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_vs.솜차이
1.
“후욱. 후욱.”
뜨거운 열기와 눈 부신 햇살이 아름다운 환상의 섬 푸켓.
그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 매진 중인 사내가 있었다.
-꿈틀. 꿈틀.
구릿빛 피부에 터질듯한 근육을 더욱 쥐어짜며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사내.
“영상들은. 확인해 봤나?”
그런 사내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예.”
솜차이는 자신의 트레이너가 돌아왔음에 들고 있던 바벨을 내려두며 호흡을
정리했다.
“... 어떤 것 같나.”
“어떻긴요. 항상 똑같습니다. 강한 상대에요. 어려운 상대고.”
이번 브로일러 인 런던에서 강해서와 맞붙을 주인공. 솜차이는 퉁명스레 답했다.
“훈련은. 할만한가?”
“...네.”
낙무아이로 활동할 때에 비하면 지금의 훈련과 경기 일정은 빈말로라도 가혹
하다 할 수 없었다.
“... 트레이너로서 이런 말을 한다면 자격 미달이랄 수 있겠지만. 나는 걱정
이 되네. 자네의 시합 텀과 시합에 대해.”
솜차이의 트레이너인 제럴드는 심히 걱정스럽다는 눈빛이었다.
“아시잖아요. 낙무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활동하는지.”
“알지.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자네의 그 몸은...”
178이라는 미들급에서는 조금 작은 키를 가진 솜차이가 브로일러의 미들급에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사실 별것 없었다.
‘화끈한’ 시합을 하니까. 그리고 ‘오래 버티니까’.
낙무아이 출신의 솜차이는 타고난 강골과 맷집으로 화끈한 난타전을 선보이며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파이팅 스타일로 유명했다.
가뜩이나 미들급 선수가 부족한 브로일러에서는 잘 싸우고 자주 싸우는 그를
내칠 이유가 없었다.
“이번 시합이 끝나면... 조금 쉬게.”
“...아시잖습니까. 이번에 아이가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제럴드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솜차이.
“길게 봐야 해. 지금 자네가 가는 길은...”
“알고 있습니다. 코차이가 걸은 길과 닮았죠.”
“... 약도... 끊게.”
“... 후.”
솜차이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나이에 학비를 벌기 위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시합을 뛰다 뇌출혈로 사
망한 그의 절친 코차이.
코차이를 그렇게 보낸 후 낙무아이의 체질 개선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
만, 솜차이에게 돌아온 것은 낙무아이 영구제명이라는 결과였다.
가혹한 시합 일정과 그것을 버티게 해주는 도핑 성 약물들. 태국에서는 너무
나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3년에 150회 경기를 뛰었다는 어느 낙무아이의 이야기는 별 놀라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선수의 시합 전적이 300회를 넘어가는 것도 놀라운 게 아
니었다.
“약물 근절을 외치던 자네가. 낙무아이의 환경 개선을 부르짖던 자네가. 지금
꼴을 보게. 이게 무언지.”
“... 가정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낙무아이에서 영구제명이 된 솜차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FFC는 낙무아이 출신 선수들이 꽤나 있어 발을 들이밀기가 어려웠고 WFC에서
는 솜차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나마 솜차이에게 손을 내밀어준 곳이 브로일러의 미들급이었다.
“이기지 못하더라도. 파이트 수당을 받으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좋은 밥을 먹고. 학용품을 사고. 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저는 이제
그걸로 족합니다.”
“...약물의 말로. 자네가 그리 떠들고 다녔잖은가.”
“아이의 미래를 위해 제 미래를 대가로 바쳐야 한다면. 전... 그럴 수 있습니
다.”
-꾸욱.
정상적인 근육을 벗어난 듯한 솜차이의 근육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번 시합은... 어쩌면 승리 수당도 챙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뭐?”
“적어도. 타격으로는 쓰러지지 않을테니까요.”
하늘을 향했던 고개를 내려 제럴드를 쏘아보듯 바라보는 솜차이.
“약쟁이라 욕해도 좋고. 손가락질당해도 좋습니다. 이번만큼은 케이지 안에서
쓰러지지 않고. 걸어서 내려오겠습니다.”
“...”
그리고 그 기백에 제럴드는 준비했던 많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승리 수당까지 챙긴다면. 한동안은 시합을 조금 쉬게.”
그저 솜차이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체중은?”
“83.2키롭니다!”
“확실해?”
“열 번도 더 쟀습니다!”
“좋아.”
드디어 솜차이와의 시합이 하루 남았다.
이번 시합은 일본이 아닌 영국 런던에서 치러지는 만큼 일주일 전부터 현지에
서 시차 적응을 하며 컨디션 조절을 했었다.
“컨디션은 어때?”
“음. 잘 모르겠어요. 괜찮은 것 같은데.”
“시합 텀이 짧아서 체력적으로 손실이 클 거다. 몸에 부하가 심할 거야.”
그래서 그런가. 뭔가 엘런 폰 때 보다 몸에 힘이 조금 빠진듯한 기분이었다.
시합 텀이 짧으면 경기력에 기복이 생긴다는 게 무슨 말인지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도 점점 몸이 만들어지고 있어 앞으로는 더 수월할 거다. 수분 컷팅으로
감량하는 폭이 늘어가고 있으니.”
“넵!”
계체량을 위해 밖으로 나오니 런던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맑은 하늘이 우릴
반겼다.
“어후. 피곤하다”
준현이는 우리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계체에서의 통역을 위해 어제 늦게 런던
에 도착했다.
런던과 서울의 시차는 9시간. 지금쯤 한국은 한창 저녁일 테니 피곤할 법도
했다.
“조금만 참아라. 이번 계체는 별 트러블 없이 빨리 끝날 거야.”
“그래.”
엘런 폰과는 달리 솜차이는 SNS나 인터넷 기사에 별다른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최창우와 엘런 폰의 전적이 있다 보니 뭔가 심심한 느낌이랄까.
-찰칵 찰칵.
계체량 장소에 들어서자 이미 앞서 도착한 선수들을 향한 카메라 셔터음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레오 엔더슨.’
이번 브로일러 인 런던 시합의 메인 매치 선수이자 영국을 대표하는 웰터급
종합격투기 선수인 그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인터뷰 중이었다.
“해서 너도 나중에 유명해지면 한국에서 이렇게 시합 열리는 거야?”
그걸 보면서 신기한 듯 준현이가 물어왔고.
“그렇겠지? 메인 시합을 나갈 정도가 되면 한국에서 시합이 열리겠지?”
나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올 그날을 기약하며 대답했다.
그것보다 내 상대 선수인 솜차이는 아직 안 왔나?
“저기. 솜차이 선수 아냐?”
그때 준현이가 손을 들어 회장 한곳을 가리켰다.
“맞는... 거 같네.”
와.
몸이 뭐 저래?
키는 나보다 한참 작은데 근육이 장난 아니었다.
구릿빛 피부에 짧은 목과 넓은 어깨. 쩍쩍 갈라진 근육들까지.
지난 엘런 전 이후 나름대로 열심히 굴렀는데... 또 굴욕 샷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었다.
“흠...”
뒤에서 들리는 안 코치님의 침음성.
“이번 시합.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해서야.”
“네?”
솜차이 선수를 한번 보더니, 이번 시합에 관해 이야기하는 안 코치님.
“아무리 봐도. 내츄럴 같지가 않아.”
“내츄럴요? 그러면... 약물...?”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태국 선수라고 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아닐 수도 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저기 봐라.”
솜차이 선수를 한번 가리킨 후 어깨와 몸을 훑는 안 코치님.
“소위 맷집이라고 부르는 놈은. 근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목 근력과 골밀
도. 그리고 회복력 등이 있겠지. 지금 눈으로 보이는 솜차이의 몸 상태만 해
도... 영상으로 보던 선수와는 전혀 별개의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그건 그랬다.
준현이가 말하기 전까지는 못 알아봤을 정도로 덩치가 너무 달랐으니까.
떡대 자체가 달라졌달까.
“약물이면... 도핑 테스트는 안 하나요?”
“아마 지금은 약물검사를 하더라도 나오는 게 없을 거다. 그리고 브로일러는
애초에 WFC만큼 약물검사에 철저하지도 않고.”
“흐음...”
“정신 바짝 차려라. 세상에 손쉬운 승리는 없다. 알지?”
“넵!”
다행히 이번 계체량에서는 어떤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고, 솜차이 선수와는 악
수까지 한 뒤 파이팅 포즈를 잡으며 사진 촬영도 했다.
뭔가 순한 맛으로 지나간 계체량이라 조금 싱겁다고 생각했더니, 진짜 매운맛
을 계체량 다음날 본 시합에서 맛볼 수 있었다.
2.
“안녕하세요! 여러분! 유나 유나 유나tv! 임유나 입니다! 오늘은 평소랑 다른
시간에 방송을 시작했어요! 이유는 다들 아시죠?”
한국 시각으로 새벽을 지나 곧 아침이 밝을 시간.
임유나는 미리 공지했던 대로 아주 이른(혹은 아주 늦은) 방송을 켰다.
┕격관이라며?
┕ㅇㅇ 오늘 강해서 경기 있잖슴. 그거 보겠지. 경기 시간 땜에 지금 킨 거 아
니누
┕오바야. 새벽 6시 방송이라니...ㅠㅠㅠ
┕오늘 상대 태국 선수라며? 낙무아이?
┕낙무아이는 모르겠고. 낙승이긴 할 듯
┕엘런 폰보다도 폼 떨어지는 선수임ㅇㅇ 거저먹는 한판이지.
┕강해서 연말까지 3승 챙기면 토너먼트 출전권 얻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진
짠가?
┕유나찡이 한번 물어보면 안 됨? 연락처 있을 거 아냐
“헤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시합 준비 중일 때는 연락드리는 게 민폐라
한번도 연락한 적이 없습니다! 시합 끝나면 조심스럽게 물어볼게요!”
┕오늘도 1라운드 KO 던지나?
┕엘런 폰보다 떨어지는 앤데 5초 컷 뚫나?
┕근데 경기 텀 ㅈㄴ짧네 진짴ㅋㅋ 엘런이랑 시합 끝난 지 이제 한 달 조금 넘
었지 않냐?
┕오히려 편한 거 아님? 체중 조절하기 편하잖아.
┕ㅈㄹ 훈련하려면 다시 평체 돌아갔다가 시합 일정 맞춰서 매치 며칠 전부터
다시 감량해야 하는데 ㅈㄴ힘들어. 감량한 몸무게로 한 달 버티는 게 아냐 ㅉ
“아! 강해서 선수 나옵니다! 다들 쉿! 집중합시다!”
라이브 방송의 댓글 창을 주욱 읽다가 강해서가 등장하자 반짝이는 눈으로 조
용히를 외치는 임유나.
“자. 이제 시작합니다. 또 얼마나 빨리 끝날지 모르니 다들 쉿...!”
강해서와 솜차이의 시합이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와. 근데 저 태국인 몸 ㅈㄴ좋네;;;
└저거 암만 봐도 약쟁이 아님?
└보면 알겠지. 저 몸에 카디오까지 갖췄으면 약쟁이로 봐야지
└뭔 상관이누. 브로일러 보는 이유가 화끈한 경기 때문인데 ㅋㅋ 약쟁이 노상관
└근데 약물 쓰면 몸에 데미지 장난 아니지 않음?
└개솔. 약물 안 쓴 내츄럴들 은퇴율이 더 높은 건 알지? 부상 위험 줄여주고
감량 편한 약물 놔두고 왜 내츄럴로 사눜ㅋㅋㅋ
“자. 다들 쉿. 이제 시작했어요!”
케이지 중앙에서 주먹을 맞댄 후 잠시 거리를 벌리는가 싶더니 솜차이에게 접
근하는 강해서.
└키 차이가 많이 나서 타격은 확실히 유리하겠다. 리치 차이 봐
└낙무아이라 그라운드도 약할 테고. 이건 뭐 낙승이지
채팅창에는 강해서의 낙승을 예상하는 댓글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어?”
유나의 입에서는 아리송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영상 속 강해서가 거리 주도권을 잡은 채 솜차이를 향해 연신 주먹을 두드려
보지만, 그 굳건한 가드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흠. 난 다르게 생각함. 어쩌면. 이거 강해서가 질지도 모름. 약쟁이들 맷집
이랑 체력은 장난 아니거든. 그것도 무에타이로 단련된 낙무아이면 맷집 장난
아니라 봐야지. 저 목 두께 봐라
그리고 올라온 장문의 채팅 하나.
모두가 낙승일 거라 생각했던 시합에서 의외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강해서였다.
*
-강해서 선수! 무섭게 몰아칩니다!
런던 웸블리에 위치한 SSE 아레나.
그곳은 지금 두 명의 파이터가 만들어내는 열기가 식어버린 한낮의 열기를 대
신하고 있었다.
-강해서 선수와 솜차이 선수의 리치 차이가 크거든요. 솜차이 선수가 리치
182cm 강해서 선수가 리치 198cm로 무려 16cm나 차이가 납니다. 타격에서 이
리치의 차이는 무시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솜차이 선수! 타격기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무에타이 베이스라는
걸 과시라도 하듯 강해서 선수의 모든 펀치 세례를 버티며 묵직한 한방 한방
을 휘두릅니다!
-아! 이렇게 1라운드가 끝납니다! 강해서 선수의 폭풍 같은 타격 세례에 금방
이라도 끝날 것 같던 시합이 결국 2라운드로 넘어갑니다.
“후우...”
1라운드가 이렇게 길었나?
“해서야. 자. 물.”
“넵!”
나는 물을 입에 한 번 머금은 후 뱉으며 숨을 골랐다.
“코치님.”
“응?”
“저 솜차이 선수. 몸이 돌덩이에요. 두드려도 열리지가 않아. 와...”
“저 정도 맷집 좋은 선수를 격침시키려면 가드 위로 들어가는 공격은 의미가
없을 거다. 1라운드처럼 무작정 펀치 세례를 쏟기보다는. 한방 한방을 날카롭
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어.”
“넵!”
뭐. 조금 단단하다 뿐이지 지금 형세가 내게 유리한 건 변함 없었다.
-띵
그리고 다시 시작된 2라운드.
나는 이번 라운드에는 기필코 끝내겠다는 마음으로 힘차게 전진 스텝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