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_오픈 워크아웃 >
1.
“블레이크라...”
목과 팔 여기저기가 문신으로 뒤덮인 백인 파이터 하나가 오픈 워크아웃의 분위기를 흐리고 있었다.
이번 오픈 워크아웃은 내겐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사였는데 저런 미꾸라지 하나가 툭 튀어나오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알아보니까. 저 선수 조금 유명한 친구네.”
“네?”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이나 지역 차별주의적 발언을 쉽게 내뱉는걸로 유명한 듯해. 여성 편력으로도 유명하고.”
필승 형은 어느새 블레이크에 관한 정보를 얻었는지 그에 관한 이것저것을 읊어줬다.
“그냥 뭐. 상종할 인간이 못 되네요.”
“생각보다 저런 선수들이 많아. 사실 내가 겪은 인종차별은 백인보단 남미 쪽 애들이나 흑인들에게 당한 게 더 많았지만.”
“...그래요? 걔들도 인종차별 받는 애들 아니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남아 사람들한테 불친절한 거랑 같지. 오히려 백인들은 멀쩡한 경우가 많아.”
“그렇구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물론 사람마다, 상황마다 달라지는 부분이었으니 절대 정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필승 형의 경험상으로는 그랬다는 거니까.
“해서야!”
한창 블레이크의 인터뷰를 보고 있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아름아?”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한껏 꾸민 아름이가 있었다.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스케줄 있어서 왔지.”
참고로 이번 WFC271의 오픈 워크아웃은 상암동에 있는 JJ E&M 센터 미디어 홀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방송국들이 즐비해 있는 곳이니 아름이가 오며 가며 충분히 들릴 수 있는 곳이랄까.
“어? 아름 씨!”
필승 형도 뒤늦게 아름이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지만.
“아. 네.”
아름이는 이번에도 꽤나 냉랭한 태도로 필승 형에게 벽을 쳤다.
“...야. 확실히 나 뭔가 미운털이 박힌 것 같지?
필승 형은 내게 귓속말로 낙담한 듯 물어왔지만 나도 감이 안 잡혔다.
평소 강아지처럼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아름이가 요즘 들어 필승 형만 보면 찬 바람이 불어댔으니.
”두호 오빠는?“
”아. 두호 형도 곧 올걸?“
원래 오픈 워크아웃에 시합에 출전하는 모든 선수가 참가하는 건 아니었다. 그게 의무도 아니었고.
다만 두호 형과 나는 한국에서 열리는 오픈 워크아웃이니만큼 거의 반강제적으로 참석을 하게 됐을 뿐.
”해서야.“
”응?“
”난 너 응원할 거야. 알지?“
”어... 어. 뭐. 응.“
아름이는 따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행에게서 잠시 벗어나니 대뜸 응원하겠다는 말과 함께 날 빤히 바라보았다.
”두호 오빠한텐 미안하지만. 헤헤.“
어. 음. 이런건 심장에 무리가 가는데. 거기다 풀메이크업이라니. 반칙이잖아.
사실 아름이와의 친분은 두호 형이 먼저였다.
애초에 두호 형이 나한테 운동하자며 꼬시며 낚을 때 썼던 미끼가 아름이와의 식사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름이는 아직 모르고 있겠구나.
”생각해보니까. 해서 네 시합이 끝나고는 우연히도 만나고, 전화 통화도 하고 했는데. 정작 시합 전에 힘내라는 응원은 제대로 해준 적이 없더라구. 헤헤.“
”아아.“
듣고 보니 그렇네.
시합이 끝난 뒤 아름이와 연락하거나 만난 적은 많지만, 시합 전에 이렇게 얼굴 보고 응원을 받아본 적은 없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얼굴 보고 꼭 응원하고 싶었어. 헤헤. 그래서 일부러 왔지롱!“
”하하하. 고마워. 음. 하하.“
꼭 이길게. 라는 말은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직도 속마음 한구석에는 ‘두호 형을 이기는 건 옳지 못하다’라는 생각이 있는 걸까.
-웅성. 웅성.
한창 아름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점점 커지는 주변의 웅성거림.
무슨 일인가 봤더니 무대 위에서 인터뷰 중이던 블레이크가 그새 일정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 동선에 나와 아름이가 있었다는 거고.
”음?“
그때 나를 알아본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블레이크
”와우. 한국에도 이런 미인이 있었네?“
날 보고 다가온다고 생각했던 블레이크는 내 생각과는 달리 아름이를 향해 눈을 빛내며 말했는데, 이제는 어설프게나마 듣는 귀는 트여서 블레이크가 하는 말을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슨 용건이시죠?“
역시나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는 아름이.
블레이크의 능글맞은 웃음에 보기 드문 딱딱한 표정으로 응대했다.
”무슨 용건은. 나 몰라? 여기 있는 거면 행사 관계자나 팬 아닌가? 나 블레이크야.“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뭐. 모르면 어쩔 수 없지.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니까. 같이 커피나 한잔할까?“
”보다시피 일행이 있어서요.“
아름이는 슬쩍 내 쪽으로 시선을 줬고, 블레이크는 그제야 날 발견한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단순히 키만 보자면 나나 블레이크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마디로 블레이크가 이제 와서 날 발견했을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건 그냥 대놓고 무시를 한 거였다.
”저기. 블레이크.“
그때 블레이크의 스텝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아하? 이거. 한국의 연예인이셨네? 어쩐지 내가 여기 와서 본 사람 중 제일 이쁘다 했지.“
스텝을 통해 아름이가 연예인이라는 걸 전해 들은듯한 블레이크.
”이봐. 숙녀가 곤란해하잖아. 그쯤 해. 거기. 블레이크의 통역이 있으면 내 말 전해줘. 쓸데없이 시비 걸 시간에 내일 있을 시합 준비나 하라고 말이야.“
나는 난감해하는 아름이의 앞을 슬쩍 가리며 블레이크와 그 일행에게 말했다.
”이게 누구야? 그러고 보니 이번 시합의 메인 선수 아냐? 이봐. 아가씨. 이런 게이랑 노닥거릴 바엔 나랑 놀자고. 끝내주는 남자를 앞에 두고 왜 이런 게이 뒤에 있는지 모르겠네?“
”...“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니면 아직 내 영어 회화가 서툴러서 뭔가 해석을 잘못했거나.
”이 새끼가 미쳤나. 이봐! 너희 선수 빨리 안 데려가?“
”게이 새끼는 빠져!“
블레이크는 내 뒤에 있는 아름이의 팔목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고.
-턱.
-뿌득. 뿌득.
그의 의도는 내 손에 가로막혔다.
”... 이 손 안 놔?“
-휙. 퍽!
블레이크는 내게 잡힌 팔을 빼내기 위해 한차례 팔을 당겼고, 그로 인해 우리 둘은 한차례 몸을 맞대게 되었다.
나는 그가 당겼던 팔을 밀어내는 타이밍에 그의 가슴께를 밀어내며 그의 팔을 놔버렸고
-쿵!
블레이크는 순간 발이 꼬였는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큭! 이 개자식이!“
넘어졌던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 내게 달려들려는 블레이크와.
”참아! 그만해 블레이크!“
그런 그를 말리는 그의 스텝들.
-저기 무슨 일 있나 본데?
-어? 강해서 선수다!
-옆에 누구야? 손아름 아냐?
-헐? 손아름? 손아름이 왜 여기 있어?
-강해서 선수랑 같이 있는데? 일단 찍어!
-블레이크랑 강해서랑 시비붙은 건가?
-찰칵찰칵
-차르르르
나름 구석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이야기 중이었는데 블레이크 저놈 때문에 다 망쳤네.
”일단. 자리 옮기자 아름아.“
”...응.“
아름이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는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나 밖에 매니저랑 내 팀들 있어서. 그쪽으로...“
”아. 어.“
나는 일단 아름이를 데리고 무작정 자리를 벗어났는데, 아름이가 정확히 목적지를 짚어줬다.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아름이의 팀으로 향하는 길. 아름이가 내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왔다.
”네가 왜 미안해. 그 자식이 제정신이 아닌 거지.“
”그래도. 나 때문에 시비붙었잖아.“
”아니라니까. 그냥 나한테 시비가 걸고 싶은데 마침 아름이 네가 있었던 거야. 오히려 나 때문에 네가 난처해져서 내가 미안하지.“
”... 헤헤.“
어이구.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나 보다.
”아. 여기서부턴 혼자 가도 돼.“
주차장 근처에서 이제는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아름이.
”아. 어. 들어가 봐.“
”...손...“
”아! 미안해.“
아름이 손을 쥐고 있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황급히 그 손을 놓자 아름이는 다시 한번 풉 웃더니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파이팅 해야 해? 주말에 시합은 보러 가지 못할 것 같은데. 방송으로 꼭 챙겨볼 테니까.“
”...고마워.“
”시합 끝나고. 연락해야 해. 알지?“
”어... 그...래.“
”대답이 왜 이렇게 시원찮아?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고.“
”그럼 됐어. 헤헤.“
다시 특유의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아름이.
참 종잡을 수 없는. 그렇지만 그게 전혀 부담스럽다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게 매력인 아름이었다.
”그나저나.“
-뿌득.
블레이크. 이 개자식을 어떻게 해야 하지?
*
-WFC 271 오픈 워크아웃! 강해서와 블레이크의 신경전?
-강해서! 상대 선수 최두호가 아닌 블레이크와 신경전을 벌인 까닭은?
-손아름과 강해서의 반전 친분?
-손아름이 WFC271 오픈 워크아웃에 간 이유는?
-손아름의 손을 잡고 다급히 행사장을 벗어나는 강해서. 과연 둘은 무슨 사이?
└아... 해서 형이 암만 잘나가도 손아름은 선 넘었지!
└아름이를? 아름이를? 아름이를? 아름이를?
└난 이 만남 반댈세!! 어디 무식한 쌈쟁이가 우리 아름이를!!
└아놔. 손아름 팬카페에 좌표 떴나. 갑자기 손아름 팬들 ㅈㄴ많이 보이네
└손아름 원래 최두호랑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했었음 ㅇㅇ 강해서랑도 같은 체육관이고 손아름은 두 선수 모두랑 친분있음ㅋ
└너튜브에 영상 뜬 거 봤음?ㅋㅋㅋㅋㅋㅋㅋ 미들급 강해서가 라헤급 블레이크한테 힘으로 하나도 안밀림ㅋㅋ
└블레이크 엉덩방아 굴욕행 ㅋㅋㅋㅋ 지금 개인 SNS에 욕질 오지던뎈ㅋㅋㅋ
└블레이크가 손아름한테 집적거렸고 강해서가 막아서다가 시비 붙은거임 ㅋㅋ 나 어제 현장에서 직관했음
└아 블레이크 ㅈㄴ 줘패고싶네... 최두호 강해서 매치 보고 게이 매치라고 하질 않나... 해외에도 기사 떴음. 게이 매치라는 자극적인 단어로
어느새 엊그제 있었던 오픈 워크아웃의 일은 기사화되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블레이크와의 시비 이후로는 오픈 워크아웃은 순조롭게 끝났지만, 그 여파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게 질의응답을 받지.“
”그래도 공개훈련 일정을 잡아뒀었잖아요.“
지난 시합에서는 공개훈련보다 질문을 받아 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이번 오픈 워크아웃에서는 간단한 공개훈련을 선보였다.
그러다보니 인터뷰나 질의응답을 할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때는 입장 정리도 안 됐었고.“
아름이는 연예인이다 보니 나 혼자 일방적으로 입을 열어 상황 설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름이도 소속사와의 사정이나 연예인으로서의 입장이 있었으니까.
”후우. 시합에 집중하자. 해서야.“
”...당연하죠.“
”이번 시합 준비. 이전의 어떤 시합보다도 힘들었잖아.“
”...“
그건 사실이었다.
이전까지의 훈련이 몸을 두드리는 듯한 훈련이었다면, 이번 훈련은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훈련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노력했는데. 그것도 상대가 두호 형이고. 블레이크 같은 놈 때문에 망치면 안 된다.“
”아. 알았다니까요.“
오늘은 WFC271의 계체가 있는 날.
가장 정신이 예민하고 곤두서 있을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그러다보니 필승 형은 계속해서 같은 당부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조차 살짝 짜증이 나서 말을 조금 쏘듯이 내뱉었다.
”준비됐냐.“
그때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시는 안 코치님.
”넵.“
”몸무게는.“
”83.5였습니다. 상의 입고 쟀을 때요.“
-툭. 툭.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리시는 안 코치님.
”고생했다. 자. 가자.“
”넵!“
WFC 271.
두호 형과의 시합까지 D-1.
계체를 위해 우리는 팀 피스트의 체육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