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_선이라는 걸 모르네 >
1.
-휙. 휙.
혹시 몰라 일단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파파라치나 뭐시기 패치 같은 애들은 없겠지? 설마?
“...? 뭐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없이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날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아름이.
흠흠. 뻘쭘하네.
“혹시 주변에 누구 없나 싶어서.”
“아? 헤헤. 걱정 마. 악플러 들 악질 기사 쓰는 기자들. 보이는 족족 고소장 날리고 있어서 우리 집 근처에는 얼씬도 안하던데? 헤헤.”
“...”
뭔가 꽤나 살벌한 말을 아주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아름이.
“그래서. 갈 거야 말거야?”
“어? 아. 어.”
그러고 보니 아직 물음에 답을 주지 않았었지.
아름이 집이라... 보통 여자애들이 자기 집에 남자 사람을 이렇게 쉽게 들이나?
그것도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간에...
“그... 부담 되면 안 들어와도 되구. 밖은 추우니까 커피나 한잔 하고 가라는 의미였어. 카페. 못 갔잖아.”
내 대답의 뜸이 길었는지 살짝 당황한 듯 한 아름이.
야구모자에 마스크까지 썼지만 귀와 볼이 발그레해진 게 보였다. 추워서 저런 건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저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뭐. 초대해주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거절했다가는 다시는 이런 기회가 안 올 것 같기도 하고 말야.”
“응? 아. 헤헤. 아닌데. 거절해도 담에 또 초대할건데.”
내 대답에 그제야 조금 편하게 웃는 것 같은 아름이.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내 느낌이다. 아름이는 이 상황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삐 삐삐삐 삐삐 삐삐
공동 현관을 지나 아름이의 집 앞에서는 일부러 살짝 떨어져 딴청을 피웠다.
다들 이런 경험 있지 않나? 도어락 누를 때 괜히 훔쳐본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이렇게 딴청 피우거나 폰 보던 경험.
“들어와.”
늦은 시간이라 다른 주민들에게 민폐가 될 거라 생각했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속삭이는 아름이.
“음. 실례합니다.”
나는 아름이의 집에 첫 발을 딛으면서 내심 시합 끝나고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핏자국이나 이런 것 때문에 시합 이후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왔으니까.
만약 운동 끝나고 집 가는 길이었다면... 흠. 흠. 겨울에는 추워서 운동 끝나고 집에 가서 씻는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운동 끝나고 집 가는 길에 아름이 집으로 왔다면 땀 냄새와 발냄새가 장난 아니었을거란 이야기였다.
“왜 들어오다 말아?”
“아. 아니야. 화장실이 어디야? 손발만 좀 씻게.”
그래도 남의 집에 왔으면 손발부터 씻는 게 예의지.
혹시나 용변이 급한 걸로 보일까봐 굳이 사족을 덧붙였다.
“풉. 바로 옆에 있는 문이야. 문 옆에 스위치 있어.”
“오키.”
나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들어왔지만, 막상 이렇게 단절된 공간에 아름이와 둘이 있다고 생각하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일단 조금 작전을 짜자는 마음으로 화장실에 들어왔는데
“...”
갖가지 세면도구와 샤워 볼. 여성 용품들까지.
진짜 아름이만의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들어와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하. 창섭 형이 무리하지 말랬는데. 가능할까?
*
‘아! 화장실 정리를 해뒀나?’
아름이는 남자 사람을 집으로 초대한 게 태어나 처음이었다.
심지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아직 아버지도 와보지 못한 금남의 구역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지금 생각해도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 아름이였다.
‘추워서 밖에서 이야기하기 그러면 잡깐 우리 집에 가자니. 어후...’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합이 끝난 해서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그의 입술을 본 게 화근이었다.
병원에 간다는 말에 다친 곳을 찾다가 입술이 터진 걸 발견했는데 해서의 입술을 보니 갑자기 입술밖에 보이질 않았다. 지난여름 부산에서의 일이라도 생각이 난 것일까.
“미쳤어.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집에 데리고 와서 어쩌자는건지.
적당히 커피만 주고 보내야 하나? 실망? 하면 어쩌지?
그렇다고 막 준비가 된 건 아닌데?
“아.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진 아름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아름이가 해서에게 관심을 보였던 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이 다니는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남자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창섭 오빠나 두호 오빠 같은 그런 ‘체육관 남자사람 1’ 정도랄까.
그래서 집 근처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말 놓자고 했던 제안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속없이 웃고다니는 것 같아도 나름대로의 맺고 끊음이 확실한 아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우연이 한번. 두 번이 되면서. 자신을 괴롭히던 스토커를 잡을 때도 마주치고 낯선 일본에서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호감이나 호기심보다는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았다.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인맥들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이쪽 ‘업계’와 관련되어 있는 ‘동료’ 였다.
같이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리엘리 멤버들. 친하게 지내는 연예계 사모임 ‘주인공’ 멤버들. 그 외에도 친한 언니 오빠 동생들.
모두 한 다리 건너면 알만한 연예계 선후배들이었기에, 함께 지내며 편하게 있다가도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히거나 자리가 불편해질 때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의 편안함을 강해서에게서 받았다. 그래서 정말 좋은 ‘친구’ 라고 생각했었고, 가끔 연락하고 만나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또래들이 할 만한 고민을 나누고. 서로 응원하는 그런 건설적이고 건전한 관계.
-달칵
한참 상념을 이어가던 아름이는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급하게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나, 나왔어? 금방 나왔네?”
“어? 어. 손발만 씻고 나왔으니까.”
“저쪽에 소파에 좀 앉아 있어. 커피. 괜찮지?”
“어... 혹시 그냥 우유 같은 거 있어?”
“우유?”
그러고 보니 오늘 시합을 막 끝내고 온 참이었지 해서는.
아름이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고 자책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면 핫초코 같은 거 괜찮아?”
“오! 좋지. 달달한 거 땡긴다.”
강해서는 지금 커피를 마시면 몸에 무리가 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시합을 위해 컨디션을 극도로 끌어올려두었고, 시합이 끝난 지금은 그 반동으로 온 몸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시합 데미지가 많지 않다 하더라도 피로도 자체가 높아진 것.
그런 상황에서 몸에 카페인을 넣는 행위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물이나 우유정도를 바랬는데, 달달한 초코라는 말을 들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헤헤. 자. 여기.”
능숙하게 커피 한잔과 따뜻한 핫초코 한잔을 만들어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는 손아름.
“집이 휑하지?”
핫초코를 앞에 두고 집을 두리번거리는 강해서를 보며 아름이는 부끄럽다는 듯 한마디 내뱉었다.
“아니? 그 뭐냐. 미니멀 라이프? 딱 그 느낌이네. 깔끔하고.”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이어진 침묵.
“저...”
“응?”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건 강해서였다.
“그거 있잖아. 지난 오픈워크아웃 때 기사 난 거.”
“아. 응.”
“잠잠해지긴 했는데 혹시나 해서. 괜히 스캔들 나거나 하면 아름이 네 이미지에 문제 생기거나 할 수도 있고. 소속사 입장도 있고 하니까.”
강해서는 원래 오늘 아름이를 만나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인 인터넷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아. 뭐. 추측성 기사는 많이 안나올 거야. 아까도 말했잖아. 난 그런 카더라 기사 쓰는 기자님들 그냥 안 넘어가거든. 그래서 나 건드리는 연예부 기자님들 잘 없어.”
“아. 그래?”
어쩐지. 첫날만 기사 몇 개 올라오더니 그 이후로는 아름이와의 기사가 안 올라오더라니.
강해서는 아름이의 대답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리고. 해서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응?”
“지난번 부산에서. 기억 안나?”
“...어?”
“혹시 너 취했었니?”
“...”
아름이의 말에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는 강해서.
“그날 밤에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안나?”
“...키...스?”
“그래.”
무슨 이런 걸 여자 입으로 먼저 말 하게 한담.
아름은 집이 덥다고 생각하며 손부채질까지 해댔다.
“우리. 올해로 서른하나야. 한 달 뒷면 서른둘이고. 내 친구들은 스캔들이 아니라 벌써 결혼한 애 엄마들도 있어.”
“... 어...”
“내가 그날 밤. 술에 취해서 실수한 거 같아?”
“...아니.”
“그런 기사. 몇 개가 나도 상관없어. 그런걸로 타격 안받아. 연애 정도에 무너질 내 커리어 아냐. 중요한 건 네 마음이지.”
“...”
-홀짝.
손아름의 말에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깊은 생각에 빠진 강해서.
“미안해. 생각이 짧았다.”
그리고 이어진 담백한 사과.
“사실. 나도 생각이 많았어. 너랑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금도 가득하니까. 잠깐의 변덕은 아닐까. 스쳐 지나는 바람은 아닐까. 괜히 나만 상처받으면 어쩌나. 뭐. 그런?”
“내가 올해 들은 이야기 중 가장 바보 같은 말이야.”
“하하.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잖아. 아름이 너는 예쁘고. 누가 봐도 사랑스럽고 맑은 그런 사람이니까.”
“...”
-쪽
순간 머그잔을 쥐고 꼼지락거리며 수줍게 말하는 강해서가 귀엽다고 생각하던 손아름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입 맞추고 말았다.
“아. 아. 어. 미안.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러고는 본인이 놀라 허둥지둥 화장실로 도망치고 말았다.
“미쳤어. 왜 이러지?”
화장실 문을 닫고서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하나 울상이 된 아름이.
처음 집 앞에서 해서의 입술을 봤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지.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과 함께 귀와 목덜미가 붉다 못해 터질 것 같던 아름이.
이내 뭔가 결심한 듯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쿠울...
시합이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일까.
강해서는 따뜻한 핫초코 한잔에 소파에 기대어 세상 편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 하아. 내가 못살아.”
기껏 각오?를 다지고 나왔던 아름이는 허탈하면서도 묘한 안도가 섞인 한숨을 토해낼 뿐이었다.
*
“...?”
“....!”
뭐야.
여기 어디지? 내 방이 아닌데?
낯선 잠자리의 감촉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깨고 말았다.
“아. 해서야. 일어났어?”
“...”
완연히 밝은 아침.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셨다.
“어제 너 핫초코 마시다 잠들어서. 깨우기 뭐해서 그냥 재웠어. 괜찮지?”
“어? 어. 어.”
이제야 지난밤의 상황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어제 아름이 집에 와서 이야기를 하다가. 핫초코를 마시고. 그리고... 어?
-휙.
나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며 아름이를 돌아봤는데 아름이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주방에서 뭔가 뚝딱 뚝딱 거리고 있었다.
“아름아. 어제 나 자기 전에...”
“해서야! 이거 간 좀 볼래? 오랜만에 하는 거라 잘 됐는지를 모르겠네. 헤헤.”
내 말을 싹둑 잘라버리더니 음식 간 좀 봐달라는 아름이.
-후룩.
“음. 와! 완전 맛있다!”
“헤헤. 그래? 다행이다.”
조금 전에 하려던 질문이 뭐였는지도 까먹을 정도로 맛있는 된장찌개였다.
-꼬르륵
된장찌개를 한 숟갈 먹고 나니 갑자기 배에서 요동을 쳤다.
“배고프지?”
“어... 어제 시합 때문에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었으니까.”
리게인을 위해 계체 이후부터 시합 때까지 수분 보충은 많이 했지만 제대로 된 음식 섭취는 자제했다. 위에 음식물이 들어있으면 시합에 지장이 생길수도 있으니까.
시합 이후에도 핫초코 한잔 마신게 다였으니 배가 안고플 수가 없지.
“앉아있어. 금방 밥 차려줄게.”
“...어.”
무릎까지 오는 편해 보이는 원피스형 옷을 입은 아름이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분주히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쟤는 화장도 안했으면서 아침부터 뭐가 저렇게 예쁘지.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아름이가 내 아침밥을 준비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현실감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제 저녁에 아름이가 내게 두 번째 입맞춤을 한 것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갔다.
‘어제 너무 피곤해서 내가 꿈을 꿨나?’
뭔가 욕구 불만(?)이어서 아름이 꿈을 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스윽.
아름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할 게 없어진 나는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간밤에 온 연락은 딱히 없었고, 어제 시합에 대한 기사들이나 찾아보자는 생각이었다.
초록창 뉴스 탭을 들어가자 눈에 보이는 기사들. 그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기사가 몇 개 있었다.
-WFC 271의 승자! 강해서. 다음은 미첼 코너? 미들급 타이틀전을 향한 그의 도전!
-블레이크 ‘WFC271의 메인매치는 꼭 계집애 싸움 같은 시합이었다.’ 막말 파문?
-브라이언. WFC를 떠나 브로일러 미들급 챔피언 등극!
-WFC의 브로일러 죽이기?
-강해서와 최두호의 시합이 졸전? 블레이크의 SNS 막말 종합.
어제 시합에 대한 몇 가지 기사 중 블레이크의 SNS 발언과 관련된 기사들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내용을 읽어보니 어제 시합이 수준 이하의 졸전이었다는 내용의 SNS를 어제 저녁에 블레이크가 올렸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의 SNS를 찾아 검색해보니
@wonder_blake
-와하하. 저게 게이의 최후야. 받아주는 놈만 죽어나는 거지.
시합 마지막 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어오른 두호 형의 사진을 올려두고는 비하하는 듯 한 글 한줄을 올려놨다.
“...이 새끼가.”
진짜. 선이라는 걸 모르는 새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