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_원-나잇 토너먼트
1.
“코치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준현은 계체량과 인터뷰까지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나고서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것도 나름 재밌네.”
오랫동안 참았던 화장실을 찾으며 꽤나 즐거운듯한 표정의 준현.
사실 준현은 통역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였음에도 원하던 현장
통역 업무를 맡지 못했었다.
공식 석상이나 중요한 자리에서 통역가는 그 외모 또한 경쟁력이라는 말이 있
었는데, 준현은 그 통역 실력만큼 외양이 받쳐주질 못했기 때문.
그런 이유로 통역대학원까지 졸업했지만, 외국계 무역업체의 비즈니스 통역
업무로 취업을 했었다.
“휘유. 쌀뻔했네.”
친구인 해서 덕분에 회사가 망하고 난 뒤 오히려 더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
요즘. 전혀 접해보지 못한 격투기 관련 통역이었지만 현장통역을 위해 용어를
조사하고 전문성을 키우는 순간들도 즐겁기만 한 준현이었다.
-툭. 툭
“헤이.”
그때. 볼일을 보고 다시 팀 피스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는 준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봐. 꼬마 돼지. 너 아까전에 애송이 파이터의 통역 맞지?”
조금 전 인터뷰에서 강해서와 신경전을 벌였던 파이터. 브래드였다.
“꼬마 돼지도 애송이 파이터도 난 잘 모르겠는데?”
준현은 다짜고짜 자신과 해서를 비하하는 브래드의 언행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냥 가던 길을 가려 했다.
-확!
브래드가 그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돌려세우기 전까지는.
“이것들이 다들 미쳤나. 이봐 돼지. 네가 지금 누구한테 뭐라고 한 건지 자각
은 있나?”
“이것부터 좀 놓고 말하지? 파이터라는 놈이 본인의 직업에 대한 일말의 프로
의식도 없어?”
“뭐?”
준현은 브래드의 팔을 억지로 빼내며 태연히 구겨진 어깨 부근의 옷을 손으로
툭툭 쳐서 폈다.
“진짜 죽고 싶어?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건방진 거야? 꼬마 돼지? 혹시 애송이
를 믿고 이렇게 나대는 건 아니겠지?”
“넌 항상 누군가 타인을 믿어야만 자신감을 얻는 스타일인가 보네. 소변도 못
가리는 애들 중에도 믿을만한 애들은 있나 봐?”
“...뭐?”
“너도 볼일 보러 온 것 같은데 괜히 애먼 사람 붙잡고 시비 걸지 말고 소변이
나 보러 가. 네 말대로 오줌을 지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런데 이 자식이!”
준현은 아까 인터뷰 때 있었던 말들을 이용해 브래드에게 대꾸했고 브래드는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준현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웅성웅성.
이미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중에는 계체량을 취재하러 나온 기자들도
다수 있었다.
“넌 뭘 믿고 이 상황을 만들었냐? 큭... 지금이라도 이 손 놓지?”
준현은 브래드에게 잡힌 멱살 때문에 숨이 막혀 얼굴이 벌게진 상황에서도 끝
까지 침착함을 놓지 않았다.
브래드 또한 생각보다 일이 커졌음을 인지함과 동시에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
“야! 이! 새끼야! 그 손 안 놔!”
그때 인파 한쪽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여. 왔냐.”
준현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고도 태연했고.
“Fuck!!”
브래드는 준현의 멱살을 거칠게 내던지며 욕설을 뱉을 뿐이었다.
*
“이 새끼가?”
나는 브래드가 준현이를 바닥에 집어 던지는 순간, 더는 참지 못하고 달려들
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스탑! 스탑!”
뒤늦게 안전요원들이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야! 괜찮냐?”
나는 안전요원과 실랑이하는 브래드를 두고는 일단 바닥에 쓰러진 준현이부터
챙겼다.
“어. 괜찮음. 별일 없었음.”
“씨발. 별일 없기는. 별일 없는데 네가 왜 저 새끼한테 멱살 잡혀있었는데.”
“그건 쟤가 또라이라서 그렇지. 쟤가 또라이인 거랑 내가 별일 없는 거랑 상
관없음.”
“미친놈.”
이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
툭 털어대는 준현이.
얘는 간땡이가 큰 건지 그냥 매사에 무감각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안전요원들에게 붙들려가듯 끌려가는 브래드를 바라보며 준현이에게 물었다.
“몰라. 아까 인터뷰할 때 많이 빡쳤나봐.”
“그런데 왜 내가 아니라 너한테 화풀이야?”
“그러니까 또라이라는거지.”
진짜 괜찮은 건지. 애써 괜찮은 척하는 건지.
“어쨌든...”
진짜 오랜만에 빡치게 만드네. 브래드. 이 새끼.
제발 내일 지지 말고 결승까지만 올라와라. 제발.
2.
-시청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브로일러의 마
지막 경기! 브로일러 248! 지금! 시작합니다!
한 해의 끝인 12월 중순의 일요일 정오.
스포츠 TV에서는 브로일러의 원-나잇 토너먼트 생중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와! 다행히 이번 시합은 주말 낮에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쵸?”
임유나는 오늘도 강해서의 경기를 실시간으로 관전하기 위해 라이브방송을 켰다.
└낮에 할 것도 없었는데 딱 좋넼ㅋㅋ 일요일 점심에 격투기 시합이라닠ㅋㅋ
└산호세는 지금 토요일 저녁 9시임ㅋ
└시차 무엇ㅋㅋㅋ 딱 보기 좋은 시간대인 거 실화?ㅋㅋㅋㅋ
└여기서 강해서 우승하면 바로 타이틀전임? 와... 스트리트 파이트 나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ㅈㄴ빠르네 진짜
└근데 어제 강해서랑 브래드랑 뭔 일 있었던 거 같던데?
“어제요? 무슨 일이 있었지?”
임유나는 아직 강해서의 시합까지는 꽤나 여유가 있었기에 시청자들과 대화를
주고받다가 어제 있었다는 ‘어떤 일’에 대해 알게 됐다.
└브로일러는 기사가 잘 안 올라와서 찾아보기 ㅈㄴ힘듬 진짜
└(링크) 이거 타고 가서 봐라. 강해서 통역을 현실 친구가 맡았는데 통역해주
고 브래드한테 뚜까맞을뻔함ㅋㅋㅋ
└헐 미친. 일반인한테 저런 짓 하고도 출전정지 안 먹음?
└응~ 폭행 아니야~ 멱살만 잡았어~
└멱살을 잡든 어쩌든. 프로 파이터가 일반인을 상대로 위협을 했는데;;;
└딱 봐도 통역 친구 안여돼 스타일인데;;; 개쫄았겠다 진짜.
└기사 내용 봐봐 ㅋㅋ 개웃기네 ㅋㅋㅋ
임유나는 시청자가 올린 링크를 타고 들어가 외국에서 올라온 브로일러 248
계체량에서의 이슈 기사를 확인했고 거기서 브래드에게 멱살 잡힌 준현의 영
상을 보게 됐다.
“헐... 미친 거 아니에요? 이 선수? 잠시만요. 기사 좀 읽어보자. 어... 나는
순간 내가 서 있는 곳이 브로일러라는 세계적인 단체의 계체량 현장인지 하이
스쿨 체육관 구석인지 헷갈렸다. 그 순간 브래드는 그저 아직 덜자란 고등학
교 양아치에 지나지 않았다? 헐...”
└올? 우리 유나 영어 잘하눜ㅋㅋㅋ
└번역기 돌린 거 아냐? 아니면 피디가 읽고 번역해줬나?
└뭐래? 링크 들어가고 바로 직독직해 했잖아
└유나찡 영어 잘함ㅋㅋㅋ 하와이에서 학교 다녔댔음ㅋㅋㅋ 너네 찐팬이 아니쿤?
└얼. 어쩐지 가끔 영어 할 때 발음이 좋다 했어ㅋㅋㅋ 영어 하는 컨텐츠 하나
만들어보지
유나는 채팅창의 내용에도 반응하지 않고 기사들을 정독하고 있었다.
‘어떡해. 해서 씨 많이 화났겠는데?’
강해서와 그 친구들의 끈끈함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유나는 이번 일로 강해
서가 브래드라는 선수에게 강한 적개심은 물론 분노를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강해서 선수가 부디 감정 컨트롤을 잘 해야 할 텐데요. 브래드 선수랑 1차전
은 아닌 것 같던데.”
└대진표 좀 봐라 유나야~
└강해서 4강 상대는 톰슨임 ㅇㅇ 톰슨 이기고 올라가도 브래드가 지면 못 만
남 ㅋㅋ
└이런걸로 감정컨트롤 못해서 질 거면 프로 할 자격이 없지 ㅋㅋㅋㅋ
└어! 토너먼트 4강전 준비 영상 나온다! 다들 집중 ㄱ!
채팅창의 글을 보고서 다시 스포츠 TV 생중계에 집중하는 임유나.
‘제발 이겨라. 토너먼트 준비한다고 요 몇 달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지기
만 해봐.’
브로일러는 WFC와는 달리 계체량 영상도 찾아보기 어려웠고, 시합 전 기자회
견이나 인터뷰 영상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강해서가 메인 카드라 스포츠 TV에서 중계라도 해주니 시합이라도 실
시간으로 볼 수 있었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얼굴도 까먹을 정도로 최근 몇
달 동안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와. 몸 진짜 좋아졌네.’
처음 임유나가 격투기에 빠지게 만들었던 박기영 선수와의 시합 때 강해서와
지금의 강해서는 완전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일반인이 봤을 때는 충분히 ‘몸 좋다’라고 평가할 정도의 몸이 되었으니까.
“자. 다들 영상 집중할게요!”
이번 시합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오면. 이기든 지든 연말에는 꼭 얼굴 봐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임유나는 이제 곧 시작하려는 강해서의 시합에 빠져들기 시
작했다.
*
“...해서야. 좀 진정됐냐?”
“...네.”
안 코치님은 꽤나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계셨다.
“진짜 괜찮아요.”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야. 너.”
어제 브래드와 준현이 사이에 있었던 일은 결국 브로일러 248의 관계자들 모
두가 알 정도로 퍼져나갔다.
안 코치님 또한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는 길길이 날뛰셨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 눈치를 보고 계셨다.
“... 그놈. 일부러 너 도발한 거야. 알지?”
“알죠. 괜찮아요.”
중요한 건 어제 그 일이 있고 나서 브래드 놈이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했다는
거다.
뭐랬더라?
-브로일러는 가난한 거지가 동냥을 하러 오는 곳이 아니다. 정 돈이 필요하다
면 내 양말을 줄 테니 갖다 팔아도 좋다. 애송이 파이터의 집값보다 비쌀 거
다. 일반인에게 위해? 나는 무슬림이 아니다. 그렇기에 돼지에게 존중을 표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였던가.
아주 뚫린 입이라고 신나게 입을 털었더라.
가뜩이나 벼르고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그 기사를 보자마자 2차 빡침이 올 수
밖에.
“일단 4강이 먼저다. 톰슨도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야. 브래드 그놈 때문에
흥분해서 4강전을 망치면 결국 아무것도 안 된다.”
“...알고 있어요.”
“최대한 침착하고. 이성적이게. 오케이?”
“넵. 오케이.”
안 코치님이 바라보는 내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을 거다. 그러니 계속 풀어주
려고 노력하시는 거겠지.
-강해서 선수. 입장 준비해주세요.
드디어 진행팀에서 4강전 첫 경기의 준비를 알려왔고.
-와아아아아아!!
오늘 브로일러 248 원-나잇 토너먼트는 관중만 1만2천여 명으로 올해 브로일
러 경기 중 가장 많은 관객이 참석한 경기였다.
-휘익! 휙!
그런 만큼 넓은 체육관을 울리는 관객들의 환호성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울
림이었다.
“...”
그런데도. 내 눈은 케이지를 지나 관객석 어딘가 혹시 있을 브래드를 찾고 있
었다.
“...야 인마! 강해서!”
결국, 안 코치님이 큰 목소리를 내셨다.
“넵!”
“집중 안 해? 저기서 널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는 톰슨 안 보여?”
“죄송합니다!”
쩝.
살면서 정말 누군가에게 이렇게 구타 욕구가 생긴 적이 없었는데. 친구 놈이
나 때문에 험한 꼴을 당했다는 생각에 확실히 조금 흥분하긴 했나 보다.
나는 팀 셔츠를 벗고 마우스피스를 착용한 후 바세린 도포까지 끝마치고 글러
브를 팡팡 두드리며 호흡을 다스렸다.
“자! 입장해!”
“넵!”
그리고 드디어 4강전의 시작.
한달음에 케이지로 뛰어 들어갔다.
‘집중하자. 집중.’
내 앞에는 브로일러 미들급 랭킹 6위. 킥복싱을 베이스로 하는 타격이 일품인
파이터 빌리 톰슨이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래.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해야지.’
발밑을 보지 않고 애먼 곳을 쳐다보다가 넘어지지.
진정하자. 강해서.
나는 속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심판의 진행에 맞춰 글러브 터치를 하고 1
라운드에 돌입했다.
-스윽.
-휙. 휙.
톰슨과 나는 탐색전을 펼치듯 케이지 중앙에서 가벼운 펀치와 킥 공격을 주고
받으며 본격적인 싸움을 위한 예열을 하고 있었다.
1라운드 5분. 총 2라운드의 짧은 시합.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시
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톰슨에게 집중하기 위해 집중도를 높였고.
“...어?”
분명 내 눈은 톰슨을 보고 있는데. 톰슨 뒤로 케이지 밖 1열에 앉아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브래드가 주변시에 정확히 들어왔다.
-툭. 휙. 휙.
나와 톰슨의 시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뭔가 유쾌하다는 듯 옆 사람에게 뭐
라 뭐라 말하는 브래드.
아무리 브로일러에서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지만 저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웃
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 열이 뻗치는 느낌이었다.
-휙. 휘익. 후웅!
‘그런데. 자꾸 거슬리게 이건 뭐야?’
-슥. 휙. 뻐어억!
나는 잠시 시선을 돌려 내게 오른손 훅 공격을 하는 톰슨의 품으로 파고들어
왼손 바디 한방과. 전력으로 휘두른 오른손 오버핸드 펀치를 그의 턱에 꽂아
넣었다.
‘미안하지만. 시간 없으니까 빨리 좀 끝내자.’
난 한시라도 빨리 저 브래드의 얼굴을 두드리고 싶거든.
“스탑! 스탑!!”
케이지 바닥에 쓰러진 톰슨에게 달려들어 파운딩을 때리려 하자 온몸으로 막
아서며 스탑 사인을 하는 심판.
-와아아아아!!!
나는 환호성도 뒤로하고 케이지 밖으로 보이는 브래드를 향해 달려갔다.
-철컹!
한달음에 철망을 밟고 케이지 위에 올라탄 나는.
“야! 이 새끼야! 빨리 올라와! 다시는 못 웃게 해줄 테니까!”
어느새 굳은 표정의 브래드를 향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