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_because I'm a strong >
1.
“오우. 제발.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줘.”
미국 텍사스 주 델러스.
이곳의 5월은 한국의 여름과도 비슷한 덥고 건조한 날의 연속이었다.
“내배엽이니 중배엽이니 외배엽이니.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세 가지 체형으로 나뉘겠어?”
우리는 델러스 아메리칸 에어라인스 센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체육관에 훈련캠프를 차렸다. 레이첼의 전폭적인 메세나 덕분에 훌륭한 코치진을 구성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고 이곳 텍사스에 오기 전까지는 출국 전까지 한국에서 심건오 선생님의 집중 코칭을 받았었다.
“그냥 다 같은 사람이야. 식단을 지키고 운동을 했는데 살이 안 빠지면 식단이 잘못됐거나 운동을 잘못 했겠지. 개개인의 차이가 있는 거지 제발 구시대적인 배엽론 좀 이야기 하지 마.”
“아니 그래도 사람의 체질이라는 게...”
“오우. 퍼킹!”
필승 형은 이곳 체육관에서도 배엽 론을 이야기하다가 한차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게. 하지 말라니까요. 형.”
“야. 넌 한국 사람이 어? 사상의학 이런 거 몰라?”
“어휴...”
이 형은 투 머치 토커에 아는 건 많은데, 너무 잡다하게 안다.
뭐랄까. 얕고 넓은 지식이랄까.
“배엽 론은 미국에서는 이미 우리 아버지 세대에 사장된 이론이야. 특히 아시안 들이 배엽론이나 혈액형. 이런걸 들고 오는데, 그러니 무시를 당하는 거야.”
“끄응...”
어렵게 초빙해온 컨디셔닝 코치 코이델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건 뭐야?”
이번에는 필승 형이 코이델 코치가 가져온 훈련용품 하나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트레이닝 마스크라고 고지대에서 운동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는...”
“오 마이 갓.”
아까와는 반대로 필승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이건 산소 공급을 제한해서 체력 회복력이라든지 호흡근이라든지...”
“오우. 오케이. 코이델. 지금 해서에겐 남은 지방을 태우는 일이 중요해. 그렇지?”
“그렇지?”
“이걸 끼면 지방을 태우기가 어려워져. 그러니 이건 빼놓자.”
“트레이닝 마스크를 끼면 왜 지방을 태우기가 어려워지지?”
“후우. 헤이. 코이델. 혹시 ATP나 TCA를 알아?”
“...왓?”
“그러면 유산(lactic acid)은 알아?”
“...들어는 본 것 같아.”
“짧게 말해줄게. 짧은 시간 사용하는 이런 마스크로는 실제 고지대와 같은 운동 효과. 보기 어려워. 그리고 산소 공급을 제한하는 운동을 하게 되면 운동 퍼포먼스가 떨어지고 지방을 태우기도 어려워. 그러니 이건 빼고 하는걸로. 오케이?”
“...오케이.”
오. 이번에는 뭔가 필승 형의 승리인 것 같았다.
준현이도 ‘이번엔 필승 형님이 한방 먹인 것 같은데’ 라고 말 했으니까.
“자. 자. 두 분 그쯤 하시고. 다시 훈련 시작하시죠?”
나는 지금 몸의 밸런스를 잡는 훈련에 한창 매진 중이었다.
밸런스를 맞춘다는 게 단순히 균형만 잡는다기 보다는 자주 쓰지 않았던 신체 부위와 자주 쓰는 신체 부위의 근력 및 순발력. 반응 속도까지 어느 정도 밸런스를 맞추는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
“좋아. 한 타임 끝났다. 전력 분석 쪽으로 넘어가자.”
“넵!”
필승 형은 종일 내게 붙어서 트레이닝 스케줄을 관리해주고 훈련 동선까지도 체크해줬다. 준현이가 없을 때는 통역 역할도 맡아주면서.
“오. 미스터 강. 힘들죠?”
“하하. 할 만합니다.”
체육관 안쪽 미팅 룸에서는 전력분석관인 데이비드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둔 상태였다.
“브라이언. 아주 강한 선수입니다. 일단 이걸 먼저 보시면...”
전력 분석관이라는 포지션은 사실 꽤나 낯설었다.
보통 안 코치님과 내가 직접 상대 선수의 영상을 분석하며 전략을 짰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전문적으로 전력 분석을 하는 사람을 고용해봤다.
“브라이언은 거리 싸움에 능숙합니다. 앞손을 아주 영리하게 사용하는 선수에요. 머리를 뒤로 두고 앞손으로 상대방의 시야도 가리며 전진을 한차례 방해하죠.”
“앞손으로 레프트를 날렸을 때, 그게 상대방에게 유효한 타격을 준 경우 약 70프로의 확률로 라이트 오버헤드 펀치를 꺼내듭니다.”
“자신보다 리치가 긴 선수에게는 킥을 잘 사용합니다. 킥의 유효 타격 이후에는 라이트보다 높은 확률로 레프트를 먼저 꺼내듭니다.”
전력 분석관은 지난 브라이언의 시합들을 모두 체크하고 면밀히 분석해 아주 작은 습관이나 사소한 확률까지도 수치화 해 보여주었다.
“와... 이런 식이면. 상대방 쪽에 전력 분석관이 있으면 저도 완전 다 까발려지겠네요.”
“맞습니다. 그래서 보통 전력 분석관이 붙으면 해당 시합의 전략까지 모두 터치합니다. 이번 시합에서는 라이트를 최대한 아끼라든지. 킥 이후에는 항상 어떤 행동을 하라던지. 그것들이 모두 다음 시합에서의 정보 혼선을 줄 수 있는 항목들이 됩니다.”
“...그렇군요.”
그냥 잘 싸워서 이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든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해결 방법이 서너가지가 있다면 그 중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석해 가장 높은 확률로 상대방을 유도하고 조금 더 손쉽게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는 겁니다.”
“넵.”
지난 캠프 때도 느꼈지만.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돈이 있으니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만 열심히 할 수 있어 그게 너무 편리했다.
전력 분석관은 브라이언의 버릇과 대처방법. 그에 따른 가장 효율적인 전략과 전략 이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훈련들까지 제시하며 큰 힘이 되었고.
“흐읍!”
“하나 더!”
“후우. 후우. 흐읍!!”
나는 주변에서 서포트 해주는 대로 그저 열심히 땀만 흘리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WFC 264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
“해서야. 인터뷰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래?”
“인터뷰요?”
오픈 워크아웃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아침.
한창 막바지 훈련과 수분 커팅을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WFC 공식 매거진에서 온 인터뷰 요청이야. 어쩔래?”
“공식 매거진이요? 그러면 해야죠.”
브로일러에서 WFC로 넘어오면서 느낀 점은 ‘무조건 흥행성이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당장 일주일 후 나와 맞붙을 브라이언만 하더라도 실력으로는 흠 잡을 데 없지만 텔론 회장과의 마찰 때문에 근 일 년 가까이 시합을 갖지 못했다.
필승 형은 ‘브라이언이 가진 실력만큼이나 흥행성만 갖추고 있었어도 절대 이렇게 방치는 못했을 거다.’ 라고 말 했었다.
PPV 수입이 주가 되는 WFC이니만큼 관객이 열광하고, 또 관심이 높은 선수의 시합은 돈이 됐다. 그리고 돈이 되는 시합을 애써 외면할 WFC가 아니고.
“바로 오늘 가능하냐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죠.”
이미 시합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라 고강도의 훈련은 하고 있지 않았다.
적당히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수준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기에 인터뷰 스케줄이 부담가지는 않았다.
“실례합니다.”
인터뷰 요청에 응하고 채 반나절이 지나지 않은 오후에 WFC 매거진 사람들이 체육관을 찾았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강. 저는 오늘 인터뷰를 진행할 캐넌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인터뷰는 준현이를 끼고 진행이 되었는데 영상 촬영은 없이 그냥 인터뷰어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우선. 브로일러 미들급을 제패한 후 단 한 번의 방어전도 치르지않고 WFC로 이적하셨습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음. 브로일러 챔피언은 WFC 이적에 대한 제한 조항이 있습니다. 물론 다행히도 제 계약서에는 그런 조항이 없었지만요. 중요한 건 제가 챔피언을 달성했을 시기에 브로일러와의 계약이 끝난 시점이었고 새로운 계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아. 그러면 재계약시에 WFC 이적 제한 조항이 새로 생겼겠군요?”
“네. 그래서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WFC로 이적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실. 저는 브로일러의 끈도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물어도 될까요?”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WFC의 텔론 회장님과 브로일러의 오스만 회장님을 모시고 브로일러 챔피언 자격을 유지한 채 WFC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지난번 브로일러 챔피언 달성 후 :LA에서 두 단체의 회장을 모셔놓고 했던 딜에 대한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입 밖으로 꺼냈다.
“아쉽게도 아직 두 단체는 함께할 수 없다는 대답과 함께 어쩔 수 없이 WFC로의 이적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MMA 시장 또한 복싱처럼 각 단체들의 자유로운 교류가 가능해진다면 좋겠습니다.”
“이거. 아주 민감한 발언이군요. 좋습니다. 다음으로는 이번 WFC 데뷔전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이번 데뷔전 상대는 브라이언 선수로...”
이어지는 질문은 데뷔전 상대인 브라이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길 수 있는지 등의 뻔한 질문들이었다.
“저는 사실 브라이언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제가 MMA를 접한 지 이제 겨우 1년정도 됐거든요. 지난 1년간 시합이 없었던 선수라 시합제안서가 왔을 때 조금 기분이 나빴습니다. 뭐야? WFC가 날 무시하나? 그래도 브로일러 챔피언 출신인데 이런 듣보잡을 붙여준다고?”
“하하하. 그렇군요. 브라이언 선수가 최근 경기가 없긴 했죠. 하지만 최근 시합이 없다는 이유로 방심해도 좋을 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닐텐데요.”
내가 상대 선수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무시하는 발언을 하자 오히려 신난 듯 한 반응을 보여주는 인터뷰어.
“이번 시합에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승자는 WFC 웰터급 챔피언이자 미들급 왕좌를 노리고 있는 파이터. 최두호 선수와의 시합이 예정되어있죠. 미들급 타이틀 샷을 걸고요.”
“맞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죠. 타이틀 샷을 걸고 웰터급의 왕자와 겨룰 상대가 누구인지!”
“그래서인지 몰라도. 브라이언은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지금 제가 신경 쓰고 있는 상대는 최두호 선수입니다. 미첼 코너의 앞에 서기 위해 꺾어야 할 선수는 최두호 선수이니까요. 브라이언은... 뭐. 그냥 지나가는 휴게소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하하. 이거. 아주 입담이 좋은 선수가 WFC에 등장했습니다. 일본이나 한국 쪽 선수들은 모두 말을 아끼고 조심성이 많은 편인데 미스터 강은 아주 거침없군요?”
확실히 WFC도 그렇고. 지금 날 인터뷰하는 인터뷰어도 그렇고. 뭔가 화제가 될 만하고 자극적인 걸 좋아한다는 느낌이었다.
“MMA를 수련하고 나니 알겠더라구요.”
“그게 뭡니까?”
“저보다 강한 상대가 없다는 걸요. 제 이름이 강해서 인데. 영어로 제 소개를 하자면... because I'm a strong 정도가 될까요? 하하.”
“오! 미스터 강은 강하기 때문에 상대가 없다?”
“뭐. 어딘가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가 제 눈으로 직접 본 사람 중에선 딱히?”
“와하하하하. 이거. 인터뷰에 나가도 좋은 내용. 맞죠?”
“그럼요.”
준현이 놈은 조금 불편한 듯 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지금 내가 느낀 WFC는 일종의 ‘쇼’ 라는 거였다.
WWF와 다른 점은 시합만은 진짜라는 정도?
나는 챔피언 타이틀까지. 내가 목표로 한 곳 까지. 빙빙 둘러서 갈 생각이 없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빠르게 나아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퍼포먼스와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어그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인터뷰가 좋은 분위기 속에 끝나고 며칠 후.
-웅성. 웅성.
-찰칵. 찰칵.
WFC 264 시합을 3일 앞둔 수요일.
오픈 워크아웃을 위해 찾은 행사장에서
“이봐. 네가 난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지껄였던 놈이야?”
웬 백인 떡대 아저씨가 내 앞을 가로막고 위협적이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어... 하이? 나이스 투 미츄? 브라이언?”
얘. 벌써 그 인터뷰 기사 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