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84화 (84/203)

< 84화_한 여름밤의 꿈 >

1.

-해서 : 어? 콘서트 끝나고 바쁘지 않아?

-해서 : 일단 나도 친구들이랑 있어서

나는 유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둘러댄 뒤 아름이 에게 답톡을 보냈다.

-아름 : 친구 누구?

-아름 : 물어보기도 그러네. 준현 씨랑 기태씨 재현씨. 맞지?ㅋㅋ

-해서 : ㅇㅇ 휴가 맞춰서 같이 부산 내려왔거든

-아름 : 너 혼자 빠져나오기 뭐하면 같이 봐도 되고. 나야 사실 따로 보는 게 더 편하지! 헤헤

-아름 : 콘서트 끝나면 별 일정 없어~ 다들 한잔하러 가자는데 왁자지껄한 거 별로 안 좋아해서

흐음...

일단 아름이는 콘서트 준비를 위해 가봐야 한다며 나중에 다시 연락을 준다며 톡을 마무리 지었다.

“야. 술 떨어졌다. 술 사러 가자.”

준현이는 어느새 비어버린 맥주병을 흔들며 날 일으켜 세웠다.

“영은 씨랑 다녀오는 게 좋지 않겠냐?”

“술 사오다 시비 붙으면 어떡해 인마. 영은 씨가 너무 예뻐서. 너같은 덩치를 데리고 가야 시비 안 붙지.”

“뭐 인마?”

준현이와 나는 티격태격 거리면서도 엉덩이를 털며 술을 사기위해 신발을 신었다.

“뭐. 더 사올 건 없겠어?”

“아이스크림!”

“오빠! 저는 오렌지주스!”

“씹을 거 아무거나.”

“괜찮아요. 전.”

일행들의 요구사항을 일단 들어만 둔 상태로 백사장을 벗어나 편의점을 찾아 걷고 있는데

“아름씨였지?”

“엉?”

“아까 톡.”

“...어.”

이것 때문에 나한테 술 사러가자고 한 거였구만.

하여튼 간에 돼지의 탈을 쓴 여우야 준현이 놈은.

“근데. 노선 정해야 하는 거 아냐?”

“...노선이라니.”

“유나 씨나. 아름씨.”

“...”

쩝.

준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안다.

제3자가 보기엔 확실히 유나는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일테지.

하지만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는 조금 애매했다.

그냥 친한 오빠. 친하게 지내고 싶은 오빠. 과연 그 이상의 호감인지 아닌지.

사실 그걸 확인하려면 자주 얼굴 보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럴 처지가 안되는 게 문제였다.

연애에 정신 팔려서 감정소비하고 시간 할애하는 것.

물론 연애가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 중 하나인건 맞지만, 과연 지금 타이밍에서 격투기와 시합들보다 연애가 더 중요한가 라는 질문에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뭐. 그래. 유나 씨야 그렇다고 쳐. 아름씨는?”

“야. 아름이는...”

걘 연예인이잖아.

화려한 세상에서 사는 다른 세상의 사람.

그런데 막상 친해지고 보니 생각보다 아름이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밝은 얼굴 뒤에는 꽤나 그늘지고 힘들었던 과거들이 있었고.

‘그래서 친구인 내게도 잘 해주는 거겠지.’

주변에 사람이 많을 것 같은 이미지의 아름 이였지만, 알고 보니 지독한 집순이에 일 때문에 잡힌 스케줄이 아니면 동네를 잘 벗어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동네에서 사귄 친구니 잘 챙겨주는 거겠지. 애가 워낙 착하기도 하고.

“흐음...”

하지만 준현이 놈은 내 말을 다 듣고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미친놈아. 아름이랑 나랑은 썸이 생길만한 뭔 건덕지도 없었다니까?”

“유나 씨랑은 있었고?”

“음...”

사실 건덕지라는게 대단히 큰 사건이나 이벤트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유나랑은 지난 필승 형의 시합을 본다고 부산을 갔을 때 같이 서울 올라오면서 조금 많이 친해졌지.

“아름씨랑도 자주 봤다며?”

“자주 본거지 오래 본 건 아니잖아.”

“그래도 운명처럼 약속도 안정하고 만났다며. 한국에서도 해외에서도.”

“그건 좀 신기하긴 한데. 신기한 거랑 좋아하는거랑 뭔 상관이냐?”

“나도 모르지. 차라리 대놓고 물어봐.”

“뭘? 아름이한테? 나한테 마음 있냐고? 미친놈이구만 이거.”

잘도 ‘응. 난 해서 너한테 관심 있어.’라고 말 하겠다.

괜히 설레발 쳤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면 그거야 말로 뭐하는 짓이냐.

“근데. 그런 애매한 스텐스가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거. 알아야 돼.”

“... 하. 솔직히 지금은 연애보단 눈앞의 두호 형과의 시합. 거기서 이기면 미들급 타이틀전까지. 더 중요하고 더 신경써야할 게 많아.”

막상 둘 중 한명과 정말 잘 된다 하더라도. 연애 초반에 신경써야할게 얼마나 많은가. 연락도 자주해야하고 얼굴도 자주봐야하고. 이것저것 챙길 것도 많고.

내가 연애를 안해본것도 아니고. 지금은 새로운 연애는 시작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면 차라리 확실하게 선을 그어. 설레발일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희망고문 시키는 것보다는 낫지.”

“... 그런가.”

확실히 내가 선을 긋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를 좋게 봐주는 누군가에게 사서 미움받고싶어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선을 긋는 게 왜 미움을 사는 거냐? 너한테 향하던 호감이 끊어지는 거지.”

“그게 그거지 인마. 박탈감이라는 게 있잖아.”

“그거 못 되 처먹은 심보야.”

“...인정.”

괜히 나중에 더 큰 상처가 되기 전에 선을 긋는 것. 그게 어쩌면 유나도 아름이도. 그리고 나도. 서로에게 더 건전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간에. 우리 현자 새끼. 아직 안 죽었네? 영은씨 만난다고 현자 탈피했는줄 알았더니.”

“뭐래? 술값이나 계산해.”

헐. 당당하게 술과 안주들. 그리고 주문받은 아이스크림과 마실 것까지 계산대에 올려두고는 계산을 요구하는 준현이 놈.

“당연히 내가 하냐?”

“당연히 네가 하지. 난 백수라니까.”

“쩝.”

나도 백수 비슷한 프리랜서인데.

상담료라 생각하고 시원하게 계산해줬다.

“어! 왔다!”

“오빠! 아이스크림!”

이제는 정말 해가 저물어버린 하늘.

일행들은 먹을거리를 사온 나와 준현이를 반겼고

“야. 야. 모래 들어가 모래. 앉아있어.”

나는 살짝 술에 취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일행들을 진정시키며 봉지를 풀었다.

‘일단 지금은 놀자. 괜히 분위기 망치지 말고.’

선을 그을 땐 긋더라도. 굳이 다 같이 놀러온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으니까.

-물끄러미 바라보던 네 고개의 각도를. 날 향해 걸어오던 네 걸음의 보폭을 그 모든 것을 사랑했어.

멀리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멜로디.

아름이의 ‘모두 사랑이었다’가 부산 바다축제 무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 술도 왔으니까. 한잔 짠!”

아무도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는건지.

아름이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우리들 중 축제나 아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

“후우.”

한여름의 밤은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임에도 그 열기를 잃지 않았다.

비단 기온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젊음의 열기 또한 그랬다.

-저기요. 혹시 두분 이서 오셨어요? 저도 친구랑 왔는데...

-저쪽에 자리 펴놨거든요. 술도 있고 안주도 있는데 사람이 없네요. 같이 한잔 하실래요?

해운대 백사장 벤치에 앉아있자니 아직 짝을 찾지 못한 청춘들의 뜨거운 도전과 열정이 눈에 밟혔다.

“해서야!”

완전 백사장 쪽은 아니고 차로변과 맞닿아 있는 사람도 조명도 적은 벤치.

“어. 왔냐.”

우리는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

아름이의 숙소가 이 근처였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초저녁부터 달려서 다 뻗었다.”

유나 네는 영은 씨가 만취해서 유나가 캐어한다고 아까 전에 먼저 들어갔고, 재현이와 기태도 무더운 날씨에 빠르게 달려서 숙소에 뻗어있었다.

숙소에서 나오기 전까지 멀쩡했던 건 준현이와 나 뿐. 준현이는 TV볼 거라며 숙소에 남아있었고 나만 편하게 나올 수 있었다.

“어후. 술 냄새. 술을 얼마나 마신거니?”

“하하. 오랜만이기도하고. 마지막이기도 해서.”

“마지막?”

“이제 서울 올라가면 다시 훈련 스케줄로 돌아 가야하니까. 식단도 조절해야하고.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도 마지막이지.”

“아아.”

물론 지금도 아주 편하게 먹고 마시는 건 아니었다.

최대한 기름진 것과 탄수화물은 피해가면서 나름대로 양심의 가책을 덜 받는 음식들 위주로 먹고 있었으니까.

“후움. 그러면...”

“응?”

“마지막 마시는 술! 나랑도 마시자. 헤헤.”

“술?”

“응! 지난번에 홍대에서도 너네 술먹는 거 보기만 했잖아.”

아아. 아는 언니랑 한잔 하러 나왔다고 했었을 때를 말하는 거구나.

“뭐. 콜. 여기서 조금 더 먹나 덜 먹나. 그게 그거지 뭐. 근데 어디서 마시게?”

“음... 너넨 어디서 마셨어?”

“우리? 우리야 그냥 백사장에 돗자리 펴고 마셨지.”

“우아... 좋았겠다. 친구들이랑 넷이서 마신거야?”

“... 어...”

순간 뭘 잘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문이 살짝 막혔었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편하게 술자리도 잘 가지지 못하는 아름이는 백사장에서 돗자리를 펴고 술을 마셨다고 하니 부러워하는 눈치였고, 거기다 대고 유나 네랑 섞여서 술을 마셨다고 하기가...

“아니. 아는 동생들도 부산에 와 있어서 같이 마셨어.”

어렵긴 뭘 어려워.

몇 시간 전에 선을 긋기로 했으니 이런 건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 해야지.

“아는 동생들? 남자?”

“아니. 여자애들. 너튜브 하는 애들인데 부산 여행 영상 찍으러 왔다고 해서.”

“아아... 너튜브 하는 동생들이면 예쁘겠다.”

유나는 확실히 어딜 가도 주목받을 정도로 예쁜 편이지. 영은씨도 평범보다는 예쁜 축에 속하고.

하지만.

“흐음...”

조명이 많지 않은 산책로 쪽의 어두운 곳에서 수직으로 빛을 받은 아름이의 얼굴은. 일반인 기준의 예쁘다 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정도로 예뻤다.

“웅? 왜?”

“아니. 걔들보다 네가 훨씬 예쁘다 싶어서. 괜히 연예인이 아니구나.”

“뭐, 뭐래!”

-퍽!

아오...

얘 생긴 건 여리여리하고 키도 작은 게. 손은 꽤 매웠다.

우리 팀 피스트 체육관을 괜히 다니는 게 아니었어.

“여튼. 부럽다. 밤바다 보면서 술도 마시고.”

“어?”

“난 해외 나가야지 그렇게 편하게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그냥 그런 게 부러워서.”

“흐음... 야. 따라와봐.”

“어어?”

나는 아름이를 이끌고 산책로를 벗어나 편의점 쪽으로 향했다.

“여기서 기다려봐.”

사람이 적고 가로등이 많지 않은 곳.

아름이는 모자도 큰걸 푹 눌러써서 애써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나는 아름이를 밖에 잠시 세워두고 빠르게 편의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을 사서 나왔다.

“뭘 그렇게 산거야?”

“이거? 돗자리랑 술. 안주.”

“설마 백사장에서 마시게?”

“따라와보라니까.

사실 해운대 백사장에서 술을 마셔본 건 나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백사장이라는 곳이 조명이 없어서 사람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곳이더란 말이지.

“저쪽으로 가자.”

“응······.”

벌써 시간이 1시를 넘어가는 늦은 밤이었다.

아직도 백사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초저녁보다는 훨씬 줄어든 상태.

모두들 그들만의 역사를 이룩하러 자리를 뜬 거겠지.

“자. 옆 사람들 아무도 안보이지?”

“그러네...”

그리 멀지않은 곳에 다른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검은 실루엣만 보일 뿐 이목구비는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만 밤이었다.

“뭔가. 뭔가 콘서트장 같다.”

“엉?”

“콘서트장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그 역광 때문에 객석의 팬들이 모두 실루엣으로만 보이거든. 그러면 공연 전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게 보이지만.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어...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

내가 케이지를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했으니까.

뜨거운 열기. 체육관이 떠나갈 듯 한 환호와 함성. 하지만 케이지 안에만 들어가면 주변은 캄캄하고 나와 상대선수 단 둘만 남겨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그 순간이 좋았다. 그리고 그 적막이 다시 함성으로 바뀌었을 때의 간극을 사랑했다.

“헤에. 해서 너도 그런 게 있구나?”

편의점에서 사온 캔 맥주를 홀짝거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살짝 볼이 빨개진 아름이.

“너 내일 일정은 없어? 너무 늦는 거 아냐?”

“웅. 내일 일정 없어. 걱정안해두 돼.”

“생각보다 술 잘 마시네?”

“헤헤. 나 술 잘 마셔!”

근데 너 취한 것 같은데.

밤은 더 깊어져갔고, 주변의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줄어들어 이제는 바다의 파도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아까...”

“응?”

한참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먼 바다를 보던 눈을 내게로 돌리며 입을 여는 아름이.

“그 아는 동생. 친한 동생이야?”

“응? 음... 조금? 격투기 하면서 알게 된 동생인데. 격투기 컨텐츠로 너튜브를 하거든. 그래서 꽤 친해졌지.”

“그래? 후움. 그 동생. 남자친구 없지?”

“어? 어. 없을걸.”

“구래애.”

이건 별로 안 좋았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내가 암만 바보라도 그 정도는 알지.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어쩐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저스트 친구’인 사이에서는 나올 수 없는 분위기랄까.

“해서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어?”

“좋아하는 사람. 없냐구.”

취한건지 아닌 건지. 아주 또렷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질문하는 아름이.

까만 밤바다에 조명도 없는데 쟤 눈은 왜 저렇게 빛날까? 하는 잡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쳤다.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 걸 생각하거나 고민할 여유가 없기도 하고. 누군갈 좋아하고 맘 졸이고. 또 기다리고. 그런 감정소모가 그리울때도 있긴 한데, 지금 나한테는 다른 집중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격투기?”

“어. 든든한 응원자가 있어서 날 지지해주는 그런 게 고프기도 한데. 그렇다고 내가 연애에 올인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나랑 만나면 상대방 쪽에서 많이 희생하고 참아야할 거야. 데이트도 잘 못하고. 시합 때문에 예민해져 있을 수도 있고. 운동보다 뒷전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

“흐음. 그렇긴 하겠다. 생각보다 비슷하네.”

“뭐가?”

“네가 하는 고민. 예전에 내가 했던 고민이거든.”

그러면서 풀어놓는 아름이의 또 다른 이야기들.

사실 연예인이 격투기선수보다 연애에 대한 제약이 훨씬 심하기는 했다.

스캔들 터지면 안 되니 바깥에서 데이트도 제대로 못해. 활동기에는 매니저가 24시간 붙어 다니지. 거기다 바쁘기는 오죽 바쁜가.

“그래서. 주변 연예인들을 보면 연애를 아예 포기하거나. 아니면 아예 공개 연애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더라.”

“그렇구나.”

“나는 한다면. 공개연애가 좋은 것 같아.”

“하하. 그래?”

“나는 언제쯤 남자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응?”

“나. 데뷔 이전에 연습생일 때 만난 남자친구가 있어. 완전 애기 때. 손만 잡아봤다?”

“어. 어...”

“그리고 데뷔 이후에는 한 번도 사겨본적이 없어.”

“...”

또 분위기가 이상해지네.

지금은 연애할 때가 아니라고 충분히 말한 것 같은데. 너무 돌려서 말한 건지. 아니면 얘가 취해서 제대로 못알아들었나?

“나 같은 애는. 여자 친구로는 어떤 것 같아?”

자의식과잉 같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반칙이었다. 누구라도 아름이가 내게 마음을 표현한다고 느낄만한 타이밍이었으니까.

“...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니. 그럴 용기가 없다.

이게 한 순간의 호감이나 호기심일지. 분위기에 취한 것일지.

아름이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 지속성에 대한 문제였다.

만약 지금 아름이의 질문에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해준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정말 쪽빛 가득한 행복한 일만 가득할 수도 있고, 어쩌면 이제까지 내가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절망이 가득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아름이와 만나다 싸운다면. 문제가 생긴다면. 헤어진다면. 과연 그걸 감당하면서 앞으로의 시합들에 집중할 수 있을까?

“뭐가 그렇게 겁나?”

“응?”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내게 꽤나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는 아름이.

“시합은 그렇게 적극적이면서. 싸울 땐 그렇게 저돌적이면서. 이럴 땐 남자애가 왜 그렇게 겁을 내?”

“내가 뭘...”

“지금 내가 무슨 말 한 건지 몰라?”

“...”

어라.

이게 아닌데.

얘가 쎄게 나오네?

“너. 그 너튜브 한다는 동생. 좋아하니?”

“어... 아...니?”

“그럼. 그 동생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

이건 대답하기 애매합니다. 판사님!

“맞네. 그런가보네. 혹시 그 동생이랑 나랑. 저울질 하는 거야?”

“뭐래. 그런 건 아니거든?”

“웅. 반응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네. 확실히 그 동생보단 내쪽인 것 같아.”

이번엔 배시시 웃는 아름이.

“알겠어. 그거면 됐어.”

뭐가 됐다는 건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선 아름이는 그 반짝이는 눈으로 날 빤히 내려다보더니

“너한테도 중요한 순간인 거 알아. 그래서 더 망설여지는 것도 알아.”

“...”

-쪽

그리고는 정말 가벼운 입맞춤.

“그리고. 그런 중요한 순간이니까 응원 해주고 싶은 거야. 대답은 지금 안 해줘도 돼. 서울 가서 체육관에서 봐. 헤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붙잡을 새도 없이 쌩하니 숙소 쪽으로 달려가는 아름이.

한여름 밤의 꿈인 건지.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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