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_재밌네 >
1.
“아아... 또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옵니다. 오늘따라 위험한 장면을 많이 보여주는군요. 강해서 선수.”
“아무래도 감량의 여파가 큰 듯합니다. 리바운딩으로 인한 체중 증가가 큰 만큼 감량 시의 리스크도 크니까요.”
스포츠 온 TV의 해설진은 WFC 미들급 타이틀전 1라운드를 한창 중계 중이었다.
“그렇죠. 지난 오픈 워크아웃에도 불참했던 강해서 선수는 어제 계체 중계 때 한눈에 보기에도 감량 고가 있어 보였습니다.”
“보통 감량의 여파라고 하면 가장 큰 부분이 경기 집중력과 체력입니다. 부디 강해서 선수가 후회 남지 않는 시합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경기 초반부터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며 꽤나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고 있는 강해서. 해설진이 1라운드 중계 이후 오늘 시합은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오늘 강해서 왤케 비리비리하냐?
└비리비리한 건 모르겠고. 움직임이 좀 이상한데?
└계체는 통과했어도 감량은 거의 실패라던데. 그게 진짠가?
└평소같으면 충분히 대처했을 플레이들에 너무 휘둘리는데;;; 이대로 1패 가나?
└무패 기록 깨지나? 무패 기록 좀 길게 가져갔으면 했는데
└강해서가 이상한 것도 있지만, 미첼도 수준이 미쳤음. 1라운드는 서로 탐색전이었던 것 같고, 이제부터 미첼 본격적으로 달려들텐데. 불안하다 불안해
└역시 인간계 최강... 미첼한테는 어렵나?
격투기 커뮤니티의 반응 또한 겨우 1라운드 5분만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시합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강해서가 WFC 아시아 첫 중량급 벨트를 들어올리나 기대를 표하던 팬들은 1라운드에서 강해서가 시종일관 밀리는 그림을 보여주자 급격히 텐션이 떨어졌다.
“미첼. 어때?”
그 시각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WFC Apex.
WFC 274 마지막 경기의 출전 선수인 미첼은 1라운드가 끝난 뒤 세컨진이 준비한 의자에 앉아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글세.”
미첼은 세컨진의 질문에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마치... 초보자를 상대하는. 그런 느낌이었어.’
자신의 펀치나 페인트 동작들에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강해서의 모습에 오히려 미첼이 당황했었다.
혹시나 함정이거나 의도적인 설계인가 싶어 1라운드를 들여 조금씩 그의 외곽을 두드려봤지만
‘함정이나 설계는 아닌 것 같았어.’
앞선 최두호와의 시합과는 기량 차이가 너무 심했기에 조심스러운 플레이를 펼쳤지만, 2라운드부터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공략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미첼이었다.
“진짜. 괜찮냐?”
그리고 미첼의 맞은편 코너.
강해서의 세컨석에서는 박필승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해서에게 컨디션 체크를 했다.
“후우. 네. 뭐. 아직은 괜찮아요. 정타로 맞은 것도 별로 없고.”
사실 강해서는 이번 미첼과의 타이틀전을 그렇게까지 크게 신경쓰고있지는 않았다.
미들급의 최강자. 인간계 최강. 그렇게들 떠받드는 듯 했지만, 실제 강해서가 분석한 미첼은 최두호보다 조금 나은듯한 수준이었다.
물론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고 방심을 해도 좋을 정도의 상대는 아니었지만, 반대로 말한다면 집중만 하면 어렵지 않은 상대. 그정도라고 생각했다.
“형.”
“엉?”
“형은 상대방이 주먹 날리면. 어떻게 피해요?”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상대방 주먹 궤도를 보고 피해내면서 카운터를 뻗어요?”
“무슨 개소리야. 당연히 전체 움직임으로 예측하는거지. 보고 어떻게 피해. 리듬. 움직임. 습관. 이런 모든 걸 고려하는거지. 영상 분석은 왜 하겠냐?”
“... 그렇죠?”
강해서는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역시나 생각했던 대답이 나오자 가벼운 한숨을 쉬며 다시 마우스 피스를 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
정확한 타이밍에 울리는 2라운드를 알리는 신호음.
“해서야! 천천히 해! 천천히! 너무 무리하지말고! 앞으로 네 선수 생활은 훨씬 길게 남았으니까.”
박필승은 그런 강해서를 향해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한마디를 얹었다.
“걱정말아요. 좋은 공부 좀 하고 올테니까.”
강해서는 그런 박필승을 슬쩍 돌아보며 가볍게 대답했고
“... 뭐라는거야? 괜찮은 거 맞나?”
박필승은 강해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파이트!
심판의 신호와 함께 가벼운 글러브 터치로 본격적인 2라운드 시합이 시작되었다.
-후웅! 훅!
1라운드와는 달리 상당히 공격적으로 치고들어가는 미첼.
강해서는 평소와는 달리 양팔간격 이상으로 거리를 벌린 뒤 미첼의 펀치와 움직임을 관찰했다.
‘이게... 전체를 보라는 거였구나.’
지난 라스베이거스에서 볼튼과의 스파링에서 주변시를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강해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게 진짜였어.’
눈 앞으로 미첼의 펀치가 지나갈 때 강해서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을 뻔 했다.
모든 투기종목에 처음 발을 들인 입문자들이 당연하게 겪고 지나는 과정을 강해서는 WFC 타이틀 매치에서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휘익! 휙! 퍽!
미첼은 2라운드 초반부터 승기를 가져가기 위해 강해서를 매섭게 몰아쳤지만, 생각보다 그리 쉽게 분위기를 가져오지 못했다.
‘1라운드 때보다 뭔가 움직임이 좋아졌다.’
아니. 움직임 자체가 빠르거나 힘있어졌다기 보다는 불필요한 움직임들이 줄어들었다.
움직임에 낭비가 없어지니 반응속도가 빨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충분하다.’
지난 WFC 271에서 강해서의 경기력은 미첼에게는 약간의 충격이었다.
말 그대로 기술을 뛰어넘는 피지컬.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최두호의 뛰어난 테크닉을 방어해내는 동물적인 신체 능력과, 모든걸 뒤엎을 수 있는 힘.
하지만 오늘 눈앞에서 마주한 강해서는 그때와는 달랐다.
적당한 기술과, 애매한 신체능력.
WFC271 때는 도핑을 했던게 아닌가 싶을정도로 수준 차이가 심했다.
-퍽! 뻑!
미첼은 라이트 훅으로 강해서의 가드를 두드리면서 레프트 킥으로 강해서의 오른다리 무릎 아래를 집요하게 공략했다.
‘이런거였구나. 이런거였어.’
그리고 강해서는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도 모르게 폭발적인 성장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
-휙. 휘익. 후웅!
날 듯이 뛰어들며 던지는 펀치 컴비네이션과 테이크다운을 위한 셋업까지 뿌리치며 뒤로 빠진 강해서.
그는 자신이 이제껏 해왔던 ‘격투기’가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야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단 몇분의 짧은 시간만에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미처 채우지 못했던 부분들을 채워넣고 있었다.
강해서에게 미첼은 가장 완벽한 교보재와 같았다.
-휘익. 훙! 퍽!
미첼의 라이트 펀치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리듬과 타이밍. 그리고 ‘감각’으로 피해내며 드디어 카운터 펀치를 우겨넣은 강해서.
“큽!”
미첼은 생각지 못했던 카운터 펀치에 처음으로 전진 스텝을 멈추고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다행히 그리 제대로 들어온 펀치는 아니었기에 조금 경각심을 갖게 할 뿐이었지 미첼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재밌네.’
그동안 강해서는 상대의 움직임을 모두 ‘보고’ 피해내며 가장 ‘효율적인’ 방법과 궤도로 상대를 타격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감’으로 피해내며 스스로의 타격조차 ‘제대로 보고’ 맞추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뻗어내고 있었다.
‘재밌어. 진짜 재밌어.’
-휙. 퍽. 휙. 휙. 툭.
한팔 간격보다 조금 먼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주고받는 타격전.
미첼과 강해서는 둘 다 이렇다 할 정타를 넣지 못하고 클린치 상태로 들어갔다.
-뿌득. 뿌드득.
서로의 상체를 잡은 상태에서 힘 싸움에 들어갔다가
-휙. 퍽! 퍽!
힘에서는 불리하다 느낀 미첼이 강해서를 밀어내는 타이밍에 강해서는 아래에서 위로 미첼의 턱을 노린 훅성 펀치를 뻗어내었고, 미첼은 그것을 막아내며 강해서의 오른 다리에 다시 한번 레그킥을 꽂아넣었다.
-삐
그와 함께 울리는 신호음.
2라운드의 종료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후우. 후우.”
와. 재미는 있는데. 체력이 안따라주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라운드를 계속 넘기면 진짜 큰일 날 것 같달까.
“해서야. 잘 했다. 이번 라운드는 우리가 먹었어.”
필승 형은 내 땀을 닦아주며 2라운드 상황과 앞으로 남은 라운드의 전략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
“엉?”
“나. 5라운드까지 못버틸 것 같은데.”
“... 그정도야?”
“그냥 버티기만 하라면 할 것 같은데. 제대로 움직이면 3라운드. 길어야 4라운드 초반?”
“...”
급격히 어두워지는 필승형의 안색.
이것 참. 뭔 말을 못하겠단 말이지.
“대신. 3라운드에 최대한 끝내볼게.”
“...뭐?”
“대충 배울 건 다 배운 것 같고. 조금 아쉽긴 한데, 그것 때문에 질 수는 없으니까.”
“뭐라는 거야? 아까부터 배우긴 뭘 배워?”
“그런게 있어. 후-우.”
깊게 숨을 한번 들이쉬며 몸 전체로 산소를 보낸다는 느낌으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삐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 휴식 시간.
“다녀올게. 집 갈 준비 해도 돼. 형.”
“... 까불지말고. 침착하게 해. 천천히. 알겠어?”
“에압.”
필승 형과 안 코치님의 당부에 대답하며 마우스 피스를 꽉 깨물었다.
-툭.
3라운드.
지난 1라운드에서는 미첼이 이득을 봤고, 2라운드에서는 내가 근소하게나마 이득을 봤다면, 3라운드는 미첼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타이밍이었다.
-휘익!!
아니나 다를까 라운드가 시작하자마자 뛰듯이 달려드는 미첼.
그의 슈퍼맨 펀치에 가까운 주먹을 뒤로 살짝 뛰듯 피해내며
-후웅! 쩍!
그의 머리에 하이킥을 꽂아 넣었다.
“큽!”
평상시처럼 느려진 세상 속에서 정확하게 타점을 잡고 때려 넣은 킥은 아니었기에 미첼은 휘청거릴지언정 쓰러지진 않았다.
재미있다. 재미있어.
격투기가 가진 원초적인 매력이라는 게 이런거였구나 싶었다.
뭐랄까. 아드레날린이 돈달까.
-휘익! 휙!
비틀거림에도 내가 후속타격을 가하지 않자 인상을 구기며 다시 달려드는 미첼.
이제는 ‘보고 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예측과 감으로 유효타격을 주지 않고 그의 타격을 모두 피해낼 수 있었다.
“흐읍!”
억눌린 기합과 함께 테이크 다운을 가져가기 위해 상체를 숙이고 손을 뻗어오는 미첼.
-스으으윽.
‘어라.’
한창 그의 펀치를 피해내며 감각과 리듬에 집중하다보니 조금씩 머릿속의 안개가 걷혀가는 느낌이었다.
-슥. 휘익. 쩌어억!
미첼의 테이크 다운 시도를 피해내며 무릎을 차올렸다.
-쿠웅!
타이밍 좋게 미첼의 이마 부근을 스친 무릎 덕분에 미첼은 상체를 숙인채 들어오던 모습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듯 엎어질 듯 하더니 겨우 균형을 잡고 섰다.
“큭!”
그런 미첼을 향해 이번 시합에서 처음으로 밟아보는 전진 스텝.
-휙! 휙!
크게 휘두르는 미첼의 펀치를 피해내며
-퍽! 퍽!
그의 안면에 원투 펀치를 꽂아 넣었다.
-퍽! 쩍! 쩍!
안면으로 가드를 올린 미첼의 복부를 한번 두드린 후 라이트 레그킥으로 그의 왼쪽 다리 무릎 아래를 연달아 두드렸다.
-휘청
복부와 다리에 연달아 타격을 넣으니 순간 중심이 흔들리는 미첼.
-뻑! 뻐억!
그대로 자세를 단단히 잡고 미첼의 안면과 턱에 레프트 라이트를 꽂아넣었고, 미첼은 그대로 뒤로 쓰러지듯 밀려났다.
-쿵!
그리고 결국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에 그대로 달려들어 그의 얼굴에 펀치를 쉬지 않고 꽂아넣었고.
-퍽! 퍽! 퍽!
“스탑! 스탑!”
심판의 스탑 사인이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아!!!!!”
객석의 환호성이 들리기도 전.
나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포효하듯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휘이이이익!!
그리고 이어지는 객석의 함성.
“후우.”
뭔가 정신이 개운했다.
하나의 알을 깨고 나온 듯한 느낌.
분명 이제까지 보던 케이지와 체육관인데 뭔가 오랜 잠을 자고 깬 것처럼 새로워 보였다.
-강해서. 승리. 3라운드 1분 02초.
드디어 브로일러에 이어서 WFC에서도. 미들급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2.
“... 어때?”
켄달은 눈 앞의 남자를 만나기 위해 지인들을 총 동원해야했다.
“으음...”
-미스터 강! 3라운드 1분 2초만에 미첼 코너를 잡아내고 WFC 미들급 챔피언벨트를 획득합니다!
실시간 중계로 강해서의 시합을 지켜보고 있던 전직 WFC 라이트헤비급 선수. 현 WBC 프로 복서로 전향한 블레이크는 깊은 고민을 내포한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내가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주지.”
“텔론 회장을 모르나? 그가 허락할 리 없어.”
“그걸 해결하는 게 내 일이지. 자네는 시합에 대한 의지만 있으면 돼.”
“흠.”
사실 블레이크는 이제껏 SNS를 통한 강해서의 도발을 계속해서 피해왔었다.
종합격투기계를 떠나 복싱계로 넘어온 뒤 아직 자리를 잡지도 않았는데 괜히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카이서스의 프로모터로 유명한 켄달이 직접 찾아와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준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좋아. 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 WFC 미들급 챔피언 벨트를 들어올린 강해서의 시합을 보고나니 충분히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3라운드에서는 꽤나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앞선 1, 2라운드에서는 정말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줬으니까.
‘3라운드도 거의 운빨이지. 타이밍 좋게 니킥이 잘 꽂혀서 그걸로 시합을 끝낸거나 마찬가지니.’
주먹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복싱에서는 고려할 필요도 없는게 킥 기술들이었다.
“하하하하. 좋아. 잘 생각했어. 미스터 강과 텔론은 내가 어떻게든 설득할테니. 자네는 시합 준비만 하고 있으라고.”
켄달은 진심으로 기쁜 듯 박수 치며 웃었다.
“기대하라고. 정말 멋진 무대를 선물해줄테니까.”
블레이크는 기대감 넘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은 블레이크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라스베이거스 모처에 웅크리고 있는 위대한 챔피언.
켄달은 그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