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_끝났네? >
1.
-그럼 지금 대기 중이야?
“어. 이번 말고 다음 시합 끝나면 내 시합이야.”
-떨리겠다. 했던 만큼만 하면 돼! 알지?
“당연하지. 걱정 마. 안다치고 돌아갈 테니까.”
-...응. 고마워.
시합 직전 라커룸.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동안 아름이와 가벼운 전화통화를 나눴다.
지금이 애틀랜타 현지 시각으로 저녁 9시쯤 되었으니 서울은 아침 10시쯤 되었을 거다.
오늘은 스케줄이 없는지 자다가 깬 듯 한 아름이의 목소리가 너무 듣기 좋았다.
“야. 해서 저 새끼 연애하냐?”
“글쎄요? 전화하는 거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뒤에서 필승 형과 창섭 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 될 것 같아. 시합 끝나고 연락할게.”
-응! 나. 이제 해서 네 시합 챙겨 볼려구. 오늘도 볼 거야! 끝나고 연락줘!
“하하. 알겠어. 나중에 연락할게.”
아름이는 이제껏 격투기 시합을 보는 게 무서워서 제대로 못 봤다고 했다.
내가 이겼다는 인터넷 기사를 먼저 접하고 나서야 하이라이트를 보는 게 전부.
그나마 실시간으로 시합을 챙겨봤던 건 지난 미첼과의 타이틀전이 유일했었다.
하필이면 내 격투기 경력 중 가장 많이 얻어맞은 시합을 생중계로 봤던 거다.
“강해서. 너 요즘 연애 하냐?”
“네? 어. 뭐. 연애가 대수라고.”
필승형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뭐?”
“다들 하는 건데요 뭐. 저도 하고.”
“킥!”
살짝 발끈하는 필승 형과 뒤에서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흘리는 창섭 형.
그러고 보니 창섭 형은 여자 친구 있으셨지. 레이싱 모델 출신에 라운드 걸 여자친구.
“하. 창섭아. 너 웃었냐?”
“푸하하하. 형님 반응이 너무 웃겼잖아요. 솔직히.”
“이 자식이?”
“다음에 혜미한테 주변에 괜찮은 사람 없나 물어보라고 할게요. 푸하하.”
“진짜?”
아예 웃음이 터져버린 창섭 형과 웃음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소개팅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는 필승 형.
창섭 형과 필승 형은 겨우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서 저런 티키타카가 보기 좋은 편이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선수 쉬는데 방해되게.”
그때 라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안 코치님.
“아닙니다!”
“하하. 아니에요. 저희는 비품 체크 한번 하고 올게요.”
필승 형과 창섭 형은 귀신이라도 본 듯 후다닥 옆방으로 사라졌다.
“쯧. 저 두 놈은 언제 정신 차릴지.”
“하하. 필승 형은 은퇴했으니 뭐. 창섭 형은 복귀 안한대요?”
“저도 고민 많은 모양이더라. 그냥 모른 척 해라.”
“넵!”
하긴.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굴 걱정해.
그나저나 두호 형은 요즘 뭐하지?
은퇴와 복귀라는 단어에 갑자기 두호 형이 생각났다.
“그나저나. 진짜 괜찮겠냐?”
“네?”
“이번 시합. 이겨도 돈 한 푼 못챙겨 갈 수 있다.”
어제부터 안 코치님과 다른 코치진들의 안색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계체 행사에서 내가 터뜨린 폭탄 발언.
체육관 사람들과 전혀 상의되지 않은 사항이었기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을 거다. 그래도 시합 전이라고 어느 누구도 내게 와서 ‘왜 그랬냐? 무슨 생각이냐?’ 등의 질책을 하지는 않았다.
“걱정 마세요.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체육관 측으로 돌아갈 비용은 제가 맞춰 드릴게요. 저 모아둔 돈 꽤 돼요.”
“그걸 왜 받아 인마. 필요 없어.”
“하하하.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블레이크 수익 다 뺏어올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건 보너스죠 보너스.”
“...말이나 못하면. 중요한건 조건이 너무 터무니없는 조건이라는 거야.”
그런 터무니없는 조건이 아니면 블레이크가 낚이질 않았을 테니까요.
“괜찮아요. 저. 오늘 컨디션 진짜 좋거든요. 이렇게 컨디션 좋았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그건 다행이네.”
“그러니까. 이참에 봐두세요. 코치님 선수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감량고 없이 베스트 퍼포먼스를 보이면 과연 어느 정도 레벨인지. 사실 나도 감이 오질 않았다.
중요한건 이것도 아직 몸이 완성된 게 아니라는 거다.
겨우 한 달. 한 달간 바짝 끌어올린 거지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더 이상 몸을 다듬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육체가 완성되면 과연 어느 정도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을지 지금의 나 또한 알 수 없었다.
“형님! 준비하랍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필승 형의 목소리.
“들었지? 준비해라.”
“넵!”
드디어 오늘 이벤트 매치의 마지막 순서. 블레이크를 두드려 패는 시간이 다가왔다.
*
-와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
요란한 음악과 함께 입장로를 통해 무대 중앙으로 들어섰다.
입장 곡은 WFC에서 틀던 것과 같은 음악이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분위기가 달랐다.
꽤나 낯선 풍경.
관객의 함성도 반응도 열기도. 뭔가 종합격투기와는 달랐다.
전체 초대석으로 구성된다더니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이 들어찬 객석.
미국에서 복싱의 인기는 이 정도였구나 싶었다.
“옷 주고.”
“넵.”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창섭 형에게 건냈다.
오픈핑거 글러브와는 다른 복싱 글러브를 끼고 마우스피스를 입에 집어넣었다.
-탁. 탁.
그리고 이것.
복싱화라는 걸 이번에 처음 신어봤다.
미끄러움 방지와 뭐 이런저런 걸 위해 신는다는데 MMA에서는 이런 걸 신지 않으니까 한 달이 지나도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펑퍼짐한 트렁크 팬츠. 타이트한 MMA 팬츠를 입다가 이런 펑퍼짐한 팬츠를 입으니 어디 해수욕이라도 하러가야 할 것 같았다.
“뭘 그리 멍때려?”
“아. 하하. 링 좀 본 다구요.”
지난 한 달간 지겹게 봤던 사각 링이지만 이렇게 무대로 만나니 또 느낌이 달랐다.
전체적으로 이런 느낌이구나. 복싱은.
“강해서 선수. 링 안으로.”
“넵!”
사각의 링은 케이지보다 훨씬 작았다.
약 20피트 내외.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관계자들이 링 바로 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양 선수. 각자 자리로.”
종합격투기와는 달리 중앙에서의 글러브 터치를 하지 않는 건지 각자의 코너에서 시합은 시작되었다.
링 중앙에서 심판이 양팔을 들고 있다가
-땡!
복싱 특유의 공 소리와 함께 팔을 내리는 것으로 시합은 시작되었다.
-퉁. 퉁. 퉁.
MMA와는 달리 복싱링 바닥을 밟는 복싱화의 발자국 소리.
블레이크는 공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날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휘익. 툭. 툭.
큼지막한 복싱 글러브가 한팔 간격 앞에서 날 향해 가볍게 날아들었다.
잽으로 거리를 재며 간을 보는 행태.
-휘익! 휘익!
곧이어 펀치 컴비네이션이 날아들었지만 모두 피해냈다.
-휘익! 휘익! 후웅!
이번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달라붙으며 안면을 향한 펀치와 바디 블로까지 섞어 연계하는 블레이크.
-휙. 탁. 탁!
안면 펀치 하나는 피하고 나머지 하나는 쳐낸 뒤에 바디블로까지 패링으로 쳐냈다.
-씨익.
겨우 그 정도로 유효타를 먹이려고. 어림도 없지.
블레이크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는 게 보였는데 미안하게도 오늘 내 컨디션은 정말 최상이었다.
도저히 유효타를 먹어줄 수가 없는 상태랄까.
-스읍.
살짝 호흡을 들이쉬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보이는 블레이크의 표정. 그리고 그의 움직임.
근육덩어리의 꿈틀거림. 그의 시선 처리. 바디 밸런스. 무게 중심이 어디 있는지. 이 모든 정보들이 자연스럽게 그냥 느껴졌다.
블레이크. 오늘 시합에서 네가 가져갈 건 아무래도 피멍과 수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
“와! 방금 봤어요? 미쳤다! 강해서 미쳤다!”
므마 TV의 박관장은 아침부터 분주히 방송준비를 시작해 ‘강해서 Vs. 블레이크’의 시합 리액션 방송 중이었다.
┕진심 개 미쳤음 ㄷㄷ 다 피하고 다 쳐내네
┕와 개소름. 저 거리에서 한 대도 안 맞는다고?
조금 전 시작했던 강해서와 블레이크의 시합은 1라운드부터 매섭게 몰아치는 블레이크의 공격으로 벌써 1분 30초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근거리에 붙어서 잽부터 스트레이트에 훅. 어퍼컷. 바디블로우까지. 다양한 연계를 시도하는 블레이크였지만 단 하나의 유효타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저게 지금. 그냥 유효타가 없는 수준이 아니에요. 일단 맞는 게 거의 없어. 블로킹으로 유효타를 허용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냥. 응 너 내 몸에 손 못 대. 이런 수준이라니까?”
┕피하기 힘든 바디블로우는다 패링으로 쳐냄ㅋㅋㅋㅋㅋ 완전 갖고 노넼ㅋㅋㅋㅋㅋㅋ
┕?? 이거 시합 어디 가서 볼 수 있어요? 중계 안 해줌?
┕이거 시합 PPV 중계라 돈 내고 봐야함 ㅋㅋㅋ 그래서 박관장도 영상은 못 틀고 리액션만 하는거임
┕우리도 다 돈 내고 시합 보는 중ㅋㅋㅋㅋ 개꿀잼 벌써 2분이다!!!
┕1분 남았다! 1분만 버티자 갓해서!!
┕외쳐 갓해서!!!!
┕갓!
┕갓갓!!
그의 경기를 중계를 통해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비단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경악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시합의 당사자인 블레이크는 그 누구보다도 경악스러운 마음이었다.
‘이게 말이 돼?’
상대방인 동양인 놈은 자신의 펀치가 어디를 향할 건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정말 종이 한 장차이로 피해내고 있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지근거리에 붙어 펼치는 난타전.
더욱 경악스러운 건 ‘난타전’ 이라고 하지만 정작 주먹을 뻗는 건 블레이크 자신뿐이라는 것이었다.
‘퍼킹!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안면은 기동 범위가 크니 피할 수도 있다. 복싱은 글러브가 크니 블로킹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디는 그렇지 않았다.
몸의 중심이 되는 몸통은 펀치를 피해낼 수 있는 움직임 자체가 한정적이었기에 블레이크는 안면 과 바디에 골고루 펀치를 분배해 컴비네이션을 넣었으나 강해서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피하고 쳐내며 단 한 대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허억. 허억.”
3분 동안 전력으로 샌드백을 쳐도 이정도로 지치진 않았을 거다.
블레이크는 1라운드가 20초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소나기처럼 쏟아내던 펀치를 멈추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스윽.
그제야 로프까지 밀려있던 강해서는 사이드로 돌아 나오며 블레이크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저 새끼가.’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강해서를 따라붙으며 펀치를 쏟아 내보지만
-휘익. 휘잉! 탁! 휘익!
원투는 보기 좋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양옆으로 흔들며 피해내고 바디블로우는 어김없이 블로킹이 아닌 패링으로 쳐내는 강해서.
어떻게든 유효타를 넣기 위해 들러붙는 블레이크와 강해서는 클린치 직전까지 갔으나
-때앵.
1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두 사람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우와아아아아!!!!!!!!!!!!
-진짜 한 대도 못때렸어!!!!
-이게 말이 돼? 마치 카이서스의 시합을 보는 것 같았어!!!
사각링 주변에서 들리는 관객들의 환호성.
-툭. 툭.
그리고 처음으로 글러브를 들어 블레이크의 볼을 두드리는 강해서.
“1라운드 끝났네?”
마우스피스 때문에 어눌한 발음.
“기대해. 이제부턴 나도 너 때릴 거니까.”
지금 이 순간.
블레이크는 강해서의 어눌한 발음이 그 어느 뉴스보다 정확하게 자신의 귀에 꽂히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