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_카이서스
1.
“하. 참...”
볼튼은 오늘 자신의 스파링 파트너로 올라온 상대 선수를 바라보며 어이없다
는 듯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MMA 파이터. 브로일러 미들급. 동양인. 심지어
‘복싱 경험도 별로 없어 보이네.’
가드 자세나 발 스텐스. 파이팅 리듬까지. 전문적으로 복싱을 수련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 아무리 컨디션 조절용 스파링이라도. 수준은 좀 맞춰주지.”
불평을 하면서도 볼튼은 링 중앙으로 나가 상대 선수와의 글러브 터치를 빼먹
지는 않았다.
-휙! 퍽!
‘오?’
펀치에 힘은 뺐지만 그만큼 더욱더 빠르게 뻗었던 레프트 잽.
하지만 상대 선수의 글러브에 보기 좋게 막혔다.
‘제대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반응이 좋네.’
그래도 스파링 상대를 아무나 뽑진 않았는지 생각보다 괜찮은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복싱 경험은 전혀 없는 듯했다.
볼튼의 펀치를 모두 막아내는 건 칭찬해줄 만 했지만, 사각의 링에 대한 이해
도는 거의 전무한 수준.
-턱.
결국, 상대선수. 강해서는 볼튼의 압박에 코너에 박히고 말았다.
-휙. 휙.
몇 번의 펀치를 잘 피해내긴 했지만 결국 코너에 몰린 강해서는 볼튼의 펀치
세례에 몸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휘익.
이어지는 볼튼의 연타 사이 들어온 강해서의 펀치.
“응?”
순간 볼튼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 봤나 했다.
‘한창 싸우는 도중에. 한눈을 팔아?’
복싱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상대 선수와의 눈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MMA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방의 눈(안면 부근)을 바라보며 싸운다.
그런데 조금 전 강해서라는 상대 선수는 볼튼과의 근접 타격전 중에 눈을 아
래로 힐끗거려 순간 페인팅을 구사하는 줄 알았다.
-퍽
그런데 페인트가 아니라 진짜 타격지점을 바라보는 거였다니.
‘...셋업인가? 페인트를 위한?’
볼튼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MMA도 그렇겠지만 복싱 또한 한 방의 결정타를 위해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라운드까지 셋업 펀치나 동작을 행한다.
-휙. 휘익. 휙. 휙.
하지만 강해서의 시선 처리는 페이크나 그것을 위한 셋업이 아니었다.
‘그냥... 타격지점을 보고 때리는 게 습관이잖아?’
지근거리에서 상대방 눈만 바라보고 있다면 그 눈동자의 움직임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눈동자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상대방의 어깨가 움직인다.
그러면 상대의 움직이는 어깨로부터 이어지는 오른쪽 빈 곳을 커버한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볼튼은 강해서의 펀치를 모두 봉쇄할 수 있었다.
‘이건 뭐. 이번 스파링은 움직이는 샌드백 치는 연습이라 생각해야겠군.’
이런 볼튼의 생각은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까지 변하지 않았다.
-휙. 휘익. 휙.
2라운드에서는 상대 선수인 강해서가 단 한 번의 주먹도 뻗질 못했으니까. 말
그대로 샌드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점점 펀치를 맞는 빈도가 줄어들고 있어.’
1라운드까지는 타격할 때뿐만 아니라 펀치를 막아낼 때도 시선이 흔들렸다.
그런데 2라운드 중반을 넘어서는 시선의 흔들림도 사라졌고 유효타가 나오는
빈도도 떨어졌다.
-땡!
“후우.”
2라운드가 끝나고 볼튼이 자신의 코너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 백인 남성 하나가 다가왔다.
“오우. 볼튼. 미안해. 나름 유명한 MMA 파이터라고 추천을 받았는데 이렇게
수준이 떨어질 줄은 몰랐어.”
남자는 볼튼의 스파링 매치를 담당하는 매니저였는데 2라운드까지의 스파링을
보고 볼튼이 기분이 상했을까봐 달래주러 온 것이었다.
“...아니야. 저 친구. 그렇게 수준이 떨어지는 선수가 아니야.”
“응?”
“괜찮다고.”
매니저는 볼튼이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것에 안도하고는 얼른 사라졌고 30
초의 휴식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땡!
스파링의 마지막 라운드인 3라운드 공이 울리고 링 중앙에서 글러브 터치를
한 두 사람.
“흡!”
볼튼은 2라운드 종반에 자신의 펀치가 거의 다 빗나간 걸 떠올리며 3라운드
초반부터 기어를 높여 빠른 펀치들을 쏟아냈다.
-휙. 휙휙휙. 휘익.
글러브 터치 이후 바로 전진 스텝을 밟으면서 펀치를 쏟아냈지만 단 하나의
유효타도 적중시키지 못했다.
‘...’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상대 선수의 눈에서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낀
볼튼은 목덜미부터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가드를 당한 게 아니라. 다 피했어. 그것도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맞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자신의 공격을 피해내는 동양
인 선수를 보며 애써 불안감을 떨쳐버리며 다시 바디부터 셋업을 쌓으려 전진
스텝을 밟는 볼튼.
-퍼억!
전진 스텝을 밟기 위해 발을 떼서 앞으로 옮기는 찰나의 순간.
날숨이 나가고 들숨을 들이쉬는 아주 잠깐의 타이밍.
그 타이밍에 강해서의 펀치가 볼튼의 왼쪽 옆구리를 두드렸다.
-퍽! 퍽 퍽!
이후로 연계되는 강해서의 펀치 세례.
1, 2라운드와는 달리 볼튼의 눈을 또렷이 직시하며 볼튼의 왼쪽 옆구리, 오른
쪽 옆구리. 오른쪽 안면. 왼쪽 안면 순으로 비어있는 자리만 골라 빠르게 펀
치를 욱여넣은 뒤 뒤로 한 발짝 멀리 물러서는 강해서였다.
“...”
이쯤 되니 1라운드의 시선 처리가 정말 페이크 셋업이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볼튼이었다.
-까딱. 까딱.
이제는 가드까지 내리고 자신을 도발하듯 손짓하는 강해서에게 자세를 낮추며
돌진하는 볼튼.
헤비급치고는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볼튼이었기에 전진 스텝과 함께 펀치를
뻗자 그 속도가 섬광과 같았다.
-휘익.
하지만 이번에도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로 피해내는 강해서.
볼튼은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강해서의 눈빛에서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마침내 알아차렸다.
‘...카이서스. 그와의 스파링과 같은 느낌이다.’
처음 카이서스의 체육관에 들어왔을 때.
WBA 헤비급으로 활동 중인 볼튼은 카이서스와의 지도 스파링을 할 수 있는 기
회를 얻었고, 그날 처음으로 ‘벽’을 접한 바 있었다.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낱낱이 읽히고 있다는 느낌.
무슨 수를 써도 자신의 펀치가 상대에게 닿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
볼튼은 카이서스와의 스파링에서 느꼈던 감정을 지금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카이서스처럼 압도적인 벽은 아니었지만 같은 결의 벽.
저 동양인 선수는 카이서스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
이 볼튼의 뇌리를 스쳤다.
“이익...”
매스 스파링임에도 불구하고 핸드 스피드를 올리기 위해 조금씩 펀치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 볼튼.
-휙. 휙휙. 휘익. 퍽! 휙. 퍽!
하지만 그런 볼튼의 펀치는 안면이든 바디든 단 한 대도 맞지 않았고, 중간중
간의 아주 작은 틈을 노린 강해서의 펀치만이 볼튼의 복부와 안면을 두드렸다.
-땡!
앞선 1, 2라운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3라운드가 끝나는 공이 울렸고.
볼튼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자신의 코너로 돌아갈 뿐이었다.
“... 저 친구는 누구지?”
그때 볼튼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
“카이... 서스.”
이 체육관의 주인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챔프라 불리는 사나이.
카이서스였다.
*
“휘유.”
이렇게 빡! 집중하는 모드는 오래 유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이바노프와의 시합보다 훨씬 집중했다 보니 뭔가 정신적
으로 지친달까.
“와. 님 방금 쩔었음.”
스파링 글러브를 벗으며 링을 내려오는데 준현이가 엄지를 들어 올렸다.
“쩔긴. 지친다. 조금 쉬어야겠어.”
저녁 인터뷰 때까지 훈련 스케줄을 짜뒀는데 다 취소하고 한숨 자고 싶은 심
정이었다.
“헤이.”
짐을 챙기고 체육관 담당자에게 말을 한 후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스파링 상대
였던 볼튼이 우릴 불렀다.
“이봐. 잠깐만. 당분간 계속 스파링 나와줄 수 있어?”
체육관을 나서려는 우리에게 뛰어와 다음 스파링 스케줄을 물어오는 볼튼.
“흠... 준현아. 일단 아까전에 한 말의 사과부터 듣고 싶다고. 말 좀 전해주라.”
“아까전에 한 말?”
“MMA 선수니 뭐니. 동양인이니 뭐니 했던 거.”
“아! 오키 오키.”
준현이는 내 말을 볼튼에게 전달했고.
“오! 미안해. 절대 비하의 의도는 없었어. 나도 시합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
이 촉박해서 그랬어. 매니저가 스파링 상대를 잘못 구해온 줄 알았거든.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생각보다 깔끔하게 사과하는 볼튼.
뭐. 스파링할 때도 시합 매너가 깔끔했기에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리고. 오늘 스파링. 카이서스가 지켜봤어.”
“왓?!”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준현이 놈.
“야. 오늘 스파링 카이서스가 봤대! 어? 저기 있다. 저기 카이서스 맞지?”
“어... 맞는 것 같네.”
사실 외국인은 잘 못 알아보겠다. 특히 흑인은 더.
카이서스가 맞는 것 같긴 한데 길 가다 만났으면 못 알아봤을 거다.
“카이서스가 그러더군. 자기와 같은 부류라고. 스파링을 하면 내게 도움이 많
이 될 거라고 그랬어. 염치없지만 며칠만 도와줄 수 있겠어?”
“흠...”
사실 당장 복싱클럽에서 내가 얻을 건 딱히 없었다.
지금 이대로도 기존의 습관을 지워낼 수 있는 단초는 잡았으니까.
“미안해. 나도 시합이 얼마 남지 않아서 훈련 스케줄이 빡빡해. 스파링 상대
가 되어주는 건 어려울 것 같아.”
내 코가 석자인 상황인데 오늘 처음 본 사람의 사정을 봐줄 수는 없었다.
“일주일. 일주일간 하루에 한 번 볼튼의 스파링 상대를 해주면. 내가 자네의
타격을 봐주지.”
거절의 대답을 내놓자 볼튼의 뒤에서 들린 목소리.
“자네는 MMA 파이터지? 신기하군. 나와 비슷한 느낌의 선수는 태어나서 처음
봐.”
카이서스였다.
WBA, WBO, WBC, IBF.
복싱을 대표하는 4대 단체 최초의 헤비급 통합 챔피언.
데뷔 이후 단 한 차례의 패배도 용납한 적이 없는 위대한 챔프라 불리는 선수
였다.
“볼튼은 내가 아끼는 후배지. 하지만 나도 스케줄이 있어 그의 스파링을 봐줄
수는 없어. 자네가 나 대신 그 역할을 해주면 나도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서
자네의 타격을 봐주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그가 직접 내 타격을 봐준 다라.
복싱과 MMA의 타격이 엄연히 다른 테크닉을 구사한다지만 분명 도움은 될 터
였다.
중요한 건 일주일이나 볼튼에게 시간을 투자할 만큼 그와의 하루가 값질 것이
냐가 문제였는데.
“무엇보다. 자네 눈. 나와 비슷해. 나와 같은 인지 세상을 사는 사람은 한번
도 본 적이 없어서 나도 흥미롭군. 과연 자네가 나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
는지 궁금해.”
준현이는 통역을 하면서도 이게 무슨 말이야? 하는 표정이었지만 그걸 듣는
나는 달랐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집중했을 때 보이는 세계.
크진 않지만 내 시야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읽어지는 그 순간을 이야기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오케이. 일주일. 스파링해 주지.”
어차피 스파링 자체는 겨우 십분 남짓이니 그걸로 카이서스와의 타격 훈련 하
루라면 남는 장사라는 판단이었다.
“여기 혹시 강해서라는 선수가 있습니까?”
카이서스의 제안에 오케이를 던지는 그때.
이번에는 등 뒤 체육관 입구에서 내 이름이 들렸다.
“아! 강해서 선수시죠?”
내 이름이 들려 고개를 돌렸더니 날 알아봤는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낯선
백인.
“안녕하세요? 저는 WFC에서 나왔습니다. 다름 아니라 저희 회장님이 강해서
선수를 꼭 만나고 싶어 이곳 체육관을 찾으셨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준현이가 제대로 통역을 한 게 맞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WFC 회장님이 여기서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