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_그래. 이거지
1.
마치 돌덩이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분명 내가 때리고 있는데 내가 먼저 지치는 느낌이랄까.
-휙!
-휙! 퍽!
들어오는 라이트를 피해내며 오른손을 마주 뻗었다.
클린 히트까지는 아니지만 손에 느낌이 올 정도로 솜차이의 얼굴을 두드렸는데.
“...”
전혀 데미지를 입은 표정이 아니었다.
-후웅! 턱!
강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킥 공격은 대체로 모두 막혔다. 아무래도 타격기술
자체는 무에타이 베이스인 솜차이가 훨씬 뛰어날 테니 어쩔 수 없지.
벌써 2라운드도 끝자락.
-훙!
말없이 우직하게 들어오는 솜차이는 한두 대를 맞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주먹
을 휘둘러왔다.
-퍽!
그러다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스치듯 맞는 펀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체력이 조금씩 떨어지며 두 눈으로 뻔히 보고도 맞는 펀치까지 생겼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시합을 빨리 끝내기 위해 공
격에 더욱 박차를 가했는데.
“허억. 허억...”
내 체력이 먼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
“후욱. 후욱.”
2라운드가 끝나고.
세컨진에 둘러싸여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니 비로소 정신이 조금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체력과 맷집이 보통이 아니야. 타격으로 맞춰 잡으려면 정말 순간적으로
의식을 날릴 정도의 데미지가 아니면 어려울 것 같다.”
자잘한 펀치로 데미지 누적을 주어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안 코치님의 조언.
이제는 나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타격이 쌓이는 속도만큼이나 회복 속도도 빨라서. 시합이 끝나기 전까지 KO가
나올 만큼 데미지가 쌓이지 않을 것 같았다.
“2라운드까지 일방적으로 두드렸으니 해서 네가 훨씬 앞서고 있다. 3라운드에
서 큰 변수만 없으면 네가 이겨. 판정으로 가자.”
“판정... 이요?”
“그래.”
그래.
판정승이라는 게 있었지.
5분 3라운드의 시합이 모두 끝났음에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경기 내용을 점
수 매겨 심판들이 판정하는 제도.
“후우...”
나는 다시 마우스피스를 꽉 깨물었다.
“몸 좀 움직였더니. 컨디션이 돌아온 것 같아요.”
“뭐?”
“사실. 체력도 좀 딸리고 살짝 멍했는데. 지금은 안개가 걷힌 것처럼 말짱해
졌습니다.”
“뭐라는 거야. 해서야. 굳이 무리 안 해도 된다? KO승이나 판정승이나 똑같은
승이야.”
“...”
물론 나도 안다.
지금 내게 중요한건 승리라는 타이틀이지 그게 KO승인지 판정승인지는 중요하
지 않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 코치님.”
“... 망할 놈.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바깥으로 돌아야 한다. 알겠어?”
“하핫. 넵!”
그렇게 잠깐의 휴식 타임이 끝나고 곧바로 시작된 3라운드.
-툭.
링 중앙에서 다시 한 번 주먹을 맞댄 솜차이는 그나마 가쁘던 호흡까지 차분
하게 가라앉아있었다.
“후우. 후우.”
조금 전 안 코치님께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2라운드 막바지에서 솜차이의 펀치를 맞으며 뭔가 머리가 띵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는 브로일러였고.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피땀 흘리며 뛰는 전장이었다.
엘런 폰을 너무 쉽게 이겼다고 해서.
모두가 이번 매치는 낙승이라고 예측하니까.
태국 선수는 종합 격투기에서 좋은 모습을 못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브로일러는 WFC보다 한 끗발 떨어지는 리그고 솜차이는 거기서도 패전 담당
선수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나도 모르게 방심을 만들어내고 집중력을 떨어
뜨리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그걸 솜차이의 펀치를 맞고서야 느꼈다.
이곳은 마음에 아주 사소한 빈틈만 있어도 경기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곳
이라는 걸.
언제나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후욱!
그 전에도 솜차이의 움직임은 모두 보였지만. 지금은 솜차이의 갈라진 근육
줄기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한 걸까. 솜차이의 운동 방향과 속도까지 본능적으로 느
껴지자 그의 이후 움직임을 직관적으로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휘잉!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솜차이의 펀치.
그래. 이거지. 이거였지.
-후웅! 휙! 휙!
안면을 향하는 펀치는 정말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바디 샷은
어깨가 앞으로 나오는 순간 정확한 거리조절로 피해냈다.
킥 공격은...
-후웅! 텅! 쿵!
솜차이가 킥 공격을 위해 발을 듦과 동시에 킥 발의 무릎 궤도를 막아내며 땅
을 딛고 있는 나머지 다리를 걷어내 넘어뜨려 버렸다.
“...”
케이지 바닥에 넘어져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날 올려다보는 솜차이.
-까딱. 까딱.
나는 그런 솜차이와 거리를 벌리며 어서 일어나라는 손 제스처를 취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이제야 들리는 함성소리.
1,2라운드 내내 타격을 퍼부을 때도 듣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함성소리가 아레
나를 가득 채웠다.
-통. 통.
이제 나도 체력이 많이 돌아왔다.
발끝이 가볍고 몸이 가뿐했다.
-쿵쿵쿵
다시금 내게 돌진하는 솜차이.
2라운드에서 고전했던 게 저것 때문이었다.
솜차이는 무에타이 베이스라 그런지 타격만큼이나 클린치를 정말 잘 했는데
한두 대 맞을걸 각오하고 내게 들러붙어 체력을 뺏아가니 미칠노릇이었다.
‘그런데. 이젠 안 통해.’
아까는 조그마한 틈에 펀치를 우겨넣기 위해 물량으로 승부를 보느라 접근을
허용했다면.
-뻐억!
이제는 솜차이의 틈이 너무 커다랗게 보여서 못 맞출 자신이 없거든.
-뻐억. 떠어억!
가드를 올리고 상체를 낮춘 상태에서 내게 접근하다가 안면에 레프트 라이트
를 맞고 주춤거리는 솜차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던 그의 왼발 무릎 위로 제대로 로우킥을
꽂았다.
-휘청
처음으로 들어가는 클린 킥.
순간 휘청거릴 정도의 데미지였으니 당장 달라붙기는 어려울 터였다.
‘타격으로 격침시키려면 어려울 것 같다고. 그래서 서브미션으로 끌고가야 되
나 싶었는데.’
지금이라면. 그냥 말 그대로 샌드백처럼 솜차이를 두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드 위가 아닌 정확한 타격 포인트들로만.
-툭. 툭. 퍽. 퍽. 뻑. 뻐억. 뻐어억!
순간 얼음이 된 듯 멈춰버린 솜차이의 턱을 두어 대 두드린 후 왼손으로 바디
샷을 한번.
바디 샷을 때리기 위해 접근한 날 붙잡으려는 솜차이의 턱을 오른손으로 아래
에서 위로 라이트 어퍼컷 한방.
턱이 들리고 시야가 천장으로 가 있는 솜차이의 안면을 다시 레프트 라이트로
구도를 잡은 뒤. 그의 왼쪽 관자놀이를 향해 오른발 하이킥을 한방.
-쿠웅!
그렇게 연타를 집어넣자 드디어 쓰러지는 솜차이.
“스탑! 스탑!”
한 박자 늦은 심판의 스탑 사인이 있었지만 나는 애초에 파운딩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건 절대 못 일어난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와아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들리는 객석의 환호성.
그리고 케이지 문이 열리며 환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안 코치님까지.
조금 늦었지만. 딱 내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2.
“그러니까 저는 말이죠. 이번 3라운드가 고비다. 그렇게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강해서 선수의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렇게 볼 수 있거든요.”
지난 최두호의 WFC 경기를 해설했던 김국현 해설 위원이 오늘은 강해서의 브
로일러 경기를 해설하고 있었다.
“그러면 해설위원께서는 3라운드에서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보시
는 겁니까?”
“반전이 일어 난다기 보다는. 강해서 선수가 아주 조심해야한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솜차이 선수의 내구력은 지금 제가 눈으로 보면서
도 믿기가 힘들 정도에요. 물론 강해서 선수의 폼도 상당히 물이 올랐지만서
도. 그라운드에 취약점을 가진 강해서 선수에겐 조금 어려운 라운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 말임미다.”
“그렇군요. 실제로 2라운드에서는 마지막에 안면 정타를 허용하기도 했으니까
요.”
“맞슴미다!”
김국현은 얼마 전 최두호와의 시합에서 학센을 상대로 멋진 장면을 연출해냈
던 강해서라는 격투기 선수가 브로일러에서 데뷔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를 응원했다.
데뷔전에서 엘런 폰을 7초 만에 KO시켰을때는 누구보다 열광했고.
그런 만큼 지금 솜차이와의 경기에서 불안요소를 보여주는 강해서의 모습을
손에 땀을 쥐어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자. 말씀드리는 순간. 3라운드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대한민
국의 자랑스러운 파이터. 강해서 선수가 3라운드에서도 멋진 모습 보여주길
응원해주세요.”
캐스터의 말과 함께 시작된 3라운드.
“어? 어?”
그런데 강해서가 3라운드가 시작되자 솜차이의 펀치 거리 안에서 가드도 제대
로 올리지 않은 채 서 있더니 솜차이의 펀치를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도 모를
정도의 차이로 피해내기 시작했다.
“저거... 지금 안 맞은 거 맞죠? 해설위원님?”
“...저도 그렇게 보임니다. 카메라 각도 상 정확히 보인다고는 말씀드릴 수가
없는데. 강해서 선수의 움직임을 보면 데미지가 없어보이니 모두 피해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후웅! 텅! 쿵!
그리고 솜차이의 킥 공격을 막아내며 그의 축발을 걷어내 쓰러뜨린 후 강해서
가 거리를 벌리고 손을 까딱거릴 때.
“우와아아아!! 아. 죄송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흠. 흠. 해설 위원님. 방금
전 장면은...”
캐스터는 방송중인 것도 잊고 소리를 지르다 시청자에게 사과를 하고는 김국
현 해설위원을 바라봤다.
“... 너무 아름답슴미다. 어떻게 저런 경기력이 나오지요? 1,2라운드와는 완
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렇게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국현 해설위원은 넋이 나간 듯 시합 영상을 바라보며 해설이 아닌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솜차이가 다시 일어나 강해서에게 달려들 때.
“솜차이 선수의 클린치를 조심해야 합니다. 원래 무에타이가 타격과 클린치를
전문적으로 하는 스포츠에요. 클린치를 당하면 몸싸움이 되면서 체력 소모가
커집니다. 체력적으로 열세인 지금 강해서 선수가 정말 조심해야 하는...”
김국현 해설위원이 클린치를 조심해야한다고 말을 하는 도중.
강해서가 솜차이의 안면을 몇 번 두드리더니 바디 샷과 어퍼컷. 이후에 오른
발 하이킥까지 차올리며 솜차이 선수를 쓰러뜨렸고.
-3라운드 1분 19초, 강해서 KO승.
미처 해설할 시간도 없이 강해서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
“...”
┕ㅁㅊㄷㅁㅊㅇ 방금 뭐였음?
┕강해서 쟤 휴식타임에 약 먹고 온 거 아냐? 갑자기 왜저래?
┕와... 지렸다. 나 팬티좀 갈아입고 옴
┕애초에 1라운드부터 이렇게 하던지 쯧
┕네에 불편러는 나가주시구여~
임유나는 채팅창의 글을 볼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쩐...다. 와. 이거지. 이래서 내가 격투기에 빠졌던 거지.’
지난번 박기영 선수와의 일전에서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강해서.
그 모습에 임유나는 다시 한 번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꼈다.
┕유나찡 완전 맛 갔는데?
┕리액션 안함 리액션?
┕쟤 볼 빨개진 거 아냐?
┕모르겠는데? 빨리 다시보기나 틀어줬으면
“어. 음. 아. 네. 와! 방금 진짜 멋있었죠? 마지막에 오른발 하이킥! 그걸로
끝낸 거죠?”
┕ㄴㄴ 그전에 오른손 어퍼컷에서 이미 끝났다고 봄
┕다시보기 틀어주네. 안면 두드리고 바디 때려서 얼굴 내려오니까 바로 오른
손 어퍼컷 날리네. 저거 맞고 살 수 있나?
┕ㄹㅇ 저렇게 맞으면 바로 염라대왕 만나러 갈 것 같은데ㄷㄷㄷ
┕야. 솜차이 일어났다. 저렇게 맞고 저렇게 빨리 일어난다고? 저거 백빵 약쟁
이야
“강해서 선수님 승리가 선언되었구요! 다행히 상대 선수인 솜차이 선수도 의
식을 차리고 일어났네요! 큰 부상은 없어야 할 텐데요.”
┕저 피지컬에. 저 카디오에. 저 맷집이다? 킹리적 갓심이지 ㅋㅋㅋ
┕와 근데 강해서는 내츄럴인가? 브로일러에서 내츄럴로 약쟁이를 때려잡넼ㅋㅋ
┕나이 서른에 프로 데뷔해서 브로일러 2승! 가슴이 웅장해진다! 아재의 도전!
“에이. 서른이 무슨 아재에요. 그건 너무했다. 아! 강해서 선수님 승리 인터
뷰하네요. 쉿!”
강해서의 승리 인터뷰가 시작되자 채팅창을 조용히 시키는 임유나.
-어. 그리고 이번 브로일러와의 계약에서 연말까지 3승을 챙기면 연말 원-나
잇 토너먼트 출전권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제 1승 챙겼으니 남은 두 번의 시
합. 그리고 토너먼트와 타이틀전까지. 쉬지 않고 달려볼 생각이니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승리 인터뷰에서 공식적으로 계약 내용을 언급하며 전 세계 브로일러
미들급 선수들을 대상으로 폭탄을 터뜨리는 강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