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_파급력 >
1.
@wonder_blake
-지금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으면 언제든 연락해. 애송이 챔피언에게 복싱의 벽이라는 게 어떤 건지 보여줄 테니까. WFC 챔피언이라는게 얼마나 보잘 것 없는건지 알려줄게
“하. 참...”
나는 가장 최근에 올라온 블레이크의 SNS까지 확인하고는 그저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대체 무슨 심산인지 내가 아무리 도발을 걸어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블레이크가 갑자기 복싱의 벽을 보여주신다니. 괜히 찝찝하달까.
“준비 다 했냐?”
“준비랄 게 뭐 있어요. 그냥 편하게 가면 되지.”
“하긴.”
안 코치님은 본인이 말 하고도 이상하다 느꼈는지 어깨를 으쓱 거리셨다.
“와. 난 텔론 회장 진짜 오랜만에 보는데. 긴장 좀 해도 되지?”
“아니면 그냥 쉬어도 되구요.”
“아. 왜! 나도 같이 갈래! 거기 식당 맛있다고!”
필승 형은 꽤나 들뜬 분위기였는데 WFC를 은퇴하고 나서 처음으로 텔론 회장을 만나는 자리다보니 그런가보다 했다. 아니면 진짜 WFC에서 밥을 먹고싶은 걸지도 몰랐고.
WFC 본사.
엊그제 미들급 타이틀전을 치렀던 WFC Apex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 저 건물을 나는 한 번도 가본적이 없었다.
처음 방문하는 사유가 어째 WFC가 아닌 복싱 관련이라 참 묘한 느낌이었다.
우리 일행은 별 어려움 없이 WFC 본사를 찾아 텔론의 사무실까지 올 수 있었는데, 나는 초행길이라지만 필승 형과 안 코치님은 이미 WFC 본사쯤은 몇 번씩 방문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라 헤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똑. 똑.
-들어와요.
텔론 회장의 비서로 보이는 분이 노크를 하자 들려오는 텔론의 목소리.
비서가 문을 열어주고 우리 일행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 어서와 우리 챔피언!”
텔론 회장은 양팔을 활짝 펼치며 우리 일행을 반겨줬다.
“반가워요. 텔론.”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중급 영어회화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기에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원래 출국 예정이었다고. 갑자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하네. 취소된 만큼 하루의 일정 경비와 비행기 티켓은 우리 쪽에서 부담 할테니 이해좀 해주게.”
“그렇게 해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오늘 사무실을 찾은 건 나와 안 코치님. 그리고 필승 형 이렇게 세 명이었다.
하지만 정작 텔론 회장과 주로 의견을 주고받는 건 안 코치님 뿐이었지만.
“바쁜 사람들을 불렀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텔론 회장은 지난 미들급 매치와 내 경기력에 대한 칭찬을 잠시간 늘어놓더니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제 막 시합을 치른 선수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집 나간 개 한 마리를 잡아야하는데. 어떻게. 손 좀 빌릴 수 있겠나 싶어서 말이야.”
“... 집나간 개라. 잡아도 다시 집으로 들이시지는 못할 텐데요.”
“하하하. 집에 들일 생각도 없네. 그 괘씸한 녀석이 집을 나가면서 주인을 물었지 뭔가. 그냥 다시는 이 근처로 얼씬도 못하고 짖지도 못하게만 해주면 되네.”
텔론 회장도 어지간히 화가 났었나보다.
웃으면서 말하지만 눈에서 살기가 비쳤다.
“복싱 시합입니다. 애초에 블레이크와 강해서 선수는 같은 WFC 소속일 때부터 체급도 달랐구요.”
“어차피 복싱 체급은 우리와는 또 다르지. 크루저급으로 가도 되고 헤비급으로 가도 되네.”
복싱은 총 17개의 체급으로 나뉘어져 있어 8개 체급으로 나뉘어진 WFC와는 명칭도 한계 중량도 조금씩 달랐다.
텔론 회장이 말 한 복싱의 크루저급은 190파운드. 86키로 이하 급의 체급이었고 헤비급은 190파운드 이상. 86키로 이상의 선수들이 출전하는 체급이었다.
위대한 챔피언이라 불리는 카이서스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체급이 바로 86키로급 이상인 체급이었다.
“WFC 선수들은 WFC 외의 투기종목 시합 출전에 대한 여러 제약이 있습니다. 이번은 예외로 두시는 겁니까?”
“예외지. 예외야. 일단 미스터 강이 복싱 시합에 나가는 것도 아니잖은가.”
“...네?”
“미스터 강은 말이지. 현 WFC 미들급 최강자가 한 체급 위인 전 WFC 라이트헤비급 선수와 계약 체중으로 이벤트 시합을 가지는 거네. 물론 룰은 복싱 룰을 따르고 링도 사각링에서 싸우겠지만 말이야.”
“...”
대단한 인간이다 텔론은.
끝까지 ‘MMA Vs. 복싱’ 이라는 프레임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블레이크는 복싱 선수이기도 했지만 전직 WFC 선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시합은 나와 블레이크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비’ 로 일어난 이벤트 매치이고, ‘서로의 합의’하에 룰은 복싱 룰. 체급은 계약체중. 무대는 사각 링이 되는 방식이라고 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이렇게 들으니 정말 그럴듯해 보이는 개소리이긴 했다.
애초에 복싱 선수와 시비를 붙어 싸우는 게 아니니 종합격투기와 복싱의 자존심 대결이 아닌 현직 MMA 선수와 전직 MMA 선수의 트러블인 게 사실이긴 하니까.
“그리고. 저놈 옆에 꽤나 거물이 붙은 모양이야.”
“거물이라면······.”
“카이서스의 프로모터가 블레이크 옆에 붙었다고 해. 대체 그놈이 뭐 먹을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카이서스의 프로모터라...”
“확실한 건. 이번 시합은 큰돈이 될 거야. 카이서스의 프로모터는 확실히 능력 있는 친구거든. 시합을 키울 줄 아는 사람이지.”
돈이 된다라.
내가 이번에 미첼 코너에게 이기고 받은 파이트머니와 승리수당이 모두 합쳐서 2억이 조금 안 되는 걸로 전달 받았다.
텔론 회장이 큰돈이라고 할 정도면 과연 얼마나 받을 수 있는건지도 궁금해졌다.
“다만. 걸리는 부분은 있네.”
“어떤 부분입니까?”
“지난 미첼과의 시합.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미스터 강의 퍼포먼스가 조금 떨어졌어. 물론 이기긴 했지만 결과보다는 과정의 문제를 말 하는 거야.”
“...”
“특히 타격 폼이 떨어졌달 까. 컨디션 문제일수도 있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네. 괜히 집나간 개새끼 어깨를 올려줄 수는 없으니 말이야.”
텔론 회장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이번 시합을 치르면서 많이 배우고 느꼈다. 예전의 내가 얼마큼 불합리한 존재였는지. 그러면서도 중간을 건너뛰어 채우지 못한 부분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이 부분은 당사자인 나 외에는 답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내가 직접 대답을 했다. 안 코치님이나 필승 형도 내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실테니까.
-후우
잠깐의 심호흡.
“형. 거기서 저 때려 보실래요.”
“...뭐 인마?”
“저 때려 보라구요.”
“너 미쳤냐?”
필승 형과의 대화는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텔론 회장은 당연히 어리둥절한 표정 짓고 있었다.
“아. 좀 때려 보라구요.”
“아놔.”
-휘익!
가볍게 뻗어오는 필승형의 펀치.
“아. 최선을 다해서 날려봐요. 최대한 빠르게. 내 얼굴 쪽으로.”
“너 진짜 왜 그러냐?”
“은퇴한지 일 년 넘은 선수한테 맞을 챔피언이 아니라니까. 때려 봐요.”
“하. 놔. 난 책임 못 진다?”
필승 형과 내가 앉은 자리는 딱 한팔 간격. 앉아있느라 다리를 못 쓰는 이 상태에서 필승 형의 전력을 다한 펀치를 피해낸다는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보통 사람이나, 지난번처럼 컨디션이 떨어졌던 내게는.
-스읍. 후우.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후우웅. 휘익. 휘이익.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마저 천천히 들린다고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보이는’ 필승 형의 주먹.
필승 형의 눈을 직시하고 있음에도 필승형의 어깨 움직임과 펀치 궤도. 속도까지 정확하게 보였고 나는 앉은자리에서 고개를 단 1센티도 뒤로 빼지 않고 양옆으로만 까딱거리며 모두 피해냈다.
“...”
그런 내 주변시로 보이는 텔론 회장의 경악어린 표정. 이건 꽤나 볼만한 장면이었다.
“... 괴물새끼. 대체 미첼전에서는 왜 쳐맞은거냐 그러면?”
필승 형은 근 십여 회에 달하는 펀치를 뻗어낸 후 주먹을 거두며 질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날은 진짜 컨디션이 안 좋았다니까요.”
이번에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주고받는 대화였다.
“... 이거. 깜짝 놀랐네. 갑자기 두 사람이 싸우는 줄 알았지 뭔가. 케이지 안에서면 몰라도 현실에서의 싸움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텔론 회장은 조금 전까지 내게 보냈던 불신의 눈초리나 경악의 눈빛이 아닌 아주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우리 챔피언을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 같군. 집 나간 개를 잡는 데는 너무 과한 인사야.”
“그 개가. 제 바짓단에도 오줌을 싸고 도망을 가서요. 개인적으로 저도 볼일이 조금 있습니다.”
“하하하. 그래. 집 나간 개를 끌어내는 방법은 제 소변냄새 뿐이지. 어떻게. 진행해도 되겠나?”
텔론 회장의 의미심장한 눈빛.
안 코치님의 시선은 날 향해 슬쩍 움직였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국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 라는. 주인을 물고 집 나간 개라면. 충분히 미친개일 것 같군요.”
“뭐? 으하하하하. 아주 적절한 속어군. 그래. 미친개를 잡을 수 있는 최고의 무대는 내가 만들어주지. 으하하하.”
텔론 회장은 안 코치님의 재치 있는 대답이 정말로 기꺼웠는지 아주 큰 소리로 웃어대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직 블레이크와의 시합이 가시화 되진 않았기에 정식 계약서는 아니지만, 오늘 있었던 대화에 관한 가벼운 계약서를 작성한 후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맙네. 비서에게 오늘 숙박과 내일 비행기 티켓은 이야기해뒀으니 나가서 물어보면 될 거야.”
고민거리 하나를 털었다는 듯 밝은 표정의 텔론.
“저. 본사 식사권은 없나요?”
“...뭐?”
하지만 그 밝은 표정도 필승 형 앞에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선수들한테는 나오는 식사권 있잖아요. 온 김에 밥 좀 먹고 가게.”
“... 비서에게 따로 말 해두지.”
참 대단한 형이다. 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이러는거야?
*
@sun_west
-그렇게 붙자고 할 때는 도망다니더니. 갑자기 뭐 믿는 구석이 생겼나봐?
@sun_west
-난 언제든 좋아!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지. 원하는 모든 방식을 수용할게. 복싱? 아니면 오른팔을 쓰지말아줄까? 그것도 아니라면 1라운드 동안 널 공격하지 않아줄 수도 있어. 어때?
@sun_west
-내가 불안한 건 딱 하나야. 똥을 싸질러두고 또 네놈이 도망갈까봐. 제발 빼지 말고 붙어주라. 링 위에서 날 마주보고도 과연 네가 그렇게 입을 털 수 있는지 궁금하니까.
텔론 회장과의 미팅이 끝나자마자 내가 했던 일이 이거였다. SNS 저격 글 올리기.
WFC에서도 적극 밀어준다고 했으니 거리낄게 없지.
-휘익. 휘익.
한국에 돌아와서 컨디션을 회복하며 가장 먼저 체크한 게 바로 ‘집중 상태’ 였다.
물론 텔론 회장을 만났을 때 필승 형을 대상으로 한번 집중력을 끌어올린 적이 있긴 하지만, 이 ‘집중 모드’ 로 접어드는 게 됐다가 안됐다가 한다면 그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대충 알겠네.’
이런 상태에 대해서 어디 자문을 구할 데가 없다보니 혼자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물어볼만한 상대라고는 카이서스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그쪽은 겨우 한번 본 사이일 뿐 연락처도 모르니 말이지.
“야. 너 얼굴 상태가 왜 그러냐?”
“하하. 뭐 좀 연구 좀 한다고.”
“연구 하는 거랑 얼굴이랑 뭔 상관인데? 다크 서클 봐라 인마. 너 잠 못잤냐?”
“하하하.”
필승 형은 역시 쓸데없이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나는 편의상 ‘집중 모드’라고 부르는 상태를 시험하기 위해 미국에서 한국을 들어와 지금까지 한숨도 잠을 자지 않았다.
미국에서 컨디션이 좋았을 때는 ‘집중 모드’로 들어가는 게 전혀 무리가 없었는데 지금은 지난 미첼과의 시합 때처럼 머리에 안개가 낀 듯 집중도 잘 안되고 ‘집중 모드’로 들어가지지도 않았다.
이걸 시험해보자고 십 몇 킬로를 감량할 수는 없으니 혹시나 싶어 잠을 자지 않아봤는데 역시나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집중력이다. 집중력.’
임의로 집중 모드라고 부르긴 했지만 진짜 집중력의 차이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수면부족으로 집중력이 바닥을 치기 시작하자 ‘집중 모드’는 고사하고 반응속도부터 모든 신체 능력이 한 단계 떨어진 느낌이었다.
“야. 들어가서 자라. 툭 치면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네 완전.”
“하하. 아니에요. 형. 저 미트 좀 잡아주세요.”
“...뭐?”
지금 이 상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훈련들이 있단 말입니다.
컨디션이 좋으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기초 훈련들.
“자. 자. 빨리요.”
수면 부족이지 감량으로 인한 체력 저하는 아니었기에 미첼과의 시합 때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았다.
훈련 효과도 훨씬 크겠지 생각하며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야! 야! 강해서!”
창섭 형이 체육관 문을 열고 달려왔다.
“무슨 일 있어요?”
“야. 너 이거 봤냐?”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더니 대뜸 스마트 폰을 들이미는 창섭 형.
-복싱계와 종합 격투기계의 자존심 대결? 침묵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카이서스. 이번 블레이크와 강해서의 이슈에 입을 열다?
=복싱계의 위대한 챔피언이라 불리는 카이서스가 이번 복싱계와 WFC의 이슈에 입을 열었습니다. 평소 인터뷰나 SNS를 잘 하지 않는 카이서스의 이런 입장 발표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라 국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복싱 팬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카이서스는 자신의 공식 SNS 계정을 통해 이번 이슈 사항에 대해 입장을 밝혔으며....(하략)
@Kaisus_Kaiser
-나는 블레이크라는 선수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난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저 미스터 강에게 복싱을 시킬 수만 있다면 그게 어떤 방법이든 찬성한다. 나는 그가 내 앞에 서는 날을 언제나 기대하고 있다.
창섭 형이 보여준 스마트 폰에 떠 있는 건 카이서스에 관한 기사와 카이서스의 공식 SNS에 올라온 게시물 하나였다.
“야. 지금 이것 때문에 완전 난리던데? 그냥 작은 이벤트 시합 수준의 파급이 아니야 이건.”
파급력이야 그렇다 치고. 카이서스가 갑자기 나한테? 왜?
작가의말
ufc 본사는 사실 그리 고층도 아니고 라스베이거스가 내려다 보이는 그런 건물도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극중에서는 연출을 위해 고층 건물을. 그리고 계체에 텔론이 직접 나서지도 않는다는 설정들이 있으니 현실과는 여러부분에서 디테일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감안해서 즐겨주세요!:)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카이서스가 입을 열었네요!
자까는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스포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