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_갑자기? >
1.
“카이서스가?”
텔론은 보기 드물게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여기.”
그에 텔론의 비서는 태블릿에 카이서스의 SNS를 띄워 그에게 전달했다.
“... 이것 참. 좋아해야할지 싫어해야할지 모르겠군.”
카이서스는 그의 프로모터가 권한다고 이런 글을 쓸 위인이 아니라는 걸 텔론은 너무 잘 알았다.
“한마디로. 이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카이서스의 속내라는 거지.”
미스터 강에게 복싱을 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 찬성한다.
거기에 더해 그가 자신의 앞에 서길 바란다는 말까지.
“이번 시합을 진행함에 있어 분명히 해야 할 게 있어.”
“네.”
“미스터 강과 블레이크의 시합은 WFC의 연장이라는 것. 룰은 복싱 룰을 쓰지만, 복싱 선수와 MMA 선수간의 분쟁이 아닌 MMA 선수들 간의 다툼이라는 것. 알겠나?”
“알겠습니다.”
카이서스까지 나서서 한마디 거든 상태.
그의 파급력을 생각해봤을 때 블레이크와 강해서의 시합은 조만간 격투기계에 가장 핫한 이벤트 중 하나로 떠오를 게 뻔했다.
“이런 큰 건을 놓치면 안 되겠지.”
텔론은 이미 이렇게 일이 진행되기 전에 켄달의 방문을 받은 바 있었다.
켄달이 전달한 의사는 단순하고도 명료했다.
‘권태로운 황제를 깨우고 싶다.’
카이서스가 인정했다는 ‘재능’을 통해 다시 한 번 그에게 열정을 불어넣고싶다는 켄달.
블레이크의 승리를 위해 짜여진 판이 아니었다. 블레이크를 설득한 켄달도, 상대 선수인 강해서도. 마지막으로 텔론까지도. 모두가 하나같이 블레이크의 패배를 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스터 켄달이 한 말처럼. 카이서스. 그를 깨울 수 있을까요? 미스터 강이?”
텔론의 최측근이자 몇 번이고 강해서를 직접 대면했던 비서였지만 ‘과연?’ 이라는 의문을 떨치지는 못했다. 그만큼 카이서스라는 선수의 업적과 실력은 복싱 계를 떠나 시대에 퍼진 하나의 불가침 영역과도 같았으니까.
“글쎄. 솔직히 나도 잘 몰라. 미스터 강 그 친구의 어떤 점이 황제의 마음에 들었는지. 블레이크와의 시합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황제를 깨울 수 있을지.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
“...”
“우리는 WFC야. 이건 비즈니스지. 알아서 판을 만들어주고 키워주고. 거기에 모든 영광까지 우리에게 돌린다는데 뭐가 더 필요한가?”
격투기를 좋아하고 강함을 신봉하지만, 그만큼이나 이성적이고 비즈니스적인 사람이 텔론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이슈에는 속도가 생명이지. 불길이 꺼지기 전에 고기를 올려보자고.”
“네.”
“한국에 연락해봐. 가장 빠르게 시합을 할 수 있는 날짜를 잡아서 분위기가 최고조일 때 샴페인을 터뜨리자고.”
강해서 Vs. 블레이크.
현 시각 가장 뜨거운 이슈인 두 사람의 매치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될 듯 했다.
*
-그래서. 이번에는 복싱 시합 하는 거야?
“어... 아마도? 아직 확실하진 않아. 시합 제안서나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건 아니니까.”
한국에 들어온 지도 며칠 됐지만 아직 친구들도 아름이도 보지 못했다.
수면을 줄여가며 연구할 게 있다 보니 어쩔수 없었달까.
그러다보니 이제는 아름이와 전화 통화하는 게 꽤나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래? 그래도 복싱은 종합격투기보다는 덜 다치지 않아?
“뭐. 꼭 그렇지만도 않아.”
타박상이나 골절 같은 부상의 빈도수야 복싱보다 MMA가 월등히 높은 건 맞았다.
다만 심각한 후유증이나 펀치 드렁크 같은 건 MMA보다 복싱 쪽이 훨씬 위험하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타격 부위가 상체와 머리에 집중되기도 하고, 뇌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는 진동이 오픈핑거 글러브 보다는 복싱 글러브가 훨씬 크니까 그렇겠지.
실제로 MMA는 피를 철철 흘리고 엄청 심각해보이지만 펀치드렁크나 시합 후유증 사망 같은 굵직한 부상은 복싱보다 훨씬 덜했다.
내가 알기로 뇌에 충격이 많이 가는 운동을 꼽을 때 항상 들어가는 게 미식축구와 복싱이었으니까.
-진짜? 헐. 그러면 복싱도 위험하잖아.
“괜찮아. 이번에는 프로 선수긴 해도 복싱 랭커라던지 오랫동안 복싱을 수련한 선수는 아니니까.”
-그래도... 저번 시합 봤어. 다리 괜찮아?
“아...”
봤구나.
시합은 무서워서 못 보겠다기에 안봤을 줄 알았는데. 하필이면 역대 급으로 많이 두드려 맞은 시합을 봤네.
-아 가 아니잖아. 무대 내려갈 때에도 절뚝거리던데.
“내가 그 정도면 상대 선수는 어떻겠냐.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뭐. 괜찮아. 병원도 다녀왔어.”
-매번 그렇게 심하게 다치는 거야?
“아니야. 진짜 아니야. 지난 시합이 정말 특히 많이 맞은 거야. 원래 나 잘 안맞아.”
-거짓말
“진짜래도? 너튜브 찾아봐.”
-... 싫어.
와. 억울하네.
난 진짜 정타 잘 안 맞는 스타일인데 말이야.
그라운드로 들어가서 얻어맞은 적은 있지만 타격 전에서 두드려 맞은 건.... 솜차이랑 두호 형. 미첼 정도밖에 없었다.
-근데 밖이야? 차 소리가 나네?
“아. 어. 오늘은 볼일이 조금 있어서 훈련 일찍 마치고 나왔어.”
-볼일?
“어. 이번 이벤트 매치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 좀 해볼까 싶어서.”
어제 카이서스가 날 언급하며 SNS를 써준 덕분에 내 인지도는 하루 만에 급상승했다.
물론 브로일러 미들급 챔피언 출신. 현 WFC 미들급 챔피언. 이것만으로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만큼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나와 두호 형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
하지만 이걸 세계무대로 가져가자면 말 그대로 ‘아는 사람만 아는’ 수준의 인지도였다. 한국에서나 복싱보다 종합격투기의 인기가 높지 아직 전 세계적으로 보면 그렇게까지 유명세를 얻기엔 부족했으니까.
반면 카이서스는 데뷔부터 이어진 무패의 기록이 현재까지도 현재진행형인 복싱계의 레전드다. 탑에 오른지 20대 초반에 데뷔해 정상의 자리에 오른지도 벌써 십년 가까이 되지만 단 한 번의 패배나 고전도 없는 살아있는 복싱의 신.
그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특집. 영화나 도서들도 많았으니 딱히 복싱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 카이서스 하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 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거기다 신비주의까지 있는지 언론이나 SNS등을 잘 하지 않기로 유명한 카이서스가 날 지목하며 입을 열었으니 인지도가 오를 수밖에.
-...그래서. 너튜브 촬영하러 간다고?
“응. 지난번에 말한 동생한테 신세진 게 많아서. 이참에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아.”
유나한테는 이래저래 고마운 게 많았다.
종합격투기 초창기부터 유나TV를 통해 입장 발표를 한 적도 있었고, 초반 인지도를 높이는데 유나의 역할도 컸으니까. 사실 세계무대 나가고 나서는 큰 도움 없었다지만 애초에 유나가 아니었으면 최창우와의 시합이 제대로 성사가 되었을지. 이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거였다.
유나 TV를 통해 이슈화된 최창우와의 시합을 계기로 브로일러로 데뷔했고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오늘 방송은 카이서스 덕분에 세계적인 유명세를 치르게 된 김에 유나TV에 출연해 블레이크와 카이서스에게 간단하게 한마디라도 하면 유나의 너튜브도 조금이지만 떡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획하게 된 자리였다.
-... 그래. 잘 갔다 와.
“흠?”
목소리가 급격히 퉁명스러워졌네.
“일단 지금 도착해서. 올라가봐야 하거든. 끝나고 연락할게! 라이브 방송이니까 너튜브 찾아보면 나올 거야! 시간 되면 봐.”
-안볼 거라니까!
어이쿠.
아름이가 목소리 높이는 건 또 오랜만에 듣네.
“하하. 알겠어. 끝나고 연락할게.”
-흥.
삐지셨구만.
하긴. 한국 들어와서 아직 아름이도 한 번도 못봤는데 아무리 방송이라고 해도 다른 여자애를 먼저 본다고 하니 삐질 만도 하지.
우리가 아직 ‘오늘부터 1일!’ 이렇게 공식 연애 선언을 한 건 아니지만 썸이라는 걸 타고 있는 건 확실했으니까.
오늘 유나네 방송을 찾은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설레발일지 혹은 자의식과잉일지는 모르지만, 유나가 나한테 혹시라도 마음이 있었다면 그것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랄까.
-띵동
-문 열렸어요! 들어오세요!
조금 차분하지만 쾌활한 유나 특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유나 TV의 촬영지인 공유 오피스로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네가 여기 왜 있냐?”
“나야 영은 씨가 유나 씨 도와주러 온다고 해서 왔지.”
준현이 이 새끼는 한국 도착해서 몇 번을 보자고 했는데 다 튕구더니만. 여기서 만나네?
“바쁘다며.”
“어.”
“이게 바쁜 거야?”
“이게 바쁜 거지. 연애보다 바쁜 게 뭐 있음?”
... 말을 말자.
그나저나 얘네들 확실히 사귀기로 한 건가?
“응. 벌써 한 달 넘었음.”
“오빠한테 아직 말씀 안 드렸나보구나. 저희 만난 지 한달 조금 넘었어요.”
당당한 표정의 준현이 놈과 살짝 부끄러워하는 영은 씨.
“... 재현이나 기태는 왜 아무 말도 없었냐?”
“걔들도 모르니까.”
“너네 비밀연애하냐?”
“노노. 그냥 바빠서 말을 못했을 뿐.”
와.
사실 조금 신선하긴 했다.
우리 친구들이 서로 끈끈하게 지낸지가 벌써 14년 정도가 되는데 준현이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그동안 재현이나 기태는 몇 번씩 연애도 하고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는데, 준현이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는 모태솔로였다.
사람마다 연애할 때 모습이 다르다지만 준현이 이놈은 재현이보다 더한 놈이었구만. 연애하면 친구를 아주 거들떠도 안보는 놈이었어.
“뭐래. 치사하게 타이틀전에 나만 빼놓고 가서 그런 거다 인마.”
“뭐래. 캠프 일정부터 같이 움직이자니까 네가 그땐 어렵다며?”
“영은 씨랑 사귀기 직전이었으니까.”
사실 이번 미들급 타이틀전에서는 언제나 내 옆에서 통역을 맡아주던 준현이가 자리를 비웠었다.
라스베이거스 캠프 때부터 같이 움직이자고 일정을 알려줬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다고 했었거든. 근데 그 중요한 일이 연애사업일 줄이야.
“그래도 타이틀 전 때는 불렀어야지.”
“... 넌 그때 내 상태를 모르니까 그런 말 할 수 있는 거다 인마.”
만약 시합 직전의 내 상태를 알았으면 넌 그런 말 못해. 준현이를 신경 쓰기는커녕 내 한몸 간수도 어려운 상태였거든.
-쿡. 쿡.
“오빠. 저도 있는데.”
“아! 그래. 유나야.”
“우리 아직 인사도 안했는데.”
“...하하하. 미안해. 잘 지냈지?”
“조금 전 까지는요?”
방송 장비가 세팅 된 책상 앞.
본인의 덩치보다 훨씬 큰 게이밍 의자에 앉아 빤히 날 올려다보는 유나는 언제 봐도 검은 고양이 같았다. 실제 성격은 강아지 같은데 말이야.
“누가 오랜만에 보고도 아는 척도 안해서 지금은 잘 못 지내고 있는 중이에요.”
“하하하하. 아니라니까. 준현이 저 샊.... 아니 저 놈이 여기 있어서 놀라서 그런 거야.”
“놀란 게 아니라 반가운거 같았는데.”
“하하하...”
매우 불편하네.
아주 불편해.
“그나저나. 방송까지 시간 좀 남았지?”
“네. 두 시간 정도. 우리 피디님이랑 작가님이 오늘 방송 내용이랑 질문지 등 알려주실 거예요. 저 방에 있어요.”
“오케이.”
공유 오피스는 촬영을 위해 평범한 방처럼 꾸며진 촬영실과 소품이나 의상 등이 있는 소품실. 그리고 회의를 위한 회의실이 있었다. 유나는 이제 대기업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구독자를 보유한 너튜버다 보니 담당하는 피디와 작가. 카메라맨 등 스태프들만 하더라도 작은 회사 수준이었다.
“아! 오셨어요. 강해서 선수님!”
깍듯하게 인사하며 오늘의 방송 방향과 콘셉트. 그리고 꼭 들어가야 하는 필수 코너와 질문 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 와중에
-톡. 톡.
-아름 : 해서야. 방송 준비 중이야?
-아름 : 바빠?
아름이의 톡이 도착했다.
-해서 : 아니. 괜찮아. 왜?
-해서 : 지금 오늘 방송 큐시트 확인 중
-아름 : 그래? 방송 얼마 안 남았지?
-해서 : 어? ㅇㅇ 두 시간 정도?
-아름 : 나 지금 스케줄 끝났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ㅎㅎ
-아름 : 그 블레이크라는 선수. 나랑도 트러블 있었잖아 오픈워크아웃때
-해서 : 아. 그렇지. 아름이 너랑의 문제가 발단이었지 어떻게 보면
-아름 : 그래서 말인데. 나도 그 방송 같이 나가면 안 돼? 지난번에 기사난 거 해명도 할 겸.
...이제 방송 두 시간도 안 남았는데.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