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_첫걸음
1.
“으아아아악!!!”
첫날 했던 말은 취소다.
만족스러운 미국 일정은 고사하고 나만 족같은 미국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밀어!”
“으아아아악!!”
미국에 온 지도 어느덧 한 달.
체육관을 구경시켜준 첫날을 제외하면 말 그대로 ‘지옥’ 같은 스케줄이 날 기
다리고 있었다.
“오케이. 퍼지지 말고 아령 들어! 30초 펀치 간다!”
반복적인 훈련의 연속이다 보니 이제는 준현이가 없어도 웬만한 훈련 지시들
은 알아먹을 정도.
“와우. 미스터 강 체력 정말 좋은데? 나 같으면 토해도 벌써 토했을 거야.”
“스트렝스, 파워 트레이닝부터 어질리티 트레이닝까지. 벌써 한 달 만에 몇
레벨이나 점프한 거야?”
“괴물이야 괴물. 이제는 벤슨도 슬슬 피하잖아?”
물론 저런 일상적인 수군거림까지 다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미스터 강. 스트렝스. 파워. 어질리티. 레벨. 몬스터. 벤슨. 이정도 단어들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때려 맞출 뿐이지.
“오케이. 물 마시고. 휴식해.”
“허억. 허억. 와. 씨. 죽겠네.”
미국에서의 훈련은 기초 체력과 파워 훈련이 대부분이었다.
기초 훈련 외에는 타격보다는 주짓수 훈련을 중점적으로 배웠고.
“강. 네 친구는 오늘 안 왔나?”
“뭐? 친구? 준현?”
“그래. 준현! 강 네 친구.”
대충 준현이를 찾는 눈치였다.
준현이도 양반은 못 되는 놈이라 때마침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저기. 저기 오네.”
맘모스는 내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준현이를 발견한 후 활짝 웃으며 손짓
했다.
“해서 너 오늘 자기랑 어디 좀 가야 한다는데?”
“어디?”
“얼마 전에 갔던 예일대.”
“...또?”
미국에 도착하고 보름이 조금 지났을 때 맘모스는 내게 뭔가 검사할 게 있다
며 어디론가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체육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예일대학교의 한 연구동이었는데, 나
는 거기서 CT부터 별 이상한 검사들을 받았다.
“중요하대. 빨리 준비하라는데?”
“그 정도는 이제 나도 대충 알아듣거든?”
내 몸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지만, 그랬으면 병원으로 데리고 갔겠지.
무슨 일인지는 가 보면 알 일이었다.
“놀랍습니다. 미스터 강과 같은 몸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그렇게 맘모스 코치를 따라 도착한 연구실에서 우릴 반긴 건 침을 튀기며 내
몸을 만져대는 반 대머리의 교수님이었다.
“지난번 검사에 대한 결과지입니다. 여길 보시면 지난 Biopsy로 뽑아낸...”
전문 용어가 많아서인지 준현이도 조금은 더듬으며 통역을 해주는데, 한국어
로 말을 해줘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음. 간단히 말하자면. 미스터 강은 정말 믿기 힘든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선천적으로 근섬유의 개수가 보통 사람보다 많습니다. 이미 알려진 운동
선수들의 평균보다도 많아요.”
“근섬유가 많다구요? 좋은 건가요?”
“당연하죠! 보편적으로 근섬유의 수와 크기는 태아기 때 결정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생후 5개월 이후 근섬유의 증가는 어렵다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그리고 운동선수에게는 이 근섬유의 개수가 아주 중요하죠.”
교수의 말을 축약해보자면, 난 선천적으로 근섬유가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많
았고, 또 그 굵기가 가늘다고 했다.
“근섬유가 얇다고 힘을 적게 내는 게 아닙니다. 근섬유가 얇다는 건 동일 면
적의 근육이 낼 수 있는 힘이 월등하다는 뜻이니까요. 대신 열량 소모가 어마
어마하겠지만요.”
복잡한 말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근육이 효율이 좋다는 거 아닌가 싶었
다. 물론 열량 소모가 많다는 건 그만큼 에너지 보충을 많이 해줘야 한다는
거겠지만.
“단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사자의 경우 사람과 비교해 근섬유의 굵기가 평균
절반 정도로 얇습니다. 동일 면적에서 사람의 4배에 가까운 힘을 낼 수 있는
근육 구조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죠. 반대로 말하자면 같은 행동을 했을 때 사
람보다 4배나 많은 열량을 소모한다는 거구요.”
“그러면 저도 그런 경우란 말씀인가요?”
“아뇨. 사자나 영장류에 비할 만큼 얇지는 않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사람’의
범주에 들어갈 정도의 굵기니까요. 다만 근섬유가 얇은 만큼 개수가 많습니
다. 아마 조금만 운동해도 근육이 빨리 커지고 비슷한 덩치의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힘을 내실 겁니다.”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딱히 운동을 안 해도 힘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니까.
단순히 덩치가 커서 남들보다 힘이 좋은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구나.
“거기에 속근섬유와 지근섬유 모두가 우수합니다. 혹시... 에리스로포이에틴
을 사용합니까?”
에리스... 그게 뭔데요?
“흔히 EPO라고 하는... 적혈구 생산을 도와주는 약물이라고 보면 됩니다. 도
핑이라고 하죠.”
“그런 거 안 하는데요.”
“그러면... 미스터 강은 선천적으로 적혈구 수치가 아주 높습니다. 다행입니
다. 도핑으로 인해 순간적인 적혈구 수치의 증가는 심장에 무리를 가져오거든
요.”
적혈구에 있는 헤모글로빈은 체내에 산소 공급을 담당한단다. 그리고 그 수치
가 매우 높은 편이라 몸속에서 산소 운반이 활발하고 쉽게 지치지 않는다고.
“몇 가지 실험을 조금 해봐도 되겠습니까?”
교수님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내게 몇 가지 고강도의 운동 저항 테스트를 제안
했고 나는 맘모스 코치의 의견을 따라 수락했다.
“다행이다.”
“네?”
모든 테스트가 끝나고 다시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
맘모스 코치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에 강 네가 불법 약물을 투여한 줄 알았어.”
이건 또 무슨 말이야?
“훈련 스케줄을 따라오는 모습에서. 그리고 체력과 근육의 성장을 보면서 이
건 도핑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WFC나 브로일러. 아니, 전 세계의 모든 격투단체에서도 약물을 이용한
훈련은 존재했다.
훈련 기간에 약물을 이용하고, 실제 시합 전에는 약물을 끊는다. 이때 사용하
는 약물은 훈련의 효율을 높여주는 종류의 약물들이기 때문에 시합 전에 약물
을 끊으면 도핑 테스트에서는 절대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 하지만 부작용이 심해.”
“부작용이요?”
“일단 EPO같은 경우... 심장에 무리가 많이 간다. 실제로... 내가 가르치던
선수 하나가 몰래 EPO 주사를 사용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적이 있지.”
약간은 침울한 어조로 ‘그래서 나는 절대 약물 사용을 권하지 않아. 최두호와
내가 친해진 계기이기도 하지.’라고 말하는 맘모스 코치.
하긴. 두호 형도 약물 사용에 관해서는 거의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경계하는
스타일이었다.
“안 코치는 제논이나 EPO 주사에 대해 꽤나 개방적인 스텐스였으니까. 혹시나
했지.”
“그래서 연구실로 데려간 거예요?”
“... 성장호르몬이나 EPO 계열 약물은 이 세계에 흔해. 안 쓰는 놈이 바보라
는 소리를 듣지. 하지만 말년으로 가면 그들은 모두 장애인이 돼. 평생 남성
호르몬제 처방을 받으며 살아야 하지. 난 내가 가르치는 선수에게서 그런 미
래를 보고 싶지 않아.”
생긴 거랑 다르게 되게 섬세한 아저씨였네.
“말 그대로 미라클 보이군. 미스터 강 너는. 듣자 하니 사람보다는 유인원에
가깝다며?”
“...그 정도는 아니라고 했거든요?”
걔네들이랑 달리 저는 지구력도 좋다고 했거든요?
“어쨌든. 내일부터는 훈련 양을 더 늘려도 되겠어. 혹시나 도핑한 거라면 몸
에 무리가 갈까 봐 조금 봐주고 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겠어.”
“...”
씨익 웃으며 말을 내뱉는 맘모스 코치나 그 말을 통역해주며 재수 없게 웃는
준현이나. 둘 다 악마 그 자체였다.
*
“오늘이 마지막 스파링이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제한이 없어. 물론 파운딩은
금지다. 테이크 다운과 발차기까지는 모두 허용한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없어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한 달여 간의 미국 원정 트레이닝.
벤슨의 시합이 한 주 앞으로 다가오며 그와의 스파링도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
었다.
“둘 다 링 중앙으로.”
마지막 스파링은 ‘매우 강한 강도의’ 스파링이었다.
지난 한 달간 메서 스파링이라고 해서 아주 약한 강도의 스파링을 하루 일 회
이상 가져왔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타격에 있어서는 꽤나 강한 강도
의 스파링을 가져왔고.
오늘은 테이크다운과 그라운드까지 들어가는 매우 강한 강도의 스파링으로,
이는 벤슨이 적극적으로 원한 결과였다.
“자. 아무리 고강도라 하지만 스파링이라는 것. 잊지 말고. 다치지 않는 게
최우선이다. 레디. 파이트!”
맘모스의 콜과 함께 살짝 글러브를 맞댄 후 거리를 벌리는 벤슨과 나.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먹고 자는 것 외에는 하루종일 운동만
했다.
식단도 맘모스 코치가 제공하는 음식만 먹어가며.
그 결과
-휙. 휙.
나보다 한 체급 낮은 벤슨의 공격이 너무 느려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체중은 처음 미국으로 올 때와 별 차이가 없지만 이미 뱃살과 옆구리살은 거
의 잡히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몸은 꽤나 단단한 근육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후웅! 툭!
중단 킥을 차는 벤슨의 오른발을 가볍게 피한 뒤 자세를 다잡기 전 가볍게 왼
주먹을 그의 턱에 갖다 댄 후 뺐다.
“흐압!”
그리고 다시 뻗어오는 그의 펀치 컴비네이션을 가벼운 상체 움직임만으로 다
피한 뒤.
-툭.
오른발을 들어 그의 왼쪽 무릎 관절 위에 살짝 갖다 댄 후 뒤로 빠지며 거리
를 벌렸다.
“하. 그만. 그만할래. 그만.”
테이크다운이나 그라운드 시도는 하지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글러브
를 벗는 벤슨.
“이거 원. 나는 이 악물고 덤비는데 강은 메서 스파링을 하고 있잖아. 이건
의미가 없어.”
준현이의 통역을 들으니 내가 조금 심했나 싶었다.
처음 미국 왔을 때는 그래도 ‘스파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차이였
는데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은 ‘스파링’이라는 단어를 쓰기엔 벤슨과
내 기량 차이가 너무 벌어졌다.
“와. 저게 진짜 ‘세계급’ 재능인가?”
“저게 말이 돼? 처음 왔을 때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벤슨을 그냥 갖고 놀잖아?”
“...내가 미들급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저런 괴물이랑 같은 체급이었다면 나
는 다른 단체로 옮겼을 거야.”
마지막 스파링이 시시하게 끝났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내 쪽을 보며 수군거렸다.
그렇다고 일부러 치열한 척 스파링을 해줄 수는 없었으니 뭐 어쩌겠어.
“이거. 이거. 내가 미스터 강 너를 너무 과소평가했어.”
맘모스는 씁쓸한 듯 고개를 저으며 내게 다가왔다.
“...미안해.”
“그래. 미안해야지. 체육관을 한번 둘러보라고.”
예의상 미안하다고 했을 뿐인데 그걸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맘모스.
“체육관?”
“그래. 벤슨은 이 체육관의 기대주야. 향후 브로일러 웰터급 랭킹까지 노릴
수 있는. 그런데 그 기대주가 비슷한 수준이었던 파이터에게 단 몇 주 만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뒤떨어졌으니 저들의 심정이 어떻겠어?”
“...”
상실감. 혹은 허무함. 그런 심정일까?
“하하하. 뭘 또 심각해져? 미스터 강 네가 지난 한 달간 어떤 훈련을 받았는
지 여기 있는 모두가 아는데. 심지어 최두호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내 훈련
스케줄을 완벽하게 소화해냈어. 저들이 널 보며 박탈감을 느끼거나 상실감을
느낄 것 같아?”
“솔직히...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걱정하지 마. 저들은 앞으로의 네 행보에 따라 널 동경하고, 또 경외할 테니
까. 그리고 언젠가는 너와 함께 이곳에서 훈련했다는 걸 자랑스레 여기겠지.”
“...”
“그러기 위해선 미스터 강. 넌 정말 기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길을 걸어야
할 거야.”
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종이 한 장을 꺼내는 맘모스.
“그리고. 오늘 아침. 네가 걸어야 할 위대한 길의 첫걸음이 도착했다.”
그 종이는 한 달 뒤 있을 브로일러 시합에 대한 안내서였고.
내 데뷔 무대에 대한 안내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