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_최 악 >
1.
“... 그가 라스베이거스에서 훈련캠프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어.”
사막 한가운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관광도시 라스베이거스.
이곳의 12월은 일교차가 10도 이상 날 정도로 컸기에 훈련 캠프를 차리기에는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다만 WFC Apex가 라스베이거스에 있어 많은 종합격투기 선수들이 라스베이거스에 자리 잡고 있을 뿐.
“그래? 시합이 잡혔나보군.”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카이서스의 체육관.
그곳에서 카이서스는 자신의 프로모터에게 꽤나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 누구보다 열심이니까.”
프로모터의 말에는 뼈가 있었지만 카이서스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카이서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할건가?”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라. 내가 지금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군. 맞나?”
“이 체육관의 모든 선수들이. 미국, 아니 전 세계의 모든 복싱 선수들과 팬의 이목을 받고 있는 선수가 바로 자네야.”
-꿈틀
“그래서?”
카이서스는 의자에 기대있던 몸을 바로세우며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서스. 네 방어전도 이제 두 달이 채 남지 않았...”
“이봐.”
카이서스는 프로모터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불쾌하다기보다는 권태로움에 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왜 굳이 쓸데없이 감정소모를 해. 그냥 편하게 하라고. 두 달이 남았건 두시간이 남았건. 내가 지는 일은 없을테니까 말이야.”
“...”
“내가 어디 조금이라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가? 타이틀전에 올라오는 선수들은 나와의 시합을 영광이라 생각하고 링에 서지. 방어전이라. 내가 도전자를 받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
카이서스의 프로모터는 다시 스마트 폰을 집어드는 그를 보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알겠어. 나는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겠어.”
그리고는 소파에 파묻히듯 반쯤 누워있는 카이서스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달칵.
나서면서 사무실의 문을 잠그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후우.”
언제부터 저렇게 된 것일까. 카이서스의 프로모터 켄달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어? 켄달! 카이서스는 오늘도 개인 훈련인가?”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그에게 카이서스의 스케줄부터 물어보는 선수들.
“아아. 그렇지. 이제 방어전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카이서스도 집중해야 할테니까 말이야. 사무실 근처에서는 시끄러운 훈련을 좀 자제해달라고.”
“위대한 챔피언의 훈련을 방해할 수는 없지. 그나저나. 새로운 소식을 가져왔는데 전해주지 못하겠군.”
“새로운 소식?”
켄달은 그게 뭐냐는 듯 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지난번에 말 했던 그 선수 있잖아. 동양인 파이터.”
“미스터 강?”
“그래. 그 친구. 어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모양이더라고. 볼튼이 오랜만에 얼굴 본다고 지금 그 친구네 체육관으로 가는 걸 봤어.”
“그래? 생각보다 빨리 왔네.”
“볼튼이 신나서 가더라고. 이번에는 스파링에서 꼭 이기고 돌아오겠다고 말이야. 푸하하하.”
“아아. 작년 볼튼의 시합 때 스파링 파트너를 맡았다고 했던가?”
볼튼은 켄달의 담당 선수가 아니었기에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카이서스의 열렬한 추종자를 자처하는 볼튼이다 보니 대충의 상황은 알고 있었다.
“그랬다더군. 이번에는 설욕할 수 있을는지 몰라. 저 카이서스와 비등한 스파링을 펼쳤다는 괴물 파이터에게 말이야.”
“... 그게 무슨 말이지?”
“응? 켄달은 몰라? 미스터 강이라는 친구가 카이서스와 스파링을 했었다던데?”
“... 자세히 말해봐.”
켄달은 카이서스의 프로모터였지 트레이너가 아니었다. 소속 체육관과 프로모팅은 전혀 별개였기에 카이서스의 개인적인 일상이나 소소한 일들까지 파악할 수 없었다.
“...으음. 나도 들은 이야기라서 말이지. 볼튼의 스파링을 도와주는 대가로 카이서스와 짧은 스파링을 가졌다고 들었어. 미스터 강이라는 친구가.”
“결과는?”
“짧은 공방이었지만 우열을 가릴 수 없었음. 이라고 볼튼이 말 하더군. 뭐. 물론 카이서스가 많이 봐줬겠지. 상대는 MMA 선수니까 말이야.”
“...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고?”
“그래. 아! 그러고 보니 한창 볼튼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
“그런 이야기라니?”
“카이서스가 미스터 강이라는 친구에게 복싱계로 넘어오라고. 카이서스와 그 친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나 뭐라나. 뭐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고마워.”
켄달은 많은 정보를 전달해준 선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프로모터는 트레이너나 체육관과는 별개로 복싱 선수간의 시합을 주선하고 기획하는 사람이었다.
카이서스의 기량이나 경기력을 챙기기보다는 더 좋은 시합. 더 좋은 무대를 만드는 게 켄달의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 카이서스는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복싱 선수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는 고독했다. 드넓은 복싱 계에서도 카이서스는 독보적인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은퇴를 입에 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미국 복싱협회와 정치권 인사들까지 찾아와 은퇴를 막아섰다.
위대한 챔프에 대한 경외와 팬 심이었겠지만, 그 이후로 카이서스에게서는 하나의 나사가 빠져버린 듯 했다. 바로 열정이라는 나사가.
최고의 시합. 최고의 무대. 선수가 가장 빛나는 순간을 선사하는 게 목적인 켄달 또한 카이서스의 프로모터이자 팬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우상이 조금씩 망가지는 걸 지켜보는 건 고욕이었다.
“여보세요? 어. 그래 나야. 켄달. 지난번에 자네가 말 했던 친구 있잖아? 그 WFC에서 복싱계로 넘어왔다는 친구. 그래. 그 친구가 강해서라는 WFC 파이터와 지속적인 트러블이 있었다고 했지?”
체육관을 나서며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는 켄달.
그는 어쩌면 자신의 우상인 카이서스에게 열정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로 자신의 모든 수완을 동원하여 하나의 시합을 매칭시켜볼까 싶었다.
“그래. 약속 잡아줘. 내가 그 친구를 한번 봐야겠어. 그래. 고마워.”
최근들어 스파링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시합 대비 훈련도 하지 않는 카이서스가 인정했으며, 유일하게 흥미를 보이고 있는 선수를 복싱계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
“우웩. 우웨에에엑...”
-팡. 팡. 팡.
“괜찮냐?”
“우엑... 아뇨. 안 괜찮아요.”
진짜 죽을 것 같았다.
“... 이번 시합. 괜찮겠냐?”
“...괜찮아야죠.”
라스베이거스로 현지 적응 및 시차적응차 캠프를 차린 지도 벌써 한달.
어느새 연말을 훌쩍 넘겨 새해가 밝았고 미켈과의 타이틀전이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 되었다.
“근섬유의 굵기가 보통사람보다 얇다. 그게 이런 결과로도 돌아올 줄이야.”
“...하하. 힘은 좋잖아요.”
“그러면 뭐해. 힘을 쓸 체력이 없는데.”
지난번 두호 형과의 시합에서도 최대의 난관은 감량이었다.
그리고 이번 타이틀전 준비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 또한 감량이었다.
“일단. 쉬어라.”
“사우나 다녀올게요.”
“너 그러다 죽어 인마.”
“하하하...”
나는 그냥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83.91Kg
84키로 조금 안 되는 체중의 커트라인 안에 내 몸뚱아리를 집어넣는 일은 지금에 와서는 정말 지옥과도 같은 고행의 길이었다.
아까 필승 형이 말 한 것처럼 나는 근섬유가 보통 사람들의 평균치에 비해 상당히 많이 얇았다. 또한 그만큼 근섬유의 개수도 많았고.
이건 지난번 코네티컷에서 훈련할 때 맘모스 코치와 대학연구실에서 검사하며 알게 된 사항이었다.
중요한건... 그 때문에 한번 성장하기 시작한 근육이 쉽게 빠지지 않고, 웨이트를 하지 않아도 근육의 성장이 도드라졌다는 게 문제였다.
“후우...”
땀을 빼기 위해 찾은 사우나.
상의를 탈의하고 거울을 바라보니 쩍쩍 갈라진 근육질의 몸이 보였다.
확실히 키를 보나 근육을 보나 미들급에 어울리는 몸은 아니었다.
근육을 빼려고 그렇게 노력했지만 몸이 점차 다듬어질수록. 시합을 대비한 최소한의 훈련을 이행하면 할수록. 몸은 점점 미들급의 규격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쩝. 진짜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쉬어야하나.”
유산소도 타격훈련도.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식단조절만 하면서 누워만 있어야하나 싶었다.
정말.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2.
브로일러와 WFC까지 포함해 프로 파이터로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오픈 워크아웃에 불참했다.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시합은 고사하고 내일 있을 계체 때까지 몸이 버틸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여기서 더 빼면 탈수로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타격을 완성시키기 위해 찾은 라스베이거스 캠프.
하지만 정작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감량이 전부였다.
솔직히 조금 욕심이었나 싶었다. 11월 말에 WFC 271을 치러내고 2월 달에 열리는 WFC 274에서 타이틀전을 갖겠다고 했으니.
11월 달에 감량했던 몸으로 2월까지 버티는 게 아니라, 시합 이후 평체에 가깝게 회복된 몸을 다시 짧은 기간에 미들급의 커트라인으로 깎아내야 했는데, 이걸 내가 너무 만만하게 봤나보다.
재작년. 데뷔 초창기 때만 하더라도 2-3달의 경기 텀으로 시합을 치러낼 수 있었기에 이번에도 가능할 줄 알았는데, 그때와 지금의 내 몸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달랐다. 데뷔 초에는 뺄 지방들이 많았고 근육은 적었다. 수분 커팅보다는 지방부터 빼야했기에 힘들긴 했지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반대로 지금은 체지방은 거의 없고 근육만으로 평체가 90키로 중후반에 달했다.
수분 커팅만으로 미들급 한계 체중을 맞추기에 무리가 있을 정도.
“일단. 조금만 더 해보죠...”
온 몸에 힘이 없었다.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입술은 갈라져 조금만 크게 입을 벌려도 피가 날 정도였다.
‘‘힘내라’에서 마모루나 일랑은 감량하면 할수록 정신이 날카로워지고 집중력이 올라가던데. 다 개뻥이었어...’
지금 내 상태는 조금만 정신 줄을 놓으면 멍해질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져 있었다.
수면부족과는 달리 짜증이 나거나 예민하거나 이런 느낌이 아니라, 그저 멍하고 의욕이 없었다.
“...필승아. 지금 해서 체중은?”
“84.2KG나왔습니다. 팬티까지 다 탈의 하구요.”
“하...”
바로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필승 형과 안 코치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느낌이었다.
“읏차-”
300그람.
삼겹살 3인분도 안 되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휘청
“야! 왜 일어나! 앉아 있어!”
“앉아만 있으면 체중이 줄어드나요. 시합 이틀 남겨두고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면 시합 때려쳐야지.”
나는 필승 형의 부축을 걷어내고는 느린 걸음으로 한바퀴. 두 바퀴. 체육관을 돌았다.
“... 하.”
필승 형의 머리 긁는 소리가 귀에 박히듯 들려왔다.
WFC 274.
WFC Apex에서 치러지는 신년 최대의 이벤트.
메인 매치로 WFC 미들급 타이틀전이 예정되어 있는 그 날까지 이제 겨우 이틀 남았다.
그리고 그 계체량까지 겨우 하루.
부디. 하루만 더 버틸 수 있기를.
작가의말
겨우 연이 닿은 선수들에게 인터뷰를 할 때마다 감량고에 대해서는 ‘지옥‘ ‘죽을 것 같은 고통‘ ‘최악‘ 등등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으로 힘듬을 말씀하시네요.
시합에서 지거나 얻어맞는것 보다도 감량이 더 무섭다고 하신 분도 계시니...
해서야. 이기든 지든 이번 시합 끝나면 체급 올리자... 내가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