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_조지아 >
1.
“흥. 흥.”
평소 긍정적인 마인드와 행동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손아름은 뭔가 불만이라는 듯 연신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은 지금 만나는 분께만 집중하고 싶어요.
너튜브 채널 유나 TV의 라이브 방송.
별로 딱히 볼 생각은 없었지만 강해서가 하도 보라고 해서 무슨 이야기하나 싶어 살짝 봤는데 저렇게 공식적으로 썸을 발표하다니.
“아. 덥네. 난방을 너무 높여뒀나?”
괜히 손부채질로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애꿎은 난방 탓을 하던 손아름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나갈 채비를 했다.
“약사님. 운동선수들 피멍 같은 거 들었을 때 쓰는 약 같은 게 있나요?”
“멍이요? 멍 연고가 있어요. 멍 부위에 출혈이나 상처가 있어요?”
“어... 아뇨. 그냥 좀 붓고 멍만 들었어요.”
“그러면 이거 가져가시면 돼요. 그냥 바르면 안 되고. 마사지하듯이 부드럽게 전체적으로 발라줘야 해요.”
“...마사지요?”
근처 약국에서 멍 연고를 사며 마사지라는 단어에 괜히 귀가 빨개지는 손아름.
아직 3월의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마스크와 모자 때문인지 날씨가 덥다고 생각하며 연신 손부채질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손에 근육 테이프부터 멍 연고까지 이것저것 든 봉투를 들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손아름.
-아름 : 저기요. 썸남씨. 방송 끝나는 대로 얼굴 좀 봅시다?
-아름 : 집으로 오세요
마지막 톡을 보내기 전 잠시 고민에 빠지긴 했다.
‘그래도 멍 연고 바르려면 마... 사지를 해야 하니까. 밖에서 할 순 없잖아?’
어설픈 자기 위안을 하며 톡을 보내고는 급하게 집 정리를 하고 거울 앞에 섰다.
‘마스크 때문에 화장이 조금 지워졌나?’
혹시나싶어 오늘 스케줄이 끝나고 메이크업도 아직 안 지웠었다.
집에서는 무조건 편하게 있자는 주의였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불편해도 예쁜 옷을 입고 있는 손아름.
-띵동.
그렇게 강해서를 기다리며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초인종이 울렸다.
“해서야!”
“어. 안녕.”
손아름이 반갑게 맞이했지만 어색한 듯 뻘쭘하게 인사를 건네는 강해서.
‘... 진짜 예쁘네. 현실감각 없이.’
강해서는 조금 전까지 함께 방송했던 유나도 예뻤지만, 눈앞의 손아름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작은 얼굴에 화려한 이목구비. 손대면 분이 묻어날 것 같은 하얀 피부와 연갈색 눈동자. 오늘따라 화장도 화려해서인지 평소처럼 편하게 대하기가 뭔가 어려웠다.
“시합 아직 안정해졌다며?”
“...”
“다친 데도 멀쩡하다며?”
“...”
소파에 앉으니 연타로 날아드는 질문인지 질책인지 모를 손아름의 압박. 강해서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휴우. 다리 줘봐.”
“어?”
“다리 걷어서 줘보라구. 피멍 든 다리.”
“...”
멍든 다리를 보면 또 한마디 할까 봐 머뭇거리던 강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리를 걷어 아름이에게 보여줬다.
“...아프겠다.”
하지만 별말 없이 멍 연고를 꺼내 들더니 퍼렇게 멍들고 부은 다리를 정성스럽게 마사지하는 손아름.
“어! 아! 아니야. 내가 해도 돼!”
“가만있어.”
“...”
꽤나 착 가라앉은 손아름의 목소리에 뭔가 더 말을 하기 어려웠다.
“해서 네 일이니까. 싸우지 말라거나 다치지 말라고는 못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치지 않길 기도하거나. 다치고 돌아오면 이렇게 약을 발라주는 정도밖엔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것까지 뺏지는 마.”
“...고, 고마워.”
고마움에 말을 더듬은 건지 손아름의 손길에 자극이 되어 말을 더듬은 건지는 강해서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일에 대해서 주제넘게 나설 생각은 없어. 나도 노출 심한 옷으로 무대를 서기도 하고. 연기를 하다 보면 다른 배우들과 스킨십을 하기도 해. 연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구속하거나 질책만 하면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게 아니라 짐이 되는 거니까.”
“...”
“네 직업. 일. 존중해. 솔직히 멋있고 대단하다고도 생각해. 대신 다친 널 보듬어주는 역할은 내가 할 거야.”
소파에 앉아 있는 강해서와 바닥에 앉아서 그의 다리를 마사지하는 손아름.
손아름은 연갈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강해서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름아.”
“응?”
“넌 내가 왜 좋아?”
“...”
아주 가볍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
강해서의 마음속에 가득했던 핵심적인 의문이었다. 대체 손아름이 ‘왜?’
“글쎄. 음. 생각보다 이유가 꽤 많은데.”
“어?”
“일단 귀엽게 생겼구. 근데 몸은 엄청 좋고. 무엇보다 말을 이쁘게 해.”
“말 예쁘게 안 한다니까.”
“나한텐 그래. 그리고. 너가 다른 여자들이랑 가깝게 지내면 내 기분이 다운되더라. 그래서 알았어. 너 좋아한다는 거.”
“...”
“마음이 중요하지. 아무리 좋아할 이유가 많아도 마음이 안 생길 수도 있는 건데. 마음이 먼저 생겼다면 좋아할 이유야 앞으로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어.”
“...”
“흡!”
부드러운 손길로 다리 마사지를 해주던 손아름의 팔을 끌어 와락 안는 강해서.
“해, 해서야?”
“미안해. 내가 조금 찌질하고 찐따같은 성격이라서. 쓸데없는 생각이 많고 결정을 잘 못 내려.”
“...”
“근데. 이건 반칙이잖아.”
“응?”
“네가 너무 예뻐서. 다른 선택지가 없잖아.”
“...”
마주 안은 채 서로를 마주 보는 강해서와 손아름.
“나도. 아름이 너 많이 좋아해.”
“풉. 애기같아. 그게 무슨 고백이...흡...”
그리고 처음으로 강해서가 리드한 입맞춤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2.
“애틀랜타요?”
“그래.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벤츠 스타디움에서 치러질 거다. 알고 있다시피 4월 마지막 주말.”
한창 필승 형과 맞잡기 훈련을 하고 있는데 안 코치님이 사무실에서 나와 이벤트 매치의 확정 사항을 전달해주셨다.
그나저나. 조지아면 커피 이름 아닌가?
-뻑!
“인마. 커피 이름이 아니라 원두 생산지인 나라 이름이고. 조지아주는 미국에 있는 주 이름이고.”
“아! 알거든요? 농담 한번 한 거 가지고.”
아름이도 보고 있는데 또 뒤통수를 때리는 필승 형.
“복싱 룰로 진행되는 이벤트 시합이다. PPV 판매가 있으니 수당은 따로 나올 테고 현장 관람티켓은 따로 판매하지 않고 전석 초청권으로 진행하기로 했다는구나.”
“전석 초청권이요?”
“복싱은 인기가 많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종합격투기는 인기가 없어 보이잖아요 안 코치님.
“승리 수당과 관계없이 파이트머니면 50만 달러다. 이기면 승리 수당에 부상으로 벤츠 최상위 라인 한 대까지. 이거. 내가 말하면서도 덩어리가 너무 크네.”
안 코치님은 이번 이벤트 매치 조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본인도 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듣는 나도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복싱과 종합격투기의 대전료 차이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났나 싶었으니까.
“무조건 이겨야겠네?”
“무조건 이겨야겠네가 아니라. 이기는 건 당연한 거예요. 필승 형. 중요한 건 어떻게 이기느냐지.”
드디어 블레이크와의 시합이 현실로 다가왔다.
시합 준비 기간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이벤트 매치였으니 별 상관없었다. 승패를 떠나 하나의 쇼이자 말 그대로 이벤트였으니까.
주최 측 뿐만 아니라 시합을 기대하는 팬들도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려 하겠지.
중요한 건 난 그렇게 가볍게 임할 생각이 없다는 거다.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블레이크 그 개자식이 우리 아름이한테 헛수작 부리려고 했다니.
“메인 시합은 해서 너랑 블레이크. 그 전에 복싱 이벤트 매치가 5개 준비돼 있다.”
“와우. 이벤트 매치인데도 시합이 많네요.”
“PPV 판매는 해야 하니까. 게다가 이번 매치는 복싱계 종합격투기계를 막론하고 가장 핫한 시합 중 하나니까. 촉박한 일정임에도 참여코자 하는 선수들이 넘쳐나는 모양이야.”
“다들 복싱 선수들인가요?”
“대진표가 아직 다 나온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종합격투기 선수들도 참여 문의가 쇄도하는 모양이야. 물론 최대한 밸런스를 맞춰서 구성하겠지. 우린 우리 시합만 신경 쓰면 돼.”
“뭐. 그렇죠.”
이건 복싱 Vs. MMA가 아니었다. 종합격투기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블레이크 그 개 같은 놈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자리일 뿐이었다.
“체급은 헤비급. 200파운드 이상이니 어디 한번 베스트 체중을 찾아보자.”
“넵!”
감량고 없는 시합이라니. 정말 이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WFC 체급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조금 해봐야겠다.”
뒤이어 안 코치님은 미들급 챔피언 달성 이후에 나아갈 방향에 관한 주제를 꺼내셨을 때
“아야!”
등 뒤에서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아, 아름 씨. 발을 그렇게 밟으시면...”
“죄송해요. 못 봤나 봐요.”
“... 제가 키가 180이 넘는데요?”
“어쨌든 못 봤나 봐요. 죄송해요.”
“...”
“그리고 조지아 커피는 코카콜라 본사가 있는 조지아주 이름을 딴 게 맞거든요?”
“네?”
“원두 생산 나라 이름 아니거든요?”
“...”
필승 형의 발을 밟고는 한마디 톡 쏘더니 물 마시러 자리를 뜨는 아름이.
“야. 나 진짜 아름 씨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아름이가 밟아봤자 뭐 얼마나 아프다고. 저 가벼운 애가.”
“발 뒤꿈치로 찍듯이 밟았다니까? 새끼발가락 쪽 밟혔다고!”
“거. 참. 엄살은. 덩치는 아름이 세배는 되겠구만.”
“아오!”
“왜 나한테 그래요. 아름이한테 가서 화내던가.”
씩씩거리면서도 차마 아름이한테는 한마디도 못 하는 필승 형.
사람은 참 착한 형이라니까.
*
-팡! 팡! 파앙! 때앵!
-후욱. 후욱.
블레이크는 연신 미트를 두드리다가 공소리가 들리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때?”
블레이크가 속한 ‘The Box’ 체육관의 관장은 블레이크의 질문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애초부터 복싱이나 할 것이지 대체 왜 MMA 같은데 눈을 돌린 거야?”
“그게 데뷔가 빨랐거든. 당시 나는 한 푼이 급했고, 뒷골목을 벗어나 양지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 어쨌든 아주 좋아. 솔직히 이 정도까지 해낼 줄 몰랐어.”
실제로 관장은 이번 이벤트 매치를 위해 블레이크를 지도하며 여러 번 놀랐다.
생각보다 탄탄하게 쌓여있는 기본기와 복싱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현역 MMA 파이터였던 만큼 우수한 운동능력.
블레이크는 지금 당장 프로 무대에서 활약해도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정도의 기량을 가진 선수였다.
“미스터 강의 영상은?”
“이미 여러 번 봤지. 애매해.”
“애매하다라.”
“타격이 좋아. 테크닉도 좋고. 다만 그게 복싱 베이스는 아니야.”
MMA 타격과 복싱 사이에는 꽤나 큰 간극이 존재했다.
똑같이 글러브를 끼고 주먹을 휘두르는 행위이긴 했지만, 그 메커니즘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제일 최근 시합 영상을 보면... 그것만 보자면 이번 시합은 블레이크. 네 낙승일 거야.”
“후후. 아마 감량 실패로 컨디션이 많이 떨어졌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차라리 이전까지는 약을 빨다가 타이틀전에는 약을 끊었다고 보는 게 신빙성 있겠지.”
“푸하하. 그럴 수도 있겠어.”
시원하게 웃어젖히는 블레이크.
“자. 오늘은 이만하자고. 내일은 계체가 있으니까.”
“의미가 있나.”
“다른 대진들은 계체가 필요하다고. 헤비급이야 의미가 없지만 말이지.”
어느새 강해서와 블레이크의 시합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내일 있을 계체 행사 또한 ‘계체’라는 목적보다는 ‘이벤트성 쇼’라는 것에 더욱 초점이 맞춰지겠지.
“내일 또 그 게이놈 면상을 봐야 한다니 기분이 더럽지만, 곧 그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건 좋군.”
“하하하. 충분해. 복싱으로는 네가 그 아시안에게 질 이유가 없다고.”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푸하하하.”
시합까지 이틀. 계체까지 하루가 남은 시점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블레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