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_무리수? >
1.
-펑! 퍼엉! 뻐어엉!
-끼익.. 끼익...
무슨 폭탄 터지는 것과 비슷한 굉음과 함께 고통스럽다는 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야. 내일이 시합인데 뭘 그리 힘을 빼고 있어? 살살 해라.”
“기물 파손되면 추가비용 나가. 샌드백 뽑히겠다. 좀 쉬어라 해서야.”
한창 샌드백을 두드리다 잠시 쉬고 있는데 필승 형과 창섭 형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들어오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하하. 이정도로 망가지면 샌드백이 문제죠. 오히려 체육관측에 시설물 관리미흡으로 우리가 따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 그런가? 어쨌든 인마. 좀 있으면 계체 가야되는데 좀 씻고 쉬어라. 샌드백 터뜨리려고 작정한 놈 같아.”
“하하하. 넵!”
필승 형과 창섭 형 모두 샌드백 망가진다고 반쯤 농담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전력을 다해서 친 것도 아니었다.
블레이크와의 시합을 준비했던 지난 한달.
그 기간 동안 실제로 내가 했던 훈련은 복싱보다는 기초 웨이트 훈련이었다.
미들급에서 라이트헤비급으로의 체급 전환.
사실 이건 꽤나 예전부터 이야기해왔던 일이었기에 생각보다 그리 긴 고민이나 회의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미들급 한계 체중에 맞추려다가는 제명에 못살겠다는 생각까지 했었으니까.
미들급 타이틀이 아깝긴 하지만 챔피언 벨트야 라이트 헤비급 가서 또 따면 되지. 라이트헤비급부터는 속된말로 거인들의 세상이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기지 못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블레이크 전을 준비하면서 감량을 하지 않고 웨이트를 하다 보니 확실히 느낌이 왔다. 라이트헤비급이 미들급에 비해 얼마나 수준이 높든 상관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꾸욱. 꾸욱.
글러브를 낀 손을 강하게 쥐어보는데 정말 글러브를 찢어버릴 수도 있을 만큼 힘이 넘쳤다.
지금 평체는 98키로. 라이트 헤비급에서 뛰려면 여기서도 6키로 정도는 감량해야했지만 그게 어딘가 싶었다. 6키로 정도면 정말 수분 조절만으로도 충분히 뺄 수 있는 범위였으니까.
“야. 너 아직도 안 씻었냐?”
“창섭 형. 하하.”
“안 코치님이 슬슬 움직이자고 준비하래. 땀내 풍기면서 가기 싫으면 씻고 와.”
“넵!”
벌써 시간이 이리 됐나 싶었다.
오늘 계체는 말 그대로 이벤트였다.
복싱 헤비급은 200파운드 오버로 약 90키로 이상만 되면 체급에 제한이 없었다.
감량 따위 필요가 없는 거지.
그냥 내일 시합의 이슈를 위해 서로 간에 신경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읏샤-”
나 또한 준비한 내용이 있고, 블레이크를 엿 먹이기 위한 카드가 있었다.
“잘 먹혀야 할 텐데.”
샤워실로 향하며 혼자 중얼거렸지만, 분명 잘 먹힐 거라 생각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준비했으니까.
*
-찰칵! 찰칵!
흔히 A타운 으로 통하는 애틀랜타.
그곳에 위치한 벤츠 스타디움은 지금 세계적인 이목을 모으고 있는 이벤트 시합을 준비하느라 한창 소란스러웠다.
-저기! 미스터 강이다!
-원더보이!!
기존의 WFC 경기의 계체량과는 숫자부터 다른 카메라 숫자와 인파.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복싱이 갖는 인기와 위치를 알려주는 듯 했다.
-강해서 선수. 216.8 파운드. 계체 통과
-블레이크 선수. 207.2 파운드. 계체 통과
내일 있을 복싱 이벤트 매치를 위해 계체장에 모인 선수들.
크루저급이나 라이트헤비급 등 선수들은 계체량이 유의미했다.
하지만 계체장의 모든 기자들은 계체는 무의미하지만 존재 자체로 이슈가 되는 메인 매치 두 선수의 모습을 찍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블레이크 선수? WFC를 박차고 나와 프로복서로 전향하며 프로 데뷔도 성공적으로 치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오늘과 같은 종합격투기 선수와의 이벤트 매치를 가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종합격투기를 할 때부터 생각했던 게 있습니다. 주먹으로만 싸우면 1라운드도 버티지 못할 머저리들이 주먹으로 안 되니까 냄새나게 들러붙어서 그라운드니 그래플링이니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많은 복싱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종합격투기 챔피언도 주먹만으로 싸우면 프로 복서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걸요.”
-찰칵. 찰칵.
-타다닥. 타닥.
블레이크의 발언이 끝나자 카메라 셔터박스 소리와 함께 키보드 소리가 회랑을 가득 채울 듯 울려 퍼졌다.
-다음으로는 강해서 선수. 블레이크와 같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어. 뭐. 비슷합니다. 꼭 저런 애들이 있어요. 핑계만 가득한 애들. 이렇게 했으면 이겼을 텐데. 저렇게 했으면 이겼을텐데. 그냥 자기가 약해서 진걸 인정 못하고 시스템을 욕하는 애들. 그래서 보여주려고요.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 붙어도 이기지 못한다는 걸.”
-와하하하하
-찰칵. 찰칵
-타다다닥. 타다닥
마찬가지로 강해서의 인터뷰가 이후에도 울려퍼지는 카메라 소리와 키보드소리. 거기에 위트 있었던 그의 답변에 웃음은 덤이었다.
“아! 그리고. 그냥 저 친구를 조금 쥐어패고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네?
“지난 WFC 271에서 처음 봤는데. 상당히 질 나쁜 친구더군요. 저는 프로니까 밖에선 싸우지 않아요. 케이지에서 한번 만나면 단단히 혼을 내줄 생각이었는데 체급이 달랐죠.”
-그런 일이 있었죠.
“그런데 WFC에서 도망쳐서 복싱계로 갔네? 어라. 그런데 복싱계로 가니까 오히려 체급을 맞춰서 때려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거에요. 그래서 이번 시합을 제안한겁니다.”
강해서는 블레이크를 도발하기 위해 꽤나 중간 없는 발언을 내뱉었고 인터뷰 진행자는 흥미롭다는 듯 그 말을 끊지 않았다.
“미친놈이군.”
그에 대한 블레이크의 반응은 꽤나 격렬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네놈은 MMA면 3라운드. 복싱이면 1라운드면 내 앞에 엎드려 있을 거야. 지금이라도 싹싹 빌어. 그러면 적어도 밥은 먹을 수 있게 이빨은 남겨줄 테니까.”
씩씩거리며 강해서의 도발에 답하는 블레이크.
“복싱이면 1라운드면 족하다? 만약 1라운드를 넘기면 어쩔래?”
“... 그딴 말장난에 놀아날 생각 없다.”
“말장난이라니. 네가 1라운드면 족하다기에 만약 1라운드를 넘기면 어쩔 건지 물어보는건데.”
얄밉게 웃으며 질문하는 강해서를 보며 입을 꾹 다무는 블레이크.
말이야 1라운드라고 했지만, 막상 시합에 들어가면 승패 자체도 알 수 없었다. 괜한 말로 제약을 둬서 심리적 압박을 받을 필요는 없으니 그저 묵비권을 행사할 수밖에.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말 없는 거 봐. 여러분. 이게 여러분들이 보는 인터넷 SNS에서 자의식 과잉적인 허세 글을 쓰는 애들의 실체입니다. 실제로 당사자를 눈 앞에 두고는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얼간이들이죠.”
블레이크가 아닌 계체를 실시간 중계중인 카메라를 향해 삿대질하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강해서.
“저 불쌍한 친구가 너무 쫄아있는 것 같으니 제가 제안을 하나 하죠. 1라운드 동안 저는 블레이크를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이정도면 저 겁쟁이 친구가 배팅을 할 수 있을까요?”
-오와아아아!!
강해서의 제안에 술렁이는 계체장.
블레이크는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터질 것 같았지만 쉽게 그 도발에 답했다.
“링에서 공격을 하지 않는다니.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샌드백이라도 되고싶은건가? 이것 참 출세한 샌드백이군. 실컷 두드려 맞는 대가로 50만 달러나 받아가다니 말이야.”
“그래. 그래서 말인데. 이기든 지든 50만 달러는 너무 과하잖아? PPV까지 받아가고? 졌으면 패배자답게 빈손으로 돌아가야지.”
“뭐?”
“네가 정 겁나면. 한 가지 옵션을 더 추가할게. 1라운드동안 널 공격도 하지 않고. 만약 단 한 대라도 내 얼굴에 클린 히트를 꽂아 넣으면 승패랑 상관없이 이번 시합에서 얻는 모든 수익을 너한테 주지. 어때?”
“이런 미친 새끼가?”
“대신. 만약 1라운드 안에 나한테 유효타를 못 넣으면 네 모든 수익은 나한테 주는거야.”
-찰칵. 찰칵.
-타다다닥. 타다다닥.
이번에는 어떤 함성도 없이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간 고민하는 듯 침묵을 지키던 블레이크.
“그 말. 후회하게 해주지. 지금 이게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 계약서에도 추가하자고. 내가 방금 제시했던 상황.”
1라운드 내내 공격을 하지 않고, 안면 유효타를 한번만 허용해도 승패와 관계없이 모든 수익을 상대방에게 양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
반대로 말하자면 1라운드 내내 방어를 도외시하고 공격만 할 수 있으며, 쓰러뜨리는 게 아닌 안면 유효타 한번만 맞춰도 상대방의 모든 수익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였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강해서의 제안에 블레이크는 두말할 것 없이 콜을 외쳤고 그날 전 세계의 스포츠 기사란은 강해서의 기행으로 도배가 되었다.
이제 이번 이벤트 매치의 관전 포인트는 ‘누가 이기느냐’ 도 있지만, ‘1라운드에 과연 블레이크가 강해서 에게 유효타를 넣을 수 있느냐’ 에 포커스가 집중되었다.
2.
“와. 이건 선 씨게 넘은 것 같은데요?”
국내 최대의 격투기관련 스트리머 므마tv의 박관장은 실시간 생중계중인 강해서 Vs. 블레이크의 계체 이벤트를 보며 한탄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건 선 넘은 정도가 아니짘ㅋㅋㅋㅋㅋㅋ
┕않이... 갓해서 행님... 갑자기 왜 그래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냥 참교육만 시키지
┕진심 왜 저럼? 복싱하는 애들 특유의 ‘다 피할 수 있어’ 뭐 이런 건가? 상대방도 프로복서인데?
┕팩트 : 블레이크는 WBC 프로복서로 전향 후 프로 데뷔전을 1라운드 KO로 가져갔음. 그것도 랭커는 아니지만 관록 있는 베테랑 선수를 상대로
┕ㄹㅇ;;; 저건 이겨도 돈 다 뺏기는 시나리온데. 왜 저런 무리수를 두지??
“그러니까요. 굳이 저런 무리수 두지 않아도 그냥 실력으로 인실좆 시켜주면 되는데. 저거는 너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봅니다. 상대방도 프로선수급 실력이면 안면 유효타를 안내주는게 더 어려워요. 그것도 공격 안한다고 했으니 상대방은 맘 놓고 때려댈 거 아냐.”
┕그러니깤ㅋㅋㅋ 저건 도대체 누구 대가리에서 나온 도발이냐? 강해서는 저 의견 낸 코치 짤라야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일 시합 재밌긴 하겠넼ㅋㅋㅋㅋ 1라운드 내내 맞는지 안 맞는지만 볼 것 같다
“이게. 안면 유효타라고 했으니까 강해서 선수는 안면 방어만 신경쓸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블레이크가 안면 포기하고 바디만 두드려도 시합 자체가 불리해져. 강해서 선수 입장에서는 뭐 하나 이득 볼게 없는 제안이라는거죠.”
┕유효타 안맞고 2라운드 이후에 이기면 돈 다 뺏아오잖앜ㅋㅋㅋㅋ 그러면 이득이짘ㅋㅋㅋㅋㅋ
┕받아와야 이득이지 ㅋㅋㅋㅋ 내 봤을 땐 강해서 이번에 탈탈 털리고 지갑도 털리고 멘탈도 털려서 당분간 은거할 듯 ㅋㅋㅋㅋㅋㅋㅋ
국내 최대의 격투기 스트리머 박관장과, 그의 방송을 찾아주는 격투기 팬들의 대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번 강해서의 도발은 선을 넘었다는 의견이 100중 100이었다.
국내외 언론사, 개인을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강해서의 이번 제안을 현실적으로 보는 시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제안이 공식적으로 시합 계약서에 특약으로 추가되었고 블레이크의 SNS에 인증까지 되자 ‘강해서가 요즘 잘나간다고 너무 기고만장하다’ 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었다.
“푸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그 정도는 돼야지.”
하지만 단 한사람만은 그런 강해서의 조건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 아무리 그래도 저건 불가능하지 않겠어? 블레이크라는 친구. 실력이 그리 떨어지지 않던데.”
“나는 1라운드가 아니라 시합 끝날 때까지 공격하지 않고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그건... 자네는 카이서스잖아.”
미국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
이번 시합을 성사시킨 켄달은 자신의 선수인 카이서스와 함께 본인이 성사시킨 시합의 계체 이벤트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정도는 돼야지. 아니. 저 정도도 못하면 안 되지. 푸하하하.”
뭐가 그리 신나는지 오랜만에 카이서스의 웃음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고 켄달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카이서스를 바라봤다.
블레이크와 강해서의 복싱 이벤트 매치를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