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_8대2
1.
-챔피언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딸 수 있다.
엄밀히 말 하면 타이틀전 자격도 아닌, 그 자격을 얻을 수 있는 토너먼트의
출전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연말까지 3승을 한다는 전제하에.
어떻게 보면 말 장난 같기도 한 머나먼 이야기. 하지만 그 목표가 ‘챔피언’
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한국에서는 이목을 끌기 충분한 소재였다.
-브로일러 신인 파이터 강해서. 연말까지 3연승 달성 시 챔피언 토너먼트 출전?
-초고속 타이틀전? 신인 파이터 강해서는 어떻게 혜성처럼 격투기계에 등장했나?
-프로전적 2전의 신인 선수. 브로일러 타이틀을 입에 담다. 브로일러와 오스
만 회장의 속내는?
사실 국내 격투기 시장은 아시아 내에서도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격투기에
대한 관심도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나마 WFC에서 활약하는 세계적인 선수들이 가끔 예능에 얼굴을 비추며 격투
기를 알릴뿐이었고, 케이블에서는 스트릿 FC가 후원 주최하는 격투기 관련 프
로그램이 일년에 하나 꼴로 나오는 정도.
브로일러에서 활약하는 선수는 크게 이슈가 되지도 않았고, 일반인들 중에는
브로일러라는 격투 단체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강해서가 승리 인터뷰에서 언급한 ‘챔피언’ 이라는 단어의 파급력은
꽤나 크게 퍼져나갔다.
“강해서가 그 최두호랑 같은 체육관이라지?”
“팀 피스트가 어디 있다 그랬지? 운동 하려면 거기서 해야겠네.”
운동에 별로 관심 없던 사람들부터.
“강해서 선수 협찬 업체 목록 있나? 닭가슴살 협찬 업체 없으면 빠르게 컨택
해봐!”
“운동복 협찬 받는데 있대? 스포츠 브랜드 들어간데 얼마나 있나 알아보고 우
리꺼 들어갈 데 하나라도 있으면 무조건 집어넣어!”
새로 떠오르는 스타를 향한 협찬과 후원까지. 발 빠른 사람들은 강해서의 발
언 하루도 지나지 않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강해서?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이런 애송이한테 토너먼트 출전권
을?”
“프로 총 전적이 2전? 브로일러에서 2전이 아니라 총 전적이? 이 새끼는 오스
만의 숨겨둔 아들이라도 되나?”
“챔피언? 타이틀? 아무리 브로일러가 수준이 떨어졌다지만 이런 꼬맹이가 타
이틀전을 언급할 정도는 아니지!”
전 세계 종합 격투기 미들급 선수들 사이에서도 이슈가 되었다.
비단 브로일러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격투단체 미들급에서 이슈가 된 이
유는 브로일러가 갖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이러든 저러든 명실 공히 세계 2위 격투단체라 불리는 브로일러.
그런 브로일러의 챔피언이라는 건 WFC를 제외하곤 같은 체급 내 최강자라 자
부하기 충분한 영광이었기에 많은 동 체급 선수들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이었다.
*
“하하.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지금 여기저기서 해서 씨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장난 아냐. 초록창 검색어
에도 뜨고.
“난 그냥 토너먼트 출전권을 두고 두말 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시합이 끝나고 숙소에 와서 쉬고 있는데 아름이에게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는 내 승리 인터뷰로 인해 벌써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설레
발을 치고 있는 듯 했다.
런던은 이제 모두가 잠에 들 시간이었지만 한국은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할 시간.
-그. 왜. 너랑 시합 했던 사람 있잖아?
“응? 누구?”
-한국 선수. 티비에도 가끔 나오구. 챔피언!
“아. 최창우?”
-최창우? 맞아! 맞아! 맞는 것 같아!
“최창우 선수가 왜?”
-그 선수도 막 너 관련 SNS올려서 기사 뜨고 했던데?
최창우가?
나는 아름이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최창우의 SNS를 검색해 봤는데
[email protected]
역시 강해서. 내가 넌 성공할 줄 알았다.
[email protected]
해서야. 한국 오면 형한테 연락해라. 형이 밥 쏜다.
“...”
이 아저씨는 갑자기 왜 이래?
-여보세요?
“어? 어. 여보세요.”
-봤어? 그 아저씨랑은 이제 사이좋은 거야?
“뭐. 사이 나쁠 건 없지.”
좋을 것도 없지만 말야.
뭔가 엘런 폰 경기 이후 같은 편이라는 동질감을 느낀 건가? 아니면 단순히
이번에 내가 이슈 되니까 편승해서 한마디 하는 건가? 당최 알 수 없는 사람
이었다.
“여튼. 너랑 통화하니까. 진짜 시합이 끝났구나 싶네.”
-응? 무슨 말이야?
“박기영 선수랑 시합부터. 최창우, 엘런 폰까지. 이상하게 시합만 끝나면 너
랑 만났잖아.”
-응? 헤헤. 그치.
“오늘 시합은 사실 나름대로 살짝 고비가 있었거든. 끝나고 느낀 것도 좀 있
고. 그러다보니 뭔가 제대로 방점이 찍히지 않은 느낌이 있었는데.”
-나랑 전화하니까 그 마침표가 제대로 찍힌 것 같다?
“뭐. 아니라곤 말 못하겠네. 너랑 이야기하고 있으니 진짜 시합이 끝났구나.
라는 실감이 난달까.”
-헤헤.
저 헤헤 거리는 웃음.
인터넷 채팅에서나 보고 읽었던 웃음인데 현실에도 듣기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좋아! 기분이다! 앞으로 시합 끝나면 나한테 전화해도 돼!
“그때 아니면 전화하면 안 되냐?”
-음. 그건 아닌데. 너 시합 있는 날은 내가 웬만하면 전화 꼭 받아줄게!
“황송하네.”
오랜만에 여사친과의 전화 통화는 꽤나 즐거웠다.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주변의 동갑내기 여사친들은 모두 잘려나가서 시
커먼 남자 놈들만 남았었는데.
-난 이제 또 스케줄 가봐야 할 것 같아!
“나도 자야 돼. 여긴 벌써 새벽 2시 넘었어.”
-헐! 얼른 자! 끊는다! 뿅!
“뿅.”
나이 서른에 뿅이라니.
전화를 끊는 순간에도 피식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본에 이어 런던.
한걸음 내딛었다 싶었다.
시청률도 나오지 않던 아시아국가 시합에서 브로일러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유럽권 시합에 출전했고. 또 한 번 승리하며 토너먼트전에도 가까워졌다.
물론 아직 충분하다 생각지는 않지만. 발을 헛딛지 않을 속도로. 느리지 않게
한 발짝씩 내딛고 있음이 느껴졌다.
-Rrrrrrrr
그렇게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정말 잠자리에 들려는데 걸려온 전화 한 통.
새벽 두시를 넘어가는 이 시간에 또 누구인가 했지만
-두호 형
발신자의 전화번호를 보는 순간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2.
“헤이. 미스터 초이! 휴식이야! 휴식!”
최두호는 WFC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서 한
창 훈련 중이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래. 아까 저녁 타임에 동생에게 연락한다 하지 않았어?”
“아. 그렇지.”
현지 트레이너의 말에 운동 기구를 내려두며 땀을 닦았다.
7월 평균기온이 최저 24도에서 최고 41도를 웃도는 사막도시 라스베이거스.
격투기의 메카라 불리는 이 도시에서 최두호는 새로운 훈련법이나 도움이 될
만한 격투기 프로그램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으면 어디든 달려가 훈련에 매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결코 빠뜨리지 않고 시청했던 경기는 유일하게 강해서의 시합
단 하나.
-꾸욱.
아까전 시청했던 강해서의 시합이 떠오르자 괜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많이 성장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분명 세계에서도 통할 재능을 가진 녀석이라 생각했지만 그 성장 속도가 말도
되지 않았다.
사실 최두호는 강해서가 자신의 앞에 서기까지 최소 몇 년의 시간은 걸릴 거
라 생각했다.
자신이 학센에게 챔피언 벨트를 쟁취하고도 몇 번의 방어전은 더 치러야 강해
서와의 일전이 가능하리라.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오늘 솜차이와의 시합. 분명 임팩트는 엘런 폰과의 시합보다 떨어졌지만...’
오히려 소름끼치는 건 오늘이었다.
특히 3라운드에서 강해서가 보였던 모습은 이전까지와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
을 정도여서 최두호조차 하던 운동을 내려놓고 몇 번이고 돌려봐야 했다.
만화나 영화에서나 관용적인 표현으로 쓰는 ‘종잇장 두께로 피한다’는 행위를
현실에서 목격하게 될 줄이야.
상대방의 타격 거리 안에서 모든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낸다는 건 현실에
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일반인과 프로 선수가 아닌 프로와 프로의
시합에서는 더더욱.
‘그런데 그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다니. 그것도 낙무아이 출신 타격 전문
파이터를 상대로.’
어느새 강해서가 자신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최근 조금씩 타성
에 젖어가던 최두호의 훈련 시간이 다시 뜨거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저녁 휴식 시간이 되어서야 강해서에게 축하를 건네기 위해 폰을
꺼낸 최두호.
-Rrrrrrrr
-여보세요.
오랜만에 듣는.
언젠가 자신을 뛰어넘어주길 바라는 동생의 목소리에. 최두호는 앞선 훈련의
피로도 잊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이 새끼. 이겼으면 바로 형님한테 보고부터 했어야지!”
*
-툭. 툭. 퍽. 퍽. 뻑. 뻐억. 뻐어억!
벌써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는 백발의 중년인.
“그래서.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이 내가. 이런 시합을 경기장이 아닌
영상으로 보게 만든 변명을?”
“...죄송합니다.”
텔론 회장은 오랜만에 진심으로 스스로 화가 났다는 것을 느꼈다.
“이봐.”
“네.”
“내가 왜 이 험한 격투기 시장에 매달린다고 생각하나?”
“...”
“돈이 돼서?”
“...”
“명예가 따라서?”
“...”
“그랬다면 말이야. 난 복싱계로 갔을 거야. 이 미국 땅에서 격투기는 복싱을
따라갈 수 없으니.”
“...”
텔론 회장은 조용히 강해서의 시합이 흘러나오던 영상을 끈 후 자신의 앞에
고개 숙이고 있는 비서실장을 바라보며 나직한 분노를 내뱉었다.
“나는 말이야. 그냥 격투기가 좋네. 그게 사실 내가 이 사업을 하는 가장 큰
이유야.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들의 가장 위대한 시합을 내 눈으로 내
가 주최한 경기에서 보고 싶단 말이야. 가장 날것의 부딪힘을 가장 날것의 순
간에.”
“...죄송합니다.”
“자네에게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거액의 급료를 지급하는 게 아니
라는 걸 기억해야 할 걸세. 내가 원하던 그림은 이번 시합을 끝으로 저 강해
서라는 파이터의 시합을 내가 ‘직접’ 보는 거였네. 그런데 그건 물 건너 가버
렸군.”
“...”
비서실장은 죄송하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것 참 난감하군. 오스만 그 늙은 닭도 난감하겠어.”
이번에는 사뭇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브로일러의 회장 오스만을 거론하는 텔론.
“이대로 3승을 챙겨 토너먼트를 나가고 챔피언까지 되면. WFC로 데려오지 못
하는 우리도 난감하겠지만, 오스만 그 늙은이 또한 난감하긴 마찬가지겠어.”
이러니저러니해도 이제 프로전적 2전 2승이 전부인 신출내기 파이터.
토너먼트를 거쳐 챔피언까지 달성 한다 쳐도 총 전적이 10전이 되지 않는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 된다면 전적이 문제가 되진 않지만, 그 전에 계약 내용
자체가 문제가 될 순 있었다.
오스만 회장이 대체 무얼 보고 신출내기 선수에게 토너먼트 출전권을 약속했
냐는 형평성에 대한 문제가.
그리고 그런 텔론의 생각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기에.
“어때? 시합을 직접 보니까?”
브로일러 아시안 사무국의 국장인 레일리는 강해서의 3승을 저지하기 위한 다
음 대전 상대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놈. 난 놈은 난 놈인데요? 타격만 놓고 보면 WFC에서도 통할거에요. 우리
브로일러에서는... 알렉산더 정도나 타격으로 비빌까. 아니지. 알렉산더도 타
격으로 밀릴 것 같은데?”
“평가를 하라는 게 아니잖아. 이길 수 있겠냐 없겠냐. 그걸 물어보는 거야.”
레일리는 자신의 앞에 앉아서 지난 강해서의 시합들을 다각도로 돌려보며 분
석을 하고 있는 사내를 향해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추궁했다.
브로일러의 입장에서는 강해서가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뛰어난 선수를 보유하고자 강해서와 연장계약을 하긴 했지만,
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선수로 성장하게 놔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흠. 이 친구. 싸움을 많이 안 해봤네요. 격투기 자체도 입문한지 얼마 안됐
지만. 다른 운동도 경험이 거의 없어요. 길거리 싸움도.”
“내가 그걸 물어보지 않았을 텐데.”
“글쎄요. 이길 수 있냐 물어보신다면. 승률은 8대 2 정도? 아. 물론. 제가 8
입니다.”
이제야 레일리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으며 씨익 웃는 헌트.
“8대 2라. 분석가라는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서. 다음 시합 상대
로 강해서. 괜찮겠어?”
“하하. 저야 매치를 잡아주시면 싸워야죠 뭐. 아시죠? 이런 의뢰 시합은 추가
수당이 붙어야 한다는 걸.”
“걱정 말게.”
러시아 출신의 브로일러 미들급 랭킹 4위.
별칭 ‘분석가’ 아드 릭 이바노프.
레슬링이 베이스인 그라운드의 스페셜리스트인 그가 강해서의 다음 상대 선수
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