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_토너먼트 룰
1.
“...라는데. 어쩔까?”
카이서스의 말을 통역해준 준현이는 이 상황이 꽤나 난감해 보였나보다.
질문을 받은 건 난데 왜 네가 불편해 하는 거냐?
“복싱이라.”
사실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내 기사와 댓글들을 다 찾아보는 편이고 격투기 커뮤니티 반응들도 심심
할 때마다 챙겨보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중에는 분명 ‘저 정도 타격이면 복싱이나 하지 왜 돈 안 되는 격투
기를 함?’ 과 같은 글들도 있었다.
“시시한 세계야. 이곳은. 따분하지. 나와 같은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선
수가 없어.”
내가 상념에 빠진 동안 카이서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은퇴를 생각했다. 돈이야 썩어나게 벌었지. 명예? 이 이상의 명예가
어디 있나. 무패의 헤비급 통합 챔피언. 앞으로 또 나와 같은 선수가 쉽게 나
올 수 있을까?”
그런데 계속 듣자하니 이것 숫제 자기자랑이었다.
날 복싱계로 끌어들이려는 설득을 하려는 거 아니었어?
“지난 방어전 때 느꼈지. 내가 서 있는 정상에 올라 올 자격을 가진 선수는
세상에 없다는 걸. 더 이상 복싱링은 내게 가슴 두근거리는 전쟁터가 아니라
는 걸.”
자기자랑이라기에는 조금 씁쓸한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절대자의 고독. 뭐 그런 건가?
내가 쓰던 웹소에서나 보던 장면을 현실로 목격하니 낯설긴 했다.
두호 형도 그렇고 필승 형도 그렇고. 모두 위로 올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부딪
히는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네게서 가능성을 봤다. 너라면 날 다시 두근거리게 할 수 있어. 저
사각 링에 오르기 위해 인내하고. 극복하며. 궁리하게 만들 수 있다고.”
어후.
카이서스가 나보다 몇 살 많더라? 30대 중반정도로 알고 있는데.
어쨌든 말 그대로 시커먼 남자가. 날 보고 두근거린다니. 복싱링 근처로는 가
기도 싫어지는 설득이었다.
“카이서스. 제안은 고마워. 음. 일단 지금 내 대답은 ‘NO’ 야.”
카이서스는 노 라는 내 대답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고, 오히려 볼튼이 옆에
서 왜 카이서스의 제안을 거절 하냐는 듯 뭐라 뭐라 떠들어 댔다. 정신 사납게.
“사실 나는 너와는 달라. 이제껏 무엇 하나 끝까지 해본 적 없는 근성 없는
놈이라서 말이지. 그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 재미있어서. 신나서 하
고 있는 게 격투기야.”
“복싱도 신나고 재미있게 할 수 있어.”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 중요한건 이번에도 그 끝을 못보고 도망친다면. 난
다른 어떤 것에서도 끝맺음을 못할 것 같아. 그냥 막연히 내 마음이 그래.”
“...”
“그래서. 적어도 격투기에서 한번쯤은 그 끝을 보고 싶어. 그게 내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든. 아니면 내 재능의 끝이든.”
처음에는 조금 난처해하던 준현이도 내 말이 이어질수록 표정이 단단해져갔다.
내 진정성과 결심을 느낀 거겠지. 볼튼 또한 조용해졌고.
“그리고. 하하. 복싱은 주먹만 쓰잖아? 난 일단은 손발을 다 쓰는 게 좋다고.”
괜히 분위기가 축 처진 것 같아 가벼운 농담을 하나 던졌는데.
“뭐? 복싱은 주먹만 쓴다고? 이런... 복싱은 말이야!”
애먼 볼튼에게 어그로가 끌렸다.
복싱에서 다리를 어떻게 써야 하느니. 스텝이 어떠니. 갑자기 시작된 복싱 강의.
처음에는 말릴까 싶었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그 또한 이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자 하는 모습이 보였기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분위기를 풀어냈다.
“일단. 나도 자네가 바로 오케이 사인을 보낼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어.”
한차례 무거웠던 공기가 가시고 난 뒤 다시 입을 여는 카이서스.
“끝을 본다라. 좋은 말이지. 자네라면 그 끝에 도달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
을 거야. 그때까지 이 주제는 잠시 보류하는걸로 하지.”
카이서스. 그렇게 안 봤는데 조금 질척거리는 스타일이구나?
남자가 깔끔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뭐. 내가 격투기에서 더 이상 상대가 없다고 느낀다면. 지금의 카이서스와
같은 고독감을 알게 된다면. 그땐 지금과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겠지.:
나는 씨익 웃으며 오른 손을 카이서스에게 들이밀었고.
-툭.
카이서스는 그런 내게 주먹을 맞부딪혀 줬다.
2.
“왁!!!!!!!!!!!!!!!!”
“아! 씨바 깜짝이야!”
워우. 웬만해선 욕 잘 안하는 준현이가 쌍시옷을 입에 담다니. 내 목소리가
크긴 했나보다.
“야!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하...”
준현이는 모자를 쓰고는 날 모른 체하며 저만치 앞서 걸었다.
“같이가! 준현아!”
거 참.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으면 조금 흥분할 수도 있지. 사람이 야박하게 말이야.
“어이. 깜둥이.”
준현이를 잡으러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데 들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
“창섭 형!”
권창섭 형이었다.
“어떻게 바로 찾았어요?”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질러놓고?”
“하...하하...”
근 두 달 만에 한국 땅을 밟았더니 나도 모르게 나온 환호성이었다.
“어쨌든 고생했다. 가자.”
“넵!”
픽업 나온 창섭 형의 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
“일단 오늘은 쉴 거지?”
“어후. 시차랑 비행 때문에 죽겠어요. 최소 하루는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안 그래도 안 코치님이 너 체육관 못나오게 집에 잘 넣어두고 오라시
더라.”
“하하...”
라스베이거스에서 한국까지 오는데 약 12시간 가까이 걸렸다.
운동과 훈련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쉬는 것도 중요했기에 오늘 하루정도는 컨
디션 조절을 하며 푹 쉬라는 안 코치님의 전언.
“쿨...”
준현이 이놈은 비행기에서 계속 못자더니 결국 차안에서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나는 그런 준현이를 힐끔 쳐다보고는 스마트 폰을 꺼내 주소록을 켜 전화 버
튼을 눌렀다.
-Rrrrrrr.
창섭 형은 운전하고 준현이는 단잠에 빠진 조용한 차 안.
내 스마트 폰에서 흘러나오는 컬러링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여보세요?
창섭 형한테 노래라도 틀어달라고 말 하려는 순간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여보세요?”
-해서니? 한국 왔어?
“어. 이제 막 도착했어.”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응. 괜찮지. 하는 일이 몸 관리하는 건데.”
-그래. 그래. 아픈데 없으면 됐다.
아.
왜 또 갑자기 코가 시큰거리지.
-언제 한번 올 거니?
“일단... 일단 시합 끝나구요. 연말에 큰 시합이 있어서 그때까지는 빠듯할
것 같아.”
-연말이나 내년 설에는 올 수 있겠니?
“최대한 시간 빼서 한번 들릴게.”
-항상 몸 조심하고.
“어.”
아버지의 발령으로 부산으로 내려가신 부모님과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해야 했
던 나는 20대 중반쯤부터 떨어져 지냈었다.
대학 졸업반쯤부터였다. 부모님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건.
남들은 다 취업이다 뭐다 준비하며 현실적인 미래를 준비할 때. 나는 홀로 네
버랜드에 사는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헛꿈만 꿔댔으니까.
그러다 20대 후반. 나는 제자리인데 어느새 내 뒤에 있던 친구들까지 저만치
내 앞을 질러가는 걸 보며 아예 나는 걷기를 포기했었다.
‘난 실패한 게 아니라 하지 않은 거야. 그런 삶은 너무 시시하니까.’
되도 않는 자기 위안과 위로.
남들은 ‘넌 역시 대단하다. 우리와는 달라. 뭐가 돼도 될 거야.’ 라며 엄지를
추켜세웠지만 되려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었다. 나도 그냥 평범하게 저들처
럼 살걸. 그랬으면 이렇게 뒤처지지도 소외받지도 않았을 텐데. 부모님께 부
끄러운 아들이 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그러다보니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은 고작 일 년에 두 번. 설날과 추석 때뿐이
었다.
-얼마 전에 기사 나왔더라? 네 아버지가 그 인터넷 기사까지 다 출력해서 모
으는 거 아니?
“아버... 지가?”
-그래. 자기도 왕년엔 한 주먹 했다면서 해서 네가 자길 닮아 동물적인 감각
이 있다느니 뭐라느니.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밝은 목소리. 대학 초년생 시절 이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다음 설날엔. 꼭 가도록 해볼게.”
-바쁘면 안와도 된다. 다치지만 말고. 시합 때문에 해외 나가고 하는 사람이
설날 같은 걸 어떻게 챙겨? 괜찮다. 자주 전화만 해.
그래도 매년 챙기던 설날과 추석. 그 중 이번 추석은 이바노프와의 시합일정
으로 챙기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라스베이거스로 전지훈련을 한 달 가까이
가 있었고.
“...그래. 이번 시합까지 이기고. 연말에. 내년 설날엔. 꼭 내려갈게.”
-그래. 우리 아들! 아프지 말고! 많이 맞지 말고! 파이팅!
전화가 더 길어지면 정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서둘러 통화를 마무
리했다.
“후...”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애써 차창 밖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딸깍
-그대여 내게 말해줘 사랑한다고~
창섭 형은 아무 말 없이 노래를 틀었고 준현이는 깬 건지 아직 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까까지 곯던 코를 곯지 않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저무는 시간.
서울로 들어가는 영종대교에서 보이는 차창 밖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포근하게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
“토너먼트 엔트리가 나왔다.”
한국에 도착한 이튿날.
아직 시차적응이 끝난 건 아니었지만 훈련을 위해 찾은 체육관에서 날 기다리
고 있던 건 안 코치님과 토너먼트 관련 소식들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원-나잇 토너먼트는 하룻밤에 끝나는 4인 토너먼트 형식이다.”
“넵!”
“그러면 제일 중요한게 뭘까?”
“엄... 이기는 거겠죠?”
-빡!
“아! 왜 때려요!”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니까. 이길 때 이기더라도 최대한 데미지 없이 이기는
게 중요하다.”
“...그것도 당연한 소린데요?”
데미지 없이 이기는 건 언제나 중요하지. 누가 혈전 끝에 승리하고 싶어 할까?
“그래. 당연하지. 그렇게 당연한 만큼 대진표도 중요하다.”
원-나잇 토너먼트는 여타 경기에 비해 실력만큼 중요한게 대진표라고 했다.
네 명의 참가자 중 우승 후보 두 명이 맞붙을 경우 심각한 체력 소모나 부상
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이번 원-나잇 토너먼트의 룰 가이드다. 읽어봐라.”
그러면서 내게 서류뭉치 하나를 건네는 안 코치님.
“흠... 어? 이겨도 부상이 심하면 못 올라가요?”
“그래. 이번 토너먼트는 서바이벌 룰을 적용했다.”
“서바이벌 룰이요?”
“설령 1차전에서 승리하더라도 부상이 심하면 부상 없는 패자가 2차전에 올라
가는 형식이지.”
“...”
뭐 이런 룰이 다 있어?
“그런데. 출전 목록이 6명인데요?”
“두 명은 리저브 매치다.”
“리저브 매치요?”
“만약 결승에 올라갈 멀쩡한 선수가 한명밖에 없다면. 리저브 매치의 승자 선
수가 토너먼트 결승에 진출하는 거지. 부상자를 대비한 예비 선수라고 보면 돼.”
이런 식의 토너먼트는 난생처음 보고 겪다보니 뭔가 모르는 게 많았다.
“서바이벌 토너먼트는... 지저분하다. 조심해야해.”
“지저분하다구요?”
“그래. 설령 반칙으로 패배했어도 고의성 입증이 되지 않으면 부상당한 승자
보다 반칙패한 패자가 올라가니까.”
“...뭐 그런 게 다 있대요?”
설령 반칙을 쓰더라도 부상만 없으면 반칙에 부상당한 승자를 대신해 패자가
올라가는 시스템이라니.
“거기다 1차전은 2라운드 경기다. 결승만 3라운드지.”
“... 죽자 사자 달려들겠군요.”
“그렇지. 그러니 더욱 대진표가 중요한 거고.”
“대진표는... 나왔어요?”
“아니. 아마 11월 말이나 12월 초 쯤 나올 거다. 일단 엔트리는 나왔으니 그
걸 토대로 만반의 준비를 해야지.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넵!”
연말 토너먼트까지 이제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
멍하니 멈춰 서 있을 시간은 없었다.
54_그 손 놔
1.
“오스만 그 늙은이가 드디어 미친 거지.”
브래드는 쾅-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샌드백을 쳐내며 몹시 분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올해 갓 데뷔한. 그것도 프로 전적이 3전밖에 안 되는 애송이를 토너먼트에
참가 시킨다고? 리저브 매치도 아닌 정규 엔트리에? 그게 미친 게 아니고 대
체 뭐야?”
-쾅!
정말 사람이 샌드백을 때린 게 맞을까 싶을 정도의 굉음.
-끼익. 끼익.
샌드백을 고정하고 있는 고리조차 힘겨운 듯 삐걱대고 있었다.
“워. 워. 진정하라구. 좋게 생각해. 겨우 그 정도의 선수가 참여한다는 건 오
히려 우리에게 좋은 일이니까.”
브래드의 담당 매니저는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진정하라는 듯 그를 달랬다.
“4강에서 애송이를 만나면 이득이겠지. 만약 톰슨이나 리카르도가 4강에서 애
송이를 만나면?”
“...”
분명 체력과 부상 관리가 중요한 원나잇 토너먼트에서 거저먹는 1승이 있다는
건 큰 변수였다.
“만약 내가 톰슨이나 리카르도와 4강을 치르고 결승에 올랐는데 나머지 한 명
이 애송이를 잡고 편하게 올라온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이건 명백히 오스만
회장의 실수라고!”
“... 또 모르지. 그래도 이바노프를 잡아냈잖아. 아주 애송이라고 볼 수는 없
어.”
“애송이라고 볼 수 없기는. 자네도 영상 봤잖아. 그놈은 아주 반편이 파이터
야. 이바노프가 아니라 나나 톰슨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애송이 놈은 아주
곤죽이 되어 케이지를 내려갔겠지.”
“...”
이번에는 매니저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엘런 폰과의 데뷔전은 너무 순식간에 끝났기에 영상분석이라는 게 의미가 없
었다지만 솜차이와 이바노프 전으로 강해서라는 파이터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
는 확보된 상태.
“확실히... 그건 그렇지. 솜차이의 영상을 보고는 애매했는데. 이바노프 전에
서 그는 자신의 약점을 확실히 드러냈으니까.”
카메라가 선수의 얼굴만 집중적으로 찍는 게 아니기에 찾기 쉽지 않았던 강해
서의 습관.
솜차이와의 시합에서 2라운드부터 맞지 않아도 될 펀치를 허용하고. 이바노프
전에서는 제대로 된 타격을 성공시키지 못하는 게 이상해서 몇 번이고 돌려보
며 찾아낸 약점.
“격투기 선수로서 치명적인 약점이야. 고작 두세 달 만에 고칠 수 있는 습관
도 아니지. 오스만 회장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대책을 내놔
야 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잖아.”
“그렇다면 이번 계체량 인터뷰에서 험한 꼴을 보게 되겠지. 오스만 회장도.
브로일러도. 강해서라는 애송이도.”
-쾅!
다시 한번 샌드백을 두드리며 뜨거운 눈빛으로 어딘가를 노려보는 브래드.
“절대.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거야.”
*
“그럼 내일 미국 들어가는 거야?”
“그렇지.”
어느덧 새벽 체력 훈련 때 옷을 겹쳐 입어야 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캘리포니아 주?”
“어.”
“흐음. 매번 멀리 나가는 것도 힘든 일이겠다. 거기다 컨디션 조절까지 해야
하고. 먹는 것도... 아. 먹는 건 감량 때문에 어차피 별 상관없나?”
오랜만에 체육관에서 만난 아름이는 요즘 근황에 관해 이야기하다 당면한 토
너먼트 때문에 내일 출국을 한다니까 이것저것 물어왔다.
“그렇지. 어차피 이젠 들어가서 컨디션 조절이랑 계체에 맞춰 커팅하는 일만
남았으니까.”
“으아. 힘들겠다.”
혀를 쭉 내밀며 힘들겠다고 날 위로하던 아름이는.
“아! 그러고 보니 지난번 시합 때는 끝나고 연락을 못 했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내려치더니 지난 이바노프 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 뭐. 그렇네?”
“나랑 연락 안 했는데. 시합 끝났다는 느낌. 받았어?”
“흠...”
분명 솜차이와의 시합 이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긴 했다.
아름이와 통화하며 ‘이제야 시합이 끝났다는 실감이 난다’라고 말했던 적이.
-툭!
“아! 아야! 이씽. 왜 때려? 이거 폭력이야? 프로 선수가 일반인 상대로 폭력
휘둘러도 돼?”
나는 놀리는 듯한 아름이의 질문에 이마에 새끼손가락으로 가볍게 딱밤을 때
렸고, 아름이는 그마저도 아픈지 엄살을 피워댔다.
진짜 아픈가? 되게 살살 톡 건드는 수준으로 때렸는데...
“뭐. 시합이 끝났다는 느낌이라... 이바노프 전 이후로는 확실히 그런 느낌.
못 받은 것 같아.”
“어? 진짜? 나 때문에?”
아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양손 검지로 아주 귀엽게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고.
“...뭐래? 미쳤나봐...”
나는 꽤나 극혐 한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피했다.
“...됐어. 너랑 안 놀아.”
그런 내 모습에 삐졌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아름이.
“풉. 푸하하하.”
그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렇게 편하게 여자 사람 친구와 대화를 해본 게 얼마 만이지.
하는 일이 운동이다 보니 주변엔 죄다 시꺼먼 남자들 뿐이라 유나씨나 은솔
에디터 정도가 최근에 사적인 대화를 해본 사람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인터뷰
아니면 방송 콘텐츠 관련 대화가 주를 이루었고.
정말 친구처럼 별 의미 없이 일상을 주고받는다는 느낌은 이런 거구나 싶었다.
“사실은. 아직 이바노프 전에서 시작된 시합이 아직 안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
거든.”
“응? 무슨 말이야?”
아름이는 언제 토라졌냐는 듯 내 말에 다시 집중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전에는 시합이 끝나면 다음 시합 일정까지 텀이 있었잖아. 정확히는 매치
업이 나오지 않았었지.”
데뷔전인 엘런 폰과의 시합이 끝났을 때는 연장 계약을 맺은 뒤에야 솜차이와
의 시합 소식을 들었다. 이바노프와의 시합 또한 솜차이와의 시합이 끝나고
어느 정도 텀을 두고 매치업 소식을 들었고.
“그런데. 이번은 이바노프와의 시합이 끝나는 순간 연말 토너먼트라는 고정
시합 일정이 잡혔으니까. 뭐랄까. 시동을 끄지 않고 계속 달리는 중이랄까.”
“아아. 무슨 말 하는지 대충 알겠어. 휴식기 없이 연달아 작품 활동을 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 거지?”
“... 글쎄. 난 그쪽을 잘 모르니까. 하하.”
난 잘 모르겠지만 저 혼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름이.
문득 이렇게 앉아있으니 내가 어쩌다 천생 연예인인 저 아름이랑 친구가 되어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나 싶었다.
“응? 왜?”
내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름이. 저게 진짜 어딜 봐
서 며칠 뒤면 31살이 되는 얼굴이냐. 세상의 풍파는 나 혼자 다 맞서 싸운 것
도 아니고.
“아. 아니야. 흠. 흠.”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 같으니 다시 마무리 운동이나 해야지 하고 일어
나려는데.
“어어? 너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수상해. 수상해?”
체육관 문이 열리며 정말 말 많은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필승이 형. 다녀오셨어요.”
“필승 오빠!”
양손에 먹을 걸 이것저것 사 들고 온 필승 형이었다.
“자. 자. 이거 먹고 해.”
“...감사합니다.”
가져온 대부분이 샐러드나 프로틴바. 닭가슴살 종류들이었다.
“...난 갈래. 으엑. 저거 싫어.”
특히 녹조 색을 연상시키는 알 수 없는 액체혼합물을 보고는 아름이마저 자리
를 떴다.
“자. 자. 쭉 들이켜 인마. 형이 다 너 주려고 직접 갈아온 거야.”
“...”
라스베이거스에서 한국에 돌아온 뒤 어떻게 알았는지 자청해서 그라운드 코칭
을 해주겠다며 우리 팀 피스트 체육관으로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한 필승 형.
“저놈! 저놈 저거 또 왔어?”
“아이고. 형석 형님. 형님도 한 잔 드릴까요?”
“일없어 인마!”
당연히 안 코치님과는 처음부터 티격태격했지만 내 훈련에 도움이 되는 부분
이 있었기에 크게 뭐라 하지는 않으셨다.
나 또한 필승 형이 처음 찾아왔을 때 이렇게 공들이셔도 체육관 옮길 생각은
없다고 분명히 못 박아뒀었고.
필승 형은 본인도 내년 초에 ‘WFC In 부산’의 시합 일정이 잡혔다며 함께 운
동을 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했다.
말이 조금 많은 편이긴 했지만, 딱히 거짓말을 하거나 속과 겉이 다른 스타일
은 아니었기에, 이번엔 필승 형이 우리 체육관에서 합동 훈련을 한다는 생각
으로 넘어갔다.
“해서야.”
“네?”
녹조 음료를 건네며 문득 진지하게 날 부르는 필승 형.
“지지 마라.”
평소에는 그렇게 말이 많다가도 이렇게 진지할 때는 쓸데없이 말이 짧아지는
필승 형.
“당연하죠. 누가 지려고 그 먼 데까지 가겠어요. 이기고 올게요. 걱정하지 마
세요.”
“네 시합이 끝나면 바로 두호 형의 타이틀전이지?”
“어... 그렇죠. WFC 연말 최대 이벤트라고 한창 홍보 중이니까.”
브로일러가 준비한 올 연말의 피날레가 브로일러 248 원-나잇 토너먼트라면
WFC에서 준비한 연말 최대 이벤트는 웰터급 타이틀전이 있는 WFC 256 시합이
었다.
“두 사람 모두.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그 바통을 이어
받아 좋은 결과를 낼 테니까.”
필승 형은 WFC 256의 한국 시합 메인 경기를 뛴다.
용담호혈이라는 WFC 미들급 랭킹전.
“형 실력 제가 알잖아요. 좋은 결과 있을 거예요. 일단 저부터. 좋은 결과 가
져올게요. 걱정 마세요.”
“푸하하. 야. 나 박필승이야 인마. 걱정은 무슨. 난 이길 건데 그 전에 네가
지고 오면 괜히 미안해질까봐 하는 말이지. 만약 지고 오면 형이 소주 한잔
사주마! 내 시합 이기고 나서!”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필승 형.
“뭐? 저 자식은 내일 출국하는 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하하. 형석 형님도 참.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만약 제가 지면 그땐 형석 형님
이 소주 한잔 사주시는 겁니까?”
“미친놈. 일없다. 너 술 사줄 돈 없으니 질 생각은 하지도 마.”
“하하하.”
나는 속으로 ‘저도 그 술 마실 일은 없을 거예요. 필승 형’이라는 대답을 하
며 마무리 운동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국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
팀 피스트 체육관은 식지 않는 뜨거운 남자들의 열기로 어느덧 쌀쌀해진 밤공
기를 데우고 있었다.
2.
-찰칵. 찰칵.
-이쪽을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자. 선수들. 준비해주세요!
와우.
오늘은 역대급으로 정신없는 계체량이었다.
브로일러 248 원-나잇 토너먼트는 미들급 토너먼트 시합만 4강전과 리저브 매
치. 결승전까지 메인 카드만 4개가 있었고 중간 중간 라이트 헤비급과 웰터급
예비 카드 경기까지 총 12개의 시합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말 최대 이벤트다 보니 선수도 많고 취재진도 많은 상황.
“자. 정신 차리고.”
“넵!”
브로일러 248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위치한 SAP 센터에서 치러졌다.
일찍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나와 스텝진은 시차 적응 및 계체량까지의 감량을
모두 끝마치고 계체 일정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와. 사람 많으니까 나도 정신없네. 해서야. 네 상대 선수는 어디 있어?”
“음. 보자...”
원-나잇 토너먼트의 대진표는 시합을 보름 정도 앞둔 시점에서 공개되었는데,
내 상대는 미들급 랭킹 6위의 빌리 톰슨이었다.
이미 영상으로 수백 번은 돌려봤을 그의 파이팅 스타일은 전형적인 타격계였
기에 그나마 대진운이 좋은 편이라고 안 코치님은 말씀하셨다.
“자. 메인 카드 선수분들. 이쪽으로 모여주시고요.”
정신없는 와중에 계체량까지 무사히 마치고 간단한 인터뷰와 촬영 타임.
토너먼트다 보니 메인 4명의 선수가 한자리에 모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나는 오스만 회장이 명백히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매치
는 결코 공정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인터뷰에서 갑자기 토너먼트 출전 선수 중 하나가 급발진을 밟았다.
“브래드 선수. 방금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까요?”
“말 그대로입니다. 저나 리카르도는 서로 힘든 격전을 벌일 겁니다. 누가 올
라가든 쉽게 올라가진 못하겠죠. 하지만. 톰슨은 저 애송이 파이터를 상대로
아주 손쉬운 승리를 거머쥘 겁니다. 그리고 유리한 상태에서 결승에 임하겠
죠. 심지어 그의 시합이 토너먼트 1시합입니다. 이건 명백히 톰슨을 밀어주는
브로일러의 수작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어후. 무슨 랩 하는 줄 알았네.
준현이의 통역을 듣자 하니 저 선수는 내가 자신과 붙지 않아서 많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날 애송이 파이터라 부르며 나와의 시합은 아주 손쉬운 승리를 보장하는 것처
럼 이야기하는 걸 보니.
“준현아. 저 아저씨한테 이렇게 좀 전해줘라. 나도 거저먹는 시합을 위해 브
래드 당신과 붙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톰슨과 맞붙게 되었다고. 그리고 리카르
도가 최대한 힘을 빼지 않고 결승에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리카르도와 브래드. 톰슨의 시합 영상 모두를 분석했지만, 결승에 올
라올 확률은 리카르도보다 브래드가 높아 보였다.
하지만 날 무시하는 상대에게 굳이 좋은 이야기를 해줄 필요는 없지.
“...뭐? 이 애송이가? 넌 나를 피해 톰슨을 만난걸 감사해야 할 거야. 톰슨과
달리 나와 케이지 안에서 마주쳤다면 넌 오줌을 지리며 도망쳤을 테니까.”
준현이가 통역을 잘 해줬는지 매우 흥분한 듯 내게 삿대질하며 말을 쏟아내는
브래드.
“뭐라는 거야? 넌 아직도 소변도 못 가리는 애들이랑 어울리는 수준인가 보구
나? 라고 전해줘라.”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애송이!”
나는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 대꾸했고, 브래드는 당장이라도 내
게 덤벼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공기가 과열되는 듯 하자 진행자는 적절히 인
터뷰를 커트했고 마무리가 썩 개운하지 못해게 계체량은 끝이 났다.
“쩝. 이렇게 신경전을 한 것도 오랜만이네.”
엘런 폰 때는 신경전이 있었다지만 솜차이나 이바노프는 꽤나 신사적이었으니까.
인터뷰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내일 있을 시합을 머릿속으로
이미징하고 있는데.
-웅성웅성
안쪽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지? 준현이 이 자식은 이럴 때 어딜 간 거야?”
꼭 중요할 때 자리에 없단 말이지.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통역을 맡은 준현이가 없음에도 인파를 헤치고 들어
갔고.
“...준현아?”
인파의 중심인 화장실 앞에서 준현이를 발견했다.
“야! 이! 새끼야! 그 손 안 놔!!!”
브래드에게 멱살이 잡힌 채 들어 올려진 상태의 준현이를.
작가의말
실제로 제이팍이 정찬성 선수의 통역을 맡았다가 오르테가에게 뺨을 맞은
일화가 있죠...
전문 운동선수가 일반인을 폭행하거나 위협을 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물론 브래드는 곧 해서에게 쥐어 터질겁니다.
아주 빵 터지겠죠...!
덧) 어제 권창섭이 차에서 튼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요? 아무도 언급을 안
해주시네요...ㅠ
어제와 오늘! 후원이 있었습니다!
방콕엔방콩 님! 후원 감사합니다! 작가는 방콕하며 열심히 글을 쓰고 있
습니다! 한의원만 다녀왔어요!
구름땅 님!! 오늘만 후원을 세번씩이나... 저는 처음에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 여러번 날라왔나 했습니다 ㅠㅠ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독자님들! 드디어 표지 러프가 나왔습니다...!
해서가 몸이 너무 좋다구요? 그러려니 해주세요... 표지에 군살 붙은 모
습을 넣을 수는 없잖아요...
앞으로는 저 얼굴을 떠올리며? 글을 써보겠습니다 작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