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_오늘의 약점은?
1.
-파이터 강해서의 원-나잇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하겠다.
오스만 회장의 발언은 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갑자기?”
그렇기에 나는 준현이의 통역을 듣고도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솜차이 전이 끝났을 때만 해도 브로일러에서는 내가 토너먼트에 나가는
걸 불편해한다고 들었으니까.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겠다만. 일단 우리한테 나쁠 것 전혀 없는 내용이다.
나중에 다른 조건을 걸지는 몰라도 당장 방송에서 저렇게 대놓고 말을 뱉었으
니.”
안 코치님도 이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보였다.
“중요한 건. 확실히 우리를 만만하게 보긴 한다는 거야.”
“네?”
우리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얼굴 한편에는 불편하고 불쾌한 표정
을 감추지 못하는 안 코치님.
“보통 이런 이슈를 터뜨리기 전엔 미리 말을 맞춰둔다. 보이는 퍼포먼스는 돌
발적일지라도 그 안에선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지. 그런데...”
“이번 오스만 회장의 발언은 그런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터뜨린 거다. 이건가
요?”
“...그렇지.”
그런 거라면 안 코치님의 낯빛이 굳은 것도 이해되었다.
선수인 나를 포함해 안 코치님과 우리 체육관 전체를 무시하는 처사와 같았으
니까.
“일단 내색하지는 말아라. 어쨌든 이건 좋은 기회니까.”
“...넵.”
오스만 회장의 인터뷰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인지 나는 따로 승리 인터뷰
도 하지 못한 채 케이지에서 내려와야 했고 바로 다음 시합의 준비가 이루어
졌다.
“아마 오스만 회장이 저런 퍼포먼스를 벌인 이유는. 오늘 해서 네가 이바노프
를 1라운드에 잡았던 것과 지난번 솜차이 전에서의 승리 인터뷰 때문일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 승리 인터뷰에서 또 어떤 돌발 발언을 할지 모르니 애초에 그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거지.”
아레나를 나와 숙소로 향하는 길. 안 코치님은 조금 전 오스만 회장의 발언을
곱씹었다.
“내일쯤 브로일러에서 연락이 올 거다. 계약조항 수정과 토너먼트 출전 확정
계약 등 진행해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그러면 저는 연말에 열리는 토너먼트만 기다리면 되는 거죠?”
“그래. 그나마 다행인 건 몸을 만들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는 거다.”
확실히 최근 시합 텀을 보면 제대로 몸을 만들기에는 증량과 감량을 오가는
하드한 일정이었다.
연말이라고 해봐야 고작 3달 남짓이지만, 이전의 시합들에 비하면 훨씬 여유
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네? 아. 하하하. 넵. 정타라고 해봐야 허벅지 맞은 것밖에 없는데요 뭐.”
“테이크 다운도 당했지.”
“뭐. 그건 그렇게 데미지 없었어요.”
시합이 끝나고 바로 메디컬 체크를 해봤지만, 이상소견은 없었다.
내가 직접 느끼는 후유 데미지도 없었고.
“롱런 하려면 데미지 관리가 중요하다. 다음 시합까지 과제는 몸만들기와 체
력이다. 원-나잇 토너먼트는 하루에 두 번의 시합을 뛰어야 하는 만큼 체력이
관건이니까.”
“넵!”
시간적 여유는 생겼지만, 그렇다고 천천히 쉴 틈 따위는 없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었으니까.
*
“괜찮나?”
브로일러 243 시합이 선수 대기실에서 메디컬 체크를 받은 이바노프.
“아아. 괜찮아.”
그는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레일리의 질문에 가볍게 대답하고는 주섬주섬 짐
을 챙겼다.
“8대 2라더니. 어째 결과는 미스터 강이 8이고 이바노프 자네가 2인 것 같군.”
“...그 말을 하려고 이 먼 곳까지 온 거야? 아시아 지부장이?”
속을 긁어대는 레일리의 말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며 말을 잇는 이바
노프.
“확률이라는 게 그래. 8대2라고 해서 무조건 8의 결과만 나오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이번 경기가 재수 없이 2의 결과가 나온 시합이었다?”
“... 뭐. 그런 건 아니고.”
레일리의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어깨를 으쓱이는 이바노프.
“예상 밖의 요소들이 조금 있었지. 영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그래? 그러면 그런 요소들을 다 반영한다면. 지금은 승률이 어떻지?”
“... 지금 당장 다시 붙는다면 5대 5.”
“... 정말 대단하...”
“두 달 뒤에 붙는다면 8대2. 그리고 올해를 넘긴다면... 아마 9대 1. 행운적
인 요소가 아니라면 나는 그를 이기지 못할 거야.”
“...”
시합의 결과는 정말 사소한 걸로 나뉜다. 그렇기에 레일리는 오늘 이바노프가
패배를 했다고는 하지만 강해서보다 이바노프가 약하다고 평가하지는 않았다.
이바노프가 강해서와의 승률을 5대 5라고 말했을 때 솔직히 그 평가에 놀라운
감정을 느꼈는데 두 달 뒤엔 8대2. 올해를 넘기면 9대 1이라니. 믿을 수가 없
었다.
“일단. 미스터 강. 그의 성장 속도는 정상이 아냐. 약물을 쓴다고 해도 그런
속도가 나올까 싶어.”
“... 불시 도핑이 있었네. 그는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더 괴물이군. 그 힘. 그 성장 속도. 하하. 이거 참. WFC를 피해 브
로일러로 왔는데 브로일러에도 이런 괴물이 들어오다니. 워후.”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웃어버리는 이바노프.
“... 오늘 자네는 미스터 강의 타격을 다 피해냈어. 몇 안 되는 미스터 강의
시합 중 이렇게 타격이 먹히지 않은 경기는 오늘이 처음이었어. 무슨 수를 쓴
거지?”
“...”
레일리는 그런 이바노프를 바라보며 가슴 속에 있던 궁금증을 꺼내었다.
“이게 목적이었구만?”
“알려주게. 뭘 본거지?”
“보긴 뭘 봐. 그냥 내가 잘 피한 거지. 이거. 피곤하네. 이만 좀 가주겠어?
패배자는 휴식이 조금 필요하니까 말이지.”
“... 이렇게 나올 텐가?”
“만약 그에게 약점이 있다면 그건 그의 다음 상대가 찾아볼 일이야. 나는 잘
모르겠지만 말야.”
“...”
이바노프는 레일리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짐 정리를 마쳤다.
“어이! 트레이너! 이거 정리 좀 같이하자고! 왜 선수인 내가 이걸 하고 있는
거야?”
이바노프는 레일리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레일리는 그런 이바노프를 한 차례
더 바라본 후 자리를 떴다.
“이봐. 이바노프. 왜 굳이 레일리와 각을 세운 거야? 지금까지 잘 지내왔으면
서?”
레일리가 떠나고 선수 대기실로 들어온 이바노프의 트레이너들은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뭐. 나는 그가 좋거든.”
“누구? 미스터 강?”
“그래. 나를 이긴 파이터에게 가지는 일종의 존경 같은 거지. 그리고... 내가
진 상대에게 누가 이기는 것도 좀 그렇잖아?”
유쾌하게 웃으며 정리하던 짐을 트레이너에게 넘긴 후 의자에 풀썩 앉는 이바
노프.
“그나저나. 두 달 뒤에 8대 2라니. 성장 속도가 정말 대단한가 봐? 미스터 강.”
“그것도 그가 자신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을 때 이야기지.”
문득 아까의 일전에서 얻어맞은 안면이 욱씬거리는지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잇는 이바노프.
“만약 그가 자신의 약점을 고친다면... 지금 바로 붙어도 9대 1. 도저히 그
이상은 승률이 나오질 않는군.”
2.
“약점?”
이바노프와의 시합이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우리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워터베리의 체육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뭔가. 버릇이라거나. 약점이라거나. 그런 거 없어?”
“흐음...”
맘모스는 종합격투기계에서 알아주는 타격 전문 코치였다.
어제 이바노프 전에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질문을 던졌는데 영 반응이 시원찮았다.
“내가 가르쳐줄까?”
그때 체육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
“두호 형!”
“오! 미스터 초이!”
예상치 못한 두호 형의 등장.
맘모스와 나뿐만 아니라 체육관에서 운동 중이던 다른 선수들의 이목까지 단
번에 집중되었다.
역시 WFC 랭커의 인지도란.
“몸 풀고 있어라.”
“네? 아. 네.”
너무 자연스럽게 체육관을 가로질러 들어오더니 탈의실로 향하는 두호 형.
시키는 대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두호 형이
나왔다.
“어제 시합 잘 봤다.”
“네? 하하.”
그러고 보니 시합 중간에 두호 형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본인이 맞는지
물어보기는 좀 애매했다.
“실력 많이 늘었던데. 오랜만에 가볍게 한번 붙어볼까?”
“네?”
“뭐가 네? 야. 프로끼리 가볍게 스파링 하자는 거지. 타격으로만.”
갑자기 이런 급 전개라니.
두호 형은 맘모스 코치에게 스파링용 오픈핑거 글러브를 받아 끼면서 말을 이
었다.
“엊그제 그랬지? 예전의 네가 아니라고. 이젠 쉽게 안 맞는다고.”
“네? 하하. 타격이라면 뭐.”
두호 형이 암만 WFC 랭커라도. 이젠 타격에 대한 자신감은 확실히 붙었다.
물론 어제 이바노프에겐 유효타를 거의 가져오지 못했다지만 그렇다고 내 타
격 폼이 떨어진 건 아니니까.
-까딱 까딱.
“들어와 봐.”
글러브를 끼고는 손을 까딱거리며 날 도발하는 두호 형.
“진짜 갑니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들어와. 나 최두호야 인마.”
두호 형이랑 떨어져 훈련한 지도 벌써 몇 달.
미국에서 훈련받은 두호 형이 얼마나 성장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보다 성장세가
가파를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휙!
가볍게 던진 레프트 잽이 빗나갔지만,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레프트 잽과 라
이트를 던졌다.
-휙. 휙.
하지만 내가 던진 펀치는 모두 빗나갔고.
-휙. 휙. 스팟!
내 펀치를 모두 피해낸 두호 형의 펀치 중 하나는 내 안면을 스쳤다.
“후. 저 이제 진짜 갑니다. 형?”
“아까부터 제대로 하라고 했는데. 넌 정말 말은 안 듣는 놈이야.”
스파링이라 가볍게 하려고 했는데 계속 긁으시네. 두호 형.
“스읍...”
들숨을 들이쉬고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다시 전진 스텝을 밟았다.
-휙.
가볍게 레프트 잽을 던지고
-휘익
그걸 피해내는 두호 형의 머리 궤적을 그대로 따라 라이트를 집어넣었다.
‘이건 맞았다’라고 생각하며 주먹의 감촉을 기다리는데.
-퍼억!
내 라이트는 보기 좋게 빗나갔고 오히려 두호 형의 라이트가 내 복부를 두드
렸다.
“켁!”
스파링이라 그렇게 강하게 때리진 않았지만, 순간 신음이 터져 나오는 건 어
쩔 수 없었다.
“어때? 더 해볼래?”
“... 어떻게 피한 거예요?”
“뭘?”
“방금 피한 거요.”
분명 제대로 보고 때렸는데. 다 보였는데. 이바노프 때와 같이 빗나갔다.
“흐음. 말해줄까 말까...”
손가락으로 턱을 괴며 고민하는 포즈를 잡는 두호 형. 입꼬리가 올라간 게 이
상황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해서야. 너 혹시 시합 중에 상대방 움직임이 막 느리게 보이는 것처럼 다 보
이고 그러냐?”
어? 어떻게 알았지?
“해서 넌. 눈이 너무 좋아.”
“눈이 좋다뇨? 그게 문제가 돼요?”
“아니. 눈이 좋은 건 축복이지. 중요한 건 네가 눈은 좋은데 아직 경험치가
낮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인데요?
“너무 정직해. 넌 네가 때릴 곳을 정확히 ‘보고 때리는’ 타격을 하는데, 그건
상대방 입장에서도 네 시선만 파악하면 타격 타이밍과 타격지점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는 거지.”
“... 그러면 안 보고 때려요?”
“오랜 시간 수련한 파이터들은 눈에 피가 들어가 시야가 사라져도 펀치를 정
확하게 꽂아 넣지. 너처럼 눈이 좋지 않은 대신 반복 숙달된 몸이 알아서 반
응하는 거야. 그런데 넌 보고 때리니 타이밍도 쉽게 읽히고 타격지점도 읽히
는 거지.”
... 이번 이바노프 전 전까지는 한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만약 보고 때리는 게 문제라면 그 전에 문제가 생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거야 이전까지 붙었던 상대들은 그렇게 때려도 통할만큼 너랑 수준차이가
심했을 테니까. 그리고 네 시합 영상이 많지 않아서 분석할 데이터도 적었고,”
“...”
“앞으로 네가 상대할 선수들은 이런 네 약점을 모두 파악하고 나타날 거다.
네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타격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 계속 생길 거란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해요? 뭐 눈을 감고 때리는 연습을 해야 하나...”
“뭐? 푸하하하.”
나름 엄청 진지한데 저 아저씨가 웃고 있네.
“해서야.”
“네?”
시원하게 한바탕 웃고 난 뒤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날 부르는 두호 형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던졌다.
“너. 나랑 같이 라스베이거스 가서 한 달만 같이 훈련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