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_다시. 코네티컷
1.
-슈퍼 익스트림 GYM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깔끔한 외관의 체육관이었다.
예전 ‘스트리트 파이트’에 출연할 때 가봤던 ‘더 스트롱 짐’이나 ‘스트릿 짐’
보다도 더 크고 깔끔한 이미지였다.
-쉬잉
끼익 거리는 우리 체육관과는 달리 부드럽게 열리는 자동문. 뭐. 자동문쯤이
야 동네 은행에 가도 있으니 별 대수로울 건 없었지만 뭔가 첫 느낌이 달랐
다. 느낌이.
“오! 강해서 씨! 어서 와요.”
체육관 안에 들어서자 푹푹 찌는 바깥 날씨와는 달리 쾌적한 공기가 날 반겼다.
“안녕하세요. 강해서라고 합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체육관 사람에게 가볍게 마주 인사를 하고는 내부를 한번 둘
러봤다.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깔끔한 실내공간에는 딱 필요한 것들만 갖춰진 느낌
이었다.
“안에 필승이랑 관장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아. 넵!”
합동훈련이라고 매일 전 시간을 이곳에서 훈련을 하는 건 아니었다.
정해진 요일에 정해진 시간동안 함께 훈련을 하는 정도랄까.
그러다보니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이곳 ‘슈퍼 익스트림 짐’을 찾았는데 박필
승 선수와 관장님이 기다리고 계셨나보다.
-똑똑
-들어오세요.
체육관 안쪽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영상으로 여러 번 본 적 있는 박필승
선수가 가장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의 짙은 피부의 외국인 한명과
맞은편의 중년 남성분.
외국인이 이번 합동훈련의 목적인 그라운드 담당 주짓수 트레이너. 페드로인
듯 했다. 맞은편의 중년 남성분이 이곳 체육관의 관장님인 듯 했고.
“오! 강해서 선수. 들어와요. 들어와요.”
가장 반갑게 맞아준 건 박필승 선수였다.
“잠시 앉아서 앞으로 함께 훈련해야하는데 인사정도는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소파의 비어있는 자리에 앉자 본론을 꺼내는 관장님.
“훈련 스케줄은 미리 조율한 그대로 진행 될 겁니다. 기본적으로는 강해서 선
수가 이곳 체육관에서 훈련하는 타임에는 페드로 트레이너가 전적으로 강해서
씨를 캐어할겁니다. 그 외에는...”
이미 우리 쪽 코치진과 훈련 스케줄에 대해서는 협의가 이루어진 상태. 기본
적인 내용들을 다시 한 번 훑은 후 가벼운 통성명과 함께 악수를 나누고는 사
무실을 나와 각자 몸을 풀었다.
“강해서 씨? 강해서 선수? 음...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한창 거울을 보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박필승 선수가 서글서글하게 웃으
며 다가왔다.
“아. 네. 편하게 하세요.”
박필승 선수 나이가 35살이었나...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쨌든 30대 중반정도
인걸로 기억했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합동 훈련도 흔쾌히 제안해주셨는데 말 편하게 하는 것쯤
이야.
“해서 네가 격투기 시작한지 얼마 됐다고 했지?”
“올 초에 스트리트 파이트 나가면서 부터였으니까... 반년 조금 넘었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하지 않아도 돼. 나이차이 얼마 나지도 않는데. 그나저나 반
년이라. 반년 만에 창우 잡고 브로일러 2승이라. 진짜 괴물이네?”
박필승 선수는 예전에 TV 예능에 출연하신 걸 봤을 땐 조금 남자답고 무게 있
는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되게 수다스러운 성격인 듯 했다.
“푸하하. 창우가 좀 그런 똘끼가 있지. 애는 그렇게 나쁜 애 아냐. 전두형 대
표가 애를 너무 잡아서 그렇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스트릿 FC와 최창우 선수의
이야기도 나왔다.
박필승 선수는 스트릿 FC를 거쳐 WFC에 진출한 케이스니만큼 최창우나 전두형
대표와 친분이 있는 듯 했다.
“어쨌든. 합동 훈련 간 서로 도움 될 수 있게. 잘 부탁한다.”
“네. 저두요.”
조금 딱딱한 분위기거나 텃세가 있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적어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다음 시합까지 실질적으로 남은 기간은 겨우 한
달 남짓. 앞만 보고 달려야 할 시점이었다.
2.
“흐음. 아무 이상 없다고?”
레일리는 손에 들고 있던 도핑 테스트 결과지를 내려놓으며 재차 확인하듯 물
었다.
“네. 어떤 약물 소견도 없다고 나왔습니다.”
“으음...”
솔직히 레일리는 이번 불시 도핑 테스트로 강해서의 토너먼트 진출권을 향한
발걸음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WFC와 달리 많은 선수들이 브로일러를 선택하는 이유.
그건 WFC에 비해 약물에 관대한 브로일러의 태도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비시즌에는 약물을 사용한다. 그리고 경기가 잡히면 약물
을 끊으며 체내 약물 농도를 희석시켜 시합전후로 도핑 테스트에 걸리지 않도
록 유지한다.
WFC를 따라 USADA를 도입하긴 했지만 그건 표면적일 뿐 실제 테스트 빈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
그렇기에 당연히 강해서 또한 불법 약물을 사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확실해? 검사관을 매수했을 가능성은?”
“여러 차례 교차 검증을 했지만 검사관이 매수당한 정황은 없습니다. 또한 소
변 시료도 강해서 본인의 시료가 맞다고 합니다.”
-쾅!
“말이 돼? 격투기를 시작한지 반년 남짓한 신인이 브로일러에서 2승을 가져갈
만큼 피지컬을 키우고. 두 달에 한번꼴로 감량을 해야했는데 어떤 약물도 쓰
지 않았다? 그걸 믿으란 말이야?”
“... 검사 결과는. 깨끗합니다.”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의자에 기대어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레일리.
“검사 결과를... 그러면 저희 쪽에서...”
-쾅!
부하 직원의 조심스러운 발언에 다시 한 번 책상을 내려치는 레일리.
“우리가 할 일은 선수의 불법을 모른체 하거나 혹은 잡아내는 것까지야. 없는
불법을 만들거나, 발견된 불법을 없던걸로 만드는 게 아니야!”
“...넵!”
레일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하 직원의 명치 부근을 손가락으로 쿡 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미스터 강이 어떤 약물도 사용하지 않고 운동을 시작한지 6개월 만
에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게 사실이라면. 그를 음해하고
모략질해서 끌어내리는 게 아닌, 그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게 올바른
길이야. 알겠어?”
“넵!”
“나가봐!”
“네! 실례했습니다!”
잔뜩 얼어붙어있던 부하직원이 나가고 사무실에 홀로 남은 레일리.
“이거. 만약 미스터 강이 정말로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바노프까지 잡아
낸다면... 오스만 회장이 말 한 것처럼 판을 다시 짜야할지도 모르겠어.”
신인 선수의 특혜에 대한 논란보다 선수의 상품성이 더욱 높은 걸로 검증된다
면. 당연히 그쪽의 손을 들어주는게 맞다고 생각하는 레일리였다.
*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
불볕더위도 이제는 한풀 꺾인 8월의 말.
필승 형네에서의 합동 훈련도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다.
“이제 바로 미국으로 들어가냐?”
“네. 가서 현지적응도 하고 시차적응도 해야 하니까요.”
“아는 체육관 있어? 소개 해줄까?”
필승 형과는 합동훈련동안 꽤나 친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지랖과 말이 정
말 많은 형이었다. 투머치 토커 스타일이랄까.
“하하. 아뇨. 마침 코네티컷에 아는 체육관이 있어요. 지난번에 전지훈련 갔
던 적도 있고.”
“그래?”
이번 브로일러 243 시합의 개최지는 미국 코네티컷 주의 ‘모히건 선 아레나’
였다.
다행히 맘모스 코치가 아직 코네티컷에 있었고 벤슨 또한 격하게 환영할 준비
만반이니 언제든 오라는 소식을 전해왔기에 미국 체류기간동안 또 다시 그쪽
체육관에 신세를 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형이 이야기 한 거. 잘 생각해봐.”
“네? 아. 네...”
합동훈련을 시작하고 보름정도 지났을 때.
필승 형과 밤늦게까지 스파링을 하고 잠시 쉬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었다.
“지난번에도 말 했듯이... 난 이제 곧 은퇴야. 두호 형처럼 미들급에서 체급
을 바꾸진 않았지만 대신 선수 생명을 너무 빠르게 소진했어.”
약물 사용이 브로일러보다 훨씬 엄격한 WFC에서 여러 차례 혈전을 거듭한 필
승 형은 최근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이미 뇌에 너무 많은
데미지를 입어 의사 소견으로도 더 이상 데미지가 축적되는 건 지양해야한다
고 했다고 하니.
“너도 언젠가 두호 형이랑 옥타곤에서 마주하고 싶다며. 그러면 어차피 체육
관 옮겨야 해.”
“그... 렇겠죠.”
“난 내가 은퇴하고 첫 전담 코치를 맡는다면. 널 맡고 싶다.”
“...”
대체 내 어떤 점을 그렇게 좋게 봐주신 걸까.
국내에 두호 형과 필승 형 외에도 브로일러나 WFC에서 뛰는 선수들은 더러 있
었다. 나보다 운동도 오래하고 경력도 많은 선수들이. 그런데 아직 2전밖에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지금도 뭔가 송구스러울 정도였다.
“중량급.”
“네?”
“아시아에서. 한국에서. 투기종목 중량급 이상에서 선전하는 선수는... 보기
드물지. 당장 나부터도 지금이 커리어 하이야. 이 이상으로 올라갈 자신...
없다. 두호 형이 정말 대단한 거지.”
“...”
이번 한 달간 합동 훈련을 하면서 필승 형의 실력에 대해선 꽤나 뼈저리게 느
꼈다.
레슬링을 베이스로 한 그라운드의 스페셜리스트.
일단 잡고 바닥을 구르면 내가 위에 있든 밑에 있든 승률의 80프로는 필승 형
의 몫이었다.
그런 수준의 사람도 WFC 미들급 랭킹에 이름을 올린 걸로 한계를 논하다니.
“이번 합동 훈련으로 다시 한 번 느꼈지. 해서 네 성장 속도는 말이 안 돼.”
“하하.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야.”
조금 전까지 하하호호한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꽤나 정색을 하고 말을 하는 필
승 형.
“합동훈련 초반만 하더라도 그라운드로 들어가면 열이면 열. 널 제압할 수 있
었어. 그런데... 지금은 어때?”
“...”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조금 그렇지만, 지금은 필승 형과 뒤엉켜 바닥을 굴
러도 승률이 3분의 1은 나왔다. 물론 이건 필승 형의 패턴이나 움직임 등이
익숙해져서 그런것도 있었다.
“얌마. 내가 레슬링만 25년에 유도 주짓수까지 합치면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
을 땅바닥에서 굴렀는줄 알아? 그런데 아직 귀도 까지지 않은 놈이 나랑 굴러
서 30프로 승률? 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모르지?”
“하하...”
알아요. 이제는. 제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존재인지.
“물론 그 수준에서 더 위로 올라가려면 점점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
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너라면. 중량급 세계에
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어.”
여기서 말하는 유의미한 성과라는 건 아마도. 그래. 챔피언일거다.
“잘 고민해봐라. 두호 형을 따라 웰터급으로 전향하더라도 결국 두호 형과 붙
기 위해선 체육관을 옮겨야 해. 미들급 이상 중량급을 목표로 한다면 나만한
코치가 또 없지.”
“하하. 맞는 말이에요. 고민. 진짜 제대로 한번 해볼게요.”
“그래.”
필승 형은 굳이 더 말 하지 않겠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아. 그러고 보니 미국 시합이라고 했지? 내가 작년 미국 시합 갔을 때 이야
기를 했었...”
“형! 저 먼저 가볼게요. 관장님! 페더러 코치님! 저 먼저 갑니다! 안녕히 계
세요!”
다시 투머치 토크가 시작될 듯 해 재빠르게 체육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조금 가셨다지만 그래도 따가운 햇살이 눈부신 8월 말
의 어느 날.
9월 중순의 브로일러 시합 243까지 딱 보름이 남은 날이었다.
3.
“탭! 탭!!!”
“헤이! 원더 보이! 스탑!”
워터베리에 위치한 MMA 체육관에서 오랜만에 과격한 탭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왓 더 퍽! 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거대한 덩치의 흑인 트레이너. 매머드는 자신의 눈 앞에서 태연히 일어서는
동양인 선수를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게 그 원더보이야?”
“넌 여기서 운동한지 얼마 안됐지? 저 동양인이 매머드가 그렇게 칭찬했던 원
더보이지.”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체육관의 다른 선수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수
군거리고 있었다.
“원더보이는 타격이 전문이라며? 그런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뭐야?”
“뭐긴 뭐야. 원더보이가 그라운드로 우리 체육관 블랙벨트를 압살하는 장면이
지.”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이곳 MMA 체육관은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체육관이었고, 주
짓수 블랙벨트 코치가 상주하고 있는 체육관이었다.
-짝. 짝. 짝.
“와. 정말 원더보이 그 자체네. 강. 네 상대가 이바노프라고 했나? 레슬러?”
원더보이. 강해서의 그라운드 스파링을 지켜보던 벤슨은 진심을 담은 박수를
치며 질문을 던졌다
“어. 아드 릭 이바노프. 레슬링 베이스의 격투가지.”
강해서는 매치업이 잡힌 후 매일같이 돌려봤던 자신의 상대 선수를 떠올리며
질문에 답했다.
“이거. 그 레슬러가 얼마나 실력이 좋을지는 몰라도. 테이크다운 잡았다고 신
나서 그라운드로 들어갔다가 제대로 뜨거운 맛 좀 보겠는데?”
당장 이틀 후 있을 시합이 너무 재미있겠다는 듯 웃어대는 벤슨.
브로일러 243 시합까지 이틀.
계체량까지 하루 남은 코네티컷 워터베리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