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_시합 모드 >
1.
“아... 커튼 좀 쳐줘. 어후. 어제 우리 어떻게 들어왔냐?”
“나도 몰라... 아오 머리야... 야. 물 어딨어?”
한여름의 뜨거운 뙤약볕을 피해 좀비처럼 거실로 기어 나오는 재현이와 기태.
어제 반 죽음 상태로 들어가 자더니 커튼도 제대로 안치고 잤나 보다.
“어흐. 살 것 같다.”
“어휴 시원해.”
기태는 생수를 병째 드링킹했고 재현이는 에어컨이 빵빵해 시원한 거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오늘도 날 좋네.”
“점심 뭐 먹냐? 속 아프다”
“국밥! 돼지국밥으로 해장하자!”
오늘은 친구들과 보내는 휴가였다.
유나네는 따로 부산 여행 콘텐츠 영상을 촬영해야 하는 일정들이 있었으니까.
어제는 유나와 영은이만 따로 나왔지만, 그들도 카메라맨부터 피디와 작가까지 꽤나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 팀이었다.
“아. 유나 씨랑 영은 씨랑 같이 놀면 좋을 텐데.”
“본업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우리끼리 부산 투어나 하자.”
“콜!”
“먹방찍자!”
부산 투어나 하자는 말에 재현이와 기태는 콜을 외쳤고
“어... 나는 볼 일이 좀 있는데.”
준현이는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뭐? 어디? 네가 부산에서 뭔 볼일?”
“그런 게 있음.”
“그런 게 있기는. 저 새끼 영은 씨 보러 가는 거다. 치사하게 혼자만 저쪽 팀에 합류하기냐!”
“그런 거 아님. 오늘 콘텐츠에 해운대에 있는 외국인 인터뷰를 넣고 싶다고 통역 좀 해줄 수 있냐고 해서...”
“그게 그거지. 에라잇 치사한 놈!”
재현이와 기태는 배신자라고 놀리긴 했지만 준현이의 발길을 막지는 않았다.
친구들 중 누구도 준현이의 연애사업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톡. 톡.
-유나 : 오빠!
-유나 : 준현 오빠 올 때 오빠는 안 와요?
그때 내 스마트 폰으로 유나의 톡이 들어왔다.
-해서 : 어... 나는 애매하겠는데? 다른 친구들이 있어서
-유나 : 글쵸...ㅠㅠ 친구분들도 다 데리고 오라고 하기엔 너무 지루하실 테고...
-해서 : 그렇지 ㅎㅎ 애들도 휴가 온 거다 보니...
-유나 : 저녁에는 저희도 팀원들이랑 뭉쳐야 할 것 같고. 내일이나 아니면 밤 늦게 볼까요?
음...
갑자기 왜 아름이 얼굴이 스쳐지나는지.
어젯밤의 강렬한 기억이 아직 잔상처럼 남아있나 보다.
-해서 : 오늘은 조금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같이 휴가 왔는데. 애들이랑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유나 : 어쩔 수 없죠ㅠ 올라가기 전에 또 봐요!
-해서 : ㅇㅇ 가기 전에 함 봐~
일단 오늘 저녁에 보자는 유나의 제안에는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이랑 확실히 뭔가 관계가 정립된 건 아니지만, 반대로 어떤 정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나를 만나봐야 더 머리만 아플 것 같았으니까.
-Rrrrrrr
그렇게 한창 유나와 톡을 이어가고 있는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여보세요?”
-어. 해서냐? 너 아직 부산이지?
“넵.”
필승 형이었다.
-언제 올라오냐?
“내일쯤 예상하고 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시합 제안서 왔다.
“... 다음 시합이요?”
-그럼 다다음 시합이겠냐. 그리고 방송 출연 요청이 있어.
“방송 출연이요?”
또 예능이나 CF같은 건가? 아니면 인터뷰?
-WFC 관련 방송이다. WFC INSIDER라고.
“WFC INSIDER요?”
그건 미국 방송 아닌가? 갑자기...
-물론 미국으로 촬영하러 갈 필요는 없어. 한국에서 스튜디오를 마련해 촬영할 거라더라. 그 뿐만 아니라 국내 종편에서도 촬영 요청이 왔어. 두호 형이랑 더블로.
“두호 형이랑 더블이라면. 동반 출연을 말 하는 거죠?”
-그래. 아무래도 한국 선수들끼리 맞붙는 진귀한 시합이니까. 그것도 타이틀 샷을 두고.
“두호 형 쪽은 뭐래요?”
-아직 모르지. 일단 양쪽 다 오케이 해야 편성된다고 했어. 아예 특집 방송으로 따로 편성을 잡을 거라고.
“아아.”
기존의 예능이나 토크쇼에 나가는 게 아니라. 아예 특집으로 단발성 프로그램을 편성하겠다는 의미인 듯 했다.
-네가 두호 형하네 한번 연락해봐.
“...넵!”
-그리고 특별한 일 없으면 빨리 올라오고.
“넵!”
그렇게 필승 형이랑 통화가 끝나고.
“시합 잡혔냐?”
“떠블유엪씨 인사이더? 그거 꽤 유명한 거 아냐?”
“최두호 선수랑 붙는 거지?”
친구 놈들이 전화 내용에 대해 하나씩 입을 뗐다.
“있어봐. 전화 한 통만 더 하고.”
일단 친구들의 질문을 싸그리 묵살한 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Rrrrrrrr
무채색에 가까운 기본 통화연결음이 지나고
-여보세요?
두호 형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저 해서에요!”
-알아 인마. 내 폰도 발신자 정보 뜬다.
“하하하.”
-웃기는. 토크쇼 섭외 때문에 전화했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기는. 우리 쪽에도 오늘 아침에 연락 왔으니까 때려 맞춘 거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넌 어쩔 건데?
“전... 뭐. 형 나가면 나가는 거죠.”
-아주 여유 만만하구만?
“네?”
-내 스케줄에 맞춰준다고 하는 걸 보니 아주 여유로운 것 같아서. 이거. 나도 더 타이트하게 일정을 짜야 하나?
...그러고 보니 통화음 너머로 두호 형의 목소리 뿐만 아니라 체육관 특유의 소음들이 들려왔다.
“형 지금. 훈련 중이에요?”
-엉? 당연하지. 이제 곧 오전 1타임 끝날 시간이다. 넌 벌써 한 타임 끝났나 보네?
“...어... 하하. 네. 뭐.”
-살살 좀 해라. 난 나이가 들어서 네 훈련량 못 따라가. 하하하.
이거. 뭔가 죄송스럽기도 하고,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했다.
두호 형은 벌써 한참 전부터 시합 모드로 훈련 중인 것 같은데 난 지금 해운대에서 오늘 뭘 먹을지나 고민하고 있었다니.
-여하튼. 토크쇼는. 그래. 나가자. 서울에서 개최되는 시합에. 매인 카드가 한국 선수끼리의 타이틀샷을 건 시합인데 관심 가져주는 팬들에게 인사라도 해야지.
“...넵.”
-난 아직 한 타임 다 안 끝나서. 다시 훈련하러 간다. 조만간 보자.
“...넵.”
그렇게 두호 형의 전화까지 끝나고.
“최두호 선수? 뭐래?”
“토크쇼 나가기로 했음?”
“아. 속 쓰려. 일단 뭐 좀 먹으면서 이야기하면 안되냐?”
친구들은 전화통화 내내 참고 있던 걸 터뜨리기라도 하는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일단 손을 들어 애들은 진정시킨 뒤
“야. 진짜 미안한데. 나 지금 바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다.”
먼저 서울로 복귀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갑자기?”
“어. 두호 형은. 벌써 시합 모드로 훈련 중이더라. 아마 한참 전부터 시합 모드 들어간 것 같은데. 나도 여기서 놀고 있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미안하다.”
정말 몇 년 만에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휴가였지만, 지금 당장은 휴가보다 시합 준비가 더 중요했다.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벌써? 헐. 빠르네? 아니면 해서 네가 느린 건가?”
“야. 뭐 하냐? 그럼 바로 꺼져야지! 시합이 중요하지 휴가가 중요하냐?”
“너 없어도 우리끼리 충분히 잘 노니까 걱정 말고 올라가. 준현이 저것도 유나 씨 쪽으로 가면 나랑 재현이랑 둘이서 헌팅하고 놀면 됨.”
내가 미안한 기색을 보이기도 전에 쌍욕까지 하며 얼른 꺼지라며 내 짐들을 챙겨주는 친구 놈들.
“야. 대신 시합 때 너네 자리는 제일 좋은 자리로 챙겨둘게.”
“나랑 재현이는 커플로 갈 거니까 총 4장임.”
“나도 두 장임. 총 6장임.”
“근데 갔는데 해서 저 새끼 발리면 어떡함?”
“어떡하긴? 위로 주 사줘야지. 걱정 노노.”
캐리어에 내 짐들을 쑤셔 박으면서 지들끼리 낄낄거리는 친구 놈들.
“야! 그거 구겨지면 안된다고! 아! 막 집어넣지 말라고!”
근데 딱히 도움은 안되는 게 문제였다.
*
-헐! 그래서 바로 올라가신 거예요?
“어. 너네 촬영 중이라길래 일부러 연락 안 했어. 벌써 체육관 앞이다.”
나는 제일 빠른 기차를 타고 서울로 먼저 복귀했고, 체육관에 다 왔을 때 쯤 유나에게 전화가 왔었다.
-시합 준비 면 어쩔 수 없죠... 아쉽당.
“설렁설렁 준비하고 싶지 않아서. 벌써 많이 쉬었다.”
-넵! 그럼 서울 가서 한 번 봐요!
“그러자. 시합 준비 중에는 시간 내기 힘들 것 같고. 어쨌든 한번 시간 맞춰보자.”
-...네...
어쩐지 조금 기운이 빠진듯한 반응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단 아름이와의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진짜 시간 내기가 애매했으니까.
아름이처럼 동네 친구라 가볍게 집 앞에서 5분 10분 이렇게 만날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유나는 왠지 한번 만나면 시간을 빼서 만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 아름이만큼 편하지 않아서 그러려나.
-위잉.
“저 왔습니다!”
유나와의 전화통화를 마치고 체육관에 들어서자 익숙한 퀴퀴한 냄새가 느껴졌다.
여름의 습함에 체육관 곳곳의 매트와 미트 등의 제품에서 풍기는 냄새.
거기에 땀 냄새와 방향제가 섞인 이 오묘한 향.
이런 냄새를 맡고 익숙하고 그립다는 느낌을 받다니. 나도 이제 미쳤는 모양이다.
“어? 내일이나 온다더니. 왜 이렇게 빨리 왔냐?”
아무래도 이번 주가 여름휴가의 피크였다 보니 체육관에도 사람이 많이 없었다.
필승 형과 창섭 형만 남아 체육관 정리를 하고 있었다.
“더 쉬었다간 시합 날 쥐어 터질 것 같아서요. 하하.”
“뭐. 잘 왔다. 쉬는 동안 근육은 좀 뺐냐?”
“어... 음... 살은 좀 붙은 것 같아요.”
“그래? 괜찮아. 금방 빼줄 테니까.”
필승 형은 재밌다는 듯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미심장하게 말 했고.
-끼익
“해서 왔냐? 들어와라.”
안 코치님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와서는 너무 익숙하게 날 안으로 부르셨다.
“그래. 늘어지게 쉬었냐?”
“하하. 늘어지게라뇨. 그래도 계속 체육관 나왔는데.”
부산 내려가기 직전까지 계속 체육관에 나왔으니 실제로는 겨우 삼일 쉬었다. 그런데 늘어지게라니...
“자. 이것 때문에 부랴부랴 온 거지?”
약간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안 코치님이 건네주시는 페이퍼 한 장.
“어디 보자... 서울이고. 11월 말이네요? 메인카드 마지막 시합.”
“그래. 지금부터 달리면 4달 조금 안되지. 3개월은 풀로 돌릴 수 있다.”
“... 두호 형은 벌써 달리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연락해봤냐?”
“네. 아침에.”
“...시합 때문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쫓아왔구만.”
“하하.”
적어도 여름휴가 때문에 졌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두호 형과의 일전은 어떻게 보면 내겐 중간 목표와도 같은 시합이었다.
MMA를 처음 수련하게 된 계기는 '스트리트 파이트'라는 예능 프로그램이었지만, 제대로 프로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두호 형이었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 두호 형과의 시합을 원한다는 건 조금 비약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처음 '프로'로서 이쪽 세계에 도전할 때 설정했던 목표가 두호 형이었다. 뭐라도 눈에 보이는 뚜렷한 목표가 필요했었고, 그때 날 이끌고 목표점을 잡아준 게 두호 형이었다.
"이것 참. 너랑 두호랑 시합이라니. 둘의 스파링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끽해봐야 일 년 조금 지났으니 엊그제 맞죠 뭐."
"그런데 두 사람의 매치 무대가 WFC라니. 그것도 미들급 타이틀샷을 걸고. 아마 내 운동 인생을 통틀어 가장 다이나믹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지금이 될 거다."
"하하하..."
일 년 전만 하더라도 두호 형은 WFC 미들급이 아닌 웰터급 랭커였고. 나는 이제 갓 격투기를 수련하는 초심자에 불과했다.
겨우 일 년 반 만에 두호 형은 WFC 웰터급 챔피언이 되었고, 나는 브로일러 미들급 챔피언을 달성 후 WFC로 넘어와 미들급 왕좌를 넘보고 있었다.
이게 만화나 영화라고 해도 개연성 없다고 욕먹을 만큼 다이내믹한 상황이긴 했다.
"이번 시합의 관건은. 네 체중 관리다. 지금까지도 그걸 위한 휴식이었고."
"... 넵."
"지난 시합 때. 갑작스럽게 상대 선수가 바뀌며 계약 체중으로 들어가서 다행이었지, 제이크가 아니라 브라이언과의 정상적인 시합이 치러졌다면 위험했을거다. 알고 있지?"
"... 네."
점점 감량이 힘들어지긴 했지만 지난 시합 때는 유독 어려웠다.
계체를 위한 체중 관리는 '캠프 기간 중의 체중관리'+'계체 직전 글리코겐 및 수분 커팅'으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글리코겐과 수분 커팅으로 3일간 10킬로그램을 뺄 수 있다면 계체 3-4일 전까지 93킬로 급으로 체중을 조절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계체를 며칠 앞두고 극단적인 수분 제한으로 체중을 목표 체중으로 맞춘 뒤 계체에 임한다.
중요한 건 지난 브라이언전에서는 생각보다 체중 조절이 너무 어려웠다는 거다.
운동을 하면서 평체 자체가 너무 올라갔다.
지난 일 년간 부단한 노력 끝에 지방은 거의 다 걷어냈는데, 근육 무게만으로도 미들급 한계 체중까지 감량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미들급에 있기에는 네 몸이 너무 커졌어. 애초에 네 몸은 미들급 몸이 아니었던 거야. "
"..."
"몸을 키우는 것보다. 줄이는 건 아마 지금보다 훨씬 힘들 거다. 말 그대로 모든 걸 깎아내는 시간이 될 테니까."
"... 넵."
지방을 태우는 일은 별것 아니다.
중요한 건 몸의 근육을 빼는 것.
브로일러에서도 느꼈지만, 슬슬 감량이라는 게 지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평체를 줄이는 건 보통 멍청한 짓이다. 괜히 많은 선수들이 평체를 높여두고 계체 직전에 극도의 감량을 하는게 아니야."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극단적인 감량으로 인해 오히려 퍼포먼스가 떨어지거나 컨디션이 망가진다면 그게 더 문제가 된다. 우리는 이번 시합을 통해 네 퍼포먼스가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계체 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해."
"넵!
"필승이가 훈련 스케줄 짜 뒀을거다. 나가봐."
"넵!"
11월.
두호 형과의 미들급 타이틀 샷을 건 시합까지 3달하고 20일 정도.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훈련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작가의말
사실 투기종목에서는 1체급이 아닌 2-3키로의 차이로도 퍼포먼스가 달라집니다.
역사상 많은 선수들이 체급을 올려서 듣보에 가까운 선수들에게 패배한 기록이 많죠...
그래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본인 골격 대비 낮은 체급으로 감량해서 시합에 임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감량의 고통을 감내하고, 그들이 말하는 감량의 고통은 정말 지옥과 같다거나 두려움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곤 하죠...
그런 의미에서는 파퀴아오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8개 체급이라니. 아무리 경량급이라지만 경이로운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해서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뭐 빠지는 훈련을 감내해야한다는 겁니다.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