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32화 (32/203)

32화_WTH

1.

코네티컷 주.

미국 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위로는 매사추세츠 주를, 아래로는 북대서양을

접하고 있었다.

아. 물론 이 사실은 5분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사실이다.

머리털 나고 코네티컷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봤으니까.

이게 다 구ㄱ...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방금 들었는데 어떻게 바로 정해요? 고민 좀 해봐야지! 하루 이틀 놀러 가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좋은 기회다.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첨단 시스템들을 접할 수 있을 거야.”

계약서를 쓰자마자 날 미국으로 보내려고 안달인 안 코치님.

잘은 모르지만 정말 놓치기 아까울 정도의 기회기 때문에 조금은 강요하는 듯

한 모습을 보이시는거겠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 정도의 신뢰는 있었다.

문제는 내가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거다.

“일단 이건 조금 생각을 해볼게요. 언제까지 답변 줘야한다거나 하는 거 있어

요?”

“맘모스도 지금 데리고 있는 선수 스파링 파트너겸 해서 부르는 것 같아. 빨

리 답변 줘야할거다. 안될 것 같으면 빠르게 다른 사람 알아보라고 해야 하니

까.”

“아. 넵.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말씀 드릴게요.”

“그래. 다시 말하지만... 드물게 좋은 기회니 진지하게 고민해봐라. 네가 이

길을 걷기로 했다면 해외 훈련정도는 큰일도 아니야.”

“넵!”

내 대답을 끝으로 사무실을 나가보라는 듯 손짓하는 안 코치님.

브로일러와의 계약을 위해 준비해야할 것들이 많다며 투덜거리셨지만 그래도

즐거우신 눈치였다.

“오늘은 운동 안하고 가냐?”

“아. 창섭이 형.”

사무실에서 나와 그 길로 체육관을 나서려는 날 부르는 창섭이 형.

“잠깐 볼 일이 있어서요. 형은 곧 시합이죠? 컨디션은 어때요?”

“그냥 그래. 항상 똑같지 뭐.”

권창섭 형.

내가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스파링 실수를 저질렀던 조쉬와 같은 FFC 무대에

서 활약하는 선수로 팀 ‘피스트’에 속한 몇 안 되는 현역 선수였다.

“그래도 이번 시합은 퍼스트챔피언십 코리아라 편하지 않아요? 움직일 필요도

없고 시차적응도 필요 없고.”

“대신 부담감은 더 크지. 이제까지는 이기든 지든 별 기사도 없이 잘 지나갔

는데 이번 시합은 기사도 많이 뜰 거 아냐.”

“하하. 이길 생각을 해야죠.”

“어우. 난 너나 두호 형처럼 괴물이 아냐. 평범한 시민 1이라고.”

FFC.

First Fighting Championship.

혹은 퍼스트챔피언십이라고도 부르는 단체는 WFC와 브로일러의 뒤를 쫓아 세

계 3위라는 타이틀을 자처하는 격투기 단체였다. 세계적으로 보면 3위지만 아

시아만 놓고 보면 넘버원 격투기 단체.

하지만 실상을 파고 보면 업계의 압도적인 1위 WFC와 2위인 브로일러를 빼면

일반 사람들에게는 대다수의 격투 단체는 그저 생소할 뿐이었다.

실제로 나 또한 격투기에 진지하게 입문하기 전까지는 퍼스트챔피언십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일까. 퍼스트챔피언십에서는 최근 한국인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는

가 하면 이번에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대회를 가지기도 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

팅으로 아시아권에서 대대적인 브랜드 메이킹에 들어갔다.

“컨디션 조절만 잘 해요. 시합 날 응원 갈게요.”

“안 그래도 주변에서 다들 난리다. 한국에서 시합 열리니까 다들 응원 온다고.”

“아...”

그건 좀 부담스럽긴 하겠다.

해외 시합은 응원하러 가기도 어렵고, FFC의 경우 중계도 케이블 티비를 뒤져

서 보거나 인터넷 중계를 찾아봐야하는데. 국내 시합은 가족 친지들 모두 직

관이 가능하니 부담이 더 크겠지.

“하하. 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실 거예요. 파이팅!”

“영혼이 없어 보이지만. 오케이. 접수. 떠오르는 신예의 기운도 받아가야지!”

잠깐의 휴식이 끝났는지 다시 구슬땀을 흘리러 가는 창섭 형을 보며 나는 체

육관을 나왔다.

이제는 나도 나의 무대를 찾아야지.

2

...

암만 그래도 이렇게 급 전개라고?

“야. 뭐해? 짐 챙겨.”

“어? 어.”

나는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정신이 덜 깬 건지 모를 정도로 멍한 상태로 캐

리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준현아.”

“왜?”

“이거. 꿈이겠지?”

“미친놈. 아직 잠이 덜 깼냐? 꿈?”

지금 준현이가 땀을 흘리며 날 째려보고 있는 곳.

이 곳은 브래들리 국제공항이었다.

“창섭이 형 시합 보러간다고 했는데...”

“시끄럽고 빨리 따라와. 여긴 나도 초행이라 일정 맞추려면 빨리 움직여야 돼.”

“...네.”

인천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디트로이트에서 한번 환승을 한 뒤 도착한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제일 빠른 비행 편으로 왔지만 16시간이 넘게 걸렸다.

“워터베리까지 가려면 차타고 한 시간 더 가야 돼. 시간 없다. 빨리 빨리 움

직여라.”

미국 생활을 꽤 해봤던 준현이를 따라 렌트한 차량을 타고 브래들리 국제공항

을 나서는 동안에도 현실감각이라는 놈은 당최 따라오질 못했다.

분명 안 코치님에게 미국행 제의를 받고 생각해보겠다고 할 때 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만뒀는지 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준현이가 회사를 때려쳤

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같이 미국이나 갈래? 라고 물었던 게 화근이었다.

당장 콜을 외치는 준현이를 따라 나도 기세를 몰아 안 코치님에게 전화해 콜

을 외쳤다.

그 이후부터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미국행 일정이 진행되었다.

브로일러와의 계약을 순조롭게 마치고 맘모스 코치와 일정을 조율한 뒤 정신

없이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인천공항에 서 있었고, 결국 이곳 미국 땅까지 오

게 되었다.

“다 내 덕분인 거 알지? 알지? 작년에 나 때문에 이스타 비자 받아둔 것 때문

에 일정 맞출 수 있었던 거?”

“...고맙다 새끼야. 근데 나 운동하는 동안 넌 뭐하게? 한 달 넘도록?”

“난 예일이랑 페어필드에 친구들 많음. 걱정 노노.”

아. 준현이가 보기에는 오타쿠 같아 보이고 성격은 십타쿠 같지만, 생각 외로

글로벌한 놈이었지.

“그보다. 그만 좀 먹어라. 넌 체중관리 그런 거 안 해?”

“그러게. 관리해야 하는데.”

요즘 먹을 게 너무 땡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달까.

그래서 그런지 운동을 아무리해도 몸무게 변화가 없었다. 몸은 슬림해지고 있

는데 말이지.

“그 코치님한테나 연락 해줘라. 도착했다고.”

“...나 영어 못한다고 새끼야.”

“걸어서 나한테 달라고!”

그러면 진작 그렇게 말 하던지.

나는 스마트 폰을 꺼내 맘모스 코치의 번호를 눌렀다.

-Rrrrrrrrr

투박한 기본 전화착신음과 함께 들려 묘하게 거슬리는 기본 벨 소리.

-Hello?

그리고 역시나 폰과 현실에서 동시에 들리는 기분 나쁜 목소리.

혹시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낯익은 거대한 흑인 아저씨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Welcome. To hell.”

*

“하하. 저도 예정에 없이 들어온 거라서요. 죄송해요. 유나 씨.”

-무슨 예정에 없던 미국행을 한 달을 넘게 가요?

“그러게요. 저도 경황이 없었어요. 진짜에요.”

-진짜 너무해. 한국 오면 제일 먼저 저한테 연락주세요 대신.

“넵!”

-저 이제 방송하러 가야해서 이만 끊을게요. 자주 연락해요. 저 주로 저녁이

랑 새벽에 활동하니까.

“넵!”

코네티컷과 서울의 시차는 14시간.

지금 코네티컷이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이었으니 서울은 늦은 저녁. 밤 시간

대일거다. 오늘 외에도 내가 한창 활동할 시간에 한국은 저녁이나 새벽일 경

우가 많을 텐데 유나 씨는 올빼미족이라 연락이 잘 되겠구나 싶었다.

“해서야. 도착했대. 내릴 준비하란다.”

“오케이.”

공항에서 워터베리에 위치한 맘모스의 체육관까지는 차로 약 한 시간 가량 걸

렸다.

그 사이 비행기에서 받지 못한 연락들을 처리했고, 마지막 통화를 끝내는 타

이밍에 체육관에 도착했다.

“자 들어오라고. 우리 체육관에.”

나는 맘모스와, 그의 말을 동시통역해주는 준현이를 따라 낯설지만 뭔가 익숙

한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Brazilian jiu jitsu

체육관 입구에는 커다랗게 MMA라는 글자와 브라질리언 주짓수 라는 글이 박혀

있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느낌.

그 느낌은 체육관 내부로 들어서자 더 확실해졌다.

샌드백도 있고 오픈핑거 글러브들도 보였지만 사람들의 태권도 도복과 비슷한

주짓수 도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저 동양인인가? 매머드가 그렇게 칭찬을 했다는 선수가?”

“별로 그렇겐 안 보이는데. 듣자하니 아직 데뷔 무대도 갖지 않았다던데 매머

드가 벤슨의 스파링 선수로 극찬을 하다니. 얼마나 대단한 거야?”

맘모스 코치와 체육관 내부를 가로지르자 주변의 운동하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신경쓰지 마. 너 칭찬하고 있어. 저 맘모슨가 매머든가 하는 코치가 네 칭찬

을 많이 해뒀나봐.”

“그래?”

적어도 준현이는 통역에 있어서는 장난이나 거짓말을 하는 놈이 아니었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먼 미국 땅에 와서 동양인에 경력 짧다고 무시당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 분위기는 아닌 듯싶었다.

“오! 매머드! 드디어 온 거야? 그 한국의 미라클 보이가?”

“잡설은 그만해. 일단 오늘부터 운동 시작하고 미라클 보이가 시차적응 되는

대로 붙여 줄테니까.”

“오케이! 기대된다고!”

체육관 제일 안쪽.

오픈 핑거 글러브를 끼고 타격 연습을 하던 라틴계로 보이는 외국인 하나가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며 맘모스 코치와 대화를 나눴다.

“저 사람이 해서 너랑 스파링 할 선수인가 봐. 이름이 벤슨이라는 것 같아.”

“그래?”

오기 전에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전달 받았다.

맘모스 코치가 가르치는 브로일러 웰터급 파이터의 타격 스파링 선수. 그게

내 역할이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매스 스파링이라고 하는, 아주 가벼운 스파링이 주가 된다.

공격과 타격보다는 방어를 연습하기 위한 아주 가벼운 스파링.

그리고 맘모스 코치가 날 부른 이유는 주 1회씩 진행되는 아주 강도 높은 스

파링에 있었다.

물론 MMA룰로 테이크다운과 파운딩까지 허용되는 스파링은 아니었다. 타격과

킥만 허용하는 입식 룰에 가까운 스파링을 아주 높은 강도로 원한다고 했다.

“왜 그런지 알겠네.”

“어?”

“아니야.”

나는 체육관을 둘러보며 준현이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아마도 저 벤슨이라는 선수는 주짓수가 베이스인 선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타격이 조금 약하겠지. 맘모스 코치가 스파링을 뛰어주기엔 수준차이와 체급

차이가 너무 났을 테고. 그래서 날 불렀을거다.

“안녕? 난 벤슨이라고 해. 트레이너에게 많이 들었어. 뒤늦게 격투기를 시작

해 곧 브로일러로 데뷔를 한다지?”

지금도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내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벤슨.

“강해서라고 합니다. 그냥 강이라고 부르면 돼요. 격투기는... 다들 조금 늦

지않았냐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꼭 한번 부딪혀 보고 싶어서요.”

나는 준현이의 통역을 통해 그리 어렵지 않게 벤슨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대단해. 아주 멋진 일이야.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늦고 빠르고가 어디 있

어? 하고싶은 일을 찾은 순간이 가장 빠른 순간이라고.”

“하하. 고마워요.”

이거 참.

한국에서는 나이 서른에 무슨 격투기냐고 알게 모르게 주변에서 엄청들 말려

댔는데. 심지어 인터넷 기사에서도 그랬고.

그런데 인종차별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미국에서 처음 본 사람이 오히려

편견 없이 내 꿈을 지지해주다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매머드는 나중에 붙게 해준다고 했지만 말이야. 혹시 지금 가볍게 매서드 한

번 가능해? 시차 때문에 힘들면 편하게 거절해도 돼.”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가벼운 스파링을 제의하는 벤슨을 보는데, 이번 미국행

이 왠지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일정이 될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준현아. 콜이라고 좀 전해줘라.”

그리고 스파링은 언제나 환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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