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_왜 이래? >
1.
“아침 몸무게는?”
“83.8 나왔어요. 전체 탈의하고.”
안형석 코치는 박필승을 통해 오늘 계체를 앞두고 있는 강해서의 현 상태를 체크했다.
“해서. 체급 올려야 돼요. 저러다 수명 갈립니다.”
“...”
“요즘 세상에 누가 10키로 넘게 감량을 해요. 미들급은 해서한테 베스트 퍼포먼스 체급도 아니고.”
-퍼억
“나도 알아 인마.”
“아! 왜 또 때리고 그래요!”
뒤통수를 부여잡고 자신에게 항의하는 필승을 가볍게 무시한 안형석은 저 멀리 의자에 초점 없이 앉아있는 강해서를 바라봤다.
“쯧. 닥터 체크는 해봤지?”
“... 당장 실려 가도 이상할 거 하나 없답니다. 계체하다가 쓰러지면 바로 수액 투여 가능하도록 대기중이에요.”
“그래.”
시합도 중요하고 계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선수가 가장 중요했다.
계체를 위해 체중계 위에 올라가있더라도 통과 전에 쓰러진다면 수액을 맞아야 했다.
“해서 저놈은 곧 죽어도 싫다고 하겠지만. 어쩌겠어요. 의사 소견이라면 따라야지.”
WFC가 브로일러와 차별화되는 점이 있었다.
바로 도핑이나 여타 의학적인 방법에 관한 제재였다.
USADA의 도핑 테스트도 훨씬 빡빡하게 계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계체 이후 IV 정맥 주사가 금지 된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예전에는 계체 날까지 미친 듯한 수분 커팅으로 체중을 쫙 줄인 뒤 링거를 맞아 체력과 체중을 회복하는 편법이 성행했었다. 그 외에도 혈액 도핑이라고 해서 본인 스스로의 혈액을 몇 팩 뽑아뒀다가 계체 후 수혈 받는 편법도 있었다.
체중 감량에도 도움이 되고, 일시적으로 체내 혈액이 많아지며 헤모글로빈의 수치를 높이고 체력과 회복력까지 늘릴 수 있는 방법이었으나 지금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후우. 최대한 흥분하는 일 없도록 조심하고. 미리 계체장으로 넘어가서 대기하도록 하자.”
“넵. 준비시키겠습니다.”
감량으로 수분을 날린다는 건 심장에도 막대한 무리를 주는 행위였다.
글리코겐 밴딩만으로는 계체를 맞추기 어려워 평소보다 수분 커팅의 정도가 심했던 강해서였기에 혈행에 무리를 주는 자극이나 흥분 등은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휴우...”
2월 말의 라스베이거스.
꽤나 따뜻해진 햇살을 받으며 바보처럼 멍하니 앉아있는 강해서를 보는 안형석의 시름은 깊기만 했다.
*
“컨디션은 어때?”
“언제나와 같아. 최고지.”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아야한다고.”
“당연하지.”
미첼은 계체장에 들어선 뒤 자신의 전담 코치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시합 전날의 루틴들을 하나씩 수행했다.
계체장은 꼭 먼저 와서 둘러볼 것. 계체가 끝나면 상대 선수와 악수나 포옹을 하는 것. 특히 자신과 같은 날 시합하는 선수들의 계체를 모두 지켜보는 건 그의 오랜 루틴 중 하나였다.
“저기. 미스터 강도 왔네.”
“오! 어디?”
미첼은 자신의 상대선수이자 타이틀전의 도전자인 강해서가 계체장에 들어섰다는 말에 바로 고개를 돌려 그를 찾기 시작했다.
“어...”
하지만 강해서를 찾아낸 미첼은 반가움도 파이팅도 아닌 애매한 반응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 감량에 제대로 실패한 것 같군.”
“그러게. 계체는... 통과 할까?”
미첼과 그의 매니저는 꽤나 낭패스러운 몰골로 계체장에 들어선 도전자를 보며 우려 섞인 말을 내뱉었다.
“이거. 최강의 도전자를 최강의 상태일 때 마주하고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할 것 같네.”
“그냥 편하게 생각해. 미첼. 감량 또한 선수의 실력이라고.”
“그건 그렇지만...”
다소 아쉬운 눈빛으로 강해서를 바라보는 미첼.
-미첼. 184.4 파운드. 계체 통과.
이어지는 계체에서 미첼은 꽤나 여유 있는 모습으로 계체를 통과했고
-강해서. 185.1파운드. 0.1파운드 초과.
강해서는 0.1파운드. 0.045킬로그램 정도의 차이로 1차 계체를 통과하지 못했다.
“...완전 탈의 하겠습니다.”
결국 작은 수건 하나의 가림막 뒤에서 팬티 한 장까지 모두 탈의를 하고서야 185파운드로 겨우 계체를 통과하는 강해서.
-휘청.
탈의했던 속옷을 다시 입는 과정에서 중심을 잡지 못해 휘청 이기까지 하는 그를 보며 미첼의 눈은 더욱더 깊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자. 두 분. 파이팅 포즈를 한번 취해주시죠.”
진행자의 진행에 맞춰 포토타임을 갖는 미첼과 강해서.
가까이서 보자 수분기 하나도 없는 피부에 어디를 보는지 풀려있는 동공까지. 강해서는 미첼의 일말의 기대감까지 날려버렸다.
원래라면 미첼은 자신의 상대선수인 강해서와 악수나 포옹을 했어야했지만,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마지막 루틴은 생락해버렸다.
그렇게 미첼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계체량 이벤트가 끝나고. 드디어 WFC 274이벤트의 막이 올랐다.
2.
“어떠냐.”
벌써 몇 번째 물어보시는지.
“괜찮아요.”
“힘들면 말해라.”
“진짜. 많이 괜찮아졌어요.”
안 코치님과 필승 형의 상태 체크에 오히려 있던 진도 다 빠져버릴 듯 했다.
“완전히 베스트 컨디션은 아니지만.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어제 계체가 끝나고부터 특제 에너지 드링크들을 알람을 맞춰두고 자다가 일어나서까지 섭취했다.
덕분에 컨디션은 극적일 만큼 많이 회복되었지만, 결코 베스트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내 생에 두 번째 타이틀전. 그리고 WFC 첫 타이틀전이었기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뭐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지.
“한 바퀴 돌고 올 테니까. 무리하지말고 쉬고 있어.”
“넵.”
우리는 이미 WFC Apex 선수 대기실에 들어와있었다.
번잡하고 촉박하게 움직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꾸욱. 꾸욱.
필승 형이 자리를 뜬 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몸을 풀었다.
이번 감량은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두호 형과의 시합까지는 시합 직전. 계체 4일 전부터 수분 커팅에 들어갔다. 수분 커팅 직전까지는 오히려 수분 섭취를 평소보다 늘렸었는데, 그래야 수분 커팅 시에 땀도 잘 나고 수분 배출도 원활해져서 편하기 때문이다. 단점이라면 수분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기가 어렵다는 건데, 그정도로도 충분했었다. 두호 형과의 시합까지는.
하지만 이번 시합에서는 수분을 쥐어짤 수 있을 때까지 짜내야 했기에 수분 컨트롤을 훨씬 일찍 시작했다. 그만큼 운동량도 줄이고 훈련양도 줄어들었다.
-두둑. 우두둑.
그러다보니 시합 당일임에도 몸이 살짝 굳어있거나 아직 휴식중이라는 느낌을 받는 곳이 있었다.
꼼꼼히 몸 구석구석에 기름칠을 하고 시동을 걸듯이 스트레칭을 하고나자 살짝 땀이 배어나왔다.
“후우-”
몸에서 땀이 난게 얼마만인지.
몸은 축축 쳐지는데 뭔가 정신은 개운한 느낌이었다.
“슬슬 준비해라.”
“아. 넵.”
시간은 쏘아진 화살이라는 표현처럼 흘러갔고, 잠시 멍때렸다 싶었더니 어느새 언더카드를 지나 메인카드 시합이 한창이었다.
“이젠 예열 좀 해.”
필승 형의 말 이전에 이미 일어나 몸을 풀고 있었다.
-꾸득. 꾸득
아까 충분한 스트레칭으로 몸 구석구석이 깨어났다면, 이제는 근육 한올 한올까지 힘을 불어넣으며 몸을 움직였다.
-후끈
착각일까.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에 열기가 차오르며 근육에 힘이 깃들었다.
“준비 됐나?”
“넵!”
한참 몸을 데우고 난 뒤. 기다렸다는 듯 WFC 274의 마지막 시합. 미들급 타이틀 매치가 시작될 타이밍이 되었다.
“나가자.”
“옙!”
*
웅장한 퍼스널 입장곡과 화려한 전광판으로 떠오르는 소개.
-와아아아아!!!
언제 들어도 짜릿짜릿한 관객들의 함성이 아직 채 깨어나지 못했던 의식의 일말마저 일깨우는 듯 했다.
“컨디션은?”
“좋습니다.”
마지막 컨디션 체크까지 끝나고 진행 팀의 사인에 맞춰 옥타곤으로 뛰어들었다.
이러든 저러든. 이제 와서 물릴수는 없는 시합이 곧 시작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케이지 안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 뿐.
-툭
심판의 수신호에 맞춰 가벼운 글러브 터치 후 케이지의 양 끝으로 물러서는 미첼과 나.
-툭. 툭.
확실히 어제보다는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베스트는 아니었지만 그리 모자란 컨디션은 아니었다.
타이틀전.
미들급의 종장. 이번 시합만 어떻게든 넘겨보자는 마음이 컸다.
-슥. 슥. 훅! 툭!
여기저기 붉은 핏자국이 눈에 밟히는 새하얀 케이지 바닥을 쓸 듯이 다가와 앞손으로 견제 펀치를 뻗는 미첼.
-훅! 퍽!
멀리서 던진 왼손 펀치를 막아내자 그대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뻗어오는 라이트 바디 펀치. 피하기가 어려워 최대한 흘려 내봤지만 조금의 데미지를 허용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휘익!
바디 펀치 이후 뒤로 조금 더 거리를 벌리며 양팔 간격 가까이 공간을 만들자 왼발을 축으로 뻗어오는 라이트 레그킥.
“흡...”
체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부위가 복부와 다리다.
체력을 갉아먹기 가장 좋은 타격 부위가 복부였고, 체력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기는 곳이 다리였으니까.
-턱!
나는 순간적으로 미첼의 컴비네이션에 집중력을 끌어올렸고, 겨우 그의 킥을 흘려냈다.
‘... 미첼이 이렇게 스피드가 빨랐나?’
꽤나 집중력을 끌어올렸다고 생각했는데도 까딱하면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킥이었다.
다행히 겨우 흘려내긴 했지만 미첼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에 1라운드는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치더라도 미첼을 탐색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흐읍!”
-훙! 후웅! 탑!
킥 공격을 받아내고 잠시 대치 상태를 가졌더니 다시 먼저 달려드는 미첼.
또 다시 바디 펀치를 들어올 것 같은 자세에 복부를 방어하려 하니 미첼은 내 왼 다리를 잡고 싱글레그 테이크다운을 시도하려 했다.
“흐압!”
“흡!”
넘기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
잠시간의 힘 싸움이 있었지만, 아직 1라운드라 파워게임에서는 내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컨디션이야 어찌됐든 계체 이후 리게인으로 90키로그램을 훌쩍 넘긴 내 몸은 미첼의 몸을 위에서 짓누르기 충분했으니까.
“칫.”
짧은 침음 성을 뒤로하고 뒤로 빠져나가는 미첼.
서로 맞붙은 틈에 어떻게든 유리한 포지션으로 몰고 가기 위해 나름대로 잡기를 시도했지만 미첼은 가볍게 뿌리치고는 거리를 벌렸다.
“후우. 후우.”
아까 전부터 뭔가 이상했다.
머릿속으로 안개가 낀 느낌이랄까.
제대로 된 상황 파악과 전략 설정을 하기가 어려웠다.
보통 같았으면 절대 당하지 않았을 페이크에도 넘어갔고, 그에 대한 대처 능력도 형편없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감량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머리가 안 굴러가는 것 같네.’
-팡! 팡!
정신을 차리기 위해 글러브를 낀 주먹으로 스스로 얼굴을 두드려 봤지만 뭔가 머리가 뻑뻑한 그 느낌은 가시지가 않았다.
“합!”
내가 머리를 두드리자 그걸 들어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미첼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흡...”
1라운드부터 꽤나 무리하는 느낌이지만,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미첼의 움직임에 대응하려 했는데.
-퍽!
순간 시야가 꺼졌다 켜진 듯 픽 하고 나갔다 들어왔다.
‘... 뭐지? 방금?’
분명 집중력을 끌어올렸는데. 미첼의 펀치를 제대로 보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후웅! 퍽! 휘잉! 쩌억!
이어서 다시 한 번 불빛이 번쩍이는 시야와 감각이 사라진 듯 무거워지는 왼쪽 허벅지.
“큭...”
뒤늦게야 레프트 펀치와 라이트 레그 킥을 맞았다는 걸 인지했다.
‘...왜?’
분명 지금도 더 이상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 미첼을 노려보고 있는데
-후웅!
그의 움직임이 전혀 느리게 보이지가 않았다.
-퍼억!
이번에는 다행히 가드 위를 두드린 미첼의 펀치.
하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좆 됐네...’
집중이 되지 않는 건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상대의 움직임을 꿰뚫어보듯 하던 인지력이 순간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제껏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싸워 왔던 거야?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펀치들을 피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