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_조건
1.
“가보셔야 해요?”
안 코치님과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나니 유나씨가 살짝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어
왔다.
“하하. 아뇨. 나온 김에 옷 정도는 사고 가도 될 것 같아요.”
“그래요? 다행이다.”
두 손을 가슴께로 모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유나씨.
이런 것도 방송으로 습관화 된 리액션이겠구나 싶었다.
“시간 많이 없으신 것 같은데! 빨리 가요!”
“아. 네.”
그렇게 유나씨의 손에 이끌려 몇 군데의 옷가게를 거치고 나니 내 양손은 어
느새 쇼핑백들로 묵직해졌다.
“일단 여름옷은 이정도로 할까요?”
“... 여름 안에 다 입을 수 있을까요. 이거?”
“여름엔 하루에도 몇 번씩 옷 갈아입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아마 대부분 운동복만 입을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고. 제 옷이니 제가 사야 하는데...”
“에이. 해서씨 콘텐츠로 들어온 수익들이 많았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그리
고 제가 결제해야 싸게 해주거든요.”
“밥도 얻어먹었는데 옷까지...”
“제가 끌고 다녔으니까요? 대신 다음번엔 해서씨가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술
은 제가 쏩니다! 기억하시죠?”
“아. 네.”
그러고 보니 유나씨에게 술 얻어먹을게 있었지.
오늘은 애들 만나니 다음에 일대 일로 얻어먹어야겠다.
“이제 체육관으로 가시는거에요?”
“아뇨. 이거 집에 놔두고 가야죠.”
“해서씨 집이 어디 쪽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상수역 쪽이요.”
“오! 방향 비슷하다!”
손뼉을 짝 치며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 유나 씨.
“저 서강동 쪽인데. 상수역까지만 데려다주시면 안돼요? 그러면?”
“서강동 쪽이요? 아...”
지난번에 방송했던 쉐어하우스는 합정역과 상수역 사이였으니까 지금 말 하는
집은 진짜 집을 말 하는 것 같았다.
“그러죠 뭐.”
“진짜 동네 주민이었네요? 반가워라.”
“뭘 새삼스레.”
부츠를 신었는데도 발이 불편하지 않은지 잘도 걷는 유나씨.
홍대에서 상수역까지가 그리 멀지 않다지만 오늘 내 옷을 산다고 계속 걸어
다녔는데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재잘거리며 함께있는 시간 내내 즐겁게 해줬다.
“해서 씨 집 어디 쪽이에요? 다시 돌아가야하는거면 저 여기까지만 데려다주
면 돼요.”
“저는 저 골목에서 들어가면 돼요.”
“그럼 여기서 헤어지면 되겠다. 오늘 고마웠어요!”
“고맙긴요. 제가 고맙지.”
그냥 시간이 붕 떠서 한번 연락 해본 건데 밥도 얻어먹고 옷도 선물 받았다.
뭔가 마음의 빚이 생긴 기분이네. 다음번에 제대로 한번 갚아줘야겠다.
*
“... 너 왜 그렇게 차려입었냐? 어디 가?”
“네? 하하. 그냥 평상복이죠. 평상복. 차려입다뇨.”
집에 들어간 김에 유나씨가 사준 옷들로 싹 갈아입고 나왔다.
저녁에 친구들을 보기로 했으니까 겸사겸사.
“그래? 만날 츄리닝 입은 것만 봐서 그런가. 어쨌든 앉아봐.”
“넵.”
사무실 소파에 앉자 코치님은 특유의 국화차를 내오시며 맞은편에 앉으셨다.
“날도 더운데 시원한 거 없어요?”
“주는 대로 마셔 인마. 자. 이거.”
“이게 뭐에요?”
“뭐긴 뭐야. WFC에서 들어온 조건 요약한 거지.”
그냥 톡으로 주시면 편하게 볼 텐데. 안 코치님은 아직도 페이퍼가 편하신지
항상 데이터나 자료들을 이렇게 서류로 준비해주셨다.
“보면서 들어.”
“넵.”
“일단 WFC에서는 해서 네가 브로일러와의 계약경기가 끝난 후 이적을 했을 때
웰터급이 아닌 미들급 계약을 오케이 했다.”
“헐. 진짜요?”
“그래.”
WFC 미들급이면 말 그대로 세계 최강의 피지컬들이 모인 곳이었다.
경력도 실적도 미천한 내가 들어 갈만한 리그가 아닐텐데. WFC는 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싶었다.
“아마 브로일러에서 널 빼오는 것 자체가 목적일거다. WFC는 브로일러의 미들
급 이상 체급을 완전히 죽이려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 같은 신인 파이터까지요?”
“지금 브로일러 미들급은 무주공산이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제대로
된 선수가 없다는 걸. WFC에 다 뺏겼으니까. 심지어 챔피언석도 공석이잖냐.”
하긴. 그건 그랬자. 내가 브로일러 미들급으로 빠르게 데뷔할 수 있었던 속사
정 또한 이런 이해관계들이 엮여 있었으니까.
“거기에 브로일러 전 체급 최단기간 승리라는 타이틀을 데뷔전에서 기록한 루
키. 브로일러에서 다시 미들급 부흥의 기회로 삼기 좋은 소재지.”
“미들급 부흥의 기회라. 에이. 암만 그래도 브로일러가 그 정도로까지... 이
제 1전 치른 신인인데요.”
“그건 나중에 레일리가 오면 알겠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WFC의 의지가 확
고하다는 거야. 해서 널 데려가겠다는거지.”
“흠...”
미들급이라.
사실 혹하는 부분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앞선 계약에서 WFC의 오퍼를 뒤로하고 브로일러를 선택했던 이유는 그게 더
빨리 데뷔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미들급을 갈 수 있다면 당연히 브로일러보다는 WFC를 선택했겠지.
브로일러가 아무리 격투기 단체로서 세계2위라는 평가를 받고 WFC의 라이벌이
라 자처하더라도, 그 1위와 2위의 격차가 너무나 아득한 수준이었다.
WFC와 브로일러에 소속된 선수들의 숫자만 봐도 그 차이는 명백하지. WFC에
소속된 선수의 숫자는 약 700여명. 그에 반해 브로일러의 소속 선수 숫자는
300명이 채 되지 않는 걸로 알려졌으니까.
“WFC의 조건은요?”
“뒷장을 봐라. 경기 수는 4경기 계약이다. 대신 기한은 정해져있지 않아. 미
들급으로 기본 파이트머니와 승리 수당도 브로일러에서 제시했던 금액보다 높
아. 당연하겠지만.”
“흠...”
이거.
조건만 보면 레일리를 기다릴 것도 없이 WFC와 계약을 하는 게 맞아보였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듯
이. 이왕 격투기 선수로 활동을 할 거라면 제일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게 아
닐까?
“기다려봐라. 레일리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선택해도 늦지 않아.”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른 부분이 있는지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레일리를 기다
려보자시는 안 코치님.
-똑똑.
다행히 그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지난번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웃으며 들어오는 레일리.
“미스터 강. 지난 데뷔전 아주 감명 깊게 봤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엘런 폰과의 시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레일리.
“엘런이 최근 폼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건 그라운드에 한정되어 있었죠. 타격
만큼은 괜찮은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에게 7초라는 기록적인 승리를 쟁취하
시다니. 정말 대단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레일리와 함께 온 통역사가 있어 조금 편하게 대화가 가능
했다.
“감사합니다. 좋은 무대를 마련해주셔서 선수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스페인에서 미스터 강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이 있다는 것. 아십니까?”
“헐. 진짜요?”
난 스페인 쪽은 아는 사람도, 아는 사이트도 없으니 알 리가 없지.
“하하. 장난입니다. 물론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브로일러 팬들은 이
번 미스터 강의 시합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진짜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번 미스터 강의 기록적인 승리에 오스만 회장님께서 직접 한마디 하셨습니
다.”
오스만 회장님이?
“브로일러에서 쉽게 고쳐지지 않을 역사를 세워줘서 감사하다. 앞으로도 더
많은 역사를 함께하기 위해선 더욱 단단한 관계가 필요하다. 라고 말씀하셨
죠. 저한테 직접. 그래서 제가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더 많은 역사를 세우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단단한 관계가 필요하다라.
결국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이렇게 빙빙 돌리다니 대단하다. 정말.
“어제 일본에서 저희 아시아 사무국 직원과 계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아닌 안 코치님을 향해 이야기하는 레일리.
“그 이야기는 모두 잊으셔도 됩니다. 그 이후 오스만 회장님께서 직접 제게
계약을 챙기라고 이야기하셨으니 까요.”
그의 이야기에 내 왼손에 들려있던 브로일러와의 계약연장 데이터는 쓸모없는
종이뭉치가 되어버렸다.
“레일리 씨. 우선 우리 선수를 높이 평가해주는 브로일러와 오스만 회장님에
게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하지만 선수와 달리 저는 매니저로서 선수
가 최상의 컨디션에 최고의 무대에 서게 해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 단순한
감정만으로 움직이기는 어렵습니다.”
아. 준현이가 필요하다.
레일리의 말은 통역사가 통역해주는데, 안 코치님의 말은 아무도 통역을 안
해줘서 알아먹을수가 없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선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건 몇 마디 말이 아닌 돈이죠.
브로일러에서 새로이 제시하는 조건입니다.”
서류철에서 꺼낸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종이 한 장이 안 코치님에게 전달되
었다.
“음... 계약 시합 수 6경기. 기한은 선수가 원하는 일정에 최대한 맞춰주며
최대 2년. 거기에 승리수당과 파이트머니는... WFC의 수준까지 맞춰졌군.”
내게 들으라는 듯 한국어로 중얼거리시는 안 코치님.
“미스터 강. WFC에서도 연락이 왔겠지요?”
레일리는 그런 안 코치님의 중얼거림에서 WFC라는 단어를 포착했는지 내게 물
어왔다.
“어... 네.”
“흠. 어떤 조건인지 물어보는 건 실례겠죠. 제가 한번 추측을 해볼까요? 우
선... 미들급 계약을 들이밀었겠군요.”
“...”
“경기수도... 표준 계약인 4경기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파이트머니나 승리
수당은... 어제 저희 사무국 직원이 제시한 금액의 1.5배에서 2배정도를 불렀
겠어요.”
와. 거의 정확했다.
이런 일이 보편적이라 잘 때려잡는 건가?
“WFC에서 제시한 조건을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한 건 사
실입니다.”
나는 적당히 WFC에서 제시한 조건이 나쁘지 않다는 뉘앙스로 그의 이야기를
넘기려 했는데.
“하지만.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미스터 강. WFC의 계약엔 항상 함정이 있어요.”
“...함정이요?”
“미스터 강.”
“네?”
조금 전까지 서글서글 웃던 표정을 지우고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날 부르는
레일리.
“WFC에서 작년 한 해 동안 성사시킨 대회가 몇 번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51회입니다. 성사시킨 이벤트 경기의 수는 478경기 이구요.”
...그렇구나.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요...
“WFC 소속의 선수들은 제가 알기로 어제날짜로 708명입니다. 그들이 1년에 한
번씩만 매치를 가져도 354번의 경기를 치를 수 있죠. 1년 평균 3번의 시합을
가진다면 WFC는 1,062번의 경기를 올릴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보유하고 있는 선수 풀에 비해 WFC가 올리는 경기의 수는 말도 안 되
게 작죠. 그러면 한가지 더. 격투기 선수가 가장 많이 포진해 있는 체급이 어
딘지. 알고 계십니까?”
이건 안다.
두호 형이 뛰고 있는 웰터급.
웰터급이 미국과 유럽의 평균 체형에 가까운 체급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
장 선수층이 두터운 체급이라고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쫓는 체급이 미들급이죠.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경기를 시켜주는 WFC에서. 선수층이 풍부한 미들급으로 계약을하면. 과연
미스터 강에게 매치의 기회가 얼마나 자주 올까요? 혹시 계약 조건에 시합 일
자에 대한 조건이 있던가요?”
... 그런 내용은 없었다.
경기 수는 명시되어 있었지만 기한은 없었지.
레일리의 말에 당장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탁.
때마침 레일리가 건넨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상체를 앞으로 내미는 안
코치님.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브로일러의 조건을 보고자 했구요.”
“역시. 우수한 매니저십니다.”
“그런데 브로일러에도 독소조항은 있지요. 6경기 계약은 좋으나 WFC와의 계약
을 막는 독점 조건이 있더군요.”
“그건... 브로일러 대다수의 선수들이 하는 표준 계약입니다.”
“하지만 지난번 계약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죠.”
“...”
이번에는 레일리가 조용해졌다.
안 코치님이 대체 뭐라고 한 건데. 브로일러 대다수의 선수들이 하는 표준 계
약이 뭔데? 나도 좀 알자...
“브로일러는 현재 미들급 챔피언이 공석입니다. 그렇죠?”
“맞습니다.”
“랭킹 1위와 챔피언 결정전을 가질 선수를 연말에 원-나잇 토너먼트로 결정
지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 맞습니다.”
“이번 4경기 계약. 그 중 3번의 승리를 저희가 가져온다면. 우리에게도 그 기
회가 돌아올 수 있습니까?”
“...”
대체 무슨 말을 하기에 레일리는 맞습니다만 연발하다가 말을 못하는 건데.
“남은 6개월가량. 세 번의 시합을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이라도 패배한
다면 4번의 시합을 소화해야 합니다.”
“그건 우리의 사정입니다. 미스터 강은 당장 내일이라도 시합을 뛸 수 있습니
다.”
“...이건 제가 당장 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회장님의... 인가가 필요합니다.”
“이해합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는 레일리.
6개월에 세 번의 시합이 무슨 말이야 대체?
다음부터는 꼭 준현이를 데리고 다녀야겠다.
“이번 건에 대해서 최대한 빠른 답변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레일리가 떠난 뒤.
“무슨 얘기 하셨어요? 6개월에 세 경기가 무슨 말이에요?”
“너. 올해 말까지 세 경기. 뛸 수 있겠냐?”
“갑자기요?”
“그 세 경기. 다 이기면 내가 책임지고 타이틀 자격. 만들어주마. 어때?”
... 하. 오늘 저녁에 애들 보기로 했는데. 못 보겠네.
“코치님. 운동복 빨아둔 거 있죠?”
나는 입고 왔던 새 옷을 벗으며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당분간 저녁밥은 자진 반납이다.
작가의말
도널드 세로니의 경기 텀이 정말 미쳤었죠.
2018년도 말부터 2020년 1월까지 14개월 동안 6경기... ㄷㄷㄷ
현실이 저런데 해서는 더 가혹하게 굴려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자. 빠르게 다음 시합을 물색해볼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