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57화 (57/203)

< 58화_가르쳐줄게 >

1.

-여보세요? 해서야?

걸걸한 두호 형의 목소리가 아닌 듣기 좋은 맑고 깨끗한 목소리.

“어. 아름... 이야?”

-어? 한 번에 맞췄다! 헤헤.

일단 이렇게 젊은 여자 목소리로 날 친근하게 부를 사람이 몇 없거든.

... 생각해보니 그마저도 이제는 아예 없구나.

“아름이 네 목소리야 최근에 워낙 많이 들었으니까?”

-응? 내 목소리를 최근에 많이 들었다고?

“어. 운동할 때 네 노래 많이 듣는 편이거든. 그보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 번호는 또 뭐고?”

-...

얘는 전화를 해놓고 왜 말이 없냐?

“여보세요? 아름아?”

-아. 응! 헤헤. 미안해. 너 오늘 시합이라고 해서 전화했지!

“용케 기억했네?”

-나 그렇게 멍청이 아니거든요!

“하하하. 알지. 장난이야. 그래도 고맙다야. 이런 것도 다 기억해주고. 그나저나. 번호는 어떻게 된 거냐니까?”

-아! 나도 지금 미국이야. 연말 콘서트 때문에.

“연말 콘서트?”

-응. LA에서 오늘 연말 콘서트가 있었거든.

“아아.”

최근 K-POP은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는 애칭을 가진 LA에서는 그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라고 인터넷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러면 너도 오늘 콘서트 한 거야?”

-응. 이제 막 숙소 들어와서 전화하는 거야.

지금 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자정이 한참 지나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숙소에 들어왔다니. 얘도 참 열심히 사는구나 싶었다.

“지난번 일본에서도 나는 시합. 너는 콘서트 때문에 우연히 만났었는데. 이번에도 나는 시합이고 너는 콘서트네?”

-그러게? 뭐. 연말은 콘서트가 많으니까?

“그래도 같은 미국이라는 게 신기한 거지.”

-그건 그래. 해서 네가 있는 곳이 산호세? 캘리포니아 주지?

“어? 어. 맞아.”

-거기서 LA까지 비행기로 한 시간 반 밖에 안걸리는 거 알아?

“그게 가까운 건가?”

-헐! 미국에선 엄청 가까운 거거든? 차 타고 5시간. 비행기로 1시간 반이면 가깝지!

“...그거 서울에서 부산까지보다 먼 거 아니야?”

-... 어쨌든 같은 캘리포니아 주잖아!

그래. 그래. 그렇다고 쳐라.

내 기준에서는 도저히 가깝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아름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 넌 그래서 이제 일정이 어떻게 돼? 바로 한국 가는 거야?

“음... 아니? 내일이나 모레 쯤 라스베이거스로 넘어갈 것 같아.”

-어? 라스베이거스?

“응. 다음 주말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두호 형 타이틀전 있잖아. 몰라?”

-어... 들었던 것 같은데. 헤헤. 요즘 워낙 바빠서 그런 거 잘 기억 못해.

내 시합은 잘만 기억하더니. 멍청이 맞구만 뭘.

“어쨌든. WFC 타이틀전이고 두호 형 시합이기도하고 해서. 라스베이거스로 넘어갈 것 같아. 여기서 비행기 타면 한 시간 반 밖에 안걸린대.”

-... 너 2분 전까지만 해도 한 시간 반이면 서울 부산보다 멀다고 했거든?

“어쨌든 여기서 한국보단 훨씬 가깝잖아?”

-...

“여보세요?”

얜 또 말이 없냐.

-에휴.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뭐래? 갑자기 왜 할머니 같이 말 하냐?”

-아니라구우. 어쨌든. 라스베이거스 언제 간다구?

“음. 내일이나 모레? 왜?”

-나도 라스베이거스 가거든.

“진짜?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원래 이번 콘서트 끝나고 들릴 일 있었어. 비행기 표도 다 끊어놨는데 갑자기라니.

이렇게 일정이 겹치기도 쉽지 않은데. 어째 움직이는 동선이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스케줄이야?”

-아니. 친한 오빠 보러 가는 거야. 내 첫사랑.

*

“아! 미친놈아! 깜빡이 좀 키고 들어와라!”

준현이는 내가 아침부터 문을 두드려 깨우자 드물게 화를 냈다.

이놈이 항상 이성적이고 차분한데 잠과 먹을 거 앞에선 감정 컨트롤을 잘 못한다. 뭐, 그러니 이렇게 살이 찐 거겠지만.

“... 너 뭔가 눈빛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데? 됐어. 난 다시 들어가서 잘란다.”

“하하! 아니야 준현아! 어쩜 내 친구는 아침부터 이렇게 잘생겼나 싶어서 우러러본 거지.”

“네가 뭔가 급한 게 있긴 한가보구나? 뭔 일이야?”

“뭔 일은. 안 코치님이랑 다 첫 비행기 타고 라스베이거스 갔는데 우리도 빨리 따라가자고 깨운 거지.”

“... 푹 쉬고 오후나 내일 간다며?”

“나 완전 푹 쉬었는데?”

“너 지금 다크서클 장난 아니거든?”

“...”

망할.

사실 어제 제대로 자질 못했다.

시합이 끝난 것 같지 않다는 둥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것 같다는 둥.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아름이와 통화를 하는 순간 내가 말한 그 마침표가 찍혀버렸으니까.

내 잠을 방해한 건 시합이 아닌 전혀 다른 이유였다.

아름이가 라스베이거스를 간다!

그것도 첫사랑 오빠를 보러 간다!

오늘 오전 비행기를 타고!

그렇다고 내가 뭐 아름이를 좋아하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콘서트를 하고 지친 아름이가 혹시나 힘들진 않을까 걱정이 돼서 그런 거지.

그 첫사랑 오빠라는 놈도 본인이 아름이 만나러 가면 되지 연예인인 아름이를 오라 가라 하고 말이야.

“말해봐. 무슨 일이야?”

“아무 일 아니래도? 어차피 갈 거 그냥 빨리 갔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 그러면 혼자 가라. 난 자러간다.”

씨알도 안 먹힌다는 듯 쿨하게 뒤돌아서는 준현이.

“하... 아름이 라스베이거스 간대.”

“엉?”

“손아름 말이야. 어제 LA에서 콘서트 했는데. 오늘 오전 비행기 타고 라스베이거스 간대.”

그제서야 침대로 향하던 발을 멈추는 준현이 놈.

“오후에 가서 만나면 되잖아. 어차피 아름씨도 일정 있어서 가는걸 테고.”

“...”

“그 일정 끝나고 보면 되는데 그게 이렇게 서두를 일이야?”

“라스베이거스 가는 일정이 첫사랑 오빠 만나러 가는 거란다.”

“... 짐은 쌌냐? 난 어제 대충 싸둬서 금방 정리 끝나.”

내 말을 듣더니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물어보지도 않고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준현이.

와. 내 친구지만 방금 쫌 멋질 뻔했음. 저 떡진 초사이언 머리만 아니었다면.

2.

산호세보다 조금은 덜 차가운 공기.

나와 준현이는 매캐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흐아아암. 피곤해 뒤지겠네.”

준현이는 잠이 모자라는지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rrrrr

일단 나는 두호 형과 코치진이 있는 숙소 쪽으로 이동하며 안 코치님과 두호 형에게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는 톡을 남긴 후 아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 아름아.

-응. 해서야.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무슨 어쩐 일.

근데 막상 아름이가 이렇게 물어오니 마땅히 내놓을 대답이 없었다.

‘첫사랑 오빠 만난다는 이야기에 예정보다 빨리 라스베이거스에 왔어’ 라고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아아. 너 오늘 라스베이거스 온다고 했던 것 같아서. 나도 지금 라스베이거스거든.”

-진짜? 넌 오늘 오후나 내일 올 거라며?

“어... 그게. 일정이 좀 당겨져서 일찍 왔지 뭐. 하하.”

-그래? 아침부터 피곤했겠다. 어제 시합도 있었는데.

“하하. 뭐. 그렇지. 어디야? 라스베이거스야?”

-응. 나도 도착한지 얼마 안됐어. 밥 먹으려고 밥집 찾는 중이었어.

“밥? 아. 점심시간이구나. 같이 먹을까?”

-응? 일정 당겨져서 일찍 온 거라며? 그럼 바쁜거 아냐?

“아냐. 아냐. 그... 일정이 취소됐거든.”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방구냐.”

내가 대충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자 준현이는 본인도 듣다가 어이가 없는지 결국 한마디 했다.

“(야! 쉿!)”

나는 그런 준현이에게 목소리를 낮춘 채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아. 그래? 음... 난 괜찮아. 그런데 라스베이거스는 나 잘 몰라서.

“나 잘 알아! 나 여름에 여기서 한 달 동안 전지훈련해서 라스베이거스 맛집 잘 알아!”

-그래? 잘됐다! 그러면 여기가 어디냐면...

그렇게 아름이와의 점심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으니 몹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준현이가 있었다.

“...왜. 뭐.”

“이 새끼. 왜. 뭐. 나오는 거 보니 불리한 상황인건 아네.”

“뭐...왜...”

“에휴. 됐다. 난 숙소 가서 잘 거야. 알아서 갈 수 있지?”

“어? 같이 안가고? 아름이랑 밥 먹자.”

“일 없다.”

쿨하게 숙소 체크인을 위해 뒤돌아가는 준현이.

넌 내가 진짜. 한국 가면 영은 씨랑 잘 되게 팍팍 밀어줄게.

그렇게 준현이를 보내고 나는 벨라지오 분수 앞으로 이동했다.

“어! 해서야!”

그리고 그곳에는 해맑은 목소리로 날 부르는 아름이가 있었다.

“아름아.”

“오랜만이야!”

오랜만은 무슨. 한 보름 됐나.

아름이는 미국 오기 바로 전날까지 봤으니 재현이나 기태보다 더 자주 봤다.

물론 그런 걸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행이다. 혼자 밥 먹어야하나 했는데.”

“... 그. 뭐냐. 첫... 사랑 오빠 만난다며? 근데 왜 혼자 밥을 먹어?”

“응? 아! 아아아아. 헤헤.”

대답은 안하고 요상한 효과음만 내더니 헤헤하고 웃어버리는 아름이.

“뭐야. 반응이 왜 이래?”

“헤헤. 사실. 그거 거짓말이야.”

“...어?”

“첫사랑 오빠 만난다는 거. 장난이었다구. 해서 너... 설마 그것 때문에 오늘 일찍 라스베이거스 온 거야?”

“뭐래. 진짜 일 있어서 왔다니까.”

“헤헤. 그러면 다행이구. 화난 거 아니지?”

“화는 무슨. 뭐 먹을래? 내가 사줄게.”

첫사랑 오빠 때문에 일찍 라스베이거스 온 거냐고 물어봤을 땐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잘 넘어갔다.

첫사랑 오빠 만난다는 게 장난이었다는 것에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안도가 됐달 까.

‘내가 미쳤나. 왜 이러냐 진짜. 정신 차리자 강해서.’

아름이는 내가 쳐다볼 나무가 아니었다.

괜히 가까이서 조금 편하게 해주니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응? 뭐해? 빨리 가자아. 나 배고파.”

“어? 어. 가자. 이탈리안 요리 괜찮아?”

“응! 안 가려!”

나는 아름이를 데리고 벨라지오 호텔 근처에 있는 나름 괜찮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고 실패 없이 만족할만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우와. 해서 너랑 뭐 먹으면서 한방에 성공한 거 처음인 것 같아!”

“그러게.”

네가 두 번 다 라멘 집을 데려가서 그렇지.

“그나저나. 첫사랑 오빠 만난다는 게 장난이면. 라스베이거스는 왜 온 거야?”

“아아. 첫사랑이라는 건 장난이었고. 친한 오빠 만나러 온 건 진짜야. 지금 영화촬영중이라 저녁에나 볼 것 같지만.”

“아. 그래?”

오빠를 만난다는 건 진짜였네.

그나저나 영화촬영이면 그 오빠라는 사람도 연예인이겠구나.

“라스베이거스에서 영화라. 여기서 한국영화도 찍나?”

“당연히 찍지. 그 오빠가 찍는 건 한국 영화가 아니지만.”

“응?”

“너도 알걸? 배우 백경. 지금 할리우드 영화 찍고 있잖아.”

“...헐.”

백경이면 ‘두유노?’ 클럽에 들어가는 월드 스타 아냐?

할리우드 스타감독들이 꼭 한번 함께 작품하고 싶은 배우 1위를 찍은.

원래 직업이 웹소설 작가였던 만큼 연예계나 영화판 쪽은 내 관심분야였기에 잘 알았다.

“그 정도 월드 스타면 만날 때 조심해야하는 거 아냐? 매니저도 없이 둘이서 만나면 막 스캔들 터지고 그런 거 아냐?”

“뭐? 풉... 너 백경 오빠 공개연애중인 거 몰라?”

“어... 아! 맞다. 그랬지.”

서하늘 배우.

‘나보다 예쁜 사람 중엔 나보다 연기 잘 하는 사람 없고. 나보다 연기 잘 하는 사람 중엔 나보다 예쁜 사람 없다.’

는 말을 남긴 한국 최고의 여배우 중 하나.

백경이랑 서하늘이랑 둘이 사겼지. 걔들은 안 헤어지나? 하도 별 소식이 없어서 사귀는 것도 까먹고 있었네.

“그러니까 걱정 마. 그리고 매니저도 올 거거든? 아직 콘서트 뒷마무리가 안돼서 나만 먼저 온 거거든?”

뭐가 그리 재미난지 날 보며 시종일관 웃으며 대답하는 아름이.

하. 얘가 이렇게 착하고 잘 웃어주니까 내가 정신이 나가는 거지.

“넌 언제까지 여기 있냐?”

“음... 원래 경이 오빠만 만나고 바로 한국 들어가려고 했는데. 두호 오빠 시합이 있으면 그것도 보고 갈까 싶어. 그런데 티켓이 있으려나?”

“뭐. 티켓이야 내가 어떻게 한번 물어 봐줄 수는 있어. 한국에서 바쁜 거 없어? 스케줄은?”

“연말이라 콘서트 말곤 없는데. 이번 주말은 괜찮아.”

몇 년째 연말 스케줄은 콘서트 외에는 아무것도 잡지 않는다는 아름이.

덕분에 이번 주말은 프리해서 두호 형의 시합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주말까지 되게 긴데. 해서 네가 안 심심하게 놀아준다고 하면 두호 오빠 시합까지 보고 가고. 아니면 그냥 가고.”

...안 심심하게 놀아주는 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내가 일단 열심히는 해볼 라니까 말이야.

*

“야. 넌 아까 점심때 도착했다는 놈이 어딜 싸돌아다니다 오는 거야?”

나는 아름이와 헤어진 뒤 두호 형과 코치진이 있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에 도착하니 어제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느낌의 안 코치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 왔냐. 해서야.”

한창 훈련 중이었는지 열기 가득한 체육관 실내.

“두호 형. 저 왔어요.”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에 전보다 더 수분기 없이 지쳐 보이는 얼굴. 두호 형이 거기 있었다.

“잘 왔다.”

안 코치님을 지나 내 옆으로 오더니 툭 하고 어깨를 두드리는 두호 형.

“어제 시합. 잘 봤다.”

“전화로 했으면서 뭘 또.”

“그래도 얼굴보고 이야기 해야지.”

“하하. 고마워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진짜 얼굴보고 듣는 칭찬은 기분 좋았다.

“이번엔 내가 보여 줄 테니. 잘 봐라.”

“네?”

“기억하지? 뒤처지지 말고 따라오라고 했던 말.”

“...네.”

정정한다.

수분기 없어 보이는 얼굴이긴 하지만. 전혀 지친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피부는 푸석하지만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안광을 뿜어내며 불타고 있었다.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잘 봐라. 타이틀전부터. 챔피언을 때려잡는 법. 벨트를 빼앗아 오는 것까지. 제대로 가르쳐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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