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_타이틀전 개막 >
1.
결과적으로 길거리 싸움으로 경찰서를 가는 일은 없었다.
우리에게 도움을 받았던 레이첼이라는 백인 여성분의 집안이 꽤나 대단했는지 담당 변호사가 현장에 나타난 이후로는 우리가 신경 쓸 일 자체가 없었던 것.
“와. 레이첼을 직접 보다니.”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준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딱히 감흥 없었다.
위급한 상황이라 나서긴 했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그 귀찮은 부분이 모두 해소되었으니 다행이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나저나. 레이첼이 누군데?”
아까 전부터 레이첼 레이첼 거리는데.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호들갑이야?
“헐. 레이첼을 몰라? 하긴. 모를 수도 있겠다.”
이어지는 준현이의 설명으로 알게 된 건 레이첼이 몇 년 전까지 한국에서 아이돌 활동을 했다는 것.
“그것 때문에 그렇게 호들갑이었다고?”
아름이를 만나도 별로 놀라지 않는 놈이 은퇴한 아이돌 때문에?
“음. 이건 통역대학원 사람 쪽으로 들은 정보인데. 레이첼의 집안이 정말 어마어마한 집안이라더라고.”
“어마어마한 집안?”
하긴 아까 변호사가 와서 경찰에게 몇 마디 하는걸로 상황 정리가 끝나긴 했었다.
“...미국 4대 가문 중 하나라더라.”
“미국 4대 가문?”
무슨 중2병 같은 네이밍인가 싶었다.
“어쨌든 있어.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들. 그중 멜린 가문의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어.”
“... 그런 대단한 집안의 사람이 한국에서 아이돌을 했다고?”
“그래서 맞다 아니다 말이 많았어.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진짜야.”
준현이가 너무 진지하게 대답하니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4대 가문이니 뭐니 하는 말 자체를 태어나 처음 들어봤으니 아는 것도 없었고.
“흠...”
나는 아까 변호사에게 받은 명함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다.
“됐다. 어차피 좋게 끝난 일인데 뭐.”
순간적으로 ‘그렇게 잘 사는 집안의 사람이면 뭔가 보상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났지만, 그건 말 그대로 순간적인 생각이었다.
내가 어딜 다친 것도 아니고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뭔가 요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통성명이라도 제대로 할걸. 야. 아까 받은 명함 줘봐.”
나와는 달리 활동 분야가 미국과 깊숙이 관련돼 있는 준현이는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 듯했지만.
“엉? 아 그거? 그냥 버렸는데?”
“뭐? 이 미친놈아 그걸 왜 버려!”
“어차피 잘 마무리된 일이잖아. 그런 건 바로 버려야 액땜하는 거야 인마.”
“...”
“딱히 큰일 한 것도 아니잖아. 선행은 선행으로 끝내야지 그걸로 팔자 고치려고 하면 벌 받는다 너.”
“하. 누가 팔자를 고쳐. 애초에 난 뭐 한 것도 없는데. 그냥 알아두면 좋은 인맥이니 아쉬운 거지.”
준현이는 명함을 버렸다는 내 말에 쩝 하며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미련을 털어버렸다. 이런 면 때문에 준현이가 편했다. 과하게 집착을 하거나 불합리한 일에 목을 매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가자! 대신 내가 맛있는 거 쏜다!”
아까 한창 식당을 찾던 중에 시비에 휘말리느라 식사를 못 했던 우리는 체육관 가는 길에 문 연 식당이 있으면 거기서 대충 때우기로 했었다.
“콜! 배고파 죽겠다. 오늘, 네 지갑 거덜 내준다 내가!”
언제 아쉬워했냐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짧은 다리로 앞서 걷는 준현이.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뒤뚱거리는 뒤통수를 보니 참 탐스러웠다.
-빡!
“아! 미친 새끼! 왜 때려!”
“푸하하하하. 너무 때리기 좋아 보여서.”
“아오. 저 또라이 진짜!”
초록과 빨간 색깔로 뒤덮인 연말의 라스베이거스 거리에 준현이와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호 형의 타이틀전까지 3일.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연말이었다.
*
분명. 얼마 전까진 평화로운 연말이었는데 말이지.
“저런 늙은이가 WFC에 있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 내일 시합이 끝나면 WFC에서 저 사람을 볼 일이 없어질 거야.”
WFC 웰터급 타이틀전 하루 전날.
계체량과 시합 전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돈도 안 되고 실력도 없는 늙은이가 들어갈 곳은 땅바닥밖에 없지. 쓸데없이 덩치만 커서 땅이 많이 필요할 텐데 그 정도는 내가 지불하지. 난 부자니까 말이지.”
준현이가 어느 정도 순화를 해서 통역을 해줄 텐데도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언사가 장난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트래쉬 토크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최창우도 순한 맛이었구나. 앨런 폰이나 브래드는 말할 것도 없고.
“학센은 파이터가 아니라 마치 노회한 엔터테이너같다. 그는 챔피언이고 언제든 최강의 도전자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내일 케이지에서 최강의 도전자임을 증명할 것이고, 그의 벨트를 뺏을 것이다.”
꽤나 유창한 발음으로 학센의 말을 받아치는 두호 형.
나도 회화를 조금 공부해야 하나 싶었다.
“최강의 도전자? 이 자리까지는 어떻게 기어 올라왔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걸친 건 겨우 손가락 하나 정도야. 내가 곧 그 손가락을 밟아 다시 바닥으로 떨어뜨려 주지.”
관객이 아닌 두호 형을 향해 손가락 중지를 세우며 신랄한 말을 내뱉는 학센과.
“학센은 이제껏 타이틀에 맞지 않는 이름 없는 파이터들과의 시합이 많았다. 시시한 상대들과의 시합으로 이름값을 올리고 파이팅 실력보단 퍼포먼스 실력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내일.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흥분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두호 형에게 달려들려는 학센과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대답을 하는 두호 형.
기자회견 테이블 중앙에 앉은 진행자가 흥분한 학센을 몸으로 막아내며 사전 인터뷰는 끝이 났다.
“형. 괜찮아요?”
계체량까지 모두 끝나고 리게인을 위해 수분을 보충하고 있는 두호 형에게 다가가 조심히 물었다. 지난 토너먼트에서 브래드에게 분노를 쏟아냈던 내가 걱정을 하는 게 웃겼지만 말이다.
“안 괜찮으면 어쩔 거야.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일 케이지에 올라 학센을 두드려 패는 것밖에 없어.”
“뭐. 그렇긴 하죠.”
“오히려 좋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최선을 다해 그를 두드려 팰 수 있으니까.”
얼굴을 덮고 있던 수염까지 깔끔하게 밀고 머리는 포마드로 단정히 넘긴 모습.
최근 보았던 초췌한 모습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광은 더 깊어진 듯도 했다.
2.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일주일 만에 인사드립니다!”
한국 시각으로 일요일 오후 1시.
스포츠 TV에서는 지난주 브로일러 248 원-나잇 토너먼트의 방송 이후 일주일 만에 WFC 256의 중계를 위한 특집 방송이 편성되었다.
“요즘은 정말 한국 격투기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 강해서 선수의 브로일러 토너먼트에 이어 오늘은 최두호 선수의 WFC 웰터급 타이틀매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한국 격투의 르네상스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국현 해설위원 또한 캐스터의 말에 동의하며 최근 한국인 선수의 빅매치가 연달아 치러지는 상황에 상당히 기꺼운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약 한 달 뒤에는 박필승 선수의 WFC 미들급 매치가 부산에서 치러집니다. 많은 격투기 팬 분들의 기대가 벌써부터 느껴지는데요. 우선 오늘의 메인 매치. 최두호 선수와 학센 선수의 시합. 해설위원께서는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캐스터의 매끄러운 진행에 김국현 해설위원은 미리 준비해온 데이터 분석 자료를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에... 해외 격투기 전문가들은 이번 시합의 승률을 7대3. 높게는 6대4 정도로 점치고 있습니다.”
“최두호 선수가 3. 혹은 4이고, 학센 선수가 7과 6이라는 말씀이시죠?”
“네. 맞습니다. 하지만 격투기라는 게 언제나 수치로 결정이 나지는 않습니다. 같은 선수들끼리의 시합도 매번 다른 결과를 가져오듯 말이죠. 저는 최두호 선수가 충분히 학센을 잡고 챔피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한다 이 말입니다.”
여러 가지 불리한 수치들이 적혀있는 분석 자료를 보면서도 최두호를 응원하는 김국현이었다.
“최두호 선수는 말이죠. 수치로는 표현할 수 없는 파이팅을 가진 선숩니다. 지난 14년 동안 차근차근 전적을 쌓아오며 드디어 타이틀전에 닿았는데,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후 캐스터와 김국현이 학센과 최두호의 최근 시합들을 되돌려보며 분석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오늘의 메인 매치인 WFC 웰터급 타이틀전 예비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청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WFC 256 경기의 메인 카드. 최두호 선수와 학센의 매치가 곧 시작됩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최두호 선수가 입장합니다!”
영상으로 최두호의 테마 음악이 흐르며 도전자 최두호의 입장이 송출되었다.
“아주 컨디션이 좋아 보입니다. 계체량 이후 리게인도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학센 선수 또한 충분히 체중 회복을 한듯한 모습입니다. 오늘 시합은 컨디션의 난조 없이 양 선수 모두 실력으로 정면승부를 펼칠 듯합니다.”
드디어 등장한 최두호와 학센.
스포츠 TV의 중계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격투 팬의 이목이 집중된 매치가 시작되고 있었다.
-와 ㅅㅂ 개쫄리네. 혹시 학센 말고 최두호에 건 토충이 있냐?
└난 최두호 믿음!! 역배 가즈아!!!!
└미친 애국배팅도 정도가 있짘ㅋㅋㅋ 솔직히 최두호가 학센한테 비비기나 하겠냐?
└이번 배팅은 배당도 낮음 ㅇㅇ 학센이 너무 압도적이라. 지난주 강해서 시합은 쏠쏠했는데ㅋㅋ
└야 너두? 야 나두! 강해서 같은 언더독 나오는 시합은 잭팟이짘ㅋㅋㅋ근데 오늘은 쫌...
└이 새끼들 한국인 아니네;;; 한국인이면 임마! 당연히 최두호에 걸어야지! 나는 미국 시민권자라 학센한테 검ㅋㅋㅋㅋ
└두호 형 ㅠㅠㅠ 제발 이겨주세요... 저 지난주 잃은 거 만회하려면 형이 이겨주는 수밖에 없어ㅠㅠㅠ 이기라고!!!!
└솔찌 한국 선수 배팅 올라오는 경우는 드문데. 이럴 때라도 좀 애국 배팅해라. 나는 최두호한테 큰 거 한 장 태웠다.
└올ㅋㅋㅋ 큰 거 한 장은 저희가 잘 나눠갖겠습니닼ㅋㅋㅋ 학센 가즈아!!
특히 스포츠 시합 결과에 돈을 걸고 도박을 하는 사이트에서는 이번 시합의 결과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스포츠 배팅 사이트의 여론은 대부분 학센의 승리를 점치는 분위기였고, 이는 배팅 사이트뿐만 아니라 다른 격투기 커뮤니티 또한 비슷했다.
└솔직히 최두호가 전성기때 기량 되찾았으면 충분히 학센 잡아볼 만하다고 생각함. 일본리그 뛸 때 최두호 괴물이었음
└응~ 그건 하위 리그라서 그래~ WFC 미들급에서 개쳐발리고 체급 낮춰서 웰터급 간 게 팩트지~
└미들급에서 웰터급으로 내려간 건 맞는데. 전성기 기량이면 학센한테는 해볼 만하다고. ㅈㄴ답답하네
└아니 그 전성기 기량 자체를 찾을 수가 없다니까? 최두호 나이가 벌써 마흔을 넘었는데 뭔 전성기 기량 ㅇㅈㄹ임?
└근육은 40대까지도 성장함ㅇㅇ 테크닉이 늘고 경험이 쌓인 격투기 선수가 30대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는 경우도 많음
└30대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는 거지 40대 이후에 절정을 맞은 선수가 있냐? ㅅㅂ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ㅋㅋㅋ
└어휴. 타이슨은 나이 여든이 돼도 너 같은 건 한주먹에 보내버릴 거다.
└응 그래. 정신승리 많이 해. 난 학센한테 배팅해서 치킨 사 먹을 테니까.
└토충이였누? 그래 애국 말아먹고 치킨 사 먹을 돈 따서 좋겠다. 난 내 돈으로 치킨 시켜 먹으면서 최두호 선수 응원할란다.
최두호 선수를 응원하긴 하지만 승부 자체를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조금 어렵지 않겠냐는 여론.
“흠. 두호 형이 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가 않는데?”
하지만 이번 시합을 관객석 가장 앞자리에서 지켜보는 강해서의 생각은 그와 다른 듯했다.
“내가 봤을 때. 지금 두호 형 기량은 전성기때 이상이야.”
사람들이 소위 ‘전성기’ 라고 말하는 일본리그 챔피언 자리에 있을 때의 최두호. 그리고 WFC 미들급에 도전했던 시절의 최두호. 그 모든 영상들을 찾아봤던 강해서였다.
“레알? 형님 나이에 그럴 수가 있나?”
“난 직접 맞부딪혀 봤잖아. 확실히 말 할 수 있어. 두호 형의 전성기는. 지금이야.”
드디어 케이지 중앙에서 글러브 터치를 하는 최두호와 학센.
그 둘을 바라보는 강해서의 눈에는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