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_삼자대면 >
1.
더 큰 세계.
브로일러 252의 파이널 매치.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승리해 챔피언 벨트를 손에 거머쥐자마자 내뱉었던 승리소감으로 인해 경기장뿐만 아니라 인터넷 까지도 난리가 났었다.
“어차피 결정된 건 없어. 걱정하지 마.”
“하하. 당연하죠.”
나름 고민하고 고민해서 내뱉었던 승리소감이었다.
일부러 ‘더 큰 세계’ 로 나가보려 한다는 말만 했지 ‘브로일러를 떠나겠다’ 거나 ‘어디로 가겠다’ 는 식의 의미는 전혀 섞지 않았다.
“박 터지겠구만.”
안 코치님은 이 상황이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시합이 끝난 이후부터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두호 그놈은 실력은 좋은데 너무 점잖았거든. 격투기 선수라면 이정도 퍼포먼스는 있어줘야지.”
아직도 정신론을 말하는 코칭 스타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고지식한 스타일은 아닌 안 코치님.
코치 생활을 하며 이렇게 큰 무대에서 이정도의 관심과 이목집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하셨다. 우리 코치님도 살짝 관심을 좋아하시는 편인가?
“어쨌든. 조만간...”
-똑똑
라커룸에서 시합 이후의 방향을 이야기하며 정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라커룸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안 코치님의 대답과 함께 문이 열리고.
“실례하겠습니다.”
브로일러 측 진행 요원과.
“실례 좀 하겠네.”
오스만 회장님이 직접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오스만 회장이 몸이 달았나보네. 한달음에 달려온 걸 보니.”
안 코치님은 한국어로 우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신 뒤.
“하하. 미리 말씀을 주셨으면 따로 시간을 냈을 텐데요. 이런 라커룸에서 대화를 나누기는 서로 불편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브로일러 스텝과 오스만 회장에게는 웃으며 영어로 반기셨다.
“반기신거 아냐. 뉘앙스가 ‘중요한 대화는 이런 라커룸 같은 곳이 아니라 따로 자리를 마련했어야 하지 않냐’ 라는 말이었어.”
“아. 그래?”
물론 이 모든 건 준현이가 옆에서 작게 통역을 해주고 있었다.
“물론 따로 자리를 만들어야지. ‘우리 챔피언’ 미스터 강을 위해서라면 말이야.”
말에 뼈가 있는 오스만 회장의 대답.
안 코치님이나 오스만 회장이나 얼굴은 너무나도 반가운 듯 웃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칼을 감추고 있는 듯 했다.
“그래. 어떤 자리가 좋겠나. 우리 ‘브로일러의 새로운 챔피언’을 위해서라면 내가 뭔들 못하겠어. 원하는 대담 자리가 있나?”
“그 자리에 ‘새로운 챔피언’으로 참석할지 어떨지는 일이 흘러가는 걸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이것 참. 호의를 베풀었는데 이런 식으로 그 마음을 짓밟는다면 나도 사람인지라 상처를 받는다네.”
“과연 호의만 베푸셨는지 의문입니다만. 그러고 보니 요즘 레일리가 보이지 않는군요?”
오스만 회장은 내가 했던 ‘더 큰 세계로 나가겠다’라는 인터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고, 안 코치님은 브로일러 아시안 사무국의 국장인 레일리 씨를 언급했다.
아마 내가 정확히 모르는 뭔가가 그 사이에 있었던 모양.
-Rrrrrrrr
그때 울리는 안 코치님의 스마트 폰.
안 코치님은 오스만 회장과의 대화가 한창이었기에 창섭 형이 그 전화를 대신 받았고.
“저... 안 코치님. 이 전화는 좀 받아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창섭 형은 꽤나 무거운 공기의 분위기를 깨고 스마트 폰을 전달했다.
“왜? 누군데?”
안 코치님은 오스만 회장과의 대화 도중에도 받아야 할 만큼 중요한 전화가 대체 누구냐는 듯 목소리에 날이 섰었지만.
“그... WFC 텔론 회장이라고 했습니다.”
“...뭐?”
이어지는 창섭 형의 대답에 급히 스마트 폰을 귀에 갖다 댈 뿐이었다.
“여보세요? 네. 지금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빠르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창섭 형이 텔론 회장의 전화라는 말을 하는 순간 귀를 쫑긋 세웠으나 통화 내용은 전혀 듣질 못했다. 준현이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단 표정이었고.
“이거. 오스만 회장님. 적어도 이 자리는 저희가 대화를 나누기 적절한 자리가 아닌 듯합니다.”
“... 방금 텔론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WFC의 텔론 회장께서 전용기를 타고 지금 LA로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정말 똥이라도 씹은 듯한 오스만 회장의 표정.
준현이의 통역을 듣고 나니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오스만 회장은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지만 이후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 뚜렷하게 오가지 않은 날 잡기 위해 이 자리에 왔을 테고, 텔론 회장은 아까 전 내가 했던 승리 인터뷰의 발언 때문에 라스베이거스에서 LA로 날아오고 있는 중일 거다.
“... 정말 이렇게 불편하게 상황을 만들어야겠나?”
“저는 브로일러의 직원이 아니라. 여기 이 선수. 강해서의 매니저로서 선수에게 가장 좋은 무대를 만들어 줄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강해서 선수에게 지금보다 좋은 조건에서 훈련할 수 있고, 더욱 양질의 시합을 제공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죠.”
안 코치님의 말이 끝난 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오스만 회장.
“자넨 꽤나 좋은 매니저로군. 하지만 훌륭한 비즈니스 파트너는 아니야.”
그리고는 몸을 돌려 라커룸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이번은 이쪽이 아쉬운 상황이니 이만 물러가지. 텔론. 그 늙은이와의 약속이 잡히면 우리 쪽으로 연락을 주게. 아. 그리고 레일리는 이제 브로일러에서 찾기 어려울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마지막 할 말만 남기고 사라진 오스만 회장.
“후. 저 이제 숨 좀 쉬어도 되는 부분?”
나는 브로일러 측 마지막 사람까지 라커룸을 나서고 나서야 제대로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할 수 있었다.
“텔론 회장은 새벽이라도 상관없으니 만나길 원한다고 했지만, 선수의 피로도가 있다면 내일 낮에 연락을 줘도 좋다고 했어. 어쩔래?”
이번에는 안 코치님이 몸을 돌려 날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음. 텔론 회장이라. WFC 측 사람들과 우리들. 이렇게만 보는 건가요?”
“오스만 회장도 생각했겠지만. 텔론 회장과의 약속 장소에 오스만 회장 또한 부를 생각이다.”
오우야.
브로일러 입장에서는 나와 텔론 회장의 만남은 자기네 단체의 챔피언이 어떤 위약금도 없이 타 단체, 그것도 눈에 가시 같은 라이벌 단체인 WFC로의 이적을 저울질 하는 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는 자리.
물론 이 손가락은 나와 브로일러. 양쪽을 향할 것이다.
어쨌든 오스만 회장 입장에서는 불편하고 못마땅한 자리일 텐데 그 자리에 과연 나오려 할까? 나는 그게 의문이었다.
“아마 나올 거다. 이대로면 잃는 게 많거든.”
“... 우리는 어차피 WFC로 이적할 생각 아닌가요? 차라리 브로일러측은 배제하고 WFC랑만 이야기 하는 게 낫지 않아요?”
나는 이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각오를 마쳤다.
브로일러 챔피언을 거머쥐자마자 WFC로의 이적이라는 행보는 누군가에게는 멋져 보이고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무례하고 경우가 없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으니까.
“아니. 오늘 오스만 회장을 만나고 또, 텔론 회장의 전화를 받고나니. 재미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네?”
“일단 짐부터 정리하자. 라커룸에서 계속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야.”
벌써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
얼른 정리하고 일어나 라커룸을 나서는데.
“...”
이제야 메디컬 룸에서 나오는 레이몬드가 눈에 들어왔다.
비척비척 거리는 모습이 조금은 안돼 보이기도 했다. 아마 어제 계체 실패를 한 걸로 봐서는 감량에 실패했겠지. 듣기로는 계체 직전 심각한 탈수 증상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수액 처방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보통 대부분의 격투기 선수들이 계체에서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가 탈수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수액 투여가 있었다.
계체에 실패할 걸 알면서도 수액은 맞아야 할 정도로 심한 탈수와 컨디션 난조가 왔다는 건 이미 제대로 된 시합을 운영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과 같았다. 그럼에도 계체에서는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였던 그의 모습이 문득 대단하게 느껴졌다.
‘1라운드에서 그렇게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던 것도 라운드를 길게 가져갈 컨디션이 안되었던 거겠지.’
아마 베스트 컨디션에서 맞붙었다면 오늘의 시합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을 수도 있다.
감량과 컨디션 조절까지도 모두 시합의 일부분이라고 할 만큼 투기종목은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하는 운동이었다. 그런 만큼 마냥 동정하거나 운이 나빴다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뭔가 입맛이 개운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뭐해? 안가?”
“아. 간다. 가.”
저만치 앞서간 준현이의 부름에 다시 발걸음을 떼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세계 2위 단체라는 곳의 챔피언 벨트를 따 냈지만, 아직도 내 발걸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2.
“크흠...”
“흐흠!”
이 양반들은 아까부터 왜 자꾸 헛기침만 하고 있는 거야?
“두 분 대표님들은. 더 할 말이 없으신가봅니다.”
로스앤젤레스 미드씨티에 있는 호텔의 작은 회의실을 빌려 마련한 자리.
“크음. 이건 우리 브로일러의 위신 문제야.”
벌써 몇 번이고 만난 적 있는 대머리 아저씨 오스만 회장과.
“이건 재고의 가치가 없는 말이야.”
지난번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이서스 체육관에서 한번 만난 적 있는 텔론 회장.
서로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사실 이게 꽤나 황당한 조건인 건 알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전례가 없으니까요.”
안 코치님은 어제 라커룸에서와는 달리 꽤나 조심스럽고 친근한 목소리와 태도로 두 회장을 대했다.
“격투기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의 작은 체육관 코치가 두 분 회장님을 모셔놓고 말 하긴 참 모순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아시잖습니까. 종합격투기 시장이 복싱 시장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를.”
“...”
“흐음...”
복싱 시장과 종합격투기 시장.
이 두 시장의 결정적인 차이를 찾아보자면 선수들의 자율성에 있었다.
복싱 선수들은 프리랜서라는 개념에 가깝다면 격투기 선수들은 특정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회사원에 가까운 포지션이었다.
카이서스가 복싱 4대 단체의 통합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격투기 시장은 WFC면 WFC. 브로일러면 브로일러. 이렇게 선수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었다.
“텔론 회장님도 처음 WFC를 일구실 때 미국 복싱 협회에서 얼마나 많은 견제를 당하셨습니까.”
“... 그 말 그대로네. 난 복싱 협회의 모진 탄압을 이겨내고 WFC를 일궈냈어. 이제 와서 내가 이룩한 시장을 다른 단체들과 나눠먹을 생각이 없네.”
“하! 그러면 그렇지. 텔론 저 양반은 굶주린 강도 같은 자야. 자기밖에 모르고 함께 할 줄 모르지.”
“남이 개척한 시장에 숟가락만 얹으려고 하는 심보가 강도 심보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오스만 자네야.”
안 코치님의 중재에도 다시 날 선 분위기를 만드는 텔론과 오스만 회장.
그리고
“자. 어쨌든! 제가 말씀 드리는 건 두 분 단체가 갑자기 극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게 아닙니다. 제가 바라는 건 제 선수. 강해서 파이터가 브로일러의 챔피언 타이틀을 유지하면서 WFC 미들급 경기를 뛸 수 있는 것. 단지 그것뿐입니다.”
독점계약이 기본인 MMA 시장에서 두 집 살림을 하겠다는 말을 당당히 내뱉는 안 코치님이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오늘은 연참 없이 돌아온 자까입니다.
어제 댓글 중 시합에 관련된 댓글이 사실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가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시합 내용이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