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_메세나...? >
1.
“...이상이 미스터 강의 데뷔전 리스트입니다.”
“흠.”
WFC의 회장 텔론은 눈앞의 태블릿에 떠 있는 선수 목록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여기. 이쪽은 미스터 강과의 매치를 거부한 선수들이고?”
“네. 부상 혹은 다른 이유들로 완곡히 시합을 거부한 선수들의 카테고리입니다.”
“그래.”
브로일러 미들급 챔피언 출신의 WFC 데뷔.
텔론은 이번 강해서의 데뷔전을 꽤나 신경 써서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강력하게 미스터 강과의 시합을 원하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오호? 그래?”
“네. 여기.”
텔론의 옆에 서 있던 비서관은 태블릿에 떠 있는 선수 하나를 터치한 후 다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흠... 빌리 토마슨. 이 친구는 조금 밋밋하지 않겠나? 미스터 강은 그래도 레이몬드를 1라운드 만에 잡아낸 친구야. 폭력 문제로 방출당하지만 않았다면 우리 미들급에서도 랭커를 노려볼 수 있는 인물이었지.”
“하지만 그는 복역 후 브로일러로 이적하며 망가졌었습니다.”
“흠.”
확실히 레이몬드는 WFC에서 꾸준히 발전했다면 미들급 랭커를 노려볼 수 있을 정도의 유망주였다.
하지만 그 가정은 이미 의미 없어진 지 오래. 복역과 브로일러 이적으로 그는 발전은커녕 유망주 시절의 기량도 회복하지 못했다는 게 WFC 전력 분석팀의 판단이었다. 오히려 적수가 없는 브로일러에서 퇴보했다는 데이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그리고. 감량에 실패하며 컨디션 또한 난조였던 걸로 파악됩니다. 미스터 강의 수준을 정확히 가늠해볼 만한 시합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빌리 이 친구는 안돼. 지금 필요한 건 정석적인 파이팅으로 미스터 강의 모든 걸 끌어낼 수 있는 선수야.”
“그러면. 이 친구는 어떻습니까?”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서 태블릿의 선수 하나를 터치한 후 뒤로 물러서는 비서관.
“흠. 현 웰터급 챔피언. 미들급 타이틀을 노리고 이번에 체급을 올렸다지?”
“네. 그리고. 얼마 전까지 미스터 강과 같은 체육관 소속이었습니다. 듣기로는 미스터 강을 MMA로 끌어들인 은인 같은 존재라고 하더군요.”
“흐음.”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들었다는 듯 기분 좋은 콧소리를 한 번 낸 텔론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일단 킵 해둬. 이런 매치는 두 선수가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되었을 때 붙여야지. 브라이언은 요즘 어떤가?”
이번에는 직접 선수를 터치하여 띄우는 텔론.
“브라이언은... 역시나 훈련에 매진 중인 거로 전달받았습니다. 최근 일 년간 경기가 없어 불만이 꽤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 매치를 잡아주면 되겠구만.”
“하지만 브라이언은...”
“왜? 이번에도 이기면 타이틀 샷을 요구할 게 뻔해서?”
“...”
브라이언 제프.
WFC 미들급에서 4연승을 달리고 있는 선수였다.
다만 텔론이나 WFC와 사사건건 부딪침이 있어 제대로 된 시합을 못 뛰고 있는 선수.
그 실력만은 미들급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기에 타이틀 샷을 주지 않기 위해 텔론이 의도적으로 경기를 잡지 않고 있던 선수 중 하나였다.
브라이언은 이런 텔론 회장의 행보에 ‘이럴 거면 차라리 나를 자유롭게 풀어달라. 브로일러에 가서라도 싸우겠다.’라며 언론 플레이도 시도해봤지만, 텔론은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 강해서의 데뷔전 상대로 브라이언을 내세우겠다니. 비서관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중요한 건 미스터 강 그 친구의 재능이 진짜인지 아닌지야. 만약 브라이언이 미스터 강을 이기고 타이틀 샷을 원한다면... 그래. 그때 가서 이 친구. 미스터 최와 타이틀 샷을 걸고 매치를 붙여줘도 좋겠지.”
웰터급에서 학센을 꺾고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미스터 최. 최두호.
WFC 첫 입성 때 미들급에서 한차례 거꾸러졌다지만 지금은 웰터급 챔피언으로서 얼마든지 타이틀 샷을 요청할 수 있는 선수였다.
“... 그러면 브라이언 제프에게 시합 제안서를 보내겠습니다.”
비서관이 나가고 난 뒤.
“이거. 미첼도 꽤나 흥미로워하겠어. 다음 방어전의 상대가 누가 될지 지켜보는 맛이 있을 테니 말이야.”
텔론 회장은 앞으로 파문이 일어날 WFC 미들급을 생각하며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현 미들급 챔피언. 미첼 코너의 체육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올해 안에 역대급의 타이틀전을 준비하기 위해서.
*
“어... 그러니까. 후원을 해주시겠다? 스폰? 어. 음. 뭐라고 해야 하냐 아름아?”
나는 짧은 영어로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아 아름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스폰서보다는 메세나에 가까워요. 저희는 딱히 후원하면서 강해서 씨의 이미지로 마케팅을 하려는 생각은 없으니까요.”
레이첼이 한국어로 답변을 내려주셨다.
“메세...나요?”
스폰서는 뭔지 알겠는데. 메세나는 뭘까요...?
“그냥 대가 없는 후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문화 예술인들을 위해 저희 가문에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는 예술인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고, 이번에 제가 강해서 씨의 후원을 추천했습니다.”
“어. 음. 감사합니다.”
일단 돈을 준다는데 마다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번 LA 훈련 캠프를 진행해보며 더욱더 뼈저리게 느꼈다. 제대로 된 시합 준비를 위해서라면 돈이라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크게 부담가지실 필요 없어요. 정말로 뭔가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 없이 일방향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원이니까요.”
“사실... 저한테 왜 그런 투자... 아니. 지원을 하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물론 제가 레이첼 씨를 그... 구해준 적은 있지만요.”
“물론 그게 크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예요. 사실 그날. 아름이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거든요.”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두호 형의 타이틀전에 아름이가 오지 못했던 이유까지 포괄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난생처음 길거리 시비에 휘말렸던 레이첼과 그런 레이첼이 안정될 때까지 아름이가 곁에서 자리를 지켰다는 것. 그러다가 나와 연락하는 아름이의 폰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아름이가 연락하는 사람이 자신을 구해줬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레이첼의 요청으로 지금 이 자리가 만들어졌다는 것.
“메세나가 없었다면 발레나 오페라는 중세 유럽 이후 대중화가 되지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죠.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거장들 또한 이런 후원으로 인류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어요.”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미국에는 4대 가문이라고 하는 집안들이 있어요. 그중 대부분이 과거 복싱 시장에 많은 후원을 했었죠. MMA는 이제 갓 태어난 시장이라고 봐도 될 정도고요. 그래서 투자하는 겁니다. 새로운 문화 예술의 장르가 자리를 잡기까지는 가진 사람들의 아낌없는 지원이 필요하니까요.”
“...”
내 또래의 화려하게 생긴 금발 백인 아가씨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사실 현실감각이 별로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가문의 사람이 매니지를 통해 연락 드리도록 할 거예요. 오늘 찾아뵌 이유는 사전에 강해서 선수에게 미리 동의를 받고싶어서였구요.”
이제는 강해서 씨가 아니라 강해서 선수라고 부르는 레이첼.
“... 저는 이제 격투기를 시작한 지 일 년 정도 된 햇병아리 파이터에 가까워요.”
“햇...평... 왓?”
“아. 음. 뉴비기너? 베이비 치킨?”
“아. 오케이. 신인이라는 뜻이죠?”
“네. 네.”
한국어를 너무 잘해서 나도 모르게 편하게 이야기했나 보다.
햇병아리는 못 알아듣네.
“듀픈 가문의 메세나를 받는 선수가 있었어요. 복싱 선수죠. 그가 복싱을 시작하고 나서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아 그 재능을 알아본 듀픈 가문의 사람이 메세나 추천을 했던 거죠. 그리고 결국 그 복싱 선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이 되었어요. 미국의. 전 세계 복싱 시장의 한차례 도약을 가져온 선수로 불리기도 하죠.”
“...”
저거. 설마 카이서스 이야기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이면?
“메세나 추천은 가문의 일원이면 누구나 가능하지만, 그에 대한 검증은 철저히 이루어집니다. 강해서 선수에게 메세나가 결정되었다는 건 최소 저희 가문에서는 강해서 선수에게서 가능성을 봤다는 거겠죠.”
“감사합니다.”
“어쨌든. 저도 강해서 선수의 팬이에요. 이번에 아름이를 통해서 지난 시합들을 다 챙겨봤었어요.”
“아... 그런가요?”
이거 참.
일이 풀리려니 이렇게도 풀리는가 싶었다.
안 그래도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 안 코치님과 상의를 하고 ‘팀 피스트’의 전반적인 조정을 하려 했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어제도 너튜브 알고리즘에 강해서 선수의 영상이 떴었어요. 시합 영상들을 많이 찾아봐서 그런가?”
“네?”
“WFC 부산 시합에 강해서 선수가 잡힌 영상이 너튜브에 떴더라구요. 그치? 아름아?”
“응. 웬 예쁜 아가씨랑 꼭 붙어서 관람하고 있더라.”
“...”
뭔가 천진하게 질문하는 레이첼과 웃으며 말하지만, 한기가 느껴지는 아름이의 대답이었다.
“하. 하하...”
대체 그게 왜 알고리즘에 뜨는 건데...
2.
“흐아암.”
늦은 아침.
잠에서 깨어난 필승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도 없이 물병째 마시는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벅벅벅
격투기 선수에서 일반인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갔다.
평생을 분과 초를 쪼개어 운동했기에 지난 두 달은 정말 운동의 운 자도 느낄 수 없을 만큼 푹 쉬었다.
은퇴 선언과 함께 TV 예능 프로그램 여기저기에서 섭외가 들어왔고, 거기에 출연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망가지기도 했다.
“흐아암...”
-풀썩.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텔레비전을 켜는 박필승.
-이번 벌칙 당첨자는.... 박필승 씨!
TV를 틀자마자 본인이 나온 예능이 흘러나왔지만, 다급히 채널을 돌리는 필승.
굳이 아침부터 자신의 흑역사가 적립된 영상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쩝. 뭐 재미있는 거 없나?”
최근에는 스포츠 각 종목의 레전드들을 모아 볼링이다 뭐다 다른 종목에 도전하는 예능들이 생기면서 박필승에게도 섭외 요청이 들어왔었지만, 영 흥미가 없었다.
-톡!
-창우 : 형님! 뭐하십니까!
-창우 : 오늘 한잔 어떠십니까!
-창우 : 소고기에 소주 한잔! 콜?!
아침부터 필승을 찾는 연락이라고는 최창우의 톡이 전부였다.
필승이 은퇴 이후의 계획을 세우지 않은 건 아니었다.
즉흥적인 은퇴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아직 뭔가. 필승을 움직이게 하는 가슴 끓는 무언가가 없었다.
은퇴 이후 최창우의 체육관을 찾아가 스트릿 FC의 후배들을 가볍게 코칭했던 적이 있었다.
“더럽게 재미없었지.”
국내에 있는 후배들은 수준이 너무 떨어졌다.
물론 열정이야 넘치고 하고자 하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필승의 눈에 차지는 않았다.
WFC라는 세계 최정상 단체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과 교류를 가졌던 필승에게는 스트릿 FC의 챔피언인 최창우마저도 한참 모자라 보였으니까.
-띵동. 띵동.
그때 울리는 벨 소리.
“오늘 택배 올 거 없는데.”
또 인근 교회나 자선단체에서 온 건가 싶어 그냥 무시하고 채널을 돌리던 박필승.
-띵동. 띵동.
-쾅쾅쾅!
-필승 형! 안에 없어요?
“어?”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목소리가 꽤나 귀에 익었다.
-달칵.
“아. 뭐야. 집에 있으면서 왜 대답이 없었어요?”
“...해서야?”
인터폰을 볼 새도 없이 문을 열자 그곳엔 필승의 후배. 강해서가 서 있었다.
“뭐해요? 혼자 집에서. 빨리 나와요.”
“어?”
“운동이나 하러 가죠.”
“...어?”
“저. 지금 WFC 미들 급으로 이적한 거 아시죠?”
“어... 알지.”
“제가 지금 코치를 구하고 있는데. 조건이 WFC 경험이 많고, 미들급 경험이 있으면 더 좋거든요.”
“...”
-씨익
필승은. 오랜만에 다시 하루가 재미있어질 것 같다는 느낌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