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_복싱
1.
“그래서. 텔론 회장을 그렇게 보내셨다구요?”
“하하. 네. 뭐. 애초에 정말 얼굴 한번 보러 오신거더라구요.”
볼튼과의 첫 스파링이 있었던 날 저녁.
예정되어있던 맨즈 라이프와의 인터뷰를 위해 류은솔 에디터를 만났다.
“그래도 세계 최대 격투기 단체인 WFC 회장과의 만남이었는데. 뭔가 특별한
에피소드 같은 것 없었나요?”
“음... 특별한 에피소드라.”
사실 텔론 회장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많이 놀랐었다.
은솔 에디터 말대로 세계 최대 규모의 격투기 단체 회장님이 일개 선수를 만
나기 위해 직접 행차하다니. 그것도 경쟁단체인 브로일러 소속의 선수를.
“뭐... 정말 잠깐 얼굴만 본 거라 에피소드랄 게 없네요. 진짜로.”
“아아. 뭔가 살짝 아쉽네요.”
“하하. 생각하시는 어떤 일도 없었습니다.”
아직 브로일러와의 계약이 3게임이나 남아있었고 토너먼트와 타이틀전까지 노
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텔론 회장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따로 계
약이나 WFC 관련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을 테고.
“E스포츠나 다른 운동경기에서는 템퍼링이다 뭐다 말이 많지만. 사실 격투기
라는 종목은 비교적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잖아요? 어떠세요? WFC로의 이적 계
획이나 향후 거취는?”
“으음...”
앞선 텔론 회장의 이야기는 이번 질문을 위한 빌드업이었구나 라는 걸 느끼며
역시 은솔 에디터는 프로구나 싶었다.
일상적인 대화와 인터뷰 질문과의 경계가 아주 자연스러워 분위기가 편하고
대답하기가 좋았다.
“일단은 눈앞에 당면한 과제들에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다음 시합
에서 패배할 수도 있고. 그 다음 시합에서 고꾸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앞으로
약 두달 뒤에 있을 원-나잇 토너먼트와. 거기서 좋은 성적을 냈을 때 기다리
고 있을 타이틀전까지. 일단 저는 거기까지만 보고 있습니다.”
“역시. 선택과 집중이라는 거죠?”
“하하. 뭐. 그렇게 거창하게 포장할 건 없지만. 맞습니다. 저는 늦게 시작한
만큼 하루 하루. 일분 일초를. 사소한 에너지 낭비도 없이 오롯이 눈앞의 시
합들에 쏟아붓고 싶어요. WFC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요.”
“우와...”
오랜만에 준현이 외의 사람과 한국어로 대화를 했더니 조금 오버했나보다.
아니면 여자 사람과의 대화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거. 제가 인터뷰 요청 드린 것도 실례가 아닌지 괜히 죄송해지네요.”
“아아. 아니에요. 앞으로의 진로라던지. WFC이적 같은 닥치지 않은 미래에 대
한 걱정이나 근심을 안고가지 않겠다. 그 정도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짜죠?”
“그럼요. 저도 틈틈이 제 기사 검색해보고. 인터넷 반응도 찾아보고. 그러고
있어요. 제 기사를 위해서 먼 곳까지 와주셔서 너무 감사한 일인데 실례라뇨.”
어쨌든 은솔 에디터와의 인터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좋은 분위기에서 진
행되었고, 그리 많은 시간을 뺏기지 않은 채 마무리 되었다.
“고마워요. 해서 씨.”
“아니에요. 제가 고맙죠.”
그렇게 모든 인터뷰는 끝났다.
은솔 에디터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기사 업로드 전에 미리 글을 보내 줄테니
빼고싶은 내용이 있으면 편하게 말을 해달라고 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
였다.
사실, 올라가지 않았으면 하는 내용은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예를 들면 오늘 카이서스를 만났다던가, 조만간 그와 타격 훈련을 한다는 내
용 같은.
*
-휘익. 퍽!
-땡!
마지막 왼손 펀치가 볼튼의 왼쪽 옆구리를 가볍게 터치하는 순간 울린 공.
“고생했어!”
생각보다 그리 짧지 않았던 일주일간 스파링의 마지막 라운드가 끝났다.
“어후. 물 좀 줘라.”
“오케이. 여기.”
나는 준현이에게 받은 물을 벌컥 벌컥 마시며 갈증을 해소했다.
지난 일주일 볼튼과의 스파링은 생각보다 내게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주변시만으로 시야 정보 전체를 읽는 그 감각을 키우고 유지하는 데는 실전같
은 스파링만한 게 없었으니까.
주변시를 제대로 사용할 정도의 ‘집중 상태’에 들어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
았다. 그리고 집중상태를 유지하기 또한 쉽지 않았고.
집중력을 몰아서 쓰다 보니 살짝 두통을 느낄 때도 있었고, 집중상태가 풀리
면 오히려 상대적으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도 받았다.
“헤이. 미스터 강. 고마워.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
물을 마신 뒤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내게 다가와 감사인사를 하는 볼튼.
첫인상과는 다르게 꽤나 신사적인 매너를 가진 선수였다.
다들 운동하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코네티컷에서도 그렇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도 그렇고 심각하다 느낄 정도의 인종 차별 같은 건 받아본 적이 없었다.
영화나 소설 보면 아시아인이라고 비하하거나 동양인이라고 차별하는 그런 상
황을 많이 봐서 꽤나 경계했었는데. 역시 세상은 케바케인 듯 했다.
“카이서스가 내일 오전 훈련을 같이 하자고 했어. 어때? 괜찮겠어?”
“내일 오전?”
어느덧 라스베이거스에 온지도 4주차에 접어들었다.
슬슬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타이밍이라는 거지. 타격의 문제를 풀어낼 방법도
찾았고.
“오케이. 내일 오전 훈련. 몇 시까지 나오면 돼?”
나와 준현이는 볼튼에게 내일 훈련의 일정을 전달받은 뒤 체육관을 나섰다.
“이제 라스베이거스도 열기가 조금 사그라졌네?”
“음. 그러게.”
아직도 햇살은 뜨겁게 부서지고 있었지만, 한여름의 열기는 한 풀 꺾인 듯 했다.
하긴. 벌써 10월 중순을 넘어 11월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오늘 두호 형님 오신다 그랬지?”
“어? 어. 오랜만에 보겠네.”
코어 근력과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무슨 수상 훈련부터 필라테스 훈련까지.
라스베이거스의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니며 본인에게 필요한 훈련을 받고 다니
는 두호 형.
덕분에 라스베이거스에 온지 3주가 지나가지만 얼굴 본 적이 몇 번 없었다.
내게 필요할거라는 코치들이나 훈련들을 추천할 때나 한번 씩 얼굴 봤지.
“해서 너도 정말 토 나오게 열심히 하는데. 한 번씩 두호 형님 보면 사람이
맞나 싶을정도로 너무 열심히 하셔. 오히려 걱정되게.”
“뭐. 형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불태우고 계시니까.”
아무래도 나와는 마음가짐이 다르겠지.
나 또한 나름의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지만 형의 마음이 나와 같은 단단함일
리가 있겠어.
“이 좌식들! 내 이야기 하고 있었지?!”
스파링을 끝내고 원래 운동하던 체육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뒤에서 누군가 나
와 준현이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나타났다.
“두호 형!”
“이야. 미스터 강! 이제 좀 보기 좋게 탔네?”
가볍게 미스터 강이라 부르며 장난을 치지만 목과 어깨로 느껴지는 두호 형의
팔 근육과 열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게 40대 아저씨 몸이 맞나?
“해서가 조금 보기 좋아지긴 했죠. 전에는 영락없이 흰 백숙이었는데. 이젠
좀 오골계 같아짐.”
“뭐 인마?”
준현이는 두호 형의 말을 받아 날 닭에 비유하기 시작했다.
하긴. 예전에는 집에만 박혀있어서 남자 치고도 하얀 피부였다. 거기다 살도
붙어서 가끔 목욕탕이나 찜질방을 가면 ‘백돼지’ 혹은 ‘백숙’이라고 친구들이
놀리기도 했지.
“푸하하하. 브로일러에서 뛰니까. 오골계보단 투계가 맞는 거 아냐?”
“엇! 맞습니다. 형님!”
얼씨구. 둘이 합이 잘 맞으시네요.
브로일러가 요리용 닭을 뜻하는 의미도 있다 보니 이렇게도 놀림을 받는구나
싶었다.
“자. 자. 들어가자. 해서 중간 체크도 한번 해볼 겸.”
오랜만에 얼굴 봤지만 하하 호호 거릴 시간은 없었다.
두호형도 나도. 눈앞에 목표가 있었으니까.
-팡. 팡.
요 며칠 복싱 글러브 좀 꼈다고 스파링용 오픈핑거 글러브가 살짝 어색하게
느껴졌다.
“들어와봐.”
오픈핑거 글러브를 끼고 하는 스파링은 또 오랜만이네.
과연 지난 일주일간 복싱 선수와의 스파링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를 시험
해볼 수 있는 자리. 그것도 세계 최정상급 파이터인 두호 형이 상대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갑니다!”
메스 스파링이라고는 해도 복싱과는 달리 입식 타격 전체와 간단한 테이크다
운정도는 허용하는 룰이었다.
펀치만 신경 쓰면 됐던 지난 일주일과는 달리 이것저것 신경써야할 게 많은
상황.
-화악.
두호 형의 눈을 바라보며 전진스텝을 밟자 집중도가 높아지며 순식간에 ‘그
모드’에 진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
-휘이익. 휘익. 휘익.
내 전진 스텝에 맞춰 가볍게 뻗어오는 두호 형의 펀치들이 또렷이 보였다. 그
리고 펀치에 이어 오른발 킥을 위해 꿈틀대는 허벅지 근육까지도. 내 눈은 분
명 두호 형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휙. 휙
펀치 두 개를 정확히 피해내고는
-턱!
오른발 킥은 왼손바닥으로 무릎 진행방향을 막으며 무력화시켰다.
-휙.
바로 이어지는 두호 형의 레프트를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간발의 차로 피해낸 뒤
-툭. 턱!
두호 형의 옆구리와 안면 부근에 주먹을 차례로 갖다 대고는 뒤로 쭉 빠져 거
리를 벌렸다.
“...”
살짝 경직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두호 형.
나는 스파링 그만하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하려는데
“이런 미친.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두호 형은 버퍼링 걸렸던 영상이 다시 재생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완전히 없어졌잖아? 습관이? 근접거리에서 킥을 손바닥으로 막았다고? 보지
도 않고? 말이 돼?”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까지 벌게진 두호 형.
워. 워. 진정 좀 하세요. 저도 지금 머리 아프니까. 울려요 울려.
2.
“어후. 이제 좀 살겠네.”
“좀 괜찮아?”
“어.”
다음날 아침.
우리는 오전 훈련을 위해 일찍 숙소를 나섰다.
“어제 스파링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런 건가?”
“그런 것 같아.”
준현이의 말처럼 어제 두호 형과의 스파링은 기가질릴정도로 오래 진행됐다.
1라운드 2라운드 이런 개념 없이 한명이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복싱과는 달리 이것저것 집중할게 많은 MMA에서는 같은 시간 집중모드를 유지
했을 때 뇌에 오는 부하가 더 심한 것 같았다. 스파링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
와서도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으니까.
“헤이! 미스터 강!”
카이서스 짐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해 몸을 풀고 있던 볼튼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래도 지난 일주일간 매일 얼굴 봤다고 꽤나 잘 챙겨주는 착한 선수였다.
“왔나?”
그리고 카이서스.
Kaisus라는 본명보다는 Kaisers 라는 별칭으로 더욱 많이 불리는 복서.
아주 짧지만. 그와 함께하는 타격 훈련이라는 건 MMA 수련자인 내게도 설레는
일이었다.
“일단. 잠깐 테스트 좀 해봐도 될까?”
스트레칭을 끝내고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자 내 실력부터 보고 싶어하는 카
이서스였다.
“좋죠!”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챔프라 불리는 그와 펀치를 나눌 일이 내 평생에 언제 또
있겠는가. 그것도 MMA와 복싱이라는 서로 다른 종목에서 활약하는 선수인데.
-팡. 팡.
어제 몇 시간을 오픈핑거 글러브로 스파링 했다가 오늘은 또 아침부터 복싱용
스파링 글러브라.
뭔가 느낌이 묘했다.
“컴온.”
자신의 이마와 가슴을 툭툭 치며 들어오라고 도발하는 카이서스.
카이서스는 헤비급 챔피언답게 나와 비슷한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상
체의 근육 자체는 나보다 월등히 많은 것 같았다.
-퉁. 퉁. 스팟!
나는 살짝 스텝을 밟다가 카이서스의 비어있는 이마를 향해 레프트를 뻗었다.
-휘이익.
챔프와의 스파링이라는 긴장감 때문일까. 펀치를 내뻗는 순간, 주변이 느려질
정도로 집중력이 고조되었다.
-툭.
맞히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피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패링을
당할 거라는 생각까지는 못했는데.
“...”
카이서스는 내 주먹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정확한 타이밍에 패링으로 걷어 내
버렸다.
“후우...”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 카이서스의 눈과 전체 움직임을 더욱 주시하며 집중
력을 올렸고, 마침내 그의 움직임이 하나 둘 손에 잡힐 듯 보이기 시작했다.
-휙.
그의 어깨 움직임과 다리 움직임. 허리의 회전. 모든 정보들을 종합했다. 그
리고 예측된 그의 움직임에 맞춰 가장 적절한 위치로 가장 효율적인 라이트
펀치를 뻗어내는데.
“...”
펀치를 채 다 뻗기도 전에 그의 움직임이 바뀌는 걸 느꼈다.
카이서스는 지금 내가 뻗는 펀치를 막기 위해 왼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 오른손은 카이서스의 왼 손에 가드당할 게 뻔 한 상황. 나는
오른손을 그대로 뻗되 힘을 뺀 후 왼팔을 움직이느라 비어있는 그의 복부를
향해 왼손을 뻗을 준비를 했다.
“...!”
오른손이 카이서스의 왼손을 만나기도 전.
왼팔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아주 짧은 순간.
카이서스의 왼팔은 내 오른손과 같이 근육의 긴장도가 줄어들며 오른팔이 복
부를 가드하려는 듯 내려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턱! 턱!
결국 라이트 펀치는 왼손 가드에 막히고, 왼손 바디 훅은 카이서스의 오른손
가드에 막혔다.
“... 맞는 것 같군.”
그제서야 열리는 카이서스의 입.
“자넨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아.”
그러면서 더 이상 스파링은 필요 없다는 듯 글러브를 벗으며 말했다.
“MMA는 자네와 어울리지 않아. 복싱계로 넘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