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_승자 >
1.
WFC256
세계 최고의 격투기 단체인 WFC에서 준비한 연말 최대의 이벤트.
그리고 그 피날레를 장식할 메인 매치인 웰터급 타이틀전.
“스읍... 후우...”
최두호는 잠시 뒤 시작될 타이틀전을 기다리며 깊은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해왔던 대로만 하면 돼.”
그런 그에게 어설픈 격려는 독이 될 수도 있기에 담담히 지난 시간 쌓아온 스스로를 믿으라는 말을 건네는 안형석 코치.
“... 그래. 하던 대로. 늘 하던 대로.”
잘 할 수 있을 거다. 좋은 결과 있을 거다. 이런 말은 지금의 최두호에겐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안형석의 그 담백한 한마디가 훨씬 도움이 되었다.
“후. 고마워. 많이 안정됐어.”
최두호와 안형석은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최두호는 안형석과 팀 피스트를 떠나 라스베이거스 현지에서 트레이닝 캠프를 열었다. 한국의 훈련 시스템과 코치진으로는 이번 타이틀전을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
MMA는 파이트 머니는 적으면서 훈련 캠프를 한번 차리는 데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스포츠였다.
알렌드로와의 시합까지는 어떻게든 국내 캠프에서 코치진들을 고용해서 치러냈지만, 학센과의 타이틀전은 국내 캠프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던 최두호.
몇 달간의 미국 트레이닝 캠프의 비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을 요구하기에 고민하던 그에게 스폰서 업체가 제시한 조건은 한국 코치진을 배제하고 미국 현지의 캠프만 소화하는 것. 그것이 최두호가 몇 달간 팀 ‘피스트’의 품을 떠나있었던 이유였다.
반대로 안형석 또한 최두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트레이너로서 수준 높은 훈련 시스템과 시설을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MMA 수련을 위해 유명한 코치들을 불러 캠프를 한번 차리면 기본 억 단위의 캠프 비용이 발생한다. 파이트머니를 받아 캠프 비용을 치르고 나면 선수와 체육관이 나눠 가지는 돈은 정말 푼돈인 경우가 대부분. 최신식 훈련 시설과 시스템을 갖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여건들이었다.
최두호가 일본에서 전성기를 보낼 때도. WFC로 이적하여 미들급의 벽에 도전할 때도. 제대로 된 훈련 캠프조차 차리지 못했다.
만약 안형석이. 팀 피스트가 조금만 더 시스템이 좋았고 훌륭한 캠프를 차릴 수 있었다면 최두호는 40대의 늦은 나이가 아닌 30대 초반의 전성기 시절에 WFC에서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들어냈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안형석은 언제나 최두호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심정은 최근 브로일러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강해서에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 형. 내가 많이 고마워하는 거. 알지?”
최두호는 잠시 후 있을 선수 입장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입을 떼 안형석에게 말을 걸었다.
“고맙긴. 내 선수 하나도 제대로 케어 못하는 코치한테.”
“아니야. 형 아니었으면 나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벌써 몇 년 전에 은퇴했을지도 모르지.”
“... 그렇게 되기 전에 널 챔피언으로 만들었어야 해. 벌써 십 년 전에. 결국, 여기까지 오는데 십 년이나 걸렸다. 그것도 내가 한 게 아니라 너 혼자서 올라온 거고.”
“형뿐만 아니라. 팀 피스트 코치들 모두가 힘을 합친 덕분이지. 그렇게 말 하지 마.”
“... 이기고 와라. 팀 ‘피스트’의 최두호로서.”
“그래. 팀 ‘피스트’의 최두호의 마지막 시합이니까. 유종의 미를 거둬주지.”
서로를 마주 보며 씨익 웃는 최두호와 안형석.
곧이어 선수 입장 신호가 왔고 마침내 WFC 웰터급 타이틀전의 막이 올랐다.
*
-툭.
케이지 중앙에서 이루어진 글러브 터치의 작은 소리.
이 순간 최두호에게 그 작은 소리는 세상 무엇보다 값지게 들렸다.
이 무대. 이 한 번의 글러브 터치를 위해 14년이라는 시간을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을 수확할 차례.
-스윽. 툭. 툭.
최두호와 학센은 가벼운 탐색전을 가지며 1라운드의 시작을 가져갔다.
-휙. 휙. 틱 스팟!
사우스포. 왼손잡이인 학센은 앞 손을 잘 쓰기로 유명한 선수였다.
앞 손인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앞 손을 견제하며 툭툭 던지듯 잽을 날리다가 타이밍을 잡아 왼손 오른손 펀치를 날린 뒤 다시 멀찌감치 거리를 벌리는 학센.
‘준비를 제대로 했나 보네.’
학센 아데스.
WFC 웰터급 챔피언인 그는 ‘케이지의 악동’이라는 이미지로 알려진 것처럼 화끈한 시합과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한 선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WFC PPV 판매 랭킹 상위권을 꾸준히 유지하는 프렌차이즈 스타가 될 수 있었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합 준비를 하며 상대 선수에 관한 끊임없는 연구와 분석을 지속하는 부지런함이 숨어있었다.
‘까다로운 상대야.’
학센은 공방. 타격과 그래플링이 균형 잡힌 ‘올라운드’형 파이터였다.
그런 만큼 타격이나 그래플링 한 분야에 특화된 선수들에게 예기치 못한 고전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같은 ‘올라운더’ 파이터에게는 강한 모습을 보여왔는데.
‘나와 같은 올라운더. 최근 영상들을 체크해보면... 솔직히 우위를 점치기 어렵다.’
최두호는 학센과 마찬가지로 ‘올라운드’ 형 파이터였다. 그것도 객관적으로 아주 비슷한 수준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그렇기에 학센은 이번 시합이 꽤나 난전이 될 거라 예상했으며 종래엔 체력 싸움으로 갈 것까지도 염두에 뒀다.
-팡! 휙. 투웅!
이번에는 최두호의 펀치를 학센이 걷어내고 서로의 몸을 부딪쳐 몸싸움에 돌입했다.
“흐읍...!”
-뿌득. 뿌득...
‘무슨 힘이...!’
후반 체력 싸움으로 가게 되면 나이가 많은 최두호가 불리할 게 당연지사. 학센은 최두호의 체력을 빼기 위해 몸싸움을 걸었으나 그의 힘이 예상치를 벗어날 정도로 좋자 ‘이건 좋지 않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퍽!
“큭!”
완력에서 최두호에게 압도당하자 근거리 몸싸움에서 손해를 보게 된 학센.
최두호의 무릎 올려 차기에 왼쪽 옆구리를 내어준 뒤에야 그를 떼어내고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짧은 격돌이었지만 서로 간에 전력을 다한 순간이었기에 살짝 숨이 흐트러진 최두호와 학센.
학센이 최두호의 힘에 놀란 만큼 최두호 또한 학센의 움직임에 놀랐다.
‘파워 싸움으로 가면 불리하겠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헷갈려하는 부분이 ‘스트랭스’와 ‘파워’다.
스트렝스는 근력을 말하고 파워는 힘을 뜻한다고 보면 되는데, 파워는 스트렝스에 시간 요소가 추가된 개념이었다.
20킬로의 덤벨을 들 수 있으며 10킬로의 덤벨을 1분에 20개를 들 수 있는 A와 15킬로의 덤벨을 들 수 있지만 10킬로의 덤벨을 1분에 30개 들 수 있는 B가 있다고 쳤을 때.
근력. 스트렝스는 A가 좋지만, 파워는 B가 좋다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조금 전 학센과의 몸싸움에서 두호는 스트렝스의 우세로 조금의 이득을 봤지만, 그래플링으로 들어가면 단순 스트렝스보다는 파워가 중요해지는 순간들이 온다.
최두호는 근력에 있어서는 학센을 압도했지만, 나이가 있는 만큼 학센보다 스피드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툭. 턱!
최두호의 힘에 놀란 학센과, 학센의 몸놀림에 경각심을 가지며 조심스러워진 최두호. 두 사람은 그래플링보다는 일단 타격으로 우위를 가져가야겠다는 공통된 생각으로 1라운드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스윽. 뻐억!
그러던 중 앞 손으로 최두호의 시야를 방해한 후 뻗어낸 왼손 스트레이트로 먼저 이득을 가져가는 학센.
“흐압!”
최두호는 학센의 안면 펀치를 맞는 순간 뒷발에 힘을 주며 오히려 더욱 파고들어 펀치를 날렸다.
-휙. 퍽! 뻑! 뻑!
한 팔 거리에서 서로 주먹을 휘두르는 난타전.
서로 두-세방의 유효타를 허용하고 나서 최두호가 학센을 잡고 케이지 쪽으로 밀어붙였을 때 1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스탑! 스탑!”
심판이 두 사람을 떼어놓고 나서야 각자의 코너로 돌아가는 최두호와 학센.
최두호는 왼쪽 눈 위쪽이 찢어진 듯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고 학센 또한 오른쪽 입술 끝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누가 이득을 봤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
WFC 웰터급 타이틀전의 첫 라운드가 그렇게 지나갔다.
*
“와...”
준현이는 그저 감탄사만 내뱉고 있었다.
“저거. 피 너무 많이 흘리는 거 아냐?”
두호 형의 타이틀전은 벌써 2라운드가 끝나고 잠시 후 3라운드를 앞두고 있었다.
1라운드가 난타전으로 서로의 타격을 가늠하는 무대였다면 2라운드부터는 본격적으로 타격과 그래플링을 주고받았던 시합.
양 선수가 각자의 코너로 돌아간 지금 케이지의 하얀 바닥은 붉은 핏자국들로 얼룩진 상태였다.
“혈전이네. 확실히 수준이 높아.”
“그래?”
“어. 솔직히 내가 상대했던 어떤 선수도 이 정도 수준의 시합을 펼칠 경기력은 없었어.
이게 WFC와 브로일러의 차이인 걸까. 아니면 일반 랭커와 챔피언의 차이인 걸까.
학센은 영상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으며. 테크닉과 센스 또한 뛰어났다.
처음 두호 형의 세컨으로 직관했던 알렌드로와의 시합 때는 아는 게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오늘 시합은 내가 아는 게 늘어난 만큼 보이는 것도 많아졌다.
딱 까놓고 말해서. 지금 저 자리에 두호 형이 아니라 내가 있었어도 학센을 상대로 이 정도 경기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선뜻 예스를 내뱉을 자신이 없었다.
”이제 3라운드네. 두호 형님이 이기시겠지? 그래도 1, 2라운드 다 두호 형님이 유리했는데.“
”솔직히... 장담 못 해.“
2라운드 후반쯤부터 두호 형의 체력과 힘이 급격히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체력의 약점이 있으니 근력의 출력을 높이는 전략을 가져온 것 같은데 생각보다 시합이 길어지고 있다는 게 불안 요소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휴식 시간이 끝나고 시작되는 3라운드.
이제는 거리 싸움도 없이 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엉켜 싸우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었다.
”...안 좋아.“
”응?“
”안 좋다고. 분위기가. 두호 형이 이제 몸싸움에서 압도하질 못해. 오히려... 힘 싸움이 길어지니까 밀리는 경향도 있어.“
옆에서 보는 내게도 보이는 걸 학센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체력의 차이도. 체력 회복 속도도. 두호 형은 학센에게 미치지 못했다.
”내가 봤을 때. 두호 형이 이기려면 이번 라운드에 승부수를 띄워야 해.“
WFC는 기본 3라운드제 이지만 타이틀전과 메인이벤트는 5라운드 시합을 한다.
각 라운드 5분씩으로 라운드 간 휴식 시간은 1분.
나는 두호 형이 학센과 비등한 싸움을 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 총 5라운드 시합 중 딱 중간인 3라운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번 라운드에 승부를 내지 못하고 4라운드 이후로 넘어가게 되면 승부의 추는 학센 쪽으로 기울 것 같았다.
두호 형과 안 코치님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3라운드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며 몇 번의 기회를 잡는 듯했지만 결국 피니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
그렇게 결국 3라운드까지 끝나고. 주어진 휴식 시간 1분간 두호 형은 가쁜 숨을 내쉬며 부들거리는 다리로 케이지에 기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3.
”앉으면 못 일어날 것 같아요.“
안형석은 3라운드를 마치고 세컨 코너로 돌아온 최두호의 첫마디에 준비했던 의자를 뒤로 치우며 얼음팩으로 찜질을 시작했다.
”후우. 후우. 학센. 저놈. 챔피언은 확실히 챔피언이네요.“
지친 모습을 상대방에게 보인다는 건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의자에 앉을 힘도 없다는 걸 학센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최두호였지만 도저히 허세를 부릴 만큼의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네가 지친만큼 상대방도 지쳤다. 잘하고 있다.“
안형석은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그저 잘하고 있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속으로 질책했다.
최두호는 안형석이 그를 처음 봤을 때보다. 전성기의 그때보다. 지금, 이 순간 최고의 모습을 보이며 분투하고 있었다.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혈전. 그저 최두호의 멘탈을 케어하고 의지를 북돋우는 정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후우. 다녀올게요. 다음 라운드는 없어. 물 좀 준비해줘요. 목이 마르네.“
4라운드를 알리는 신호와 함께 비척거리는 모습으로 출격하는 최두호.
안형석은 어느새 녹아버린 얼음팩을 움켜쥐고 케이지를 벗어났다.
-툭.
찢어졌던 최두호의 눈가는 응급치료를 했지만 다시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고, 코에서도 피가 나고 있었다.
학센 또한 빨갛게 부어오른 코에 지혈을 한 흔적이 남아있었고 오른쪽 눈두덩이가 부어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이제. 좀 끝내자. 이 새끼야.“
마우스피스를 끼고 있어 제대로 발음하기도 힘들었지만, 파이팅을 끌어내기 위한 말을 내뱉으며 학센에게 다가가는 최두호.
-휙. 휘익
최두호에 비해 체력 상태가 양호한 학센은 다가오는 최두호에게 오른손 잽과 왼손 훅을 날렸고 최두호는 그런 훅을 고개를 숙이며 흘려냈다.
”...!“
그때 숙여진 최두호의 머리를 겨냥해 뻗어지는 학센의 오른발 레그킥.
최두호는 양손으로 급히 킥을 방어했지만, 그 힘에 뒤로 밀쳐지듯 밀려났다.
비틀거리는 최두호의 바디로 날아드는 학센의 레프트 펀치.
”두호 형! 파이팅!“
그와 동시에 환청이 아닌가 싶은 최두호의 귀에 익은 파이팅 목소리.
순간 최두호의 머릿속에 강해서와의 첫 스파링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흡!“
학센의 펀치의 타이밍에 맞춰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왼팔로 학센의 레프트를 막아낸 후, 그 회전력으로 상대의 오른쪽 허벅지에 로우킥을 꽂아 넣는 최두호.
”큭...!“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으며 다급히 오른팔을 뻗어내는 학센.
최두호는 로우킥을 날렸던 발이 되돌아오는 회전력까지 더한 라이트를 뻗어냈고
-뻑!
-뻑!
학센의 라이트와 최두호의 라이트가 서로의 안면에 정확히 꽂혔다.
-풀썩.
그리고 쓰러지는 사람이 하나.
-비틀.
끝까지 버티고 선 사람이 하나.
”스탑! 스탑!“
심판의 스탑 사인이 떨어지고.
-우와아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관객들의 함성과 함께 전광판에 떠오른 이번 시합의 결과.
최두호. 4라운드 1분 13초. KO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