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_브라이언 제프 >
1.
“꿈을 이루는데 적당한 시기라는 건 사람들마다 모두 다르다.”
첫 시합이 끝난 뒤 TWF 출연자들의 숙소에 찾은 팀 강해서의 코치들.
“나는 30대 초반에 WFC에 진출했지. 운이 좋았어. 하지만 미들급 데뷔 이후 연전연패를 겪고는 웰터급으로 체급을 내려 몇 년을 다시 노력해야 했지.”
첫 승리에 취해있던 팀원들과 식사 시간을 가진 뒤 그들의 고충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가진 고민은 ‘과연 이 길을 계속 가도 될까. 너무 늦은 건 아닐까.’와 같은 걱정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WFC 웰터급 챔피언이야. 미들급 탑 컨텐더이기도 하지. 긴 시간 내가 쌓아 올린 노력은 날 배신하지 않았고 난 결국 이 자리에 서 있어. 누군가는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지만 누군가는 새로운 커리어를 쌓을 수도 있는 나이야.”
두호 형의 경험에서 나오는 담담한 이야기에 도전자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진 듯하면서도 경청하고 있었다.
“너희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어. 지금, 이 순간의 너희가 앞으로 내가 볼 너희의 미래 중 가장 나약한 순간이라는 걸 내가 장담하지.”
“우우. 그게 뭐예요-”
“아저씨 같아-”
필승 형과 창섭 형은 뒤에서 오글거린다며 야유를 퍼부었지만 정작 도전자들은 두호 형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는지 눈물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힘들었겠지. 앞이 보이지 않고 막막한 길을 걷고 걷고 또 걸어서 결국 TWF까지 닿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결국 WFC와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사람은 각 체급별 한 명씩 총 두 명뿐.
여기서 미끄러지면 또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길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도전자들도 있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자. 자. 첫 승을 거둔 날 분위기가 또 왜 이래! 내일 또 열심히 훈련하려면 으쌰 으쌰 해야지!”
다행히 타고난 친화력의 필승 형이 분위기를 돋웠고 다시 팀의 분위기는 올라갔다.
담담한 두호 형의 위로와 필승 형의 시끄러운 위로가 뒤섞인 한여름의 라스베이거스의 밤하늘은 어두운 밤에도 빛이 나는 듯했다.
*
“결국, 오케이 난 거지?”
“그래.”
어떤 조건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핸콕과 브라이언의 스파링은 정말로 성사가 되었다.
그걸 확실히 눈치를 챈 건 제작진의 카메라가 핸콕과 브라이언의 부딪침을 쫓아다닐 때부터였다.
마치 방송에 내보낼 장면을 담기 위해서라는 듯 핸콕과 브라이언에게 따로 배치되다시피 한 카메라들. 그리고 그들의 사소한 시비까지 모두 잡아내는 제작진을 보며 헨드릭은 텔론을 찾았고, 그에게서 핸콕과 브라이언의 스파링을 공식적으로 확인받았다.
“내가 브라이언을 이기면 차기 타이틀 샷 상대로 날 지목하겠다는 약속. 지키라고.”
“걱정하지 마. 이미 계약서도 썼잖아?”
“후후후.”
핸콕 또한 이번 스파링으로 얻을 부분을 착실히 챙기고 있었다.
브라이언의 실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핸콕 또한 WFC 랭킹 1위에 달하는 만큼 본인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패배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차기 타이틀 샷 상대로 지목된 뒤 헨더슨을 꺾고 챔피언에 오를 순간을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일단 브라이언부터 꺾어야지.”
“헨더슨. 너야말로 미스터 강에게 이기라고. 그래야 계약을 이행할 수 있을 테니.”
스파링은 시합과는 또 달랐다.
아무리 100프로로 하는 스파링이라고 해도 스파링은 스파링. 시합과는 그 결이 달랐다. 그리고 핸콕은 수많은 라이트 헤비급 선수들과의 스파링 경험이 있었고, 브라이언은 비록 챔피언이긴 했지만 라이트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저...”
그때 두 사람의 대화에 비집고 들어오는 목소리.
“나는 어떻게 하면 될까?”
헨더슨이 불러들인 또 하나의 카드. 빌리였다.
“일단 너는 기다려봐. 팀원들과는 잘 소통하고 있어?”
“... 어.”
헨더슨은 팀 헨더슨에 속한 도전자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빌리를 배치했다.
팀 강해서에 관한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사람으로 빌리는 적격이었다.
‘우리 체육관의 코치를 잘라낼 수는 없으니까.’
핸콕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헨더슨과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 탑 랭커로서의 위치가 있었다. 같은 체육관의 코치들은 자신의 식구들이었고.
외부 코치이면서 어리숙해 이용하기 쉬운 빌리의 성격을 일찌감치 파악한 헨더슨은 TWF 초반부터 그를 도전자들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포지션에 배치한 뒤 끊임없이 팀 강해서에 관한 부정적인 소문들을 흘려 넣었다.
“잘하고 있어. 핸콕의 일이 마무리되면 너도 복수할 기회가 생길 테니 기다려봐.”
“...알겠어.”
내성적인 성격 덕분에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았던 빌리.
다행히 형인 클락이 많은 힘이 되었고 격투기 선수가 되면서 빌리를 쥐고 흔들려는 사람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다.
‘...’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이 적을 뿐이지 생각 또한 적지는 않았다.
빌리는 조용히 핸콕과 헨더슨을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훈련생들의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아직은 믿어본다. 빌리는 자신을 쥐고 흔드는 헨더슨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강해서라는 목적을 위해 조금은 더 참아보기로 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내면에 쌓여있는 분노를 터뜨릴 대상이 필요했으니까.
2.
“오늘은 특별한 스파링이 있을 예정이다.”
첫 번째 시합이 끝나고 두 번째 시합은 우리 팀에서 지목하는 선수들의 경기로 이루어졌다.
당연히 나는 라이트 헤비급 선수 중 가장 기량이 뛰어난 가마쉬를 선수로 내세우며 팀 헨더슨의 도전자 중 가장 까다로울 수 있는 전력을 지목했다.
결과는 볼 것도 없는 가마쉬의 1라운드 TKO 승리.
이로써 팀 강해서는 2승을. 팀 헨더슨은 2패를 기록하며 양 팀의 분위기는 합숙 초반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 와중에도 핸콕은 끊임없이 나와 브라이언을 도발했고, 카메라는 그 모든 장면을 담았으며 드디어 오늘 두 사람의 스페셜 스파링이 있을 예정이었다.
“TWF에서는 유례가 없는 스파링이다. 핸콕.”
“네.”
“브라이언.”
“네.”
텔론의 호명에 앞으로 나서는 두 사람.
“두 코치는 TWF 내내 트러블을 보여준 바 있다. 도전자들도 모두 알고 있을 거야. 그래서 이 두 선수의 문제 해결을 위해 스페셜 스파링을 준비했다.”
일부 도전자들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을. 일부 도전자들은 놀랍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환호였다.
어쨌든 싸움 구경은 재미있는 볼거리였고 두 사람의 신경전은 근 보름 가까이 이어져 왔으니까.
“스파링인 만큼 그라운드는 허용하되 과격한 기술의 사용은 금지한다. 그 외의 타격은 자유야.”
그 외에도 스파링 중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설명하며 드디어 시작된 브라이언과 핸콕의 스파링.
스파링이라는 특성상 3분 2라운드의 짧은 구성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브라이언 파이팅!!”
“고! 핸콕! 고!”
도전자들의 시합이 아닌 코치들의 경기였기에 도전자들 또한 부담 없이 관전하며 오랜만에 꽤나 들뜬 분위기를 자아냈다.
브라이언은 너튜브 촬영 정도로 생각하며 부담 없이 임한다고 했지만 그를 TWF에 끌어들인 입장에서는 괜히 무대가 초라해 보이기도 했고 혹시나 지면 어쩌나 싶어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휙. 휘익.
-슥. 휙. 팡!
하지만 그런 감정은 스파링이 시작하고 두 사람이 첫 격돌을 한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휙. 펑!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스파링은 브라이언의 압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원사이드로 진행되었으니까.
-툭. 팡!
일단 타격부터 차이가 심했다.
두 팔 간격보다 가까운 타격 거리에서 적극적으로 핸콕을 노리는 브라이언.
아무리 스파링용 글러브를 꼈다지만 체급이 체급인지라 제대로 맞으면 그 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핸콕의 타격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타격 거리 내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그러면서도 유효타는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일방적으로 두드려댔다.
‘...나랑은 달라.’
집중력을 꽤나 끌어올려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브라이언의 움직임은 나와 카이서스와는 전혀 달랐다.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미리 예측해서 피해내고 꽂아 넣는 게 아니었다. 움직인 상대방의 움직임에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하거나 지극히 정석적인 방어 동작으로 무력화시키며 핸콕을 압박해나갔다.
마치 두호 형을 보는 느낌이었다.
꾸준한 노력과 끊임없는 훈련으로 거의 본능의 영역에 새겨넣은 기본기.
의식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몸은 철저하게 기본기에 입각한 움직임을 보였고 그 모든 행위는 핸콕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며 차곡차곡 데미지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크흡.”
아까 말했듯 라이트 헤비급 쯤 되면 스파링용 글러브로 맞아도 그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핸콕은 브라이언의 교과서적인 컴비네이션과 압박에 꽤나 많은 유효타를 허용했고, 타격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스파링 2라운드에 들어서는 테이크다운을 위해 빌드업을 쌓기 시작했다.
-휙. 휘익.
그리고 브라이언은 이번에는 디펜스 레슬링의 정석을 보여줬다.
상대의 테이크다운 빌드업을 깨부수며 조금의 틈도 보여주지 않는 경기 운영.
어느 순간부터 핸콕은 테이크 다운을 위해 손을 내리는 행위에도 망설임이 깃들기 시작했다.
“... 완벽해. 교과서적인 움직임의 정석이야.”
“테이크다운을 대비하는 완벽한 대응이야.”
“브라이언 코치의 실력은 저 정도구나. 스파링이 이 정도면 제대로 준비된 시합에서는 대체 어느 정도 기량을 보인다는 거야?”
“그가 WFC 소속이 아니라 다행이야.”
“미스터 강도 괴물이지만 브라이언 코치도 괴물이었네. 나랑 체급도 소속도 달라 다행이야.”
처음의 들떴던 분위기와는 달리 조금은 차가울 정도로 가라앉은 도전자들의 반응.
그런 반응은 비단 도전자뿐만 아니었다. 텔론과 헨더슨 또한 이런 결과는 예상치 못했는지 아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나도 브라이언의 실력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실제 눈앞에서 본 브라이언은 천재가 노력을 했을 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군더더기 없는 종합격투기의 교과서 같은 실력을 보여줬다.
문득 두호 형과의 시합이 떠올랐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몸에 새겨진 훈련은 본능의 영역에서 날 위협하곤 했었다.
브라이언은 미안한 말이지만 두호 형보다 더욱 세련된 프로세스가 탑재된. 더욱 뛰어난 피지컬을 가진 선수였다.
과연 저 브라이언이 당시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떤 시합을 보여줬을까?
-삐
잠깐의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2라운드의 스파링이 끝났다.
브라이언과 핸콕 중 다운을 당한 사람은 없었지만, 스파링의 결과는 굳이 발표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꽤나 충격받은 얼굴로 브라이언과 가벼운 포옹을 하고는 케이지를 내려가는 핸콕. 스페셜 매치의 승자는 브라이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