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_인생 뭐 있나 >
1.
“예능이라...”
-힐끗
나는 필승 형의 말을 받으며 안 코치님의 눈치를 봤다.
“뭘 눈치를 봐? 시간 많이 안 뺐기는 거면 너 하고싶은대로 해라.”
“헐. 진짜요?”
난 당연히 욕먹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쿨하게 말씀하시는 안 코치님이었다.
“당장 시합이 잡힌 것도 아니고. 한 달 두 달 시간 뺏기는 것도 아닌데 뭐. 이 짓도 다 먹고 살자고. 나 편하자고 하는 짓인데. 티비 그거 나가는게 뭐 대수냐.”
“하하. 맞습니다. 역시 형석이 형.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남달라요.”
“넌 좀 조용히 좀 해.”
“예압!”
필승 형은 안 코치님의 말에 호응하다가 한 소리 들었지만 둘 다 표정은 웃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한국 들어가면 말 하려 했는데. 벌써 네 앞으로 광고 문의가 들어온 건이 여럿 있다. 아마 한국 들어가면 한동안은 계속 문의가 들어오겠지.”
“광고요?”
“그래. 지난번이랑은 페이 자체가 달라. 그것도 단발성이 아닌 전속 모델 문의도 있으니 한국 들어가면 한번 봐라.”
“...넵.”
광고라니. 전속 모델이라니.
예능 출연도 약간 현실 감각이 없는 단어이긴 했는데 광고나 전속 모델 같은 단어는 더더욱 현실감각이 없었다.
아니. 내가 뭐라고 날 광고에 써? 모델이라니.
물론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흐흐흐...”
약간 실성한 놈처럼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
“내비둬. 좋은 꿈 꾸나보지.”
아직 안자거든요?
비행기에 탑승해서 눈 감고 광고나 예능에 출연할 걸 생각하다보니 웃음을 흘렸는데 필승 형과 안 코치님이 재미있다는 듯 날 놀려댔다.
“해서 쟤가 은근히 관종 끼가 상당해요. 근데 예능 나가면 막 개인기 같은 것도 있어야하고 그렇지 않아요?”
준현아. 나 안 잔다고. 다 듣고있다잉?
“그러게? 해서 쟤 노래 좀 하냐?”
“애국가도 제대로 못 부르는 놈이에요.”
“춤은?”
“몸을 움직여 본 적이 있었으면 운동신경이 있다는 걸 훨씬 일찍 깨달았겠죠?”
“... 쟤 대체 이제껏 뭐 하고 살았냐?”
“저도 그게 의문이긴 합니다.”
아니. 나 안 잔다니까? 이렇게 사람을 앞에 두고 앞담화 까기 있...
“해서야! 해서야!”
“...어?”
“한국 도착했다. 일어나. 어떻게 열세시간을 한 번도 안깨고 그렇게 푹 자냐?”
“...”
아닌데?
나 안 잤는데?
너랑 필승 형이 나 앞담화 하는 거 분명 다 들었는데...?
“뭐래. 비행기 타자마자 코 골면서 자놓고. 이상한 웃음소리나 내면서.”
“... 아닌데. 진짜 안 잤는데...”
“시끄럽고 빨랑 일어나. 나가자.”
“...어.”
어디까지가 현실이었고 어디부터가 꿈이었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눈을 뜨니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는 거다.
쩝. 많이 피곤하긴 했나보다.
“차는 체육관 애들이 공항 주차장에 갖다 놨다니까 바로 그쪽으로 이동하자.”
“넵!”
약 한 달간 미국에서 훈련했기에 짐만 해도 인당 캐리어 두 개씩은 됐다.
대중교통은 이용할 수 없으니 필승 형은 승합차를 미리 대기시켜둔 듯 했다.
“강해서 선수!”
“강해서 선수다! 저쪽!”
출입국 사무소를 지나 자동문을 열고나오니 전에 없던 광경이 펼쳐졌다.
“안녕하세요. 강해서 선수. ‘스포츠가 좋다’ 김해수 기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주간 스포츠지 ‘코리아 스포츠’의 장덕배 기자입니다.”
이전까지 한국 입국에서 기자들을 만난 적은 없었는데.
무슨 아이돌 입국 촬영처럼 대단히 많은 기자단들이 모인 건 아니었지만 얼핏 봐도 대여섯 곳의 매체에서 나온듯한 기자들이 앞 다투어 날 향해 달려들었다.
“죄송합니다. 강해서 선수가 시합을 마치고 이제 막 한국에 들어와서요. 인터뷰는 체육관을 통해 따로 일정을 잡아주세요.”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필승 형과 창섭 형이 기자 분들을 제지하는 동안 큰 문제없이 공항을 빠져나올수는 있었지만 이런 경험이 난생 처음이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야. 얘 왜 이렇게 얼빠진 표정 하고 있냐?”
필승 형은 그런 날 보고 놀리듯 물었고
“기자들은 처음이라서요. 완전 놀랐네요.”
인터뷰야 은솔 에디터나 WFC 매거진에서도 해본 경험이 있다지만 이런 식으로 기자들이 덤벼드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제 오늘 한국에서 가장 핫한 키워드 중 하나가 최두호랑 강해서야. 두호 형은 경력도 오래됐고 이미 한국이라 어느 정도 노출이 된 듯 한데 해서 너는 너무 바깥 활동이 없었으니까. 거기다 해외 반응도 뜨겁고.”
필승 형은 오랜만에 안 코치님이 제지를 하지 않자 신이 난 듯 열심히 말을 뱉기 시작했다.
“요즘은 한국 언론들도 해외 노출을 많이 신경 쓰거든. 해외 스포츠팬들 사이에서 너랑 두호 형의 매치가 핫해지면서 저렇게 기자들도...”
“그만.”
결국 안 코치님에게 커트 당한 필승형의 TMI.
"어쨌든. 지금 한국에서 해서 네 인지도가 두호와 함께 꽤 높아졌다. 덕분에 종합격투기 쪽도 좋은 바람이 불고 있고. 주변 관장들도 입관 문의가 최근 부쩍 늘었다고 하더라.“
“하하. 그런가요?”
괜히 머쓱해지네.
사실 인지도라는 걸 경험할 정도로 바깥을 돌아다닌 적이 없어서 말이지.
기껏해야 집 근처 아지트로 통하는 술집 정도였는데 밤늦게 훈련 끝나고나 들렀으니 인기를 실감할 틈이 없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다는 소리야. 국내외 팬들이 많이 관심 가져주고, 그로 인해 PPV 수입도 생기는 거니까. 팬들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대중의 관심에 감사하고. 그렇다고 거기에 휘둘리지는 말고.”
“넵!”
안 코치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팬클럽이 생각났다.
예-전에 한번 들어가 봤을 때 총 인원이 100명이 안됐던가 그랬는데. 잘 기억도 안 났다 사실.
“해서야.”
그때 드물게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날 부르는 필승 형.
“네?”
“그. 대중의 관심이라는 거.”
“네.”
“분명 좋은 거다. 가만있어도 돈을 불러주고 사람들이 날 찾게 만들어주고. 난 멈춰 있는데 사람들이 날 계속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주고 띄워주지. 그런데 절대 거기 매몰되거나 집착하면 안 된다.”
“...”
“본분은 격투기 선수. 이것만 잊지 않으면 돼. 형님이 이야기하셨 듯 휘둘리지 말라는 말이야. 대중은 네가 잘 할 때는 널 응원하고 지지하지만, 네가 조금만 부진하면 등돌리고 욕할수도 있어. 거기에 일희일비하면 멘탈에도 문제가 생기고 기량에도 문제가 생긴다.”
“넵.”
역시 경험치 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사실 지금은 내 인지도라는 것과 영향력이라는 게 잘 실감도 안 나지만, 그걸 직접 피부로 느끼고 확인하게 되면... 거기에 중독되거나 매몰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내겐 그쪽으로는 확실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조력자가 있었다.
“뭐야.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어?”
“음. 하하. 사실 너한테 말하기에는 조금 낯간지러운데. 나름 나한테는 큰 관심이니까.”
서울에 도착해 각자 집으로 흩어진 뒤.
나는 저녁 늦게 아름이 에게 연락해 서로의 집 중간 어디쯤의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었다.
“아니야. 충분히 큰 고민이야. 사실 많은 연예인들이 그런 고민 없이 인기를 얻고 나서 발을 헛디디는 경우가 많으니까.”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던진 고민이었지만 아름이가 진지하게 공감해주며 나름 심도 있는 대화가 진행되었다.
“사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인기에 도취되곤 해. 내가 본 사람들만 해도 하나둘이 아니지. 특히 어린나이에 성공할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어.”
“다행이네. 난 어린나이가 아니라서.”
“성공이라는 단어를 쓰기엔 너나 나나 아직 한참 어린 나이지. 사회에서 우리 동년배들이 이제 초년을 보내고 있는 걸 생각하면.”
“엄...”
동안의 얼굴 때문일까. 아니면 헤헤 거리며 웃는 특유의 천진함 때문일까. 나는 아름이를 나와 같은 나이이면서도 꽤나 어린 이미지로 생각했나보다. 이런 아름이의 모습이 ‘반전’이라고 생각되는 걸 보면.
“아직 스스로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없는 상태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 ‘타인이 평가하는 나’ 에 집착하게 되더라. 대중이 날 좋아하고 띄워주면 내가 뭐라도 된 듯 하고. 대중의 평가. 그러니까 나보다 인기가 없는 사람은 나보다 밑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아름이 너도 그랬던 적이 있어?”
“... 있지. 그래서 대중의 평가에 집착했었던 적이 있어.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사실 아직 연기자로서 설 준비가 덜 됐었거든. 그냥 소속사가 시켜서 시작했던 연기 활동이었지. 그래도 ‘아. 나는 리엘리 손아름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날 좋아해주니까. 내 모자란 연기도 사랑해주겠지’ 라는 생각이 마음 한 편에 있었던 것 같긴 해.”
“아... 음.”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아름이와 개인적인 친분이 생긴 뒤 그녀에 관한 예전 기사들을 한번 싹 찾아본 적이 있었으니까.
‘리엘리 손아름 발연기’ 라는 이름으로 논란이 되었던 사건.
한창 악플을 엄청 많이 받았었다는 기사를 봤었다.
“그때 악플 진짜 장난 아니었지. 리엘리 다른 멤버들은 다 개인활동에 성공하고 있는데 나만 혼자 멈춰선 기분. 대중이 내게 등 돌린 기분. 그들의 평가가 밑바닥을 치자 나 스스로가 되게 가치 없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담담히 말 하면서도 그 안에 참 많은 감정들이 느껴지는 듯 했다.
항상 밝게 웃는 아름이도 그런 단단한 웃음을 갖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었다.
“사실. 진짜 안 좋은 생각까지도 했던 적이 있어.”
“... 엉?”
“헤헤. 이런 말 진짜 너한테 처음 하는데. 진짜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했었어. 워낙 집순이었어서 어두운 방구석에서 읽지 말아야할 악플들을 마약처럼 끊지 못하고 읽어 내리며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으니까.”
밝은 아름이의 모습에서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어두운 이야기.
내 고민을 상담하려 만난 자리였는데 도리어 내가 그녀를 위로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뭐. 지금은 괜찮아. 그때 인연으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내가 계속 연예계 생활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찾기도 했으니까.”
“엉?”
“헤헤. 지난번에 한번 말 했었지? 내 첫사랑 오빠.”
“...어. 음... 어.”
“그때 처음 만났어. 소심한 나랑은 다르게 거칠 것 없이 본인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싫은 티 팍팍 내는 사람. 덕분에 나도 그때 선처 없이 악플러들 다 고소했고. 소송까지도 갔었어.”
“그 오빠가...”
내가 본 옛날 기사가... 기억이 맞다면...
“맞아. 지난번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난다던 백경 오빠야. 헤헤. 고백도 못해봤고 이제는 정말 옛날이야기일 뿐이지만.”
“흠...”
백경 배우면 두유 노? 클럽에도 들어갈 정도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이고... 공개연애중인 여자 친구도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너 고민 들어주다가 내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지?”
“아냐. 뭐.”
“헤에? 반응이 너무 퉁명스러운데!”
다시 또 밝아진 아름이.
하지만 이제는 저런 모습들이 애써 밝아지려 하는 그녀의 노력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어. 남들이 보는 ‘나’는 단지 나의 성과. 혹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들뿐이야. 대중의 관심과 별개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면. 어떤 사랑을 받아도. 어떤 비방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늦은 저녁. 힘 있는 목소리로 내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아름이의 눈은 조명이 반사된 것인지 꽤나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 너는 지금 그런 상태야?”
“헤헤. 아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건데!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
나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라.
“흠.”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 봤다.
까만 밤하늘. 아름이의 눈처럼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
“필승 형. 어제 말 했던 예능. 어떤 거예요?”
나는 아름이와의 만난 바로 다음 날 체육관에 가자마자 필승 형부터 찾았다.
“엉?”
“예능에서 저 섭외 왔었다면서요. 저. 한번 해보고 싶어요.”
“진짜. 형석이 형한테도 말 했어?”
“별 말 안하시던데요?”
안 그래도 체육관 넘어오는 길에 미리 안 코치님한테 물어봤다.
예능 출연해도 되는지.
계약서도 좀 찾아봤다. 시합 외의 활동에 대해서는 수익 배분을 어떻게 하는 건지.
결과는 ‘내 마음대로’ 였다.
예능이 훈련에 지장 갈 정도는 아니었고, 안 코치님과의 계약은 ‘종합격투기 선수로서의 활동’ 에만 국한되어 있어서 TV 출연에 대한 소득은 온전히 내 것으로 취급한다고 했다.
“아. 예능이라도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요즘 많이 보이는 관찰 예능이야. 그냥 너 사는 거 근접에서 촬영하는 거라고 보면 돼.”
“...그게 재미있을까요?”
내가 하는 거라곤 집-체육관-집-체육관 밖에 없는데.
“지금 한국에서 제일 핫한 사람 중 하나가 해서 너야. 그런데 대중은 너에 대해서 너무 모르니까. 다른 스튜디오형 예능같은데 나가는 것 보다 이런 관찰 예능이 더 좋을 거야. 너도 편할테고.”
“음...”
확실히 이런 관찰 예능이 편하긴 할 것 같았다.
쇼에 출연해서 개인기를 보이거나 다른 패널들과 경쟁하고 미션을 하는 것 보다는.
“그냥 친구들도 만나고. 취미도 즐기고. 그러면 되더라. 분량 없으면 없는 대로 알아서 편집 할거야.”
“그래요?”
“어. 일단 작가랑 미팅 한번 가져보던지. 작가한테 연락할까?”
당장이라도 스마트 폰을 꺼내 전화를 걸 듯 한 필승 형의 적극성이란.
“네. 뭐. 한번 나가보죠.”
인생 뭐 있나. 한번 사는 인생 재미있을 것 같은 건 다 해보는 거지.
작가의말
아름이의 이야기는 제 전작인 ‘천만 안티팬 배우님’ 20화-24화 초반(무료 분량입니다)를 함께 보시면 더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