."
와. 이놈. 고지식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쿨병까지 있었네.
"핸콕이 자의로 하차하지 않는 이상 이번 스파링으로 그가 그만둬야 할 일은 없을 거야."
"그래. 어떻게 보면 너답다."
뭔가 꽉 막히고 고지식하지만 정의롭다거나 반듯하다는 이미지의 브라이언.
스파링 이후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스파링의 타이틀이었던 '패배자의 프로그램 하차'를 승자의 권한으로 없던 것으로 해줄 것을 제작진에게 부탁했단다.
스파링은 스파링일 뿐 제대로 된 시합도 아니니 승패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사소한 트러블 따위는 주먹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모두 털어버렸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고 하는데...
주먹을 주고받다니. 브라이언 네가 일방적으로 핸콕에게 주기만 한 것 같은데 말이야.
"... 저..."
그때 인터뷰를 위해 마련된 차단막을 걷고 모습을 드러낸 핸콕.
"... 고맙다. 브라이언."
끝까지 또 어그로를 끌까 싶었는데 예상외로 고맙다는 표현을 담백하게 꺼내는 핸콕이었다.
"고맙기는. 이건 스파링이잖아. 원래 우리 같은 사람들은 스파링하면서 친해지는 거야."
"..."
-툭
브라이언이 들어 올린 주먹에 말없이 주먹을 툭 갖다 대며 몸을 돌려세우는 핸콕.
"일단. 브라이언 네 의견은 들었어. 헨더슨과 의논해봐야겠지만 다시 한번 고맙다. 하차를 말 하는 게 아니라 파이터로서의 내 입장을 세워준 걸 말하는 거야."
하긴. 아무리 스파링이라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끝난 시합이니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그런데 정작 브라이언이 먼저 스파링과 시합은 전혀 다르다고 선을 그어줬으니 고마울 수밖에.
마지막까지 브라이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팀 헨더슨으로 향하는 핸콕.
뭐. 나랑은 엮인 것도 뭣도 없으니 내게도 고맙다는 말을 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대놓고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니 뻘쭘하긴 했다.
-뭐?!
그때 체육관 저편에서 들려오는 예상치 못한 목소리.
헨더슨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니 굳은 정도가 아니라 꽤나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 팀은 갑자기 분위기가 왜 저래?”
브라이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내 옆에 서서 헨더슨네 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본인 팀 코치가 하차 될 위기에서 빠져나왔으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일이 터졌나?”
“모르지.”
핸콕이 헨더슨을 들이받았을 수도 있고, 정말 어쩌면 핸콕이 하차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저런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다. 헨더슨 쟤는 좀 이상한 애니까.
2.
“미스터 최! 오늘 저녁. 어때? 내일은 휴일인데?”
“하하. 미안해. 당분간은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흘러 여름의 절정이라는 8월을 맞이했다.
“뭐야. 누구랑 선약인 거야?”
“아니야. 도널드. 오늘은 딸이 오기로 했거든. 좀 봐줘.”
“오! 딸? 지난번에 사진 보여줬던?”
한 주 훈련의 막바지.
도널드와 두호 형은 운동을 마무리하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근 두 달에 가까워진 합숙 동안 도전자들과 가장 친해진 코치는 예상외로 필승 형이 아닌 두호 형이었다.
아무래도 현역이라는 장점에 더해 도전자들과 부딪힐 일 없는 웰터-미들급 선수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했지 않나 싶었다. 두호 형의 카리스마와 리더십도 한몫을 했을 테고.
“헤이. 미스터 강. 그러면 너라도. 어때?”
“하하. 나도 오늘은 좀 봐줘. 나도 선약이 있거든.”
“뭐? 너도?“
도널드는 꽤나 실망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훈련이 끝난 뒤 가끔 마시는 맥주 한잔을 낙으로 여기는 도널드다 보니 오랜만에 한잔을 외쳤는데 연거푸 퇴짜를 맞고 풀이 죽어버린 것.
“나는 괜찮아. 시간 많아.”
“오우. 너는 시간보다 말이 너무 많아.”
“원래 술자리에서는 말이 많아야지.”
“술자리가 아니라도 말이 많으니 문제지!”
언제 왔는지 필승 형이 도널드에게 어깨동무하며 시시덕거렸고 도널드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자. 가자고. 또 누구 없나?”
하지만 필승 형에게 붙들린 도널드는 오늘 영락없이 밤늦게까지 필승 형의 말동무가 되어줘야 할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제가요?”
“그래. 너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두호 형의 말마따나 여름 휴가를 맞아 형수님과 유안이가 오늘 라스베이거스를 찾는다.
마침 TWF도 주말이라 자율 훈련 기간이고 도전자들이 아닌 코치진에 대한 추가 촬영은 예정된 게 없었다.
“아름 씨 오는 게 그렇게 좋냐?”
“네? 흠흠.”
딱히 긍정을 이야기하기도 부정을 이야기하기도 뭐해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오늘은 라스베이거스를 찾는 건 비단 유안이네만이 아니었다. 아름이도 같은 비행기로 들어오기로 했으니까.
“가자. 태워줄게.”
“넵!”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호 형은 나와 아름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추가로 알고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안 코치님 정도일까.
체육관 정비를 마친 뒤 코치진의 촬영이 마무리되는 대로 두호 형과 나는 공항으로 향했다.
대외적으로는 유안이와 형수님을 보기 위해 동행하는 그림이었지만 사실은 아름이를 보러 가는 길.
근 두 달 만에 아름이를 볼 생각을 하니 계속 입꼬리가 올라가는 듯하여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아빠!”
공항에 도착해 얼마나 기다렸을까.
유안이네가 탄 비행기가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고 잠시 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안아!”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유안이는 특유의 하얗고 뽀얀 볼살에 큰 눈동자를 반짝이며 두호 형에게 달려오다가
-흡칫
멈춰 섰다.
“나쁜 삼촌 있어!”
...나쁜 삼촌 아니라니까.
“...아빠 일루와...”
나를 발견하고는 멈춰선 유안이. 더 이상 다가오지는 않고 두호 형에게만 속삭이듯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미안한데 나도 다 들리거든 유안아.
“해서야!”
그렇게 유안이와 잠시 대치상황을 갖는 동안 바로 뒤에서 아름이가 형수님과 함께 뒤따라왔다.
“...어.”
마음 같아서는 나도 아름아!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공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곳에서 크게 부르기엔 꽤나 부담스러운 아름이었으니까.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장거리 비행을 했을 텐데도 광이 나는 피부에 생글생글 생기가 가득한 눈빛.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편하고 또 두근거리고 그랬다.
“유안아. 해서 삼촌이라고 해야지? 나쁜 삼촌이 아니라.”
“우웅...”
이럴 수가. 형수님이나 두호 형이 그렇게 말해도 ‘나쁜 삼촌’을 입에서 떼지 않았던 유안이가 아름이의 말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해서 삼촌이 나쁜 삼촌이면 언니도 나쁜 언닌데?”
“언니는 이쁜 언니야!”
...다 좋은데. 왜 난 삼촌이고 넌 언니냐?
“호호. 해서 씨. 고생 많으세요.”
“아! 형수님.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아니에요. 저도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라스베이거스.”
두호 형이 팀 피스트를 떠나 미국의 체육관에 소속되어 있었을 때. 거의 일 년 가까이를 라스베이거스에 혼자 생활했지만, 형수님과 유안이는 단 한 번도 라스베이거스를 찾은 적이 없었다.
당시의 두호 형은 목표를 가지고 훈련에만 매진하고 있었기에 형수님과 유안이의 방문을 마다했었고, 형수님 또한 그 의지를 존중했기에 보고 싶어도 전화 통화 정도로 만족하며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해서 씨 덕분에 이렇게 라스베이거스도 와보고. 고마워요.”
“하하. 이게 뭐 제 덕분인가요.”
TWF에 출연하게 된 건 나 때문이긴 하지만 뭐.
“유안이도. 해서 삼촌 감사합니다. 해야지.”
“...”
형수님이 저렇게 말을 해도 유안이는 끄떡도 하지 않고 두호 형의 다리 뒤로 숨어 있었다.
“유안아. 해서 삼촌 감사합니다. 해야지 언니랑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지? 해서 삼촌이 맛있는 거 사준다 그랬는데 언니만 가서 먹어?”
“우웅...”
이번에는 아름이가 나서서 유안이를 달래보는데
“...해서 삼촌 감사합니다아...”
놀랍게도 두호 형 다리에서 벗어나 배꼽 인사를 하는 유안이었다.
헐.
애들도 예쁜 걸 가린다더니. 아름이의 발언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면. 촬영 날 보자.”
“넵!”
두호 형네는 따로 잡아둔 숙소로 이동을 위해 자리를 떴고 나와 아름이 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 레이첼이 기다린다 그랬는데! 연락해줘야겠다.”
물론 그 시간은 정말 짧았지만.
“기다리고 있대. 빨리 가자.”
원래 미국에 들어와서 한번 보려고 했던 레이첼을 아름이와 함께 보게 되었다.
겸사겸사해서 아름이가 이곳에 지내는 동안 묵을 숙소도 제공받을 수 있었으니 이 정도 불편쯤이야 감수해야겠지.
그렇게 아름이와 함께 레이첼을 만나러 가는 길.
“미스터 강?”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