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_힘 싸움? >
1.
“응? 무슨 일 있어?”
양손에 요리 장갑을 끼고 된장찌개를 들고 오던 아름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표정에 티가 많이 났나?
“아. 아니야. 우와! 맛있겠다!”
개인적인 불쾌함을 굳이 이 완벽한 주말 아침상까지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먹자!”
집에서 누군가가 해주는 집밥을 먹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난여름 부산에 내려갔을 때 엄마가 해준 밥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응? 해서야. 너 열나? 얼굴이... 어제 추웠나?”
“아. 아니야. 괜찮아. 열 안나.”
흠. 흠. 지난여름을 떠올리니 해운대 밤바다와 어젯밤의 기억까지 자연스럽게 생각이 꼬리를 물어 얼굴에 열이 조금 올랐나 보다.
-후릅.
“와...”
된장찌개는 아까 간 봤을 때보다 훨씬 맛있었다.
“왜? 별로야?”
“아니? 대박. 완전 맛있어.”
된장찌개와 계란말이. 그리고 냉장고에서 꺼낸 나물 반찬 몇 개.
누군가 본다면 소박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한 끼를 준비하기 위해 아름이가 일찍부터 움직였을 걸 생각하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헤헤. 다행이다. 계란말이랑 나물도 먹어봐. 이거 지난번에 예능에서 배운 대로 내가 직접 무친 건데...”
아름이는 본인 밥은 몇 숟갈 뜨지도 않고는 이것저것 내 숟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주기 바빴다.
“아름아, 너도 좀 먹어. 나만 먹는 것 같네.”
“응. 먹고 있어. 많이 먹어. 밥 더 있어.”
“아.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나 한 그릇만 더 주라.”
밥 한 공기만큼 더 뛰어야지 뭐.
아름이가 해주는 밥상을 받는데 그깟 식단조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후아. 완전 배불러. 진짜 잘 먹었어.”
“그래도 이번엔 실패 안 했다. 헤헤.”
“응?”
“왜.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라멘집 가서 완전 실패했었잖아.”
그랬지. 아름이와 처음으로 우연히 만났을 때 라멘집엘 갔었지.
배고파 죽을 것 같았는데도 남기고 나왔던 그 집.
그런데 그 집만 있었던 게 아닌데.
“어... 음... 처음 만났을 때만이 아니지. 일본에서도...”
“아! 미안해...”
“하하하. 아니야. 대신 오늘 밥이 정말 맛있었으니까. 나. 서울에서 이런 집밥 먹은 건 부모님 부산 내려가시고 나서는 처음인 것 같아.”
“진짜?”
진짜다.
보통 시켜 먹거나 밖에서 해결했으니까.
딱히 요리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집에서 밥을 해 먹지는 않았으니까.
전 여자친구인 효인이도 딱히 집에 와서 밥을 해주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고마워. 이제껏 먹은 시합 후 첫 끼니 중 오늘이 최고였어.”
이제껏 시합은 모두 해외에서 치렀으니 매치 이후 첫 끼니는 항상 현지 식당이나 스텝들이 준비해온 한식 완제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정성 들인 집밥으로 첫 끼니를 해결하다니. 그것도 아름이가 직접 차려준 밥상으로.
“해서 넌 말을 참 이쁘게 하는 것 같아.”
“...내가?”
“응.”
식탁 맞은편에서 턱을 괴고 날 올려다보는 아름이.
순간 또 현실감각이 사라지게 만드는 외모였다.
“나 말 예쁘게 안 하는데.”
“적어도 나한텐 이쁘게 해.”
“그런가.”
또 분위기가 묘해지네.
그래도 어제와는 달리 햇살이 쨍쨍한 낮이라 아주 이성적인 상태라 다행이었다.
“그. 어제는...”
아름이도 그 분위기를 느꼈는지 어젯밤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 분위기였다.
“잠깐만 아름아.”
그리고 나는 그런 아름이의 의도를 파악하자마자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어? 응?”
“일단. 미안해.”
“...뭐가?”
다짜고짜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더니 뭐가 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미미하게 굳어버린 아름이의 얼굴.
“거절이나. 그런 걸 하려고 미안하다고 한 거 아니야. 사실 아직도 잘 실감도 안 나고 이게 맞는 건지도 많이 헷갈리긴 한데. 어찌 됐든 계속 너한테만 표현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사과한 거야.”
미안하다는 사과의 의미를 전하고 나서야 풀어지는 아름이의 표정.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 라고 정해진 건 없지만, 어찌 됐든 지금까지 어떤 호감의 표시는 아름이 쪽에서만 해왔던 게 사실이었다.
지난여름 부산에서도, 어젯밤에도.
“난 딱히 가부장적이거나 보수적인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만약에 우리가 좋은 관계로 만나게 된다면 그 과정을 온전히 아름이 네게만 미룰 생각은 없어.”
“...”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도 네가 내게 보여주는 감정이나 표현들이 헷갈리고. 실감이 안 나는 건 사실이야. 그러다보니 나도 당장 이렇다 할 확답을 내릴 수는 없는 상태고.”
“... 이해해.”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줘라. 나도 생각할 시간이라는 게 필요한 놈이라서. 대신 이 생각이 끝나면 내가 먼저 너한테 표현할게.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
햇살 한점. 바람 한 줄기까지 완벽했던 일요일의 아침은 어느 순간 그 끝을 고했다.
아름이와 아이컨택하며 잠시간 이어진 침묵 때문에.
“좋아. 나도 나만 표현하는 건 별로였어. 나 손아름이거든?”
하지만 그 침묵은 길지 않았고, 아름이는 역시나 다시금 편안한 분위기를 불러오는 특유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대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나. 마음에 널 담은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내 마음은 나도 알 수 없는 거니까. 늦지 않았으면 해.”
“와. 그거 되게 무서운 말이다.”
“당연하지. 나한테 이 정도로 표현하게 만들고. 정작 너는 시간 달라고 하면서 이 정도 말도 안 들을 줄 알았니?”
“하하. 알겠어. 오래 걸리게 하지 않을게.”
약간의 진담과 약간의 농담이 섞인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우리는 분위기를 풀어갔다.
“그런데. 우리 만약에 사귀면 공개 연애하는 거야?”
“아. 몰라. 너랑 안 사귈거야.”
“하하하.”
살짝 토라진 아름이의 표정과 함께 완벽한 일요일 아침은 끝이 났고, 나는 집에 돌아와 남은 일요일을 마무리하며 다가올 월요일은 준비했다.
“블레이크...”
선을 지킬 줄 모르는 놈을 응징할 방법을 생각하면서.
*
“이봐. 여긴 아직 한국이라고. 굳이 그렇게 도발적인 발언을 해야겠어?”
블레이크의 매니저는 지난밤 SNS로 똥을 싸지른 자신의 선수에게 오늘만큼은 모진 소리를 조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슨 상관이야. 네 말마따나 여긴 한국이라고.”
하지만 블레이크는 매니저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무시로 일관했다.
“한국은 치안이 좋지. 여긴 미국이 아니야. 길가다 총 맞을 확률이라는 게 없는 동네라고. 내가 도발을 하면 뭐? 와서 날 때릴 거야? 이 나라서 날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긴 해? 그렇다고 내가 범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말야.”
“...”
딱히 블레이크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한 매니저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블레이크는 수치심이라는 걸 가져야 한다. 그런 졸전을 보여주고 럭키펀치로 겨우 이긴 주제에
-블레이크 이번 시합으로 WFC랑 계약 끝났지 않음? 아직 재계약 기사 없는 거 보니 퇴출 각인 듯 LOL
-텔론도 저런 졸전 선수는 데리고 가기 그렇겠지. 복싱 베이스인데 그라운드 트레이닝을 어지간히도 안 해서 매번 그라운드만 가면 개털리니
-어제도 그라운드에서 그로기까지 가지 않음? ㅋㅋㅋ 행운 펀치로 겨우 살아났지 뭐야
자신의 SNS에 달린 수많은 악의적인 글들을 읽으며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블레이크. 블레이크의 SNS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해외의 격투기 팬들도 합세해 하나같이 그를 욕하는 댓글들만 달고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여튼간에 게이 새끼들처럼 사내새끼들이 안고 뒹구는 걸 왜들 그리 좋아하는지.”
블레이크의 베이스는 복싱이었다.
미국에서 복싱은 국민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운동이었고, 블레이크 또한 유년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복싱 체육관을 다녀왔다.
남들보다 체격이 좋고 힘이 좋았던 그는 복싱에도 재능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학창 시절 길거리 싸움과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더 즐겼었다.
그러다가 접하게 된 것이 바로 MMA. 복싱처럼 제약이 많지 않고 자유도가 높은 종합격투기였다.
제약이 많기에 테크닉적인 부분의 비중이 높았던 복싱에 비해 MMA는 선수 본연의 피지컬이 중요했고, 이는 블레이크에게 큰 매력으로 비쳐졌다.
미국의 중소 격투기 단체에서 MMA 선수로 데뷔했던 블레이크는 특유의 파워와 피지컬로 단기간에 챔피언 타이틀을 따냈고, MMA 선수의 종점이라 할 수 있는 WFC에 진출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블레이크의 행보는 WFC에 진출하며 급제동이 걸렸다.
“남자라면 주먹이지. 계집애처럼 들러붙어서 살이나 비벼대고 말이야.”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파이터들이 모인 WFC.
블레이크의 피지컬도 우수했지만, 그런 우수한 선수들만 모인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벽을 맛봤다. 특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그라운드에서.
“그나저나. 그건 어떻게 됐어?”
“그거라니?”
“협회 말이야.”
“아.”
블레이크는 WFC의 시합 제안에 여러 번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준비했던 일이 있었고, 이번 시합을 끝으로 준비했던 일을 시행하려 하고 있었다.
“미국 들어가는 대로 진행 될 거야. 언론에도 쫙 퍼질 거고.”
WFC 라이트헤비급 파이터 블레이크.
그는 지금 종합격투기계를 떠나 복싱계로 종목 전향을 꾀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돌아가더라도 이렇게 해야 했어. 어차피 WFC에 있는 새끼들도 능력만 되면 다들 최종 목표지는 복싱이지.”
능력이 안 되니 WFC에 남아있는 거지. 라며 말을 이어붙인 블레이크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사내새끼들끼리 살 부비며 룰도 없이 되는대로 때려대기만 하는 게 무슨 스포츠야? 그냥 막싸움이지. 시장의 크기나 파이트 머니만 해도 비교가 안 되는 걸 괜히 고민했어.”
복싱이 베이스였고, 종합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면서도 꾸준히 복싱이라는 끈을 놓치지 않고 있던 그는, 드디어 WFC와의 계약을 끝내고 복싱계의 문을 두드릴 수 있게 되었다.
2.
-WFC 라이트헤비급 파이터 블레이크. 프로복싱전향?
-WBC 회장. 블레이크의 WFC 성적 인정할 것.
-WBC 타 스포츠에서 프로복싱으로 전향한 선수들에게 차별 없이 기회를 줄 것.
-블레이크. MMA는 스포츠가 아니다? 역사도 룰도 없이 스포츠 의식 결여된 막싸움일 뿐.
-WFC 텔론 회장. 블레이크는 그저 겁쟁이일 뿐. 힘 대 힘의 부딪힘을 피해 복싱 글러브 뒤로 숨은 패배자의 이야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WFC 미들급 챔피언 미첼 코너. 블레이크의 선 넘은 비하에 한마디 하다?
-복싱계 ‘종합격투기 선수의 프로복싱 전향을 적극 환영한다. 하지만 그리 녹록지 않을 것. 복싱계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모이는 곳.’ 발언.
-블레이크. ‘복싱 룰이라면 WFC 라이트급 챔피언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너튜브 복서 아무나 데려다 놔도 이길 수 있는 수준.’ 발언 파문
“와...”
월요일 아침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스마트 폰을 보는데, 불과 하루 만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블레이크의 기사였다.
어제부터 SNS로 똥을 싸질러서 한국 내 스포츠 기사란을 도배했던 블레이크 놈이 이번에는 전 세계적인 이슈를 터뜨렸다.
“블레이크 기사 보고 있냐?”
“...네.”
아침부터 날 데리러 왔던 필승 형은 보지도 않고 내가 보는 기사 내용을 맞혔다.
“오늘 새벽부터 장난 아니었다. 아마 당분간은 그걸로 시끄러울 것 같아.”
“그 정도로 큰 일인가요?”
“당연하지. 종합격투기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걸 고깝게 보던 복싱계가 대놓고 WFC를 도발하고 있는 상황인 건데. 블레이크는 그 방아쇠를 당긴 거고.”
복싱계와 종합격투기계의 보이지 않는 힘 싸움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종합격투기는 역사를 보나 시장 크기를 보나 복싱계에 비빌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고.
“텔론 회장은 미국 복싱협회한테 당한 게 아주 많지. 물론 그놈이 그놈이지만. 어쨌든 이게 조용히 마무리될지, 아니면 진짜 제대로 한번 부딪칠지 모르겠다.”
“그렇구나.”
나는 블레이크 이 자식이 WFC를 나가서 복싱계로 넘어간다는 것만 보고 라이트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려도 이놈과 붙을 수 없겠구나 싶어서 낙담했었는데.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이놈을 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말
마침 딱 준비했던 에피소드에 맞춰 요즘 격투기판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제목에서 ‘옥타곤’을 뺐던 이유이기도 한데요. 아무래도 종합격투기 내용에 복싱이나 입식타격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으니까요!
최근 전 UFC 웰터급 파이터 벤 아스크렌이 제이크 폴이라는 유튜버에게 복싱룰로 시합을 펼쳐 1라운드만에 TKO패배를 당한걸로 살짝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벤 아스크렌은 벨라토르와 원챔피언십에서 챔피언을 지냈던 선수로 꽤나 경력이 화려한 프로파이터였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레슬링 미국 국가대표였기도 하구요. 그라운드 베이스지만 타격 훈련도 적지않게 했을 그가 프로복서이긴 하지만 3전이 전부인 유튜버에게 질거라는 예상은 쉽게 할 수 없었죠. (백사장도 아스크렌이 이길거라고 얘기 했습니다)
결과는 1라운드 1분 59초 TKO패배. 2분이 채 걸리지 않았죠.
그래서 지금 복싱계와 종합격투기계의 선수들끼리 살짝의 설전이 오가는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제 글은 현실과는 다른 정해진 스토리대로 진행되겠지만, 아무래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고려하는 부분들도 있을겁니다.
어찌됐든 꿀잼각입니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