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_선택지
1.
“그래서. 어쩔 거냐?”
WFC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난 뒤. 한창 고민에 빠진 내게 준현이가 물어왔다.
“어쩌긴. 일단 체육관 가서 이야기해봐야겠지만... 분명히 기회지 이건.”
WFC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위상은 본격적으로 격투기를 하
면서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사실상 전 세계 넘버1 격투기 단체.
그 뒤를 브로일러가 바짝 추격하고 있다지만 WFC의 아성은 견고했다.
“야. 나 간다?”
“재현이랑 기태 오기로 했다며?”
“너네끼리 놀아. 엉아는 바쁘다.”
“아. 미친놈.”
궁시렁거리는 준현이를 뒤로하고 한달음에 체육관까지 달려갔다.
원래라면 오늘 하루는 운동을 쉬기로 했지만 이런 특이사항은 보고해야겠지.
“저 왔어요!”
목소리도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체육관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됐다.
“해서 너 오늘 하루는 쉰다더니. 왜 왔냐?”
“그래. 그래. 뭐 시차 때문에 쉰다며?”
권창섭 선수와 코치형들이 괜히 놀리는 어투로 날 반겼다.
“어? 해서 씨 어디 갔다 왔어요?”
그런데... 조금 전까지 티비에서 뵙던 분이 왜 여기 계시지?
주말 운동 나오셨나?
“아. 아름 씨. 해서 저놈 두호 형 따라서 시합 다녀왔어요.”
“두호 선수님이랑요? 우와! 어디서 시합하셨길래?”
아니야. 권창섭 선수님. 창섭이 형. 그거 말하는 거 아니야.
“싱가포르요.”
“싱가포르면... 시차가...”
“한 시간이죠.”
“...”
아 왜 말하냐고!!
시차 때문에 하루 쉰다는 건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하하. 시차 때문에 쉰다는 건 농담이었고. 안 코치님 어디 계세요?”
“아아. 지금 사무실에 계셔. 손님이 오셔서.”
아하.
아무래도 두호 형이 이번 시합에서 승리하면서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안 코치님은 두호 형의 매니저도 겸하고 있으니 정신없이 바쁘겠지. 그럼 몸
이나 풀면서 기다려야 하나?
손아름 님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들어가 봐도 될 거야.”
“네?”
“사무실 들어가 봐도 된다고.”
내 생각을 읽은 건지 사무실에 들어가 봐도 된다고 말해주는 권창섭 선수.
“손님 와 계신다고...”
“그 손님이 너랑 관계있는 손님이니까. 들어가 봐.”
나랑 관계있는 손님?
일단 탈의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사무실 문에다 노크했다.
-누구야!
“코치님. 저 해섭니다.”
-해서? 들어와!
1초의 딜레이도 없이 바로 들어오라 하시는 안 코치님.
“반갑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꾸벅 인사를 한 뒤 사무실을 둘러보는데. 안 코치님과 웬
백인 아저씨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어째 딱 맞춰 왔대? 앉아봐. 안 그래도 너 부르려고 했는데.”
“넵.”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질문보다는 일단 자리에 앉는 게 먼저였다.
“인사해라. 여기는 브로일러 아시아 사무국에서 나오신 분이다.”
“아. 안녕하세...요.”
한국어로 인사해도 되나?
영어로 해야 하나?
“반갑습니다. 강해서 선수. 맞죠?”
“네? 네. 맞습니다.”
내 우려와는 달리 백인 아저씨는 조금 어눌하지만 알아듣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반가워요. 브로일러 아시아 사무국의 레일리라고 합니다.”
“아. 예.”
“지난번 최창우 챔피언과의 일전은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저희 회장님도 언
급하셨을 정도로 훌륭한 경기였죠.”
“회장... 님이요?”
브로일러 회장님이면 그 대머리 아저씨 아닌가? 오스만인가 하는.
“네. 다음 달 한국에 일정차 오실 일이 있어 그때 직접 강해서 씨를 보고자
하실 정도였죠.”
“오스만 회장이 해서 널 좋게 봤나 보다. 암만 일정 때문에 한국 방문할 때
겸사겸사 보는 거라지만. 브로일러 정도 되는 단체 회장이 일개 선수를 따로
만나는 일은 드물어.”
“...그러게요.”
조금 현실감각이 없기는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프로 격투기 선수로서 데뷔도 하지 않은 어정쩡한
포지션에 걸쳐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스트릿 FC의 챔피언인 최창우를 이기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가 싶었다.
“그런데. 바로 어제였죠. 최두호 선수의 시합 중계에서 강해서 선수의 모습을
본 회장님이 저한테 직통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 시합이요?”
“학센과의 대치 장면. 지금쯤이면 인터넷에서 꽤나 화제일 듯한데요. 회장님
이 살짝 몸이 단 듯했습니다. 하하.”
아아. 학센과 살짝 몸싸움을 한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어제 중계 장면을 직접 모니터링하진 않아서 그때 상황이 어떻게 잡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 때문인데. 해서야. 혹시 오늘 무슨 전화 한 통 안 받았
냐?”
“네? 아! 네. WFC에서 전화가...”
“그래. 너 온 거 보고 바로 전화 갔구나 싶었지.”
아.
WFC에서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나 싶었더니 안 코치님을 거쳤나 보다.
애초에 어제 WFC 시합에서 두호 형의 세컨으로 참석했었으니까.
“하하. 마침 잘됐네요. 미스터 안이 WFC의 제안도 들으셨죠? 이럴 줄 알고 저
희 회장님이 절 보내셨나 봅니다.”
지금 이 상황이 꽤나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을 잇는 레일리.
“아마 WFC에서는... 이러든 저러든 중소 단체에서 어느 정도의 경력을 쌓아
오라고 했을 것 같은데. 사실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저희 회장님이 관심을
가진다는 걸 텔론 그 양반이 알고 있다면 바로 영입을 시도할 수도 있으니까요.”
“음. 그 말이 정확하겠습니다. WFC에서 딱히 다른 단체의 경력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라스베이거스로 한번 들어오라는 말이 있었죠.”
“파격적이군요.”
내 이야기를 나 빼고 두 사람이 나누고 있었지만 어떻게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내가 전혀 문외한인 분야였으니까.
“어쨌든. 전화 통화만 한 WFC보다는 저희 브로일러가 조금 더 성의를 보이고
있다는 정도는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아. 네.”
이번에는 나를 향해 말하는 레일리.
“미스터 강은 격투기 선수로서 정상을 노리는 선수가 맞죠?”
“네? 어. 뭐. 그렇습니다.”
“그러면 프로로서 데뷔라는 걸 하고. 강한 선수들과 싸우며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내야 합니다. 맞죠?”
“네... 뭐.”
“그러면 그 시작을 어디서 하느냐가 중요한데. 스트릿 FC나 FFC 같은 곳보다
는 아무래도 저희 브로일러나 WFC가 가장 적격이겠죠. 굳이 밑에서부터 경력
과 실력을 쌓아 올릴 필요가 없다면 말입니다.”
순간. 어제 두호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시간이 많이 없어. 오래는 못 기다린다.
그래. 내가 나이가 어려서 시간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고, 선택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갈 필요는 없었다.
“저희 오스만 회장님은. 미스터 강의 데뷔전이 세계에서 가장 거친 남자들이
모여있는 브로일러에서 치러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건 WFC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때 레일리의 말에 나 대신 대답을 해주는 안 코치님.
“물론 라스베이거스로 오라는 말이 무조건적인 계약을 뜻하는 건 아니지만 말
입니다. 중요한 건 조건이겠죠. WFC는 제시할 수 없고 브로일러는 제시할 수
있는.”
“흐음...”
“해서야. 혹시 네가 생각하는 계약 조건 중 꼭 필요한 내용이 있냐?”
레일리는 침음을 흘렸고 안 코치님은 혹시나 하는 뉘앙스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 최대한 빠르게 올라가고 싶어요.”
“응?”
“빠른 데뷔. 그리고 빠른 매치업. 제가 원하는 건 딱 하나. 그거에요.”
“...”
지난번 두호 형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보통 선수들은 일 년에 몇 번의 시합을 가지냐고.
대답은 선수마다 다르지만, 평균 3회 이내라고 했다.
보통은 3~4개월의 텀을 두고 경기 일정을 잡고, 길면 5~6개월의 텀을 두기도
한다고.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막상 실전에 부딪히면 저도 다른 선수들처럼 일
년에 몇 번 시합을 못 가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일단 제가 지금 원하는 조건
은, 제가 원할 때 최대한 빠르게 시합을 잡아주는 것. 그거면 됩니다.”
“으음... 미스터 강. 체급이 어디죠?”
“네?”
어... 사실 정확히 체급을 정하지 못했다. 막연히 두호 형이 있는 웰터 급을
갈까 생각을 했었지만, 체중 감량과 몸만들기가 그리 단시간에 되는 건 아니
었으니까.
그래도 두호 형이 벨트를 갖고 기다린다고 했으니 웰터급으로 가야겠지?
“WFC는 아마 웰터급을 권할 겁니다. 텔론 그 양반이 보고 싶은 건 학센과 같
은 체급에서 미스터 강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일 테니까요.”
“...”
“거기다 WFC는 미들급에 이미 흥행 카드들이 많아요. 반면 웰터급은 학센을
제외하면 심심하죠. 분명 웰터급 계약을 원할 겁니다. 하지만 저희 브로일러
는 다르죠. 미스터 강이라면 당장이라도 미들급 데뷔. 가능합니다.”
솔직히 이게 레일리가 약을 파는 걸 수도 있다. 아직 WFC의 조건을 들은 건
아니었으니까.
“빠른 데뷔. 빠른 매치를 원한다고 하셨죠? 그러면 저희 브로일러가 제격입니
다. 세계 어느 격투 단체보다 전투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시합을 하거든요.”
브로일러라.
사실 WFC고 브로일러고 모두 내게서 거리가 먼 얘기였기에 당장 뭐라고 대답
을 하기가 어려웠다.
“오케이. 좋습니다. 브로일러의 의지는 충분히 전달받았으니 해당 사항은 강
해서 선수와 잘 이야기해보고 빠른 시일 내에 사무국으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내가 어찌 답해야 할지 몰라하자 중간에서 깔끔하게 커트해주시는 안 코치님.
“하하. 저도 오늘은 미스터 강의 얼굴만 보러 온 겁니다. 회장님이 워낙 성화
셔서요. 잘 생각해보시고 연락 주세요.”
안 코치님만큼이나 깔끔하게 물러서는 레일리.
더는 이야기 할 게 없다 생각했는지 명함 하나를 건넨 후 미련 없다는 듯 체
육관을 떠났다.
“어쩔래? 해서야. 그래도 WFC 쪽 조건도 들어는 봐야겠지?”
“네? 네. 당연하죠.”
어쨌든 조건은 꼼꼼히 따져야 하니까.
그런데. 왠지 저 레일리라는 아저씨. 꼭 다시 볼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
“아! 강해서 이 새끼 좀 떴다고 졸라 늦어! 연예인 병이냐?”
안 코치님과 브로일러와 WFC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나오니 손아름
님은 이미 집에 가셨는지 보이질 않았다.
아쉬운 대로 친구 놈들에게 연락하니 이미 1차를 달리고 있던 상황.
“연예인 병이 아니라 옘병이다. 또 여기냐?”
“그래도 우리 아지트잖냐. 설마 또 무슨 일 있으려고?”
친구들은 지난번 술집 난동의 현장이었던 단골 술집에 있었다.
하긴. 여기가 우리 아지트지. 안 좋은 사건 하나로 등지기엔 이곳에서의 추억
이 너무 많았다. 대학 시절부터 애들의 군주. 이별주. 취업 축하주. 모두 여
기서 했었으니까.
“심지어 해서 네가 스트리트 파이트 오디션에 나간 것도 여기서 술 마시다가
였지.”
“난 술 안 마셨거든.”
그래. 여긴 우리 역사가 있는 술집이지. 인정.
“자. 자. 어쨌든 해서도 왔으니까 안주 정리하고. 2차 시작할까?”
“미친놈아. 2차는 자리를 옮겨야 2차지.”
“그러면 테이블 옮겨달라고 할까?”
“말을 말자.”
재현이는 낄낄거리며 알바에게 테이블의 빈 접시를 치워달라 하며 메뉴판을
받았다.
“자. 해서 네가 먹고 싶은 거...”
-Rrrrrrrrrrrrrrrrrrrrr
메뉴판을 넘겨받으려는 타이밍에 울리는 스마트 폰.
“누구야? 이 시간에?”
“잠시만.”
-임유나
“어... 임유나... 씬데?”
“그게 누군데? 왐마 해서 요즘 좀 잘나간다고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여자 만
나고 그러네?”
“뭐? 이 쉐키. 그라믄 안돼! 폰 줘봐!”
“아 뭐래. 지난번에 우리 술집 영상 원본 올려준 유나tv의 임유나 씨야.”
하여튼 간에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진상이 되는 재현이와 기태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해서 씨?
“네. 안녕하세요.”
그러고 보니 지난 시합이 끝나고 부재중 통화가 들어와 있었는데 나중에 연락
해야지 하고 연락을 못 했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딱 한 번 연락 하셨으면서.”
-네?
“아.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
-지금 홍대라면서요?
“...”
누구야?
언놈이 스파이야?
-거기 술집 영상을 제가 어떻게 입수했겠어요? 거기 제 친구가 알바하는 술집
이거든요?
“아...”
-해서 씨 왔다길래 급하게 연락한 거예요.
난 또. 내가 홍대인 걸 어떻게 알았나 했네. 동선까지 SNS에 회자 될 정도로
유명인은 아닌데 말이야.
-지금. 그쪽으로 가도 돼요? 할 말도 있고, 줄 것도 있구요.
“지금요?”
-네. 뭐 불편하면 내일 낮에 잠시 시간 내주시면 감사하구요.
엄... 지금 온다고?
나는 순간 기태와 재현이의 눈치를 봤는데.
“왜? 지금 온대?”
“오라 그래! 오라 그래! 아니지. 모시러 간다 그래!”
저 눈치 빠른 것들이 어떻게 알고 유나 씨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친구분들은 오라시는 것 같은데.
“하하... 오세요. 뭐. 그런데 저희 오래 마시진 않을 것 같은데.”
-저도 근처에요. 그럼 조금 이따 봐요.
“넵.”
그렇게 유나 씨와 전화를 끊자마자
“온대? 온대? 온대?”
“지금 온대? 아 씹... 오늘 머리 안 했는데. 재현아 왁스 있냐?”
“포마드 있음.”
“오키. 야.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정신없다. 정신없어.
기태와 재현이는 갑자기 무슨 꽃단장을 한다고 둘이 서로 머리를 만져주며 화
장실로 향했다.
여튼 대단한 대한의 남아들이야.
“준현이 너는. 그대로 있어도 돼?”
“안주나 시켜. 메뉴판 네가 들고 있잖아.”
“...네.”
준현이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랐군.
그보다. 알바가 친구면... 누구지? 여기 알바가 한둘이 아니라 잘 모르겠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유나 씨의 친구인 알바가 누구일까 싶어 술집 내부를
훑어보는데.
“강... 해서?”
어디서 많이 본 사람.
“... 김효인.”
그리고 지금은 딱히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