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_제가 나갈게요 >
1.
나는 소란이 일어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에 여러 명의 촬영팀이 움직이려다 보니 길게 줄을 서듯 이동했는데, 나와 엄마는 제일 앞쪽에 있었고 시비는 촬영팀 제일 후미에서 일어난 듯했다.
"이거 우짤낀데? 마. 촬영이믄 다가?"
연어처럼 촬영팀을 거슬러 도착한 후미에는 노란 금발을 한 남자 한명이 있었다. 반팔티와 반바지는 심하게 짧아보였는데 그 밑으로 슬쩍 슬쩍 문신이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근처 촬영 팀 사람에게 물었고
"막내 작가랑 저 남자랑 부딪쳤나봐요. 들고 있던 커피를 쏟았다는데..."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금새 파악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금발 남성 앞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작가님 앞을 막아서며 인사를 건넸다.
"뭐고? 당신이 여 담당자가?"
"아뇨. 촬영팀 담당자는 아니구요."
그러고 보니 촬영팀 담당자는 뭐 하는 거야?
"지금 피디님 시장 다른 골목 인서트 딴다고 잠시 자리 비우셔서..."
그때 등 뒤에서 작게 들리는 목소리.
눈앞의 금발 남성과 문제를 일으킨 막내 작가였다.
"아아. 네. 걱정 마세요.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막내 작가에게 조금 자세한 정황을 물었다.
"우째 되기는. 저 가스나가 팔로 내를 치가꼬 커피 다 쏟고 옷도 배리고. 이 뭐꼬? 이거 우짤낀데?"
정작 대답은 금발 남성에게서 나왔지만.
"그, 그쪽이 절 잡아당겼잖아요! 넘어질 뻔하다가 팔을 잡은 것뿐인데..."
"으쨌든. 느그가 길을 쳐 막고 있으니까 지나갈라 그란 거 아이가. 길을 쳐 막지를 말든가."
잠깐잠깐.
그러니까.
"길을 막고 있어서. 힘으로 뚫고 지나가려고 작가님을 뒤로 잡아당겼다? 그래서 작가님은 뒤로 넘어질 뻔하다가 저 남성분 팔을 잡았고?"
"...네."
"팔을 잡았을 때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쏟은 거고?"
"...네."
어쩐지.
골목 지나오면서 저런 금발을 본 적이 없는데 부딪쳤다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이렇게 된 거였구먼.
"뭐라하노? 이라든 저라든 니가 내 팔 잡아가꼬 커피 쏟은 거..."
"저기요. 내가 지금 이분이랑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좀 조용히 해봐요."
"뭐라고?"
나는 조금 전까지 금발 남성에게 조심스럽던 태도를 지우고 꽤나 강경한 어조로 그의 말을 끊었다. 딱히 조심스러워야 할 만큼 존중해줘야 할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하. 놔. 쉬발."
-휙.
-턱!
남성은 내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듯했는데, 당연하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내게 손목을 잡혔다.
"이것 봐라? 이거 안 놓나? 이거 안..."
-뿌득. 뿌드득
"아! 아!! 뼈! 뼈 빠진다! 뼈!!"
-휙.
"함부로 손 올리지 마시구요. 자초지종 들어보고 다시 이야기하시죠."
나는 남성의 팔을 팽개치듯 거칠게 놔주며 으름장을 놓았고 그제야 그는 조금 얌전해졌다.
막내 작가분께 다시 상황의 a to z 를 듣고 나니 참 답답해졌다.
"이거. 누군가 했드마 강해서 아이가? 격투기 선수? 씨바 어쩐지. 저기요. 프로 선수가 일반인한테 막 힘쓰고 그래도 돼요?"
심지어 이런 양아치가 상대라니.
금발 문신 양아치는 뒤늦게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아주 기세등등하게 나왔다.
어쨌든 우리는 방송 촬영 중이었고 나는 프로 격투기 선수였다.
일반인과 이런 종류의 시비가 붙어서 좋을 게 전혀 없다는 이야기.
"해서야. 무슨 일이니?"
거기다 엄마까지 계신 자리였다.
"움직이지도 않고 해서 너도 안 오고 해서 와봤더니.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일단 엄마에게 대충 상황을 얼버무리고 옆에 있던 다른 작가님에게 어머니를 데리고 앞쪽으로 이동해주길 부탁드렸다.
그 사이 촬영팀을 담당하는 피디가 촬영팀에 합류했고, 무조건적으로 사과를 하는 거로 상황은 마무리가 되는 듯했다.
"이거 안 비나? 손목 뻘게진 거? 점마 오라 해라. 강해서. 직접 사과 안 하믄 나는 이대로 경찰서 갈라니까."
금발 문신 양아치가 날 끌어들이기 전까지는.
"해서 씨... 죄송합니다."
촬영팀 피디는 '스위치 온'의 메인 피디가 아니었다.
아마도 짬 안되는 피디라 부산 촬영팀을 짬 처리 당했겠지. 그러다보니 이런 상황에 적절한 대처를 할 만한 유도리도 권한도 없는 듯했다.
"아니에요. 제가 사과하죠. 뭐."
피디는 '사과 좀 해주세요.'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계속 내게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오늘 이후 볼 일도 없는 사람인데 그냥 사과하고 빨리 상황을 정리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죄송합니다. 촬영팀의 부주의로 피해를 끼쳤습니다."
"그걸로 끝이가?"
"...네?"
"내 손목 잡아가꼬 뻘게진 거. 이거는 사과 안 하나?"
하...
진짜 가지가지 하네.
순간 확 받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불쑥 치밀어올랐지만 이내 두호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시비 때문에 시합에 지장을 줄 수는 없었다.
"... 그것도. 죄송합니다."
"현역 격투기 선수가 일반인한테 이라믄 안되지. 어? 내도 격투기 선수 준비하고 있어서 이 정도로 봐주는 줄 아이소. 어이?"
"... 감사합니다."
-뿌득
꽉 쥔 주먹에서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래도 여기서 마무리되고 정리되는 게 어딘가.
격투기 선수를 준비 중이라. 제발 시합장에서 한번 만났으면 싶은데 아까 멱살 쥐려고 하는 폼으로 봐서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만약 시합에서 만났으면 아주 그냥 뼈를 자근자근 다져줬을 텐데.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시장에서의 시비 이후로는 별다른 문제 없이 촬영이 이어졌고, 일을 마치고 퇴근하신 아버지를 포함해 세 식구가 단란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촬영은 마무리가 되었다.
"고생하셨어요. 낮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촬영상으로는 부모님 집을 나서 서울로 올라가는 장면까지 찍었지만 실제로는 오늘까진 부모님 댁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촬영팀은 부모님 집 이곳저곳에 설치해뒀던 카메라들을 수거하고 있었고 촬영팀 담당 피디는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다시 한번 내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왔다.
"아니에요. 부전시장 쪽으로 가자고 했던 건 저흰데요 뭐. 별 일없이 지나갔으니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 팀에서도 고맙다고 난리에요. 이번 촬영 편집. 진짜 최선을 다해서 좋은 그림 뽑아보겠습니다."
"하하.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촬영팀은 끝까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편집에 최대한 신경 쓰겠다는 말을 인사처럼 남기고 사라졌다.
"후아."
스트리트 파이트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힘들었던 촬영이 끝났다.
부모님들도 뭔가 촬영이라는 생각에 어색해하셨는데, 촬영팀이 떠나고 나니 이제야 조금 편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계셨다.
"고생하셨어요. 촬영하신다고."
"고생은 무슨. 네 엄마가 고생했지. 난 퇴근하고 저녁 먹은 것밖에 없지."
"호호. 난 좋았는데? 내가 언제 또 TV에 나와보겠어? 아들 덕에 호강하는 거지. 그나저나 예쁘게 잘 나왔으려나 모르겠네?"
"하하. 편집에 힘 많이 써준다 했어. 예쁘게 편집해주실 거야."
연초에 한 번 찾아뵀었지만, 반년 사이에 또 할 말이 얼마나 쌓였는지.
오랜만에 만나 함께 하는 시간에 우리는 피곤함도 잊고 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난 피곤해. 먼저 잔다."
물론 아버지는 빼고...
2.
"헐. 그런 일이 있었어?"
"아오. 그때 내가 있었어야 너 대신 그런 양아치 참교육을 시켜주는 건데."
스위치 온의 촬영이 끝난 다음 날.
아침 첫차를 타고 내려온 친구 놈들과 부산역 근처의 밀면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지랄. 홍대에서 기억 안 남?"
"야! 그건 해서 때문에..."
"그때 기태 너 울었지 아마?"
"... 해서야. 재현이 저 새끼 한 대만 때려주면 만 원 줄게."
잘들 논다.
너네도 이제 나이가 서른하나야 친구들아. 제발 철 좀 들자.
"그나저나 준현이 넌 아까부터 뭐하냐?"
"어? 아. 이거."
준현이는 혼자 밀면을 흡입하더니 스마트 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유나 tv."
준현이가 넘겨준 건 한창 해운대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던 유나의 너튜브 방송이었다.
"영은 씨도 나왔구만? 그래서 보고 있었냐?"
"뭐."
쿨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준현이 놈.
"유나씨다! 바로 해운대로 갈 거지?"
"당연하지! 숙소가 해운대니까 체크인해두고 짐 풀어두고 해변으로 고고고!!!"
언제 티격댔냐는 듯 유나와 해운대 바다 이야기가 나오자 의기투합해 크로스하는 기태와 재현이.
남은 밀면을 원샷 하더니 당장 해운대로 달려가자고 난리였다.
건물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와도 숨이 턱 막히는 날씨.
지난여름 라스베이거스가 떠오르는 부산이었다.
'그래도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네.'
막상 휴가라고 일정 잡았는데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쾅!
"다 실었음!"
친구 놈 세 마리의 짐은 양이 꽤 되었기에 SUV를 렌트해야했다.
부산항대교를 지나 반짝거리는 바다를 두 눈에 가득 담으며 도착한 해운대.
"와! 부산이다!"
숙소에 짐을 풀어두고 해운대 백사장 쪽으로 나오니 재현이가 두 팔을 벌려 온몸으로 바닷바람을 만끽했다.
"지랄. 두 시간 전부터 부산이었거든?"
"아냐. 내 마음속 부산은 여기야. 해운대!"
기태와 재현이는 또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는 앞으로의 부산 휴가에 대한 기대감들이 일렁이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어? 야. 저거 '그거' 아니냐?"
"맞네? '그거' 네?"
준현이는 영은 씨랑 만나기 위해 해운대 어디에 있는지 연락 중이었고 기태와 재현이는 백사장 한 곳을 바라보며 지들끼리 수군거렸다.
"그게 뭔데?"
나는 둘 사이를 파고들며 그들이 바라보던 쪽을 봤는데.
"어?"
해운대 백사장에는 꽤나 익숙한 모습의.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무대가 있었다.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3네? 길거리 오디션을 여기서도 하는구나?"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 3의 길거리 오디션. 부산 해운대 편을 촬영 무대였다.
"저기에 그 대표랑 피디랑 다 있는 거 아냐?"
"해서 너 불편하면 딴 데로 가고."
재현이와 기태는 어차피 해운대 백사장은 넓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했지만, 나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저 프로그램으로 인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가보자."
오히려 난 친구들을 데리고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 3의 해운대 오디션을 가까이서 구경하러 다가갔고
"...어라?"
백사장 계단 쪽에 마련된 출연자 대기 텐트 쪽에서 낯익은 금발을 발견했다.
"...야. 너네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어 봐."
나는 친구들에게 알아서 근처에서 기다리거나 놀고 있으라고 한 뒤 길거리 오디션장을 둘러싼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강해서다!"
"헐! 강해서 선수다! 스트리트 파이트 촬영땜에 왔나?"
"시즌 2 하차했었잖아? 사이 안 좋은 거 아냐?"
"그건 모르지. 그것도 연출이었을 수도 있고."
스트리트 파이트 오디션장을 헤치고 나가자 주변에서는 날 알아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강해서 씨?"
인파를 헤치고 촬영팀 쪽으로 접근하자 낯익은 메인 피디와 전두형 대표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정말 반갑다는 듯 건넨 인사.
"어... 그래요. 반가워요."
"...그래. 오랜만이다."
하지만 피디와 전 대표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마치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나타난 거야?' 같은 표정이랄까.
"하하. 친구들이랑 해운대 놀러 왔다가 오디션 있는 것 보고 와봤어요. 어쨌든 저도 스트리트 파이트를 통해서 격투기에 입문했으니까요."
스트리트 파이트를 살짝 띄워주며 '문제를 일으키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뉘앙스로 인사치레를 하고 나자
"그렇죠! 강해서 선수도 우리 스트리트 파이트가 낳은 스타죠!"
"사람이 뿌리를 잊으면 안 돼. 네 근본은 스트리트 파이트지. 처음 널 가르친 것도 스트릿 FC 선수들이고.“
언제 인상을 굳혔냐는 듯 날 반겨주었다.
”그렇죠. 하하. 오랜만에 무대 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요.“
”벌써 일 년이 넘었죠? 강해서 선수가 오디션을 본지도.“
”하하. 그렇죠. 아. 그러고 보니 피디님.“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어지고.
나는 이곳 무대를 찾은 본 목적을 꺼냈다.
”이것도 인연인데. 까메오 비슷하게. 깜짝 절대 고수 이런 거로 한번 출연. 해볼까요? 시청률에도 도움 되지 않겠어요?“
”오! 진짭니까? 아니. 저희야 너무 좋죠. 사실 이런 부탁을 할 입장이 못돼서 그렇지. 강해서 선수가 먼저 해준다고 하시면...“
피디는 완전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입장이었고.
”흠. 흠. 좋겠지. 안 그래도 해서 너랑 스트릿 FC랑 불화설 이런 기사도 많던데. 그런 것도 싹 들어가고.“
뭐. 스트릿 FC랑 불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썩 좋은 관계인 것도 아니죠. 하지만 이번은 한번 넘어가 드릴게요.
”하하. 그러면. 도전자 한 명 정도? 제가 절대고수로 투입해서 오디션 보죠. 어디보자... 저기 저 금발 도전자.“
나는 대기 텐트에 있는 도전자들 중 금발에 문신을 한 양아치 하나를 정확히 짚었다.
”저 친구가 좋겠네요. 저 친구 오디션 때 제가 나갈게요. 절대고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