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87화 (87/203)

< 87화_미꾸라지 >

1.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토크쇼 세트장 바깥에서 제작팀의 콜이 떨어지고 나서야 최두호는 처음으로 편안하게 숨을 내뱉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형.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어. 그래.”

오늘 촬영에 함께 출연중인 강해서의 말에 순간 왠지 모를 낯선 감각을 느끼며 흐지부지 대답하는 최두호.

이번 방송은 컨셉상 교양프로그램에 가까웠기에 최두호와 강해서는 가볍게 친분을 과시하기보다는 서로 존칭을 쓰며 공식적인 발언들을 쌓아나갔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쉬는 시간에 평소와 같이 형이라는 호칭을 들으니 미묘하게 어색했던 것.

“어? 해서는 어디 갔어요?

강해서가 화장실에 가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그를 찾아온 박필승.

“화장실 갔다.”

“아아. 마실 것 좀 줄랬더니.”

박필승은 손에 쥔 드링크를 흔들며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형도 하나 할래요?”

“그러고 싶지만. 우리 쪽 트레이너도 저기 두 눈 시뻘겋게 뜨고 쳐다보고 있어서 말이지.”

박필승의 말에 살짝 난처한 듯 웃으며 촬영 팀 뒤쪽 어딘가를 가리키는 최두호.

“하하. 어쩔 수 없죠.”

최두호 또한 철저하게 관리된 식단과 음용을 하고 있을 테니 보통의 물이 아닌 드링크는 함부로 마시지 못하겠지. 박필승은 그의 거절에 그리 큰 무게를 두지 않고 이번 시합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이어붙였다.

“훈련은 잘 되고 있어요?”

“아아. 안 그래도 신세 많이 지고 있다.”

“내가 해서 코치긴 하지만 최대한 형네 훈련 이야기는 안 들으려고 엄청 노력중이라고.”

“하하. 뭐. 들어도 상관없지.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니까.”

최두호는 그리운 ‘팀 피스트’의 체육관을 뒤로하고 박필승 소유의 ‘슈퍼 익스트림 짐’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적진 한가운데서 훈련을 받고 있는 거나 다름 없었지만 최두호의 표정에서 불편함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해서. 어때요?”

“...뭐가?”

“오늘 오랜만에 직접 봤을 거 아냐.”

최두호가 강해서를 직접 본 건 그가 브로일러 미들급 타이틀전을 치를때가 마지막이었다.

“... 아주. 괴물이던데.”

최두호는 최대한 담담하게 오랜만에 후배를 만난 소감을 풀어냈지만, 오늘 출연자 대기실에서 의상을 갈아입던 강해서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쟤. 저거. 탈아시안급 수준이 아니에요. 그냥 탈인간급이지. 어떻게 저런 몸을 가지고 평생 운동이란 걸 안해보고 살았는지 그게 미스테리라니까.”

최두호는 박필승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연초. 브로일러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오랜만에 강해서를 보았을 때를 최두호는 기억했다. 그때도 일 년사이에 성장한 강해서의 몸과 테크닉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었는데, 근 반년사이에 다시 본 강해서는 그 경악스러운 성장속도에 탄력이라도 붙은 듯 한 피지컬을 보이고 있었다.

“근데. 저게 저놈 베스트가 아니에요.”

“...?”

“지금 웨이트 훈련 안한지 한두 달은 됐을겁니다. 미들급 베스트 퍼포먼스를 발휘하기 위해서.”

“...”

최두호는 박필승의 무심한 듯한 발언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저 정도로 완성된 몸이 베스트가 아니라니. 단지 미들급에 최적화시키기 위한 몸이라니.

“미들급 베스트 퍼포먼스라... 이런 걸 상대선수인 나한테 막 말해줘도 되나?”

“에헤이. 내가 암만 귀 닫고 있어도 내 체육관 소식이라 들리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정도는 말해줘야 형편성이 맞지.”

“하하하. 뭐. 그렇게 말해주니. 하나만 더 물어보자.”

“해서가 가장 베스트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는 체급이 궁금한 거죠?”

최두호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박필승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무언의 긍정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가 점쟁이도 아니고. 올려봐야 아는 일이겠지만... 현재까지 운동능력 측정된 데이터로 보면. 라이트헤비. 혹은 헤비급은 가야 베스트 퍼포먼스가 나올 수도 있어요.”

“...”

라이트헤비급과 헤비급.

미들급에서 겨우 하나 혹은 두 단계 높은 체급이지만 그 단어가 주는 무게는 고작 20파운드 80파운드의 차이로 말 할 수 없었다.

웰터급의 왕자라는 학센을 잡아낸 최두호가 베스트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체급은 사실 미들급이었다. 하지만 가장 경쟁력 있는 체급은 웰터급이었는데 그 이유는 미들급과 웰터급의 차이가 단지 15파운드. 약 7키로그램의 무게로 나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두호가 미들급에서 활약하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웰터급에서 70의 기량을 낼 수 있고 미들급에서는 100의 기량을 낼 수 있다면, 라이트헤비나 헤비급에서 150의 기량을 낼 수 있지만 미들급에서 120의 기량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이 미들급에는 득실거렸으니까.

“꿈같은 이야기군. 라이트 헤비나 헤비급이라. 경쟁력은?”

“... 나도 미들급 말석이 커리어 하이인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라헤나 헤비급은 테크닉보단 피지컬이라고 말하는 동네인데. 거인들의 세상.”

최두호의 키는 180이 넘었고. 박필승의 키 또한 180은 훌쩍 넘기는 키였다.

그런 그들이 말하는 ‘거인’이란 2미터를 넘어가는 그런 피지컬을 말 하는 게 아니었다.

180후반에서 190후반.

그들과는 겨우 몇센치의 차이지만 그 차이로 인한 근력과 리치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어! 필승 형!”

최두호와 박필승이 서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잠시 대화가 소강된 틈을 타 화장실을 다녀온 강해서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자. 받아라.”

“오! 마셔도 되는 거예요?”

“그래. 남은 촬영 끝까지 잘 마치고.”

“넵!”

곧이어 촬영 재개 사인이 울려 퍼지고 강해서는 다시 본인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거인들의 세상이라...’

-꾸욱.

자신의 꿈은 중량급의 마지노선이라고 불리는 미들급에서 그쳤지만. 자신이 데리고 온 후배에겐 미들급이 그 커리어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 최두호였다.

*

-WFC 미들급 타이틀전을 건 뜨거운 승부! 최두호 Vs. 강해서!

-세계를 뒤흔든 파이터 강해서! 그의 지난 18개월간 행적을 훑어본다!

-한국인 최초 WFC 챔피언 최두호와 맞붙을 상대는 전 브로일러 챔피언 강해서?

-예능에서 세계까지. 스트리트 파이트 출신 파이터 강해서의 세계 정복기!

=WFC는 오는 11월 27일. WFC PPV 매치인 271 매치를 한국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해 전 세계 격투기 팬의 이목뿐만 아니라 국내 격투기 팬들의 이목까지 휘어잡았다.

이번 WFC 271 시합의 메인 매치에는 현 WFC 웰터급 챔피언인 최두호(40) 선수와 전 브로일러 미들급 챔피언 출신이자 현 WFC 미들급 파이터인 강해서(29) 선수의 경기가 예정되어 있다.

이번 시합은 WFC 첫 한국인 파이터들의 매치라는 의미 외에도 다음 타이틀 샷이 걸린 경기라 전 세계 격투기 팬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이벤트가 더욱 의미 있어진 이유는 메인매치의 당사자인 최두호 선수와 강해서 선수의 끈끈한 우정 덕분이다. 트래쉬토크가 빗발치는 MMA 시장에서 최두호 선수와 강해서 선수의 브로맨스는...(하략)

┕와. 진짜 보고 싶다... 이럴 때 직관 안가면 언제 보려나 WFC 넘버링 시합을

┕그것도 메인매치가 한국인 선수끼리 시합임

┕거기다 이긴 선수는 타이틀샷 가져감 ㅋㅋㅋ 중량급에서 한국인 선수가 타이틀전이라니!

┕? 최두호는 이미 중량급 챔피언인데?

┕최두호가 왜 중량급 챔피언임? 웰터급인데?

┕웰터는 경량급이지 시발ㅋㅋㅋㅋ 또 웰터급이 중량급이라는 새기들 있네

┕?플라이/벤텀/페더/라이트 까지가 경량. 웰터/미들/라헤/헤비 중량. 아님?

┕중량은 미들급부터짘ㅋㅋㅋㅋ

┕아... 웰터급도 중량이라는 새기들 좀 잠잠하네 했는데 최두호 타이틀 따고부터 더 극성인듯ㅋㅋㅋㅋ

┕웰터급도 중량급 맞음;;; WFC웰터급은 170파운드 이하인데 복싱으로 치면 슈퍼 미들급이 168파운드 이하임. 그럼 슈퍼미들급도 경량이냐?

┕ㅅㅂ 또 MMA에 복싱 체급 갖다 붙이지. 어후 노답새기들

두호 형과의 토크쇼가 방송된 이후 격투기 팬들만 활동하는 격투기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일반 뉴스 랭킹에도 WFC 271 관련 기사들이 뜰 정도로 서울 시합은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었다.

-재현 : ㅋㅋㅋㅋㅋㅋ 너 팬 카페 들어가봤냐?

-기태 : 쟤 팬 카페도 있음?

-재현 : ㅇㅇ 가면 쟤 최근 방송 짤 엄청 많음 ㅋㅋㅋㅋㅋㅋ

-준현 : 재현이는 그걸 찾아서 들어가봤나보네? 해서 팬임?

-재현 : 아... 수치플

(재현 님이 나갔습니다. 채팅 방으로 다시 초대하기)

(해서 님이 재현 님을 초대했습니다.)

-해서 : 어디가세요 팬님

-재현 : ㅣ나옿패ㅕㅑㅛ3ㅗ2ㅐㅑ3ㅗㄹ

-기태 : ㅋㅋㅋㅋ 너 스위치 온 방송 나온것도 반응 좋던데? 시합 끝나고 또 나가봐 ㅋㅋㅋㅋ

-준현 : 지금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3도 해서 너 때문에 완전 불타고 있음ㅋㅋㅋㅋ

친구들 말 대로였다.

토크쇼뿐만 아니라 내가 출연했던 예능 두 개. ‘스위치 온’과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3’에서 내가 출연한 회차의 시청률이 거의 점프하다시피 뛰면서 시합을 앞둔 지금까지도 예능 출연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스위치 온에서는 부모님과의 소소한 일상과,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2에 출연할 때와는 달라진 모습들을 친근하게 보여주어서 좋다는 반응이 대체적이었고,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 3에서는 절대고수로 깜짝 등장해서 밉상이던 참가자를 참교육 해준 걸로 짤이 나돌았다.

나도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3의 방송을 봤는데, 피디님이 아주 의도적으로 금문양 놈을 악마적인 편집으로 밉상을 만들어둬서 내게 돌아오는 비난의 화살은 전혀 없었다. 방송 이후 피디님이 따로 연락해서 편집에 신경 썼다고 목소리에 힘을 줄 정도였으니까 말 다했지 뭐.

“해서야. 가자.”

“넵!”

오늘은 WFC 271의 오픈워크 아웃이 있는 날이었다.

서울의 11월 말은 한창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었기에 따뜻한 외투를 집어 들며 필승형을 뒤따랐다.

“안 떨리냐?”

“뭐. 조금요.”

“새끼.”

사실 꽤 많이 떨렸다.

WFC 뿐만 아니라 브로일러까지의 경험을 포함 해봐도 통역 없이 시합관련 이벤트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물론 주최 측과의 의사소통에는 필승 형이 간단하게 도움을 주겠지만, 이번 오픈워크아웃을 보기위해 오는 팬들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설레고 낯설기에는 충분했다.

-찰칵. 찰칵.

-어! 저기 강해서다!

-강해서 선수!

-야! 야! 나 사진 찍어줘 사진

행사장 내부로 들어가니 이미 WFC 굿즈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팬 분들과 기자들 실내를 가득채우고 있었다.

“야. 얘 왜 이러냐?”

“이 새끼. 부끄러워하는 것같은데요?”

날 향해 손을 흔드는 팬들을 향해 살짝 손을 들어 올린 후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자 필승 형과 창섭 형이 뒤따라 붙으며 놀려댔다.

“한국 시합은 처음이지?”

“그래. 그래. 그 마음 다 알지.”

이제 꽤나 까뒤집어진 귀까지 빨개진 게 나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런 내 모습이 웃겼는지 필승 형과 창섭 형은 계속해서 날 놀려댔고.

“그러고 보니. 필승형도 창섭형도. 한국 시합 경험이 있죠?”

“어? 어. 그렇지.”

“음...”

갑자기 말 수가 줄어드는 두 사람.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한국에서 치른 시합에서 졌지 않아요?”

“...”

“...”

“어라?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한국 시합에서 지고 은퇴했네? 우와. 공통점이 있구나.”

“...”

“...”

조금 전까지 날 놀리던 사람들은 어디 갔는지.

필승 형과 창섭 형은 입을 꾹 닫은 채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나는 일부러 그 둘과 살짝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어휴. 형들한테 안 좋은 기운 옮을라. 떨어져서 걸어야지.”

-빡!

“에라이. 나쁜 새끼야!”

“아! 왜 때려요! 내일 모레 시합인 선수를!”

“내일 모레면 금요일이다 새꺄! 시합은 토요일이고!”

결국 필승 형은 놀림을 참지 못하고 내 뒤통수를 때렸는데

-빡!

“금요일이고 토요일이고. 시합 얼마 안남은 애를 왜 때려!”

바로 안 코치님에게 그대로 되갚음을 당했다.

“아. 형님. 해서 저게 하는 말을 보세...”

“해서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구만. 너나 창섭이나 둘 다 한국 시합에서 졌잖아. 그리고 은퇴했고. 다 맞는 말이구만. 해서야. 더 떨어져라. 이런 덜떨어진 놈들 기운 옮으면 될 것도 안된다.”

“넵!”

역시 안 코치님 밖에 없다.

-뭐야? 지금 뭐라는 거야?

-아. 존나 재수 없게 생겼어.

그렇게 일행들과 회랑을 가로지르는 중 들리는 주변의 목소리들.

평소 같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웅성거림이지만, 주변 모두가 한국인이다 보니 웅성거림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왔다.

-블레이크 완전 어이없네.

-이런 건 기사 안 나가나?

앞서 오픈워크아웃을 가지고 있는 다른 선수와 관련된 이야기인 듯 했다.

“해서야. 뭐하냐?”

“아. 저기. 저기 좀 가보면 안돼요?”

“왜?”

“사람들이 웅성거리길래.”

나는 필승 형과 함께 웅성거림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옮겼고.

-블레이크 선수. 그러면 이번 WFC 271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기는. WFC도 이제는 한물갔다는 생각을 했다. WFC 파이트 나잇 시합도 아니고 PPV 시합을 이 먼 곳까지 와서 해야 하다니.

-이번 WFC 271이 한국에서 개최된 이유는 메인 매치인 최두호와 강해서 선수 때문이다. 이 두 선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말도 하지마라. 난 이번 이벤트의 메인 매치가 그런 게이 매치인 줄 알았다면 퇴출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제안을 거부했을 거다. 그들이 한체급만 높았어도 내가 때려줬을텐데 아쉬울 뿐이다.

저 선수는 이번 WFC271의 메인카드 중 하나인 라이트헤비급 파이터인 블레이크였다.

한창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한국 시합이다 보니 인터뷰 내용이 전문 통역사에 의해 순화되어 통역돼 있었는데, 내게는 필승 형이 옆에서 가감없이 대화 내용을 알려주었다.

“...지금 게이 매치라고 한 거예요?”

“...어.”

-차라리 여성부 매치를 봤으면 봤지. 그런 게이들의 캣파이트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티비쇼에 나와 서로를 향해 애틋하게 웃어보이며 어깨동무를 하는 그들을 보고 토할 뻔 했다.

“...”

저 새끼는 나랑 체급도 다른 체급인데 왜 시비일까.

기분 좋게 행사장에 왔다가 미꾸라지 하나 때문에 기분 잡치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