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_WFC264 >
1.
“당연히 해야지.”
미국 뉴욕의 한 체육관.
조금 전까지 열심히 운동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땀방울들을 닦아내며 브라이언이 한마디 내뱉었다.
“일정은 어떻게 잡는 게 좋겠어?”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가능하지만. 그래도 한 달은 집중해야겠지.”
지난 일 년간 시합 없이 훈련에만 매진했던 브라이언.
시합 일정이 잡히지 않았을 때의 훈련은 쇠를 달구어 언제든 두드릴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라면, 시합 일정이 잡힌 후의 훈련은 달구어진 쇠를 상대방에 맞추어 모양을 잡고 두들기는 것에 가까웠다.
브라이언은 스스로를 충분히 달아오른 쇠와 같은 상태라고 생각했기에 시합 준비 기간으로 약 한 달간의 집중 캠프를 이야기했다.
“미스터 강이라는 친구. 브로일러에서 데뷔한 이후 6전 무패의 기록을 쌓고 있는 선수야. 그것도 피니시율 100프로의 브로일러 미들급 챔피언 출신.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
“알아. 다만 지금은 이번 시합 너머에 있는 타이틀 샷이 계속 눈에 밟혀. 미첼. 그가 이제야 손에 닿을 듯 하니까.”
“브라이언...”
WFC 미들급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의 리그라는 말이 있었다.
라이트 헤비급이나 헤비급은 ‘사람’의 규격을 벗어난 강자들의 전장이라면, 미들급은 ‘사람’이 재능과 노력으로 닿을 수 있는 한계라는 뜻이었다.
그런 WFC 미들급 챔피언인 미첼 코너는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파이터의 표본이었다.
찬란한 재능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성실함.
상대 선수를 철저히 분석하고 파고드는 치밀함과 결코 방심하지 않는 신중함까지.
브라이언은 이전부터 그런 미첼의 팬이었고 이제는 도전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텔론 회장과의 잦은 마찰로 멀어진 타이틀 샷.
일 년간의 기다림에 지친 브라이언은 브로일러로의 이적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이번 시합을 이겨야 타이틀 샷을 받을 가능성이라도 생기니. 텔론이 무슨 생각으로 시합을 제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브로일러에서 넘어온 챔피언 출신 파이터와의 시합을 승낙한 브라이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패드워크에 들어갔다.
-팡. 팡!
-팡! 펑! 뻐엉!
“헤이! 살살 좀...”
조금 전까지의 훈련과는 그 강도가 달라진 브라이언의 모습에 미트를 잡아주던 코치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지금부터는 시합 준비 모드야. 다시.”
살벌하게 다시를 외치는 브라이언을 보며 그저 미트를 갖다 댈 뿐이었다.
*
“그래? 브라이언과 미스터 강의 시합이라.”
단정하게 빗어 넘긴 금발에 깔끔하게 정리된 수염까지.
길에서 봤다면 성공한 사업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외모의 남자, 미첼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매치의 승자가 웰터급에서 올라온 챔피언과 경쟁할거라고 하더군. 네 자리를 노리는 타이틀 샷을 걸고 말이야.”
“미스터 최. 분명 기억에 있어. 좋은 선수였지.”
미첼은 자신이 처음 WFC에 데뷔했을 무렵. 아시아의 어느 단체에서 챔피언을 거쳐 WFC에 도전하는 동양인 파이터와의 시합을 기억했다.
“체급을 내려 웰터급으로 전향했다는 소식에 꽤나 안타까웠는데 말이야.”
“그때와는 다르지. 너도. 미스터 최도. 어찌됐건 미스터 최도 한 체급의 챔피언이야.”
미첼은 자신의 담당 에이전트가 하는 말에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스미스. 자네가 내 에이전트를 맡은 지 얼마나 됐지?”
“음. 이제 3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러면 나와 미스터 최의 시합을 보지 못했겠군.”
“그렇지. WFC 활동 초창기였다는 것만 알고 있어. 4년 쯤 전이었나?”
“맞아. 한번 그 영상을 찾아봐도 좋을 거야.”
비록 그때보다 미첼 자신도 미스터 최도. 테크닉과 기량은 늘었겠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는 파이터의 혼을 가진 사내였어. 그날은 행운의 여신이 내 손을 들어줬을 뿐, 누가 승자가 되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 경기였지.”
“미첼. 네가 그렇게 말 할 정도의 시합이었나?”
“그래. 내가 아시안 파이터를 경시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야. 이제 육체적 강건함은 아시안들 또한 우리들에 못지않다고.”
실제로 7-80년대에야 아시아인들의 신체적 수준은 경량급 이하에서나 활약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신체 발육이 좋아진 아시아인들은 굳이 종을 나눠 이야기 할 필요성이 없을 정도로 타고난 피지컬들이 우수했다.
“그 말도 맞아. 미첼. 하지만 아직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못해. 미스터 최가 아시아에서는 상대가 없었다지만 WFC에서 좌절한 가장 큰 이유지.”
스미스는 나름대로 미스터 최에 대한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아시아 파이터들에게는 특유의 정신론이라는 게 있어. 그들은 열악하지만 그 선수의 정신과 혼을 단련하지.”
미첼은 눈앞으로 4년 전 어느날의 시합이 그려지는 듯 했다.
기량적인 부분에서는 분명히 자신이 유리했지만 승리를 향한 무서운 집념과 선수 스스로의 혼을 담아 뻗는 듯 한 펀치에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했던 그날 밤의 시합이.
“4년 전 시합에서. 미스터 최에게 단 한걸음. 단 한 번의 펀치를 뻗어낼 체력만 있었다면. 아마 그날의 패자는 내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미스터 최가 최근 미국에서 체계적인 트레이닝까지 하고 있다니. 사실 막연히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
미첼은 말을 하면서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정말로 최두호와의 일전을 기대하는 듯 한 모습을 보였다.
“... 좋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주는 일이지. 훈련은 코치들이 알아서 해 줄테니.”
스미스는 다음 미첼의 타이틀 방어전의 상대가 누가 될지 모르지만, 최상의 조건에서 최상의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준비하겠노라 다짐했다.
2.
“브라이언은 밸런스가 좋은 선수야.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라운드가 조금 더 좋은 선수지.”
확실히 필승 형이 팀 피스트에 들어오고 난 뒤 전반적인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도 분명 체계적인 훈련과 분석이라는 걸 했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과연 제대로 했었나?’ 싶을 정도로 주먹구구식이었다.
그걸 깨닫게 해준 게 바로 필승 형이었고.
“여기서 다 하려고 하지 마. 모든 걸 다 잘하는 선수는 없듯, 모든 걸 다 잘 하는 코치도 없어. 팀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서포트야. 뭐가 부족한지. 뭘 채워야 하는지. 그걸 파악하는 게 첫 번째지. 그 부족한 걸 채워줄 수 있는 코치를 찾고 섭외하는 게 매니저의 일이고.”
두호 형을 제외하고는 WFC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선수.
워낙 마당발 기질이 있어 두호 형과는 달리 WFC 활동 중 다양한 인맥을 사귀었던 필승 형은 팀에 합류하자마자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진짜 섭외해도 돼? 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말 했잖아요. 훈련에 들어가는 돈은 신경 안 써도 된다구요.”
“... 그러면 기구도 좀 사도 되냐? 요즘 코어 훈련하는 무중력 기구랑...”
지금 내게 필요한 코치들의 섭외부터 최신 훈련 트렌드까지.
한번씩 ‘아는 게 많아서 말이 많은 건가?’ 싶을 정도로 필승 형은 박학다식했다.
“시합 일정이 나왔다.”
한창 사무실에서 필승 형과 앞으로의 훈련 계획을 짜고 있는데 안 코치님이 들어오시며 한마디 무심하게 툭 던지셨다.
“아. 오셨어요? ...네?”
“시합 일정 나왔다고. 해서 너 말이야.”
아니. 무슨 그런 걸 ‘요 앞에 치킨 집 오픈했더라’ 같은 느낌으로 말하시나...
“언젭니까?”
“자.”
당연하다는 듯 건네주시는 페이퍼.
“WFC 264.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 아메리칸 에어라인스 센터에서 하네. 메인카드 다섯 개 중 세 번째.”
필승 형은 필요한 정보들만 추려서 내게 알려줬다.
그나저나. 택사스 주라. 또 처음 가보는 동네네.
“두 달 뒤다. 정확히는 한 달하고 보름정도겠네. 첫 시합부터 PPV라니. 역시.”
PPV 시합.
한국에서는 속칭 ‘넘버링 시합’ 이라고 부르는 WFC의 정규 이벤트를 말했다.
물론 브로일러에서도 넘버는 붙어 있었지만 PPV 시합은 아니었다.
PPV는 Pay Per View 라고 해서, 중계권을 판매하는 유료 시합을 뜻했다.
한마디로 시합을 보려면 돈을 주고 중계권을 사야하는데, 이 PPV의 가격이 약 50달러 정도로 한국 돈으로 6만 원 정도 했다.
그런 만큼 WFC 또한 PPV 시합은 돈이 되고 흥행이 될 만한 경기들을 위주로 구성하는걸로 유명했는데, 한마디로 ‘급’이 안 되면 PPV 시합의 메인카드로 나설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브로일러 챔피언 출신이니 파이트 나잇 이런데서 팔긴 아까웠겠지. 브라이언도 최근 시합이 없어서 그렇지 격투기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하고.”
“한 달 보름이라. 한 달이라 생각하고 일정 짜야겠네요.”
“애초에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어. 우리가 한 달 불렀었으니까.”
“넵!”
지난 레이몬드와의 시합이 끝난 지도 한달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또 한달 보름의 시간이 더 주어지는 상황이었으니 시합과 시합간의 텀은 근 세달 가까이 되는 수준.
애초에 피로도나 데미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무리한 일정은 아니었다.
다만 감량이 힘들 뿐.
“너도 이제 슬슬 몸 관리를 조금 해야겠다.”
필승 형은 운동을 마치고 체중계에 올라간 날 보더니 슬쩍 말을 흘렸다.
“네?”
“너. 이대로면 시합 텀을 늘리던지. 아니면 몸집을 줄여야 돼. 이제 슬슬 감량에 무리 올걸.”
미들급의 한계 체중은 185파운드. 83.9kg이었다.
그리고 지금 체중계에 표시된 내 몸무게는
-95.3kg
"너. 식단 조절 계속 하고 있지?“
“...네.”
“그러면 이게 네 원래 평체가 아니란 거. 알지?”
“...”
운동을 시작한 뒤로 척추가 바로 서서 그런지 키도 조금 더 컸고, 근육도 많이 붙었다. 거울에 비춰진 날씬하고 슬림한 몸의 라인은 100킬로그램이 넘어가던 시절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최근 웨이트를 자제하고 있는 몸이라는 거였다.
“해서 너는 선천적으로 근육이 잘 붙는 내배엽 스타일이라 볼 수 있어. 지방도 잘 붙고 근육도 잘 붙는.”
“...내배협이요?”
“아. 내배엽이 뭔지 모르는구나. 내배엽이 뭐냐면...”
“아! 대충 알 것 같아요! 어쨌든 내배협이라서 어떻다고요?”
나는 필승 형의 설명이 시작되기 전에 필사적으로 끊은 뒤 본론으로 다시 이야기를 돌렸다. 내배협이 뭔지는 나중에 검색해봐야지.
“그래? 쩝. 어쨌든. 넌 선천적으로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이야. 요즘 애들이 말하는 근수저라는거지.”
그거야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운동을 한지 1년이 넘어가는데.
거기다 필승 형은 모르겠지만 나는 근섬유도 평균보다 훨씬 가늘었기에 동일 면적의 근육대비 낼 수 있는 힘이 월등하다고 했었다.
“지금 네 골격에서 90키로 초반으로 유지하는 거. 쉽지 않아. 미들급에서 뛰려면 이제는 진짜 수분만 날려야 하는데 그러다 훅 간다.”
필승 형은 진지하게 미국과 서양 쪽의 종합격투기 트랜드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신론을 앞세우는 건 이미 구시대적인거야 인마. 요즘은 감량 10키로씩 이렇게 안한다고. 평체에서 조금 빼거나, 아니면 평체 그대로 시합에 나가는 선수들도 많다는 거지.”
“... 그래서 결론은 체급을 올리라구요?”
“일단은 시합 뛰어야지. 당분간은 유산소 비중을 늘리자.”
“...”
와.
이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오래 붙잡아 뒀다고? 체중계 위에?
“근데. 진짜 내배엽이 뭔지 아냐?”
“... 알아요. 내배협.”
“내배협이 아니라 내배엽인데...”
“아. 어쨌든요! 저 씻으러 갑니다!”
아직도 뭔가 아쉽다는 표정의 필승 형을 뒤로하고 나는 얼른 씻으러 도망쳤다.
체중과 체급이라.
확실히 감량이라는 게 지옥같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고민을 조금 해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
-훅. 훅.
찜통같이 더운 실내에서 땀복을 입고 미친 듯이 줄넘기를 하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헤이. 최!”
그런 사내를 부르는 같은 체육관 소속의 흑인 남성.
“한국에서 전화 왔어. 받아봐.”
“...알겠어.”
줄넘기를 멈추고 제자리에 서자 후두둑 떨어지는 땀방울들.
“여보세요?”
-아빠~!
“우리 유안이구나? 아빠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응! 유안이 아빠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사랑스런 딸의 목소리에 함박웃음을 짓는 그는 미국에서의 한창 훈련에 매진중인 최두호였다.
-아빠 언제 와?
“50밤만 기다리면 아빠 유안이 보러 갈 거야. 조금만 참아보자. 응?”
-응! 유안이는 참을 수 있어!
“착하다. 우리 유안이. 아빠가 유안이 많이 사랑해. 알지?”
-응!
최두호는 한국에서 걸려온 짧은 전화를 핑계로 잠시 휴식을 취했고.
“딸?”
“어. 세상에 하나뿐인 내 보물이지.”
그와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동료 선수는 최두호의 옆에 풀썩 앉으며 가벼운 대화를 시작했다.
“힘들지 않아?”
“힘들지.”
“힘들면 좀 쉬엄쉬엄 해. 타이틀전까지 아직 많이 남았잖아?”
실제로 최두호는 얼마 후 치러지는 WFC 264의 승자와 타이틀 샷을 건 시합이 예정되어 있었다.
미들급에서 한 번의 승리만 취하면 타이틀전에 돌입할 수 있는 상황.
“힘드니까. 죽을 만큼 힘드니까. 그래서 더 열심히 하는 거야. 이 힘든 걸 오래하고싶지 않아서. 더 돌아가다가는 목적지를 보지도 못하고 쓰러질 것 같거든.”
“...왓?”
최두호의 선문답 같은 말에 그게 무슨 말이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동료 선수.
“하하. 무엇보다. 나랑 타이틀 샷을 걸고 맞붙을 선수가 보통이 아니거든. 지금부터 시합 준비모드로 달려야해.”
“보름 뒤 열리는 WFC 264 미들급 매치의 승자가 너랑 붙는 거였지?”
“맞아.”
“브라이언을 말 하는 건가? 그는 확실히 엄청난 선수지. 저평가 되어있지만 미첼도 경계할만한 선수야.”
“...하지만 그는 내게 닿지 못할 거야.”
“뭐?”
“브로일러에서 온 챔피언이 그를 막아설 테니까. 난 그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해. 한 몇 년 후면 몰라도. 적어도 아직은 질 수 없거든.”
“...왓?”
최두호의 동료는 이번에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고,
-스윽.
최두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문득 고개를 들어 체육관 밖 하늘을 바라봤다.
WFC 264가 보름 앞으로 다가온 늦봄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