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_팀 강해서 >
1.
“헤이. 와썹. 브로일러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 축하해!”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다행히도 브라이언의 근황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기에 반갑게 인사하며 축하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고마워. 브로. 너도 미들급 타이틀 축하해. 네가 내팽개치고 간 브로일러 미들급 타이틀은 내가 잘 챙겨놨지.”
“하하. 벨트가 이제야 제 주인을 찾아간 거겠지. 그 벨트. 나도 한번밖에 못 감아봤다고.”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커진 체구.
나보다 한발 앞서 라이트 헤비급으로 전향했던 브라이언은 확실히 체급에 맞게 덩치도 커져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나저나. 라스베이거스는 어쩐 일이야? 엊그제 시합 끝난 선수가.”
“나도 작년까지 WFC 선수였어. 라스베이거스엔 친구들이 많다고. 그리고 승리를 축하하기에 라스베이거스만 한 곳도 없지.”
하긴. 브라이언은 나보다 격투기 경력도 훨씬 길 뿐만 아니라 WFC 소속으로 활동한 기간도 길었지. 라스베이거스에 지인 몇 명쯤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좋아 보이네.”
“응?”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예전의 브라이언 너는 뭐랄까. 조금 여유가 없는 느낌이었거든.”
그래서 도발하기에도 좋았고.
실제로도 그리 강하지 않은 트래쉬 토크에도 브라이언은 곧잘 반응했었지.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까. 지금의 나는 싸우고 싶을 때 싸울 수 있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거든. 그게 중요한 거야. 우리같은 파이터들에겐.”
“... 하긴.”
텔론과의 트러블로 인해 일 년 넘도록 시합 근처로도 못 갔던 브라이언이었다. 최근 그의 경기들을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만약 브라이언이 텔론과의 트러블만 없었다면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내가 붙었던 상대는 미첼이 아니라 브라이언이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만큼 브라이언의 기량은 출중했고 미첼보다 몇 수는 윗줄의 실력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심지어 이번에 라이트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리면서 그의 경기력은 더욱 좋아졌다. 이제야 자신에게 맞는 체급을 찾았다는 듯 가뜩이나 뛰어난 밸런스에 빈틈까지 채워 넣은 느낌이랄까.
“그러는 미스터 강 너야말로 라스베이거스에는 무슨 일이야? 아직 시합이 잡혔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드디어 매치가 잡힌 건가?”
“아아. 아니야. 매치가 잡히긴 했는데 매치 때문에 라스베이거스에 온 건 아니야.”
오늘 쇼핑을 오기 전 WFC 본사에서 텔론이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했었다.
회의 참석자는 나와 안 코치님. 그리고 헨더슨과 그의 팀원이었는데 곧 있을 주말 소집에 대한 내용과 TWF 31의 추후 일정 관련 안건을 주제로 하는 자리였다.
“오! 매치가 잡혔네. 언제야?”
“12월 달이야. 아직 한참 남았지.”
“그러게. 아직 6개월이나 남았네. 너무 멀리 잡은 거 아니야?”
“그게. 사정이 있거든.”
안 코치님에게 듣기로는 TWF 방영일이 12월 달이라고 전달 받았는데 그게 잘못된 정보였다.
6월 달부터 시작된 TWF는 9월 달까지 라이트 헤비급 2명. 헤비급 2명의 최종 매치 후보를 뽑는다.
그리고 9월 달부터 방영되는 TWF31은 12월달 안에 12회 방영을 끝내고 TWF 31 이라는 프로그램 이름과 동명의 독립 이벤트 경기를 12월 중 토요일에 치르게 된다.
한마디로 아직 TWF31 시합의 출전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TWF31의 시합 다음날인 일요일. WFC283으로 내정된 메인이벤트에 나와 헨더슨의 WFC 라이트헤비급 타이틀전이 내정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TWF. 나도 가끔 보던 프로그램이야. TWF 출신 챔피언이나 선수들이 MMA 시장에는 많으니까.”
“그래? 사실 난 그쪽은 잘 몰랐어.”
격투기 입문 자체가 너무 늦었고 그 전까지도 이쪽 세상은 전혀 모르고 살았다보니 WFC 챔피언 자리에 있으면서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하루 일과라고 해봐야 훈련 아니면 시합 상대의 파악이 전부였으니 이런 업계의 동향이나 트렌드 같은 건 아무래도 느릴 수밖에.
“헨더슨이라. 나도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데. 어땠어?”
“헨더슨?”
오늘 WFC 본사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헨더슨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착해 보인다’ 는 것이었다.
장난기는 조금 있어보였지만 비상식적인 행동이나 문제를 찾아서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 같은 느낌은 없었다.
미첼도 그랬고 헨더슨도 그렇고.
뭔가 챔피언 자리에 있는 선수들은 조급함이 없고 여유로운 느낌이 있었다.
굳이 흥행을 위해 악을 쓰고 어그로를 끌려는 느낌이 없었달까.
‘뭐. 학센을 생각하면 그것도 케바케인가.’
챔피언 자리에 있었음에도 흥행에 목을 맸던 학센과 같은 선수도 있는 걸 생각하면 자리보단 사람 자체가 중요한가 싶기도 했다.
“재밌겠네. TWF라. 그리고 참가자들도 미래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라이트 헤비급과 헤비급이라. 재밌겠어.”
브로일러는 WFC와는 시장 규모 자체가 다르다보니 이런 다양한 콘텐츠나 이벤트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브라이언 넌 어때. 이번에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는데 추후 일정은?”
“별 다를 거 있나. 조금 더 반응을 봐야겠지만 한동안은 조용할 듯 해.”
보통은 챔피언이 교체되면 해당 체급의 탑급 컨텐더들은 너도나도 타이틀 샷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하게 마련이었다.
신생 챔피언은 언제나 먹기 좋은 먹잇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난번 브라이언의 미들급 타이틀 획득 때도 그렇고 이번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 획득 때도 그렇고. 아직까지는 동 체급 선수들의 이렇다 할 반응이 없어 조용하다고 했다.
“1라운드 서브미션 승리였지? 시합 내용이 압도적이었으니 다른 선수들도 아직은 조금 더 지켜보자는 입장이겠지.”
괜히 먼저 나서서 두드려 맞고 다음 도전자에게 브라이언의 공략 법만 알려주는 신세가 되느니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겠다. 이런 속셈의 선수들이 대부분일거다.
“이러나저러나. 그러면 당분간은 별 일정 없는 거네?”
“그렇지?”
“그래?
브라이언.
이 고지식한 노력쟁이가 한동안 특별한 일정이 없다라.
재미있는 그림이 떠오르는데 이걸 과연 텔론과 오스만이 오케이 할지가 의문이었다.
“일단. 너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뭐가 됐든 부딪쳐 보면 알겠지.
*
“자. 가볼까.”
데릭 헨더슨은 그의 팀과 함께 라스베이거스 외곽에 위치한 WFC 체육관으로 향했다.
라스베이거스엔 WFC 본사를 비롯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체육관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TWF 전용 체육관은 프로그램을 위해서만 운영되는 곳으로 TWF 도전자들이 합숙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젠장. 오늘 드디어 얼굴을 보겠군.”
“하하. 분명 말해두지만 너무 심한 언행은 조심해. 텔론이 까칠하니까 말이야.”
핸콕은 드디어 강해서를 만난다는 생각에 거친 말을 내뱉었고 헨더슨은 그저 웃으며 주의를 줄 뿐이었다.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네가 메인 코치라고 해서 나보다 위라는 건 아니잖아.”
“하하. 그렇지. 다만 핸콕 네가 말 했듯 내가 메인 코치니 내 팀원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 또한 내게 있다고.”
애초에 핸콕과 헨더슨 또한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탑 컨텐더로서 헨더슨에게 도전해야하는 입장의 핸콕과 챔피언인 헨더슨의 사이가 좋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
헨더슨은 트래쉬 토크나 서로에 대한 언론 플레이 등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핸콕은 적극적으로 이슈를 만들고 문제를 일으키는걸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헨더슨과의 타이틀 샷을 받기 위해 여러 차례 그를 도발하고 인터뷰에서 모욕적인 언사까지 입에 담았던 핸콕이었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옆에서 보기엔 아슬아슬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쨌든 여기선 핸콕 너는 내 팀원이고. 메인 코치는 나야. 그걸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쳇. 알고 있다고.”
핸콕이 이번 TWF 코치진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사실 다분히 계산적이었다.
이미 헨드릭과 강해서의 매치는 결정이 난 사항이었고 핸콕은 그저 TWF에 출연해 타이틀 샷에 대한 자신의 의지와 열정을 시청자들에게 보이는 게 목적이었다.
12월 달 타이틀전에서 헨더슨이 방어에 성공하든 강해서가 새로운 타이틀의 주인이 되든. 핸콕은 이미 그 다음 타이틀 샷을 생각 중이었다.
“그나저나. 저 친구는 아까부터 왜 말이 한마디도 없어?”
“아. 빌리? 놔둬. 원래 좀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있다더라고.”
그리고 핸콕과는 정반대로 정말 강해서를 만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사람이 있었는데, 이번 TWF31에 헨더슨의 팀원으로 참가하게 된 빌리였다.
강해서에 대한 빌리의 집착은 WFC에서도 아는 사람은 알 만큼 유명했는데, 미들급 데뷔전부터 시작해 지속적으로 강해서와의 매치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빌리의 소문을 듣고 접근한 헨더슨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한 빌리는 결국 헨더슨의 팀원으로 TWF31의 코치진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어쨌든. 일차적인 목표는 TWF의 목적에 맞게. 우리 팀의 도전자들로 파이널 매치를 구성하는 거야. 알겠어?”
“오케이. 알아들었다고. 일단 그 빌어먹을 동전이 우릴 도와주길 빌 수밖에.”
강해서의 타이틀전 상대가 팀 헤드 코치로 있으면서 팀 구성원에 강해서에게 유감을 가진 인원이 두 명이나 포함되어 있는 팀 헨드릭의 결성이었다.
2.
“파란 게 좋은데. 왜 분홍색이냐?”
“분홍이라기엔 애매하지 않나? 빨강? 주황에 가까운가?”
“야. 누가 봐도 분홍이구만.”
필승 형과 창섭 형은 팀 조끼의 색깔가지고도 투닥투닥 거리는 게 심심할 일은 없어보였다.
“참가자 리스트는 읽어봤어?”
“아. 두호 형. 안 그래도 보고 있었어요.”
엊그제 라스베이거스로 합류한 두호 형이 슬쩍 다가와 참가자 리스트를 같이 읽기 시작했다.
“어쨌든. 우리가 뽑은 도전자가 최종 우승을 하는 게 코치로서는 최고의 영광이 될거야. 실제로 TWF 역대 최고의 코치와 최악의 코치라는 타이틀로 역대 코치들의 기록이 돌아다니니까.”
“하하. 이것 참. 이렇게 서류로만 봐서는 정말 모르겠네요. 다들 대단해보이는데.”
2000년대 초반에 첫 시즌을 시작한 TWF는 시즌이 거듭될수록 인기를 얻었다.
초반 시즌만 하더라도 완전 일반인부터 MMA 수련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참가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프로 데뷔 3전 이상의 21세 이상인가 하는 제한 조건들이 붙어야 할 정도로 참가 희망자들의 수준이 높아졌다.
한마디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도전자 명단은 다들 MMA를 수련한지 몇 년 이상 된, 데뷔를 한 프로 격투기 선수들의 명단이었다.
아무리 중소단체라지만 선수로 데뷔했을 정도면 기본기는 충분할 테고. 이렇게 서류로만 볼게 아니라 직접 봐야 좀 느낌이 올 것 같았다.
붙어 있는 사진만 보면 다들 챔피언감이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아까 보니 헨더슨 팀에 해서 널 노려보는 사람들이 꽤 있던데?”
“네?”
한창 도전자 리스트를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다른 주제를 꺼내는 두호 형.
“하나는 핸콕이었고. 하나는 누군지 잘 모르겠네.”
“핸콕이요?”
라이트 헤비급 랭킹 1위인 선수인 핸콕이 날 왜 노려...
“핸콕! 그래 핸콕 입장에서는 노려볼 수 있지. 다음 타이틀 샷은 자기꺼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해서 네가 나타나서 날름 뺏어갔으니.”
“...”
언제 왔는지 창섭 형을 버리고 필승 형이 등 뒤에 다가와 있었다.
“원래 다음 타이틀 샷 주인공으로 가장 유력했던 게 핸콕이었거든.”
“아아.”
뭐. 그런 이유라면 날 노려보는 것도 이해는 갔다.
뭔가 밥그릇이 뺏긴 기분일 테니까.
“중요한건 핸콕과 헨더슨의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핸콕이 그 헨더슨의 팀에 들어가 있다는 거지.”
“그래요?”
“그리고 나머지 한 놈. 완전 너한테 꽂힌 듯 너만 노려보던 애 하나 있었잖아.”
“아.”
핸콕이 날 노려본 건 잘 몰랐는데, 지금 필승 형이 말하는 사람이 날 노려본 나도 눈치 챘었다.
“빌리... 였었나? 그랬을거에요. 이름이.”
“원래 미들급이었어. 나랑 붙은 적은 없는데 붙을 뻔 한 적이 있어서 알지. 이번에 라이트 헤비급으로 전향했더라고.”
역시 마당발 필승 형. 모르는 게 없었다.
“그나저나. 늦네.”
나는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팀 조끼 하나를 손에 들고서 아직 오지 않은 코치 한명을 기다렸다.
-끼익
얘도 양반은 못되는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체육관 문이 열렸다.
“여. 브로.”
“브라이언. 왔어?”
전 WFC 미들급 파이터.
현 브로일러 미들급 챔피언이자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인 브라이언 제프.
텔론과 오스만 회장을 설득하는 게 꽤나 난관이긴 했지만, 우리 팀 마지막 코치로 그가 참여하게 되면서 ‘팀 강해서’의 구성원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