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_합동 훈련?
1.
이번 솜차이와의 시합은 생각보다 많은 걸 남겼다.
우선 조금쯤은 격투기라는 시장을 만만하게 보던 마음가짐과 내가 가진 재능
에 대한 신뢰에 대한 부분이었다.
WFC 랭커 수준만 와도 챔피언을 논한다는 브로일러의 미들급에서. 패전을 담
당하던 선수에게 오히려 잡아먹힐 뻔했다.
사실 이제 격투기에 입문한지 겨우 반년 남짓한 내가 누군가를 얕보거나 만만
하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주변에서 조금 추켜세워주고
짧은 경력에도 승승장구하니 내 고개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뻣뻣해졌었나보다.
-항상 명심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확률은 걸을 때 보다 달릴 때 더 높다는
걸.
문득 지난 미국 전지훈련의 마지막날 벤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반대로 조금만 신경을 쓰지
못하면 언제고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돌부리.
내가 걸어갈 앞길에는 그 돌부리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을 거
다. 그만큼 익숙하지 않은 길이니까.
“그러니까. 항상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응? 뭐라고?”
정신 바짝 차리자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다짐한다는걸 무의식중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나보다.
“아.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어요.”
“정신 챙겨. 너도 이제 한국에서 스케줄이라고 할 만큼 바빠질 수 있으니까.”
“넵!”
런던 경기를 마치고 이제 막 도착한 인천국제공항.
이제 막 경기가 끝난 타이밍이지만 벌써부터 바빠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후원 문의가 벌써 차고 넘치게 오고 있다.”
“후원이요?”
“그래. 스폰서. 네가 입는 팀복에 박힐 업체들.”
“아.”
엘런 폰과의 경기에서 셔츠가 허전하다는 말을 했었는데 정작 반응은 솜차이
와의 매치가 끝나고 나타났네.
“다음 매치 제안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연말까지 최소 두 번의 경기를 더
가져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넵.”
“나는 사실 지금은 시기가 조금 이르다고 생각한다.”
짐을 차에 싣고 체육관으로 향하는 중에 진지하게 이번에 들어온 협찬과 후원
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안 코치님.
“네가 지금 비시즌이라면 뭐라 하지 않겠는데. 언제 또 경기를 뛸지 모르니
시즌체제를 유지해야해. 길어야 두세 달 안에 매치가 잡힐거다.”
“흐음...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지금 내게 들어온 협찬이나 후원이란 건 내가 소위
‘뜨는’ 순서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협찬 후원에 정신 팔려 다음 시합에서
기량저하가 오거나 패배라도 하게 된다면 이 모든건 한여름 밤 꿈처럼 사라지
겠지.
“그래도. 다 제끼는건... 조금 아깝지 않아요?”
“그러면?”
“아까 말한 팀복에 로고 박을 업체들. 걔네들만 짧게 미팅하면요? 체육관에서.”
“흠. 그 정도야 뭐. 크게 시간 뺏기지 않겠지.”
광고라던지. 제품 사용 영상을 찍는다던지. 그런 종류의 스케줄은 지금의 내
게 사치였다.
지금은 한눈을 팔기보다는 앞만 보고 달려야 할 때였으니까.
“일단 당장 급한 건 네 체력과 컨디션을 되돌리는 거다.”
“그 말은...”
“그래.”
차량 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채 나직하고 위압감 있게 날 바라보며 웃으시는
안 코치님.
드디어 그 입이 열리고.
“먹어라.”
바라마지않던 말이 떨어졌다.
*
“...야. 이 새끼 이거 이대로 놔둬도 되냐?”
“내비둬. 그래도 지 알아서 안 먹어야 되는 건 피해 먹잖아.”
코치님의 허락이 떨어진 후 한국에 오자마자 했던 일이 친구 놈들을 소집하는
거였다.
“야! 좀 익으면 먹어! 아니면 테이블 혼자 잡고 구워먹던지!”
“아. 거 쪼전하게.”
오랜만에 먹는 기름진 삼겹살은 정말 입에서 살살 녹았다.
도저히 혼자서는 고깃집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친구 놈들을 불렀는데 정작
고기는 나 혼자 다 먹을 정도였으니까.
“후-아. 와. 이제 좀 사람 사는 것 같네.”
너무 공복을 오래 유지해서 위가 작아졌나. 몇인 분 먹지도 않았는데 점점 불
러오는 포만감에 아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 포만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준현아. 저 새끼 대체 평소에 뭘 먹는 거냐? 왜 저래?”
“음. 토마토. 고구마. 닭가슴살. 양파. 샐러리. 또 뭐 있냐?”
“웩. 겨우 포식했는데 입맛 떨어지게. 말도 꺼내지마.”
재현이의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하는 준현이를 보며 손사래를 치며 물을 벌컥
벌컥 마셨다.
아무리 코치님이 먹으라고 했지만, 그래도 피해야 할 목록들이 있었다.
그 중 첫째가 탄산이었다.
“크으-!”
내가 식사를 끝내고나자 그제야 새로 고기를 주문시켜 구워먹는 친구 놈들.
기름진 삼겹살을 먹고 시원한 탄산 한잔을 원샷 때리는데.
“꺼어어어어-억.”
왜 저렇게 시원해보일까.
나도 사이다 한 병 원샷 때리고 일분정도 용트림 하고 싶네. 쩝.
“그나저나. 오늘 하루 쉬는 거랬지?”
“어. 원래 시합 끝나고 오면 하루는 쉬었잖아.”
“이번엔 누구 안 만나냐? 유나 씨라던가. 임유나라던지. 유나tv 진행자 같은?”
“어. 안 만나.”
나는 다시 젓가락을 들어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대
답했다.
“아! 왜! 야. 그만좀 쳐먹어. 돼지새끼. 왜 안 만나는데? 바쁘대?”
“내가 돼지라고? 후후. 목욕탕 한번 갈까? 이제 누가 돼지인지? 그리고 유나
씨는 얼굴 보자는거 내가 어렵다고 했어.”
삼겹살을 집으려는 젓가락질을 방해하는 기태를 보며 복근을 한번 두드려 준
후 씨익 웃어줬다.
“미친놈. 운동선수가 몸 좋은 건 당연하지. 그걸가지고 일반인한테 자랑하고
싶냐? 그건 그렇고. 왜 안만나는건데? 술 사기로 했다며? 찐하게?”
“그러니까 안 만나지. 코치님이 말씀하신 금지목록에 술도 있어.”
“그러면 밥을 먹어야지.”
“오늘 너네 보고나면 당분간 또 체육관에서 식사해결인데 무슨 밥이야. 밥은.”
“그러면 우리랑 같이 봤어야지! 불러! 지금이라도 불러!”
“응. 싫어. 꺼져.”
끝까지 잿밥에 관심 많은 기태에게 소중한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주며 마지막
남은 삼겹살을 집어 입에 넣었다.
사실 기태 말처럼 이번에도 한국에 와서 유나 씨에게 연락을 했고, 얼굴 보자
는 연락도 받았었다.
물론 얼굴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번에 유나 씨를 만나지 않으면 1년, 아니 5년 후에 내가 이번에 유나
씨를 만나지 않은 걸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할까?
아니면 이번에 유나 씨를 만나고 훈련시간 외에 다른 곳에 집중하다가 연말까
지 2승을 채우지 못했을 때. 5년 후에도 계속 생각나고 후회 할까?
양측을 저울질 했을 때 내 마음속 대답은 후자였다.
당장 유나씨 얼굴 못 본다고 나중에 후회할 것 같진 않은데, 혹여 라도 연말
까지 2연승을 채우지 못했을 경우 아주 사소한 변명거리까지 긁어모아 후회할
것 같았거든.
“잘 생각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보통 이런건
20대 때 겪고 듣는 건데. 해서 넌 사회생활을 많이 안해서 이제야 겪는구나
싶다야.”
“...하여간. 아 밥맛 떨어져!”
“그렇게 말하기엔 이미 해서 네가 먹은 고기양이...”
“아! 몰라 몰라.”
재현이와 준현이. 쌍현이가 오랜만에 합공을 취했다.
선택과 집중이라. 그래.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적어도 다음 시합. 조금 더 본다면 다다음시합까지는 한눈을 팔 틈이 없을 것
같았다.
한눈을 팔고 주변경관까지 다 챙겨가며 유의미한 성적을 내기에는 이 격투기
라는 세계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이번 시합에서 톡톡히 느꼈으니까.
“그럼. 아름씨도 안 만나겠네?”
“엉? 아니? 아름이는 체육관에서 보니까 예외지.”
“...”
아니.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아름이를 체육관에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체육관을 옮길 수도 없잖아?
2.
“더! 더 밀어 더!”
“흐아아압!!”
이번에 솜차이와의 경기에서 몸싸움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그 전에는 접근하기 전에 경기를 끝내버렸기에 몸싸움 훈련을 그리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던 게 있는데 이제는 바닥을 만신창이 상태로 굴러다닐정도로 열
과 성을 다해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야. 후아- 좀 쉬자. 우리가 더 죽겠다.”
“그래. 쉬자. 쉬자. 못해. 못해.”
“...”
몸싸움 훈련을 하며 날 엉망진창으로 괴롭히던 스텝 세 명이 휴식을 선언하며
자리에 퍼질러 앉았다.
“뭐야. 너네 왜 쉬고 있어?”
마침 딱 그 타이밍에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시는 안 코치님.
“방금 전까지 훈련하다가 이제 조금 쉬는 거예요.”
“해서 쟤. 체력이 뭔 괴물이야. 괴물. 솜차이한테는 왜 그렇게 빨리 빨렸대?”
스텝들은 안 코치님의 잔소리에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솜차이 때랑 지금이랑 비교하면 되냐? 쟤 체중이 달라졌는데 코칭스텝이라는
놈들이 선수 컨디션 체크도 안하고?”
“하하. 알죠. 알죠. 그냥 해본 말이었습니다. 해서가 워낙 잘 하니까.”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강해서.”
고개를 휙 돌려 날 부르는 안 코치님.
스텝들에 이어서 나한테도 불똥이 튀나?
“잠시 따라 들어와라.”
“넵!”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코치님을 따라 사무실에 들어가자.
“앉아봐라.”
소파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는 안 코치님.
이야기가 꽤나 길어지려는 모양이다. 소파에 앉아보라고 하는 걸 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사무실에 들어가면 훈련을 조금 더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는 ‘몸이 식기 전에 나가야하는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들다니 참 감회가 묘했다.
“일단 광고 들어온 건은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애들 빼고는 다 보류시켜놨
고. 괜찮은 조건의 광고들은 해서 네 동의하에 모두 계약했다. 알고 있지?”
“넵!”
“그런데. 이건 네 의견이 중요한 거라 잠시 불렀다.”
“네?”
이번에도 역시나 페이퍼로 자료를 만들어 건네주시는 안 코치님.
익숙하게 서류를 받아 살펴보니.
“합동... 훈련... 이요?”
“그래. 네 다음 시합이 아직 잡히지 않은 상태기도 하니까. 그리고 너한테도
좋은 경험이 될 거다. 같은 체급의 선수와 하는 합동 훈련은.”
“...네.”
안 코치님이 건넨 서류는 박필승 선수와의 합동 훈련에 대한 제안서였다.
“사실. 이번에 해서 네 그라운드 강화를 위해서 괜찮은 코치를 데려오기 위해
서 여기저기 좀 찔러봤다.”
“넵.”
“마침 딱 한국에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트레이너가 있기에 컨택을 해봤는데
지금 박필승을 담당하고 있다더라. 박필승과의 계약이 끝나야 움직일 수 있다
기에 다른 사람을 알아보려 했는데...”
“박필승 선수 쪽에서 합동 훈련 식으로 제안이 왔다. 그건가요?”
“그렇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박필승 선수는 단체는 다르지만 같은 한국인으로서 중량급
인 미들급에서 활약하는 나에 대한 호감과 궁금증이 있었단다. 그러던 중 트
레이너의 이야기를 듣고는 흔쾌히 함께 훈련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어차피 트레이너도 하루 종일 박필승이한테만 붙어있지는 않을 테니 나쁘지
않을거다. 거기다 박필승 선수면 브로일러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그라운드
의 전문가지.”
두호 형이 그라운드가 조금 더 강한 올라운드 형이라면 박필승 선수는 레슬링
선수 출신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체육을 했던 그라운드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아마 이제껏 내가 겪어봤던 어떤 선수들보다 그라운드가 뛰어나지 않을까 싶
었다.
-Rrrrrrr
한창 코치님과 대화 중에 울리는 올드한 전화벨소리.
“미안하다. 잠시만.”
안 코치님은 내게 잠시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받으셨는데 그 내용은 영어로
대화했기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처음에는 살짝 밝았던 얼굴이 나중에는
아주 굳어지면서 목소리도 높아졌다는 것 정도로 그리 평화로운 대화는 아니
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뚝.
거칠게 전화를 끊는 안 코치님.
“...해서야.”
그리고는 조금 전보다 훨씬 낮아진 목소리로 날 부르셨다.
“...넵.”
“후우. 방금 전화는 브로일러 측 전화였다. 좋은... 소식 하나와. 썩 달갑지
않은 소식 하나가 있다. 뭐부터 들을 테냐.”
“뭐... 좋은 소식... 부터요?”
난 매 맞을 때도 항상 제일 뒤에 맞는 스타일이라서요.
“해서. 네 다음 시합이 정해졌다. 두 달 뒤인 9월 중순. 미국에서다. 그건 정
리해서 넘겨주마.”
“예쓰!”
시합 텀이 정말 짧긴 했지만 경기의 데미지는 크게 없었으니 체력과 감량만
신경 쓰면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시합이 잘 잡히지 않을까봐 걱정이었는
데 정말 다행이었다.
“다음으로...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은.”
정말 달갑지 않다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시는 안 코치님.
“조금 있다 KADA에서 사람이 나올 거다. 해서 네가 불시 도핑 테스트 대상자
라는 구나.”
...카다? 카다...가 뭔데요?
작가의말
KADA는 Korea Anti-Doping Agency 의 약자로. 한국 도핑방지 위원회 입니다.
UFC에서 우사다. USADA(United States Anti-Doping Agency
<https://en.wikipedia.org/wiki/United_States_Anti-Doping_Agency>)를
도입한지 한참 됐죠.
자세한 내용은 내일 분량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