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_작은 거인 >
1.
-복싱과 종합격투기의 한판 승부? 세계는 지금!
-복싱은 우월. MMA는 열등? 비슷한 듯 다른 두 스포츠에 대해 알아보자!
-전 WBA 슈퍼 미들급 챔피언 트로이. ‘MMA는 스포츠가 아니다. 복싱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 발언.
-전설적인 헤비급 챔피언 복서 마이크. ‘복싱과 MMA는 전혀 별개의 스포츠. 농구와 배구를 비교하는 꼴이다. 의미 없는 싸움이다.’
블레이크에서 시작된 파문은 복싱계와 종합격투기계. 양쪽 모두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wonder_blake
-MMA에 복싱 베이스 선수가 적다고? 그게 복싱이 열등한 증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네 똥 덩어리 같은 뇌가 안쓰럽다.
@wonder_blake
-잘 들어. MMA에 복싱 베이스 선수가 적은 이유는 복서가 MMA 판에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야. 훨씬 더 크고 돈 많이 주는 복싱계가 있는데 왜 굳이?
@wonder_blake
-물론 내 경우는 예외지. 난 그냥 빨리 데뷔를 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 기회가 MMA였을 뿐.
지금도 지속적으로 똥을 싸지르고 있는 블레이크.
복싱계가 종합격투기에 비해 시장도 크고 돈도 많은 건 맞는 말이었다.
복싱은 여러 개의 거대한 단체가 있었으며, 그만큼 선수 풀도 두꺼웠고 시장의 규모도 컸으니까.
MMA는 기껏해야 WFC를 비롯한 몇몇 개의 단체가 있을 뿐이지만, 전체 시장의 80프로 이상을 WFC가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다. 협회도 아닌 단체 하나가 시장 하나를 독점하고 있는 기이한 형태.
그렇기 때문에 발전이나 진보보다는 고이고 썩어간다는 평가가 끊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이놈 말이 다 맞다는 건 아니지만.”
확실한 건 이놈이 하는 말이 맞는 말이라는 거였다. 처맞는 말.
“그나저나...”
문제는 내가 SNS를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기껏 있는 SNS도 웹 소설 작가로 활동할 때 만들어둔 계정이었는데 그 안에는 온갖 감성적인 글들이... 그건 바깥으로 유출되면 안 되는 계정이었다.
한마디로 계정을 새로 파야 한다는 것.
그것도 격투기 선수 강해서의 이름으로 공식 계정을 만들어야 했다.
“복잡하네.”
뭔 공식 인증을 받으려면 신분증 사본까지 보내야 한단다.
연예인들은 다 이런 번거로운 인증을 거쳐서 공식 딱지를 받은 건가?
-아름 : ㅋㅋㅋㅋㅋ 우리야 회사에서 알아서 다 받아주지. 절차를 대신해주니까
-해서 : ...부럽네 그냥 계정만 만들어서 블레이크 계정에다 댓글 달면 안 되려나?
-아름 : 음... 그러면 그냥 묻히지 않을까? 생각보다 공인 마크가 눈에 띄거든
-해서 : 글쿤... 그러면 이제 그냥 기다리면 돼?
-아름 : 응!
-아름 : 게시물 몇 개는 올려둬야 할 거야. 보통 어느 정도 인지도 있는 브랜드나 개인한테 나오는 건데 해서 너 정도면 문제없이 나올 거야.
-해서 : ㅇㅋㅇㅋ 쌩유!
일단 블레이크의 SNS에 대응하는 건 내 계정부터 만들고 천천히 진행하기로 했다.
애초에 블레이크도 복싱계로 넘어가면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뭐하냐? 안 해?”
“넵! 합니다!”
그리고 나는 일단은 본업에 충실해야지.
-흡! 흡!
오늘은 코어 운동과 유산소 훈련으로 하루종일 조지는 날이었다.
서킷 트레이닝으로 시작해 다양한 그래플링 드릴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어디 한번. 조져보자! 내가 조져지나 훈련이 조져지나!
“하나 더!”
“으악!!”
“허리 움직이고! 코어에 힘줘! 더 빠르게! 단순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냐! 정확한 동작으로!”
“악!!!”
하지만 조져지는 건 언제나 나였다.
*
“으아...”
정말 걸을 힘도 없다는 게 이런 거겠지.
최근 들어 체력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만큼 훈련 강도도 올라갔기에 운동이 끝나면 언제나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짜샤. 기운 빠지게 왜 자꾸 신음이야?”
“... 힘들어서 그럽니다. 힘들어서.”
“힘들어야 선수지. 안 힘들면 그게 선수냐?”
하. 맘 같아선 그냥 무시하고 혼자 가고 싶지만 지금 가는 곳은 필승 형이랑 같이 가야 하는 곳이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긴장되냐?”
“긴장은 무슨.”
필승 형의 말에 대꾸할 기운도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더니 이번에는 긴장되냐며 말을 걸어왔다. 제발 조용히 좀 갔으면 좋겠구만.
“긴장했구만. 새끼. 걱정 마. 이제 꽤 사람 같다더라.”
“아우. 말을 말아야지.”
“낄낄. 야. 어디가! 같이 가 인마!”
오늘은 슈퍼익스트림 짐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필승 형의 체육관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 형은 유독 두호 형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장난기가 더 심해지는 듯했다.
-슈퍼 익스트림 GYM
언제 봐도 깔끔한 외관의 체육관이었다.
작년, 페드로 코치에게 주짓수 훈련을 받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이며 필승 형과 처음으로 만나 합동훈련을 했던 체육관이기도 했다.
“크으. 역시 홈 스윗 홈. 내 집이 최고야.”
“여기가 집이에요? 체육관이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짜샤.”
“그렇게 좋으면 다시 여기로 눌러앉든가.”
“어쭈? 뭔가 까칠하다? 고슴도치냐?”
누가 이렇게 약을 바짝 올렸는데.
이 형이 현역일 때 스파링이라도 해서 한 대라도 때려뒀어야 하는데. 정말 내가 살면서 후회를 잘 하지 않는 스타일인데 이거 하나는 후회됐다.
“어허. 눈빛이 불경한데?”
“하하. 그럴 리가요. 그냥 여기 오니까 오랜만에 형이랑 합동훈련 할 때가 생각나서. 그때 주짓수 대련 많이 했잖아요.”
“그랬지. 벌써 일 년도 넘었구나.”
“그러게요. 그때처럼 오랜만에 스파링이라도 한번. 가볍게. 어때요?”
“짜식. 감성적인 구석이 있단 말이야. 좋지! 오랜만에 이 엉아가 한번 받아주지 까짓거!”
호기롭게 외치며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는 필승 형.
그거 뱉은 말입니다? 물리면 알아서 해요?
그렇게 필승 형과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자 낯선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사람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반갑습니다!”
우리를 알아본 사람들이 반가운 듯 손을 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우렁차게 인사를 박았다.
“오! 해서 씨! 필승아! 어서 와. 안 그래도 온다는 연락 받았다.”
“에이. 해서 씨. 무슨 그런 깍듯한 인사야. 우리 사이에.”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 건 기존 슈퍼익스트림 짐 사람들이었다.
합동훈련 하면서 안면을 익혔기에 꽤나 익숙한 사람들.
“해서 이 자식. 왜 이렇게 늦었어.”
그리고 지난 시합은 기억에도 없다는 듯 반갑게 맞아주는 두호 형.
“하하. 뭐. 이것저것 처리할 것들이 많았어요.”
“짜식. 이제 타이틀 샷까지 얻었으니 더 바쁘겠다? 광고나 예능 많이 들어왔겠어?”
“하하. 뭐. 일단 당장 그쪽으로 활동할 생각은 없어요.”
당연히 스포츠 브랜드부터 요식업계까지. MMA 입문 후 단 1패도 하지 않은 내게 들어오는 러브콜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중요한 건 내가 돈이 그렇게 급하지 않다는 것.
레이첼과 멜린 가의 메세나는 당초 약속했던 것 이상이었고, 내가 제이크 전에 이어 이번 두호 형과의 시합에서도 승리한 이후 정말 전폭적이라고 할 만큼 후원의 범위를 늘려주었다.
그러다보니 파이트머니와 승리 수당 등 경기의 수익이 오롯이 순수익이 되어 체육관도 나도 꽤나 여유가 있었다.
“이거 참.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인마.”
“아...”
두호 형이 팀 피스트를 잠시라고는 하지만 떠나있는 이유는 ‘조금 더 나은 환경’ 때문이었다.
그건 더 나은 훈련 시스템일 수도 있었고, 조금 더 풍족하고 풍요로운 물적 환경일 수도 있었다.
요즘은 팀 피스트에 입관 문의도 많았고 체육관 재정 상태도 꽤나 좋아져서 기물들이나 소모품들이 새것으로 싹 바뀌었다지만, 확실히 두호 형이 팀 피스트에서 활동하던 때는 체육관에 여유라는 게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래? 일 년도 안 되는 동안 많이 바뀌었나 보네. 나중에 체육관 가면 어색할지도 모르겠어.”
최근 알게 모르게 많이 바뀐 팀 피스트의 모습을 설명하니 그립다는 감정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희미한 웃음과 함께 대답하는 두호 형.
“하하. 근데. 안 코치님 사무실은 하나도 안 변했어요.”
“그래? 뭐. 그럴 형이지.”
체육관 살림이 풍족해지면서 글러브부터 타월. 줄넘기. 훈련기구들의 가죽까지 싹 바뀌었지만 정말로 안 코치님의 사무실은 바뀐 게 없었다.
가운데 자리만 푹 꺼진 3인용 소파와 짝이 맞지 않는 유리가 올려진 탁자. 그리고 믹스커피와 티백 녹차까지. 적어도 내가 찾아낸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나저나. 넌 또 요즘 왜 그렇게 시끄러워?”
“네?”
“블레이큰가 브레이큰가 하는 친구랑 말이야.”
“아...”
얼마 전 신청했던 SNS 인증이 완료되며 나는 본격적으로 블레이크의 계정에 그를 저격하는 댓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내 계정에도 그를 저격하는듯한 게시물들을 올렸고.
처음에는 별 이슈가 되지 않나 했더니 댓글을 단 다음 날 내 계정에 들어온 팔로우 신청만 만 단위인 걸 보고 깜짝 놀랐었다.
전 세계 각국에서 들어온 팔로우 신청. 그리고 내가 단 댓글에 대한 블레이크의 반응까지. 꽤나 재미있는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너무 가십에 연연하지 마. 돈이 궁하지도 않다면서 왜 복싱 쪽을 건드려?”
“하하. 블레이크랑은 뭐. 지난 시합 때부터 트러블이 있었으니까요.”
두호 형은 내가 일부러 가십에 편승하려 블레이크를 저격했다고 생각하나 보다.
하긴. 블레이크는 WFC 271 시합 다음 날 두호 형의 사진을 올린 것 이후로는 나와 두호 형을 언급한 적도 없었다. 그저 WFC와 MMA를 비판하며 복싱계에 꼬리를 흔들었을 뿐.
만약 내가 블레이크를 저격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블레이크와 인터넷상으로 설전을 벌일 리도 없었을 거다. 그는 철저히 나를 잊었을 테니까.
“타이틀전에 집중해. 네가 가져간 그 기회. 내가 간절히 원했던 기회라는 걸 잊지 마라.”
“... 당연하죠.”
최근 블레이크와의 설전에 신경을 쓰고 있다지만 그건 정말 사소한 문제였다.
미첼 코너와의 타이틀전. 내 신경의 대부분은 당연하게도 그곳으로 향해 있었다.
“제 이야기는 그쯤하고. 형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나?”
지난 시합에서 내게 패배하면서 당장의 2개 체급 제패에 대한 발걸음에는 제동이 걸린 상태였다.
내가 걱정하는 건... 혹시나 두호 형이 은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거였다.
지난 시합에서 보여줬던 형의 투지와 각오는 보통의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왜. 내가 은퇴라도 할 것 같냐?”
“네, 네?”
“말 더듬기는. 내가 너한테 한번 졌다고 은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길래 물어본 거야.”
“하하하. 설마요.”
살짝 뜨끔하긴 했지만, 모르쇠로 대꾸했다.
“내 프로 전적에 패배가 몇 번이나 있을 것 같냐. 그저 이미 많이 쌓인 숫자에 하나가 더 쌓일 뿐이야.”
“...”
“비록 미들급에서 한번 넘어지긴 했지만. 나. 아직 WFC 웰터급 챔피언이다. 적어도 방어전 한번은 성공하고 은퇴해야지. 쪽팔리게 마지막 커리어가 패배인 채로 은퇴할 수는 없잖아.”
“...그렇죠. 챔피언이 그렇게 쉽게 물러서면 안 되죠.”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나 보다. 두호 형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강한 사람이었는데.
“이야. 해서 너 자기 과잉이 너무 과한 거 아냐? 너한테 한번 졌다고 은퇴라니.”
“아! 아니라니까요!”
“크으. 은퇴 제조기. 뭐 그런 거냐?”
필승 형은 나와 두호 형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나 싶더니 타이밍 잡았다는 듯 또 날 놀려대기 시작했다.
“...형. 글러브 어딨어요?”
“엉?”
“스파링하자면서요. 글러브 갖고 와.”
“...”
이 형. 오늘 좀 맞아야겠다.
2.
-후욱. 후욱.
“어이. 미첼. 그만해. 휴식 시간이야.”
-흐읍! 흐읍!
“이봐! 그만하라고!”
미첼은 코치가 억지로 그를 붙들고 나서야 강제로 휴식 시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슨 훈련을 그렇게 무섭게 해?”
무서운 집중력을 보이며 훈련에 몰두하는 미첼에게 결국 한마디 입을 떼는 코치.
“... 자네도 봤잖아. 내게 도전하는 동양의 용을.”
“...”
미첼은 지난 WFC 271 시합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감정을 감춘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이 자리를 내어준다면 그건 분명 브라이언이 될 거라 생각했어.”
“브라이언이라면 충분히 네게 도전할 만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미첼 네가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고마운 말이야. 하지만 브라이언은 확실히 왕좌가 어울리는 전사였어. 비록 지금은 브로일러로 이적해 만나기는 어렵겠지만.”
“...”
“그런데. 브라이언만큼이나 위협적인 적이 나타났어. 미스터 강. 그는 아마 최강의 도전자가 될 거야.”
무서운 집중력과 투지를 보이던 최두호. 미첼이 보기에도 최두호의 기술은 이미 완성에 가까웠고, 웰터급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릴 정도로 완숙한 그것이었다.
거기에 미들급까지 끌어올린 육체능력과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격투 지능은 미첼에게 오래전 기억 하나를 꺼내게 만들기 충분했다.
과거 미첼과 최두호. 두 사람 모두가 WFC에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시절을.
그 시절에는 정말 간발의 차이로 미첼 자신이 이겼지만, 이번에 최두호가 다시 한번 자신의 눈앞에 선다면 그때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건. 딱 2라운드까지였지.”
WFC 271 메인 매치 2라운드 초반까지. 미첼은 다음 방어전 상대로 최두호가 자신의 앞에 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괴물 같은 힘과 집중력으로 최두호가 준비한 모든 걸 무력화 시키는 강해서를 보며 미첼은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는 걸 느껴야 했다.
“그는 분명 작은 거인이야. 하지만 인간계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있는 이상, 아직 어린 거인에게 질 수는 없지.”
타격과 그라운드. 기술과 피지컬 모두가 뛰어나 올라운드의 완성형이라고 불리는 미첼 코너. 그는 지금 최강의 도전자 강해서와의 일전을 위해 벌써부터 기나긴 훈련에 돌입했던 것이다.
“...좋아. 그런 마인드 라면. 마침 텔론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어.”
“텔론에게서?”
“그래. 네가 작은 거인. 최강의 도전자라 부르는 미스터 강과의 매치 제안이 왔다.”
작은 거인. 강해서가 인간계를 벗어나 거인들의 세상에 발 딛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드디어 열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