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_저랑 하실래요?
1.
“오랜만이네.”
그러게.
어느새 오랜만이라는 단어를 써야할 만큼 시간이 지나버렸네.
“너넨 참 변하지도 않는구나? 여기 참 좋아해.”
효인이와 내가 만났던 기간이 4년이다.
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 봤던 사이니 당연히 우리 아지
트 술집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그걸 알면 네가 알아서 피해야 하는 거 아니냐?”
역시 준현이.
웃는 얼굴에도 침 잘 뱉는 스타일인건 알았지만 대단하다.
“준현이도 오랜만이네?”
“그 말. 한 십년 쯤 뒤에 들었으면 반가웠을지도 모르겠다.”
남은 안주를 끊임없이 헤집으면서도 상대방 가슴이 비수를 꽂는 말을 참 잘도
한다.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야.
“나 잠시 앉아도 돼?”
“노. 거기 재현이랑 기태 자리임. 수저랑 앞 접시 안보임?”
“그러면 걔들 올 때 까지만.”
그러고 보면 효인이도 참 마이페이스가 강하다.
면전에다 대고 저렇게 싫은 티 팍 팍 내는데 저걸 굳이 앉네.
“해서. 너는 안 앉아?”
“앉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또 앉기가 싫어지네.”
“나 때문인 거면 일어날까?”
에휴. 됐다.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이냐.
“아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뭐야?”
나는 자리에 앉으며 차라리 이 자리를 빨리 끝내기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
을 던졌다.
“찾아오다니. 그냥 우연히...”
“잘도 우연이겠다. 한 달에 두세 번은 주말마다 여기 오는 거 알면서. 그리고
우연이면 일행이라도 있어야지 왜 혼자 와서 여기 앉는 건데.”
“아... 친구들은 나중에 만나기로 해서.”
“그럼 약속시간 전에 혹시나 하고 들러 본 건가보네.”
“... 자꾸 이럴 거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뾰로퉁한 표정을 짓는 효인이.
참... 오랜만이라는 말을 해야 할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한때 연인이었던 사
람의 표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구나 싶었다.
연애할 때는 저 표정이면 일단 져주고 봤는데.
“뭘 자꾸 이래. 그냥 사실을 말 한 건데. 헤어진 마당에도 네 기분 맞춰줘야
하냐?”
“풉. 아냐. 장난. 미안해. 오랜만에 만나니까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사실 진
짜 지나가다가 들어온 거야. 뭐.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진짜 뭘 어떻
게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줬음 해.”
흠. 저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날 꼭 찾아와야 할 일이 있었다면 애들 없는 우리 집으로 찾아왔겠지.
“요즘 잘 지내는 것 같더라? 티비에서 보고 깜짝 놀랐어.”
“티비?”
스트리트 파이터냐 최창우랑 시합이냐. 그것도 아니면 설마 두호 형 시합은
아닐 테고.
“격투기 오디션에. 그... 뭐 국내 챔피언이랑도 시합 했었다며? 주변에서 친
구들이 물어보고 난리였어. 헤어졌는데 참 난감하...”
“야. 강해서. 빨리 안주 시키라니까? 안주 다 먹어가는 거 안보이냐? 메뉴판
이리 주던지.”
“어? 어. 자. 메뉴판.”
효인이의 말을 절묘하게 끊으며 메뉴판을 요구하는 준현이.
효인이는 살짝 준현이를 째려보는 듯 했지만 준현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메뉴
판을 정독하고 있었다. 저런 집중력이 있으니 통역대학원을 나왔겠지. 대단하
다 내 친구.
“여튼. 봤으면 알겠네. 나 요즘 잘 지내는 거. 그거랑 네가 여기 앉은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말 좀 그만 쌀쌀맞게 하면 안 되니? 그냥 진짜 반가워서 아는 체 한거야. 우
리가 헤어졌긴 하지만 서로가 진짜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으니 사귀었던 거잖
아? 헤어졌다고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 된 건 아니잖아.”
내가 깜빡하고 있었네.
효인이는 준현이에 버금갈 정도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아이였지.
“나한테 좋은 사람이 남한테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어. 좋았던 사람이 나
쁜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너 그거 지나친 자기 확신이야. 저기
요! 여기 주문 좀 할게요!”
옆에서 한마디 거들어주는 준현이.
“휴우. 그냥. 진짜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반가워서 인사 한 거야. 우리 헤어질
때만 해도 한창 무엇 하나 집중 못하고 헤맬 때였으니까. 힘들어 했으니까.”
“그래. 그 시기에 넌 나한테 헤어지자 그랬고.”
“미래가 없으니까. 징징거리고 무엇 하나 제대로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항상
포기하고 그만둘 핑계만 찾아댔으니까. 그게 내 삶까지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
으니까. 네가 지금처럼만 무언가 하나에 제대로 몰두 했다면 우리 헤어지지
않았을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제 내가 뭔가 하나에 몰두하니까 다시 만나자고? 김
효인이 성격에 그 말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네 말처럼 이제 정말 격투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그냥 응원이나 해줘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왜 아니라고 단정 지어?”
“...”
준현아. 안주 처먹을 때가 아니다. 형 좀 도와줘 봐라.
-Rrrrrrrrrrrrrr
다행히 말문이 턱 막힌 순간에 울리는 스마트 폰.
유나 씬가 싶어 폰을 보니
-손아름
“어?”
손아름님이었다.
지난번 수타라면 사태 이후 번호를 교환했었는데 전화가 온 건 처음이었다.
뭐야. 효인이 봤을 때보다 더 떨리네. 와 씨...
“잠시만. 나 전화 좀 받을게. 여보세요?”
-여보세요? 해서 씨 폰 맞아요?
“네. 아름 씨. 강해섭니다. 어쩐 일로...”
-헤헤. 아까는 인사도 못 드리고 가서 생각나서 연락 했어요! 사실 조금 기다
렸는데 사무실에서 나오실 기미가 없으셔서.
“아이고. 뭘 기다려요. 인사 그게 뭐라고.”
-친한 언니랑 라면 먹으러 왔는데 해서 씨 생각나서요! 인사 못한 것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전화 했어요! 시끄러운데 밖이에요?
“아. 네. 저도 친구들이랑 맥주 한잔 하려고 나와 있어요.”
-그러시구나! 여튼 여기라면 먹는데 너무 맛있어서 연락 했어요! 친구들이랑
재밌게 노시고 다음에 저랑 라면 먹으러 여기 한번 와요! 완전 존맛탱! 헤헤.
“하하하. 알겠습니다. 꼭 데리고 가주세요.”
-네! 그럼 전 이만! 뿅!
“하하. 넵! 뿅!”
참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손아름님은.
“...”
그 긍정 에너지에 나도 모르게 뿅! 까지 따라하며 전화를 끊고 나니 준현이와
효인이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왜. 뭐. 왜.”
“너 지금 손아름이랑 전화하면서 끝에 뿅! 이지랄 한 거냐?”
“왜. 난 손아름이랑 전화하면서 뿅 하면 안 되냐?”
준현이는 정말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었고.
“손아름? 가수 손아름? 방금 통화한 거 가수 손아름이야?”
효인이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아 왜. 난 손아름이랑 연락 좀 하면 안 돼?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이래들.
“티비에도 나오고 그러더니... 연예인이랑도 연락하고 지내는구나...”
효인이는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추해보이니 패스하도
록 하자.
“이제 해서 사는 세상이 우리랑 조금 달라. 너랑 해서랑 사귄 시간이 4년 정
도 되긴 하지만. 너희가 헤어지고 요 몇 달 동안 해서 많이 바뀌었다. 사람이
바뀌고 위치가 바뀌는 거. 시간이랑 상관없더라.”
효인이는 준현이의 말에 별 다른 대답 없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해서야! 유나 씨 벌써 왔냐?”
“오! 유나 씨야?”
그때 화장실에서 뭔 짓을 한 건지 머리에 한껏 힘을 주고 온 재현이와 기태는
효인이를 유나 씨로 착각했는지 해맑게 들어오다가.
“안녕하세요. 유나 씨! 저는 해서 친구 기태....”
“...야. 효인인데? 유나 씨가 아니라?”
“갓뎀. 야. 나 볼일을 안보고 왔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효인이인 걸 확인하고는 바로 걸음을 멈췄다.
준현이와는 달리 여자에 약한 저 두 놈은 효인이가 불편할 만 했다.
“아니야. 너희 올 때 까지만 앉아 있으려 한 거야. 기태랑 재현이도 오랜만이
야.”
“아. 어. 응.”
“그, 그러게. 오랜만이네.”
기태와 재현이가 상당히 어색한 표정과 말투로 인사를 나누고 효인이가 자리
를 비켜주려 할 때.
“해서 씨!”
정확히 내 이름을 부르는 맑은 목소리.
“아. 유나 씨.”
쌍꺼풀 없이 크고 또렷한 눈에 살짝 도발적이게 올라간 눈꼬리. 새까만 단발
과 반대되는 하얀 피부에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이 매력적인 여성. 전형적인
고양이상 미녀인 임유나였다.
거기다 짧은 스커트에 가죽재킷. 안에는 가슴골이 살짝 보일정도로 풀어헤친
흰 셔츠. 목에는 초커까지. 술집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수군거릴 정도로 과하
게 예쁜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침 이 근처에서 라방 하고 있었거든요. 여기는 친구 분들? 안녕하세요!”
“아. 어. 저는... 이제 일어날 거라 서요. 편하게 앉으셔도 돼요.”
효인이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꽤나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은
못 알아봐도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준현아. 기태야. 재현아. 나 먼저 가볼게.”
가방과 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느새 당황한 감정을 지우고 태연하게
인사하는 효인이.
“그리고 해서야.”
“어?”
“정말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고맙다. 너도 이번에 시험 붙었다는 이야기 들었어. 듣고도 축하한다는
연락은 못했는데 이렇게 하게 되네. 파이팅하고.”
“풉. 고마워. 이렇게 보니까 진짜. 내가 좋아해서 연애하고 싶었던 자존감 넘
치던 그 시절의 해서 같네.”
“쓸 데 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그래. 간다. 안녕.”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 효인이.
“저 계속 이렇게 세워두실거예요?”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유나 씨가 왔으니 직원에게 의자를 하나 더 달라고 했는데 유나 씨의 친구로
보이는 알바 분이 6인석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줬다.
“와. 유나 씨 친구 분도 엄청 예쁘시네요.”
“영은이요? 영은이 예쁘죠. 착하고 성실하고.”
재현이와 기태는 이미 유나 씨는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걸 느꼈는지 친구인
알바 분으로 대화의 초점이 바뀌어 있었다.
“근데 저 알바 분. 재현이 네가 번호 따려다가 까인 분 아냐? 남자친구 있다
고 하셨던?”
“어? 영은이 남자친구 없는데?”
“...”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가.
“풉! 푸하하하하하!!! 재현이 이 새끼 그냥 까인거였어. 푸하하하! 얼마나 싫
었으면 없는 남자친구를 만들어냈겠어.”
기태는 포복절도하다시피 웃어젖혔고 재현이는 한껏 풀이 죽은 채 얼굴색이
죽어갔다.
“알바 매뉴얼일 수도 있지. 홍대 술집에서 알바 하는데 가볍게 번호 물어보는
사람이 한 둘이었겠냐.”
“그, 그렇지?”
그래도 준현이는 마냥 놀리지는 않고 재현이 편을 들어줬고 재현이는 간신히
정신승리에 성공하는 듯 했다.
“아마 친구 분이 영은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럴 거예요.”
유나 씨만 아니었다면.
“차라리. 이쪽 친구 분이 영은이 스타일일걸요?”
“...저요?”
“쟤가요?”
“준현이가?”
“헐.”
준현이를 욕하거나 깎아내리는 건 아닌데. 170초반 대에 굴리면 굴러갈 듯 동
그란 몸을 가진 친구였다. 이런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영은이 아버지가 딱 이 친구 같은 스타일이에요. 그래선지 애가 눈이 발바닥
에 붙어있어. 곰처럼 귀엽고 푹신한 스타일을 좋아해요.”
“저도 덩치는 있는데.”
“해서 씨는 곰 같은 게 아니라 산적 같구요.”
...산적은 너무했네.
“어쨌든.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오늘 해서 씨한테 시간 내달라고 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에요.”
“다른 이유요?”
“네. 일단 이거.”
스마트 폰을 켜서 내게 건네는 유나 씨.
이게 뭐지?
“지난번 최창우랑 시합했을 때 저한테 들어온 후원금 정산이에요. 그때 누가
이기나 맞추는 미션 진행했었는데 저는 해서 씨가 이긴다 에 걸었거든요. 해
서 씨 덕분에 받은 후원금이니 나누는게 맞다고 생각해서요. 물론 내기에서
졌을때의 리스크는 제 몫이었으니 그만큼은 뺐어요.”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며 바로 내 계좌를 받아 후원금 내역의 일부를 이체하는
유나 씨.
“세금이나 이런 것도 제가 처리할거니까. 그 부분도 빼고 넣었어요. 괜찮죠?”
“아. 뭐 저야... 안주셔도 되는데 주시는 거니 그냥 감사하게 받는거죠 뭐.”
이미 재현이와 기태 놈은 돈 벌었으니 쏘라며 난리였고 준현이는 조용히 메뉴
판을 다시 들고 있었다.
“자. 드릴 건 끝났고. 이제는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짧은 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꼰 채 날 올려다보는데 눈동자가 반짝반짝 거렸다.
-깨톡!
그때 울리는 스마트 폰
“잠시 만요.”
잠시 유나 씨의 말을 끊고 폰을 확인했다.
-효인 : 많이 고마웠고. 많이 생각했어. 밝고 건강한 모습 정말 보기 좋아.
또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네 말대로 항상 응원할거야. 파이팅!(힘
내는 토끼 이모티콘)
그래도 지난 헤어짐이 너무 어설펐기에 조금 마음 쓰였는데.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듯해서 조금은 편해졌다.
내 20대의 절반 가까이를 함께 했던 사람이지만, 앞으로는 더 오랜 시간을 남
으로 지낼 사람아. 안녕.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기에 효인이의 톡에 답장을 하지 않았고, 그녀도
기대하지 않았을 거다.
“해서 씨.”
“아. 네. 어디까지 이야기 하셨죠?”
유나 씨는 잠시 뜸을 들이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새빨간 입술을 열
었다.
“저랑 합방 한 번 더 안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