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_쌓아올린 시간 >
1.
-강해서 선수? 그런 게이 자식과 날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일 역겨운 게이 매치가 시작되기 전에 승리를 손에 넣고 경기장을 벗어날 것이다.
-나는 내일 시합에서 승리할 것이고, 미스터 강이 원한다면 하루 두 게임도 뛰어줄 수 있다. 사실 그와의 시합은 시합이 아니다. 일방적인 구타지.
-이게 왜 이슈가 되는지 모르겠다. 이번 이벤트의 메인 매치는 게이 매치이고. 그들은 나보다 한 체급 아래의 얼간이들일 뿐이다. 체급과 단체의 보호가 없었다면 미스터 강은 이미 내 주먹에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이거 참...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운데 계체장에서 저런 개소리까지 들으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계체는 시합 순서대로 이루어졌는데, 그러다보니 내 앞 순서에 블레이크의 계체와 인터뷰가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지난 오픈 워크아웃 때의 사건이 인터뷰 중에 언급되었고, 블레이크는 저딴 식으로 버르장머리 없는 대답을 지껄여댔다.
“강해서 선수.”
“넵!”
그렇게 차례가 흘러 드디어 다가온 내 계체 차례.
-184.8 파운드! 강해서 계체 통과!
-찰칵. 찰칵. 찰칵.
나는 두호 형에 앞서 계체를 진행했고, 꽤나 아슬아슬했지만, 무사히 계체를 패스했다.
“강해서 선수. 간단한 인터뷰를...”
계체를 마치고 무대로 내려오자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인터뷰.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오픈 워크 아웃 때 있었던 블레이크 선수와의...”
당연하게 내게도 블레이크와 관련된 질문이 들어왔다.
“우선. 저는 지금 눈앞의 시합인 최두호 선수와의 시합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다만, 남자들 간의 끈끈한 우정을 게이라고 매도하다니. 블레이크는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긴 했습니다. 하긴. 성격이 고약하니 친구가 있기 힘들 것 같긴 합니다.”
-와하하하하!
-휘익. 휘익.
아무래도 계체장을 찾은 사람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보니 내 발언에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끝으로. 그가 두 번의 시합... 아니. 시합이 아니라 구타라고 했던가요. 저도 언제든 좋습니다. 다만 그는 눈앞의 시합부터 챙겨야 할 거예요. 지난 오픈 워크아웃 때 팔을 잡아보니 영 힘이 없더라구요.”
-와하하하하!
-찰칵. 찰칵.
다시 한번 터진 웃음과 카메라 플래시.
별것 아닌 농담이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블레이크를 좋게 보지 않고 있어서 그런지 호응이 좋았다.
저 멀리 블레이크가 내 인터뷰 발언을 전해 들었는지 얼굴이 욹으락 붉으락 해진 게 보였다.
-184.6 파운드! 최두호 계체 통과!
내 인터뷰에 이어 두호 형 또한 계체를 통과하고 무대로 내려왔다.
마찬가지로 인터뷰가 진행되었으나 두호 형은 별다른 이슈가 없었기에 이번 시합에 관한 질문과 나에 관한 질문들이 대부분이었다.
“자. 두 분. 파이팅 포즈 취해주시구요.”
-척
서로 상의를 탈의한 상태에서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우리 두 사람.
“하실 말씀 있으시면 서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두호 형. 잘 부탁드립니다.”
“...”
진행자의 말에 살갑게 한마디 했는데 돌아오는 건 싸늘한 눈초리와 침묵뿐이었다.
쩝. 뻘쭘하네. 벌써 시합 모드로 들어가신 건가.
-찰칵. 찰칵.
그렇게 포토 타임까지 끝나고 무대를 내려와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강해서.”
두호 형이 찾아왔다.
“어? 두호 형?”
꽤나 급하게 왔는지 옷을 대충 챙겨입은 게 보일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나.
“실망하게 하지 마라.”
“...네?”
“지난 학센과의 타이틀 전 이후 반년간 이번 시합만 준비했다. 다른 누구도 보지 않고 강해서. 너 하나만 목표로 두고.”
“...”
“지급 내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했어. 그런데 넌 지금 어떻냐?”
“저도 당연히...”
“강해서!”
내게 처음으로 크게 소리치는 두호 형.
“블레이크에 정신 팔려서. 벌써 네 안중에 나는 없어?!”
“...아뇨.”
“나는 내일 시합에 내 모든 커리어를 걸고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내게 이런 모욕을 주는 거냐!”
“... 죄송합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말로는 두호 형과의 시합에 집중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내 신경은 온통 블레이크에 향해있었다.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두호 형의 까칠한 피부와 살벌하게 부풀어 갈라진 근육들이.
내일 시합에서 날 쓰러뜨리기 위해 쌓아왔을 두호 형의 시간들이.
“고마워요.”
두호 형도 지옥 같은 감량을 행했을 테고, 리게인을 위해 분 초가 아까울 텐데 상대 선수인 날 위해 이렇게 찾아와 호통을 쳐주시다니.
“... 다시 말하지만. 실망시키지마라.”
“네. 실망시키는 일. 없을 거예요.”
잠시 한눈을 팔았을 뿐이지.
두호 형만큼이나 이번 시합을 고대하며 인고의 시간을 쌓아왔던 나다.
이제는 자그마한 방심도 없었다. 나는 내일. 두호 형과의 시합에 일말의 후회도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2.
WFC의 메인 이벤트인 PPV 시합이 한 해에 두 번이나 한국에서 개최된다는 건 꽤나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저쪽... 이네요!”
준현이는 그런 WFC 271 이벤트를 보기 위해 재현이와 기태뿐만 아니라 영은과 유나까지 데리고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찾았다.
“와... 사람 봐. 꽉 찼어.”
“이런 이벤트가 항상 있는 게 아니니까.”
“해서... 이길 수 있겠지?”
준현이와 친구들은 지난여름 휴가 이후 얼굴 보는 건 고사하고 연락도 자주 하지 못했던 강해서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이길 거에요! 해서 오빠잖아요!”
임유나는 그런 준현과 친구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지난 WFC 부산 시합 이후 이런 대규모의 격투기 관람을 온 건 처음이었다.
지난 강해서와의 데이트와도 같았던 부산 시합 때가 떠오르자 임유나의 귓불이 살짝 빨개졌다.
“아... 난 이런 거 처음 봐. 꺅! 저 사람 어떡해? 피 흘려!”
영은은 유나와는 달리 격투기 관람이 처음이었고.
“괜찮아요. 영은 씨. 케이지 옆으로 링닥터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큰일은 안 생겨요. 그리고 블레이크 저 자식은 피 좀 흘려도 돼요”
준현은 그런 그녀를 케어하며 차분하게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쩝. 하. 살다 살다 준현이 놈한테 졌다는 생각이 들 줄이야.”
기태는 그런 준현이를 슬쩍 본 후 재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나씨. 이것 좀 드세요. 목 막히시면 이것도...”
어휴. 저 새끼도 글러 먹었어.
기태가 친구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순간.
“어! 시작한다!”
드디어 WFC 271의 꽃. 최두호와 강해서의 시합을 알리는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꾸욱
입속에 들어온 마우스피스를 다시 한번 단단히 물었다.
-와아아아아아!!!
-강해서!!!!!!
-최두호!!!! 이겨라!!!!
-가즈아!!!!!
지난 부산 시합에서 필승 형의 경기를 보며 ‘나도 언젠가는 한국 팬들의 응원과 함성이 가득한 곳에서 경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겨우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이렇게 현실이 될 줄이야.
“얌마. 정신 차려.”
“아. 넵!”
순간 체육관의 분위기에 멍해졌던 정신을 필승 형이 다잡아줬다.
“컨디션. 괜찮지?”
“넵.”
-팡! 팡!
“자! 가자!”
“아! 좀 때리지 좀 마요!”
나는 필승 형에게 한마디 쏘며 입장 신호에 맞춰 케이지 안으로 들어섰다.
“...”
곧이어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두호 형.
어제의 갈라졌던 근육들은 사라졌지만 그만큼 더 위협적인 몸이 눈에 밟혔다.
‘저게 어딜 봐서 마흔 살 먹은 아저씨 몸이야?’
이전까지 상대했던 어떤 선수들보다도 몸이 좋은 것 같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솜차이의 몸이 저 정도로 두꺼웠으려나.
“로블로. 눈 찌르기. 후두부 가격. 케이지 잡기...”
심판의 주의사항을 익숙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며 가까이서 두호 형과 눈을 마주쳤다.
“...”
케이지를 비추는 조명일까. 두호 형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이번 시합.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런 느낌이 왔다.
-파이트!
-툭.
파이트 신호와 함께 케이지의 양 끝으로 멀어졌던 우리 두 사람은 다시 케이지 중앙에서 글러브를 살짝 부딪친 뒤.
-후웅. 휙. 후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펀치와 킥을 주고받았다.
-퉁. 퉁.
서로 유효타 없이 한차례 펀치 교환을 한 뒤 두 팔 간격으로 거리를 벌린 뒤 타이밍을 쟀다.
“흐읍!”
-퉁!
상체를 낮추며 왼팔 오버핸드 펀치로 들어오는 두호 형.
-휙.
상체를 왼쪽 앞으로 당기며 펀치를 피했는데
-텁!
그대로 오른팔로 내 왼발을 감싸 안으며 원 레그 태클을 들어왔다.
“흡!”
나는 오른발을 뒤로 쭉 빼며 왼팔로 두호 형의 오른팔 겨드랑이에 오버 훅을 걸며 태클 방어에 들어갔다.
-뿌득. 뿌드득.
와나. 뭔 힘이 이렇게 좋아.
어떻게든 날 집어던지려는 두호 형과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내려찍는 나.
겨우 몇 초의 힘 싸움이었지만 정말 몇 분은 걸린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팟!
결국, 다리를 놓고 빠지며
-쩍!
앞으로 나와 있던 내 왼발에 레그킥을 한 대 꽂아 넣는 두호 형.
“후우. 후욱.”
역시나 만만하지 않았다.
-툭 툭.
아무렇지 않다는 듯 왼 다리로 바닥을 찍으며 두호 형을 바라보던 나는.
“흡...”
집중력을 바짝 끌어올렸다.
-스슥. 휘익.
이번에는 내 쪽에서 먼저 들어간 왼손 잽.
거리가 아슬아슬했기에 두호 형은 뒤로 빠지며 펀치를 피하려 했고.
-후웅. 퍽!
나는 그 타이밍에 축발을 밀어내며 앞으로 한 번 더 전진했다.
거리가 애매했기에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펀치.
이 펀치는 이번 시합을 준비하면서 ‘스트리트 파이트’에 나온 날 보던 필승 형이 지난 시즌 내 출연 장면들을 보다가 개발한 기술이었다.
바디 컨트롤과 중간 과정 없이도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타고난 내 피지컬을 살린 기술로, 두 다리를 바닥에 붙인 채 뻗는 펀치도 아닌. 그렇다고 앞으로 뛰면서 펀치를 뻗는 슈퍼맨 펀치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있는 펀치였다.
“큭.”
다만 이 펀치를 날리려면 펀치를 뻗어내는 동안 달라진 표적을 캐치하고 축발을 밀어내며 펀치 궤도를 수정해야 했다. 한마디로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야 쓸 수 있다는 것.
-후웅! 쩍!
이번에는 내가 두호 형의 왼 다리에 레그킥을 꽂아 넣었다.
충분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펀치에 맞게 된다면 상대방은 타격의 거리 감각이라든지 전술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여러모로 이점이 많았다. 그리고 이 펀치는 그걸 노린 펀치였고.
-후웅.
다시 한번. 이번에는 라이트 펀치를 스트레이트에 가깝게 두호 형에게로 뻗었다.
-휘익.
아까는 뒤로 빠져서 펀치를 허용했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내 몸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라이트를 피해내는 두호 형.
-찌직...
두호 형이 라이트 펀치의 궤적에서 벗어난 걸 확인한 순간 억지로 펀치를 멈춰 세우며
-후웅!
몸쪽에 붙이듯 쥐고 있던 왼손으로 어퍼컷을 날리듯 두호 형의 턱을 향해 수직으로 올려 쳤다.
-흐읍! 후웅!
아슬아슬한 차이로 레프트 펀치를 피해낸 두호 형.
-훅! 퍽!
이번에는 두호 형의 짧은 라이트가 어퍼컷을 날리느라 비어버린 내 왼쪽 몸통을 두드렸다.
이건 보여도 피할 수가 없었다. 안면 쪽이면 어떻게든 피하겠는데 몸통은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으니까.
-팟!
바로 연타를 넣으려 내게 달라붙는 두호 형을 양손으로 밀치고는 뒤로 빠졌다.
“후우. 후우.”
-지끈. 지끈.
너무 집중했나.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확실히. 이번 시합은 그리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