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_전야 >
1.
이미 마지막 타임 운동이 끝났던 시점이라 체육관 시계는 오후 10시 부근을 가리키고 있었다.
-Rrrrrr
아직 한국은 겨우 오후 시간대에 접어들었을 시간.
나는 바로 필승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
-그래 인마. 형 귀 안 먹었다. 훈련 잘하고 있냐?
“저야 잘하고 있죠. 은퇴 기사. 이거 뭐예요?”
-뭐긴 뭐야. 보는 그대로지. 이제 은퇴하고 조금 쉬려고.
“... 어디 안 좋아요?”
-안 좋긴. 거뜬해 인마.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얼마 전까지 같이 훈련하고 시합했는데.”
-... 아직은 괜찮은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대. 의사 양반이.
그러면서 덤덤한 목소리로 풀어내는 지난 이야기들.
내가 LA에서 훈련에 매진하는 동안 필승 형은 왼쪽 발목의 치료 겸 정밀 진단을 받기 위해 종합병원을 찾았다고 했다.
격투기 선수는 항상 부상의 위험을 안고 사는 만큼 필승 형을 담당하는 교수님이 있었고, 이번에 병원을 찾았을 때 필승 형은 더 이상의 선수 생활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뇌에 데미지가 너무 많이 쌓였대. 다행히 발목은 뼈나 근육엔 큰 문제 없어서 이제 괜찮아졌고.
“뇌에 데미지...요.”
-이번에 제이크한테 혹을 맞으면서 쓰러졌던 게 컸던 모양이야. 물론 그 전부터 데미지는 쌓여있었지만.
하긴. 필승 형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은퇴할 거라는 말을 했었다. 코치의 길을 갈 거라고.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은퇴를 할 줄은 몰랐다.
-다행히 써밍 반칙 이의제기가 받아들여져서 마지막 커리어가 패배로 찍히진 않을 것 같다.
“노콘테스트 됐어요?”
-어. 무효처리 될 것 같다. 제이크 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날뛰지만, 영상에도 계속해서 엄지를 펴고 펀치를 던졌던 정황들이 잡혔으니까.
그래. 그 새끼 고의였다니까.
“다행이네요. 그래도.”
-내 걱정 하지 말고 인마. 네 타이틀전이나 신경 써. 형은 벌써부터 예능 섭외 엄청 들어온다. 은퇴한다니까 예능 피디들이 어찌나 찾아대는지. 너도 필요하면 말해! 형이 꽂아줄게!
“어... 저는 이제 예능은 별로...”
제 생에 예능은 스트리트 파이트 하나면 충분할 것 같거든요.
어쨌든 갑작스런 은퇴 소식에 심각한 후유증이나 문제가 생긴 건가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목소리도 꽤나 힘 있고 밝았고.
-그래. 들어가라. 형은 밥 먹으러 갈란다. 이제 감량 걱정 없이 먹고 싶은 거 다 먹어야지.
“하하. 알겠어요. 형. 벨트 가지고 한국 갈 테니 한국에서 봐요.”
-파이팅!
“넵! 파이팅!”
우려와는 달리 꽤나 기분 좋게 끊은 필승 형과의 전화.
그건 그렇고 다시 생각하니 불쾌하네. 제이크 디아즈. 언젠가 꼭 케이지 안에서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찰칵. 찰칵.
브로일러 252.
봄의 시작을 알리는 3월의 꽃바람과 함께 브로일러가 야심 차게 준비한 미들급 타이틀전이 포함된 시합이었다.
WFC와 브로일러의 규모에 대한 차이는 워낙 유명했지만, 그중에서도 미들급은 거의 불모지라 할 정도로 WFC와 격차가 있었던 브로일러.
그러던 중 WFC에서 연승을 달리다 폭력 범죄 때문에 퇴출을 당했을 뿐, WFC에 남아있었다면 충분히 랭커로 성장할 수 있었을 거란 평가를 받는 레이몬드와 혜성처럼 나타나 세계 격투기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동양인 파이터 강해서의 타이틀전은 꽤나 좋은 홍보 거리가 되었다.
“레이몬드씨는 그러면 이번 시합의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은 너무 많이 받아서 지겹군요. 그는 이번 주말 시합에서 심판에게 잘 보여야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정신이 남아있을 때 심판의 스탑 사인을 듣고 싶다면 말이죠.”
그리고 이번 매치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레이몬드 아파치는 오픈 워크아웃에서 기자들을 모아두고 상대 선수인 강해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케이지에 올라 멍청한 상대 선수를 심판이 말릴 때까지 두드려 패는 것뿐입니다. 그의 커리어가 대단하다고요? 이제껏 그가 싸웠던 상대들은 무명의 선수들일 뿐입니다. 그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했어요.”
WFC에서 퇴출당했던 레이몬드의 눈에 브로일러 미들급의 다른 선수들은 성에 차지 않는 사람들 뿐이었다.
실제로 브로일러로 이적 이후 3번의 시합을 가졌고 모두 1라운드 안에 승리를 가져가며 브로일러와 WFC의 격이 다름을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멍청한 챔피언이 부상으로 은퇴만 하지 않았어도 내 허리에는 이미 벨트가 둘러졌을 겁니다. 나는 벌써 일 년이나 기다렸고,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번 주말. 1라운드가 끝나기 전에 미들급 챔피언 벨트는 제 허리에 감겨있을 겁니다.”
SNS같은 걸로 문제를 일으키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성격 자체가 다혈질에 참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람들의 평가처럼 불같았던 레이몬드는 바로 뒤에서 자신의 인터뷰를 듣고 있을 강해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레이몬드의 공개 훈련이 끝나고 이어진 강해서의 공개 훈련.
가벼운 공개 스파링과 훈련이 끝나고 어김없이 간단한 인터뷰 시간이 다가왔고.
“아. 제 훈련에 앞서 공개 훈련을 했던 사람이 레이몬드였나요? 저는 이번 시합의 언더카드 선수인 줄 알았습니다. 너무 수준이 떨어져서. 죄송합니다. 레이몬드 선수. 제가 레이몬드 선수의 영상을 한번도 보질 않아서 못 알아봤나 봐요.”
강해서는 ‘앞선 레이몬드 선수의 인터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레이몬드 선수가 아직 가지 않고 저기 서 있습니다. 한 말씀 하신다면?”
“어. 훈련이 아까 끝났는데 왜 아직 안 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제 사인이 받고 싶어서 기다리신 거라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여기 펜과 종이 좀 가져다줄래요?”
-와하하하하하.
자신의 도발에 상대 선수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지켜보려고 남아있던 레이몬드는 강해서의 가벼운 농담에 귀까지 빨개졌고.
“우리 팬이 되게 수줍은 성격인가 봐요. 사인을 해준다니까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졌네요. 이러다 케이지에서 팬 미팅을 가지면 놀라서 쓰러지는 건 아닐지 걱정되네요.”
-하하하하하.
강해서의 통역을 맡은 김준현의 입에서 ‘샤이 보이’ 라는 단어가 나오자 다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는 기자들과 관람객들.
“이거 놔봐! 저 자식의 혀를 뽑아버릴 거야!”
레이몬드는 기자들과 일반인 관람객들이 있음에도 화가 폭발한 듯 공개 훈련 무대로 뛰쳐나갈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코칭 스텝들과 브로일러 가드들은 그런 레이몬드를 막기 위해 온몸으로 막아섰고, 그 장면은 기자들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며 브로일러 252 오픈 워크아웃은 그 막을 내렸다.
2.
“어휴. 오늘도 멱살 잡히는 건 아니겠지?”
계체량을 위해 이동하는 중에 준현이가 너스레를 떨며 한마디 뱉었다.
“음. 레이몬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조심해라.”
나는 그 말을 받아주며 진지한 표정으로 준현이에게 조심하라고 했다.
레이몬드가 WFC에서 퇴출당한 이유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반인과 시비가 붙어 주먹을 휘둘러 폭력행위로 복역을 했기 때문이다.
술자리라거나 약을 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햄버거 같은 걸 먹다가 일반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프로 격투기 선수.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봐도 레이몬드의 ‘분노조절장애성 사건’ 들을 찾아보기 쉬웠다.
전 여자친구를 폭행했다거나 코칭 스테프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으니 상대 선수의 통역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지 말란 법도 없었다.
“걱정 마. 빵형 때의 교훈이 있지. 통역 끝나면 해서 네 옆에 딱 붙어 있을 거다.”
“그래.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나도 최근 들어 영어 회화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자. 자. 들어가자.”
브로일러에서 꽤나 신경을 쓴 티가 나는 이번 시합은 오픈 워크아웃부터 계체량까지 꽤나 인기가 좋았다.
특히 지난 오픈 워크아웃 때 레이몬드와의 트러블이 기사화되며 이번 계체량은 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저기. 오스만 회장이다.”
무려 오스만 회장이 직접 계체에 직접 행차했으니까.
“오랜만에 보네. 빡빡이 아저씨.”
브로일러 초창기에는 계체량에 오스만 회장이 꼭 참여했다고 들었지만, 최근에는 오스만 회장이 계체량에 모습을 비추는 일이 드물다고 했다.
사실 이번 시합을 끝으로 브로일러와의 계약을 정리하려는 내 입장에서는 꽤나 불편하고 부담스럽긴 했다. 괜히 미안하달까.
“자. 자. 준비해.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넵!”
안 코치님은 그런 내 심경을 눈치챘는지 오스만 회장이 안 보이도록 몸으로 가리며 날 다독였다.
-강해서 선수. 계체 통과!
그렇게 시작된 계체는 별다른 문제 없이 흘러가는 듯했다.
-레이몬드 아파치 선수. 190.2파운드.
레이몬드가 감량에 실패해 계체 통과를 못 하게 되기 전까지는.
*
“통과 못 하면 어쩌죠?”
“... 아마 어려울 거다.”
미들급의 한계체중은 185. 레이몬드는 190.2파운드로 5.2파운드 체중 오버를 했는데, 이는 약 2kg이 넘는 수치였다.
1차 계체 이후 한 시간의 시간이 주어졌고 잠시 후 2차 계체가 이루어질 테지만 과연 짧은 시간 동안 2킬로를 뺄 수 있을지에는 회의적인 안 코치님이었다.
“... 그냥 하죠.”
“괜찮겠냐?”
“네. 뭐 2킬로쯤이야.”
계체에 실패했다고 무조건 경기가 취소되는 건 아니었다.
계약 체중으로 시합을 진행하거나, 시합 당일 라운드별 감점을 부여하는 등 여러 가지 페널티를 적용해 경기를 강행할 수도 있었다.
-레이몬드 아파치 선수. 188.7파운드.
결국, 2차 계체에서도 한계체중을 맞추지 못한 레이몬드.
브로일러 측에서는 우리 쪽으로 어떻게 진행했으면 좋겠냐며 의사를 물어왔다.
“굳이 우리가 아쉬울 건 없다. 기다려봐라.”
안 코치님은 브로일러 측 진행팀에 공정한 시합을 요구하며 계체에 실패한 레이몬드에게는 타이틀 샷의 자격이 없다며 이번 시합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식의 뉘앙스로 답변을 줬다.
“이번 시합에 쏟아부은 게 많아. 유리한 조건을 받아낼 수 있을 거다.”
안 코치님은 그렇게 확신했고, 그 확신은 정확했다.
“이거. 이렇게 또 만나는군.”
무려 오스만 회장이 직접 우리 쪽으로 찾아왔으니까.
“설마 레이몬드가 계체에 실패할 줄이야. 참 난감하게 됐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시합이 강행된다면 계체량을 하는 의미가 없겠지요.”
오스만 회장과 안 코치님의 독대.
“미스터 강의 입장에서도 이번 시합이 무산되는 건 좋은 일이 아니겠지. 둘러가지 말고 편하게 가지. 원하는 조건이 있나?”
“... 1, 2라운드 레이몬드 측에 라운드별 감점 1점. 그리고 그의 파이트 머니 절반을 승패와 관계없이 저희 쪽으로 돌려주신다면. 이번 시합 진행하겠습니다.”
“흐음.”
오스만 회장은 안 코치님이 내건 조건에 잠시 고민을 하더니 레이몬드 측에게 의사를 물어본 후 결국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1, 2라운드 레이몬드 측의 감점 1점. 승패와 관계없이 레이몬드의 파이트머니 절반을 강해서 선수에게 지불하는 조건으로 시합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조용해졌던 계체장은 진행팀의 발표에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양 선수. 앞으로 나와서 포즈를 취해주시죠.”
결국, 어찌어찌 계체량이 끝나고 기자단 앞에서 파이팅 포즈를 잡는 타임이 다가왔고.
“1, 2라운드 감점? 참 쪼잔한 조건이군. 후회하게 될 거야. 점수 따위 필요 없이 1라운드에 널 때려 눕혀줄 테니.”
레이몬드는 나와 마주 서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불쌍해서 그냥 봐준 거야 인마. 집 갈 돈 없으면 말해. 차비 정도는 줄 테니까. 애한테서 푼돈 뺏은 것 같이 찜찜하네.”
“뭐? 그래. 파이트 머니는 주지. 대신 승리 수당은 내꺼야. 1라운드에 네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챔피언 벨트와 함께 받아 가도록 하지.”
“네가 가져갈 수 있는 건 딱 하나야. 내 사인이지. 필요하면 말해. 내일 케이지 안에 쓰러진 네 등짝에 유성펜으로 사인 해줄 테니까.”
“뭐?!”
흥분한 듯 내게 달려들려는 레이몬드를 주최 측에서 막아서며 포토타임까지 끝이 났다.
“간 떨린다 간 떨려. 왜 그런 놈이 하는 말을 다 받아주냐?"
계체량을 끝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준현이는 내가 레이몬드의 도발을 그냥 넘기지 않고 왜 다 받아줘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고 타박했다.
”그게 다 필요한 거더라.“
나라고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지.
격투기판이라는 게 실력만 좋다고 끝이 아니더라.
선수들은 조금이라도 더 이슈될 수 있는 상대와의 시합을 원하고, WFC든 브로일러든 격투기 단체도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PPV를 더 많이 팔 수 있는 시합을 원했다.
그러려면 조용히 시합만 해서 될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이슈를 만들고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야 했다.
그래야 돈을 벌고 체육관과 팀 피스트 스텝들 월급도 주고 하지.
”상품성이 있어야 해. 케릭터를 만들어야 하고. 그래야 대접받아. 이 바닥에서는.“
”...“
”물론. 그 전에 압도적인 실력이 있어야겠지.“
레이몬드와의 시합까지 이제 채 하루도 남지 않았다.
브로일러 미들급 타이틀전.
그 벨트가 눈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