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25화 (25/203)

25화_맛 좀 볼래?

1.

“어... 손아름 씨?”

“진짜 집이 가깝나봐요? 자주 보네요?”

자주라니.

박기영 선수와의 시합 이후 처음본다.

체육관은 나와 두호 형의 시합으로 바빴고 손아름 님도 스케쥴이 바쁜지 체육

관을 찾는 게 뜸했으니까.

“이제 집 가시는 거예요?”

“네? 네.”

어째 지난번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시합을 치르고 집 가는 길에 마주쳤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이거 혹시...

‘혹시는 무슨 혹시야. 이 미친놈.’

나는 순간 머릿속에서 망상tv가 시작되려는 걸 꺼버리고는 모든 기대감을 내

려놓으며 손아름 님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차피 나는 손아름 님이 다니는 체육관의 관원1 일 뿐이니까.

“해서 씨.”

“네?”

“배 안 고파요?”

배?

미친 듯이 고프다.

시합 전에는 몸을 무겁게 할 수 없어 먹을 걸 자제했고, 시합이 끝난 후엔 조

금 전까지 두호 형이랑 같이 있었으니까.

“사실 요 앞에 맛있는 수타 라면 가게가 있어서 한번 나와봤는데. 아무래도

혼자 가서 먹는 것보다는 둘이서 먹는 게 눈에 덜 띄지 않을까요?”

“배야 고픈데... 괜히 저랑 같이 있다가 그... 스캔.... 흠흠. 들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네?”

“크흐흠... 그. 스캔... 들 하는 거 있잖아요.”

차마 내 입으로 스캔들 나면 어쩔거냐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손아름 님은 아무 생각 없는데 나 혼자 나대는 것 같아서.

“아! 아아아... 스캔들. 스캔들 걱정하셨구나. 스캔들. 아하하...”

반응이 왜 저래.

“에이. 괜찮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봐도 절대 스캔들로 볼 것 같진 않

은데요? 헤헤헤.”

“...”

하긴.

지금 내 복장은 그냥 딱 운동복. 츄리닝이다. 거기다 시합 끝나고 대충 씻고

말린 머리하며. 손아름과 스캔들이 나기엔 갭이 조금 많이 클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요!”

결국 손아름 님에게 이끌려 따라간 라면집.

맛집 맞나? 사람이 없는데?

“헤헤. 여기가 보기엔 이래보여도 되게 맛있대요!”

“누가 그래요?”

“어... 친한 언니가요?”

과연.

진짜 맛있는 집이면 손님도 많고 돈도 많이 벌었겠지. 그 돈으로 가게 외관도

신경썼을테고.

“아! 진짜라니까요? 저 못 믿어요?”

흑백이 또렷한 눈으로 날 올려다 보는 손아름.

나랑 똑같은 서른 살인데 교복만 입혀두면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

다. 사람 맞나?

“믿죠. 믿어요. 들어가죠! 맛있겠네!”

사실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웬만하면 다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봉지 라면을 끓여도 혼자 세 봉지에 밥 말아 먹고 죠리퐁까지 냉면 그릇으로

한 그릇 뚝딱 할 수 있을 정도.

“주문하신 라면 나왔습니다.”

분명. 그 정도로 배가 고팠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좀 심했다.

“... 해서 씨. 먹을 만해요?”

“아뇨.”

진짜 내가 배만 안 고팠어도 한 젓가락 먹고 안 먹었을 텐데. 배가 고파서 꾸

역꾸역 먹고 있었다.

“그쵸? 별로죠?”

“...”

알면서 왜 물어봐?

손아름 놈님은 애시당초 한 젓가락만 먹고 젓가락을 내려뒀다.

“해서 씨는 맛있게 잘 드시길래. 제 입에만 안 맞나 싶었거든요.”

대체 어딜 어떻게 보면 맛있게. 잘. 먹는걸로 보였을까.

“배가 너무 고파서 그냥 배에 뭐 집어넣는다는 생각으로 먹고 있습니다.”

“...죄송해요. 나가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됐어요. 아깝게시리.”

“제가 못 먹겠어서요. 저녁도 못 먹었는데. 이걸로 한 끼를 때울 순 없죠!”

하긴.

나도 오늘 제대로 된 첫 끼니를 이런 사료급 라면으로 때우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다시금 손아름의 손에 이끌려 라면집을 나와 근처의 분식집을 찾았다.

“먹읍시다! 맛있는 분식! 라면은 다음에 제가 진짜 맛있는 라면 대접할게요!”

“괜찮아요. 먹읍시다! 떡튀순!”

단골이라며 자신 있게 데려온 분식집.

실내가 작은 룸으로 꾸려져 있었는데 사람이 없어서 나와 손아름 둘과 떡튀순

만이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해서 씨는 왜 저녁도 안 드셨어요?”

“안 먹은 게 아니라 못 먹은 거긴 한데. 오늘도 시합 있었거든요.”

보통 이렇게 단절된 공간에 여자와 단둘이 있다면 꽤나 어색할 법도 한데. 신

기하게도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것도 살 떨리게 예쁜 여자와 있는데도.

손아름은 뭐랄까. 뭔가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연예인들

은 다 이런가?

“진짜요? 우와! 최창우 선수는 저도 알아요! 그럼 이기신 거예요?”

“뭐. 이겼으니까 이렇게 멀쩡하게 순대를 먹고 있겠죠?”

저녁을 챙기며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오늘 있었던 시합과 두호 형을 따라 랭

킹전을 관람하러 가는 데까지 이어졌다.

“와. 대단해요. 해서 씨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다니. 저라면 절대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요.”

“저도 놀라워요. 저한테 이런 적극적인 부분이 있을 줄 몰랐으니까.”

“그만큼 격투기라는 운동에서 매력을 느끼신 거겠죠!”

“뭐. 그건 맞아요.”

어두운 객석에서 울려 퍼지는 응원들.

케이지만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그 안에 상대방과 나.

승리했을 때의 그 성취감과 날 향한 관객들의 환호성.

거기에 팀 피스트의 코치들과 두호 형의 기대와 믿음.

오늘 처음으로 겪었던 ‘제대로 된 무대’는 내게 지우지 못할 강렬한 경험을

남겼다.

“그래도. 조금 겁나긴 해요.”

“또 어떤 게요?”

“또라뇨?”

“지난번에도 해서 씨가 가진 재능에 대한 불합리함을 걱정하셨잖아요.”

기억하는구나.

정말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정반대의 고민이에요.”

“정반대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그거에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헤헤.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손아름의 말대로였다.

격투기라는 운동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을 때는 내가 가진 재능이 불합리하다

느꼈는데. 조금씩 진심이 되어가면서 ‘내 재능이 생각보다 별 볼 일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스믈스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예전에 준현이와 맥주 한잔을 할 때 준현이가 했던 말이 있었다.

‘넌 뭘 하든 초반에 남들보다 빨랐어. 그런 만큼 남들보다 빨리 식고. 그리고

효인이...’

아. 마지막 말은 떠올릴 필요 없고.

어쨌든.

준현이는 내가 남들보다 많은 부분에서 빠르다고 하며 또, 빨리 식는다고 했

지만. 그게 온전한 정답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빠른 만큼 내가 가진 재능에 대한 한계 또한 남들보다 빨리 느꼈다.

그래서 ‘따라잡히기 전에’, ‘실패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만뒀던 거다.

남들이 보기엔 싫증이 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냥 비겁하게 도망쳤던

거다.

“전. 그냥 가수가 좋았어요.”

“네?”

“저도 그런 걱정 했었어요. 뜨긴 했는데 애매하게 뜨면 어쩌나. 다른 걸그룹

에 따라잡히면 어쩌나. 그저 그런 아이돌로 남아 잊혀지면 어쩌나. 그런데,

그런 걱정 다 제쳐두고 그냥 무대에 서는 게 좋았어요. 사람들의 환호성. 날

비추는 화려한 조명. 그 순간만은 내가 주인공인 무대.”

“...”

“좋아하는 만큼 열심히 연습했고. 연습한 만큼 무대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어

요. 뭐. 그러다 보니 결국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고 계시고. 헤헤.”

떡볶이를 먹고 있는 손아름의 외양은 영락없는 고딩인데. 정신연령만큼은 확

실히 나보다 높은 것 같았다.

“저도 그래요. 그래서. 이번에는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제대로 부딪쳐 보려

구요.”

이번만큼은. 꽤나 진심이거든요.

*

“준비 다 했냐?”

“넵!”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우리는 인천에서 출국해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나저나. 덥네요. 확실히.”

“열대성 기후다 보니 한국보다 덥고 습하지.”

“으다다. 몸도 찌뿌둥하고. 앞 좌석에 무릎이 닿아서 제대로 앉지를 못했더니

골반이 뒤틀린 느낌이에요.”

“스트레칭 좀 해둬.”

“넵!”

두호 형과 안 코치님은 스폰서 기업의 배려로 비즈니스석을 타고 왔지만, 나

와 나머지 코치진은 이코노미석을 타고 6시간 가까운 비행을 견뎠다.

-우두두둑.

좀이 쑤셨던 몸을 스트레칭하자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야. 해서 저놈 어디 부러진 거 아니냐?”

“그러게요.”

나보다 키가 작은 코치들은 대체로 조금 편하게 온 듯했다.

난 키도 덩치도 있다 보니 이코노미석은 정말이지 지옥이었는데.

“일단 바로 숙소 체크인하고. 두호 너는 일단 조금 쉴래?”

“아뇨. 짐만 풀어두고 바로 체육관으로 넘어가죠.”

한국에서는 아직 더위가 오기에는 이른 시기인 6월 초.

싱가포르는 이미 여름이 찾아온 듯 덥고 습했다. 싱가포르 날씨에 적응하고

컨디션을 조절하는 게 두호 형의 최대 숙제일 것이다.

“그럴까? 아무래도 시차는 거의 없으니. 그러면 애들한테 짐 풀어두고 오라하

고. 우리는 바로 체육관으로 가자.”

랭킹전까지 남은 날짜는 5일.

계체량까지는 4일이 남았다.

시차는 한국과 겨우 1시간 차이라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지만 현지에서의 컨

디션 조절이 가장 중요했기에 현지에 섭외해둔 체육관으로 향하는 두호 형이

었다.

“해서 너는. 어쩔래? 숙소 갔다가 올래? 아니면 바로 체육관으로 같이 넘어갈

래?”

“뭘 물어. 해서 넌 나랑 같이 바로 체육관으로 가자.”

“넵!”

안 코치님의 질문에 두호 형이 대신 대답을 해줬다.

그나저나. 싱가포르 체육관이라니. 괜히 기대됐다.

해외여행을 처음 해보는 건 아니었지만, 해외여행을 나와서 운동을 하러 가

본 적은 없었으니까.

“가자.”

안 코치님과 두호 형.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한 차로 움직였고, 짐을 들고

숙소 체크인을 하고 체육관으로 넘어올 나머지 코치진이 한 차를 타고 움직였다.

숙소와 체육관은 랭킹전이 열리는 싱가포르 실내 체육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끼익

습한 기후 때문인지 문을 여는데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나는 체육관.

문이 열리자 바깥보다 한층 더 습한 공기와 열기가 후끈 뿜어져 나왔다.

“여기서 기다려라.”

나와 두호 형에게 기다리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멋지게 안으로 들어서는 안 코

치님.

체육관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과 뭐라 뭐라 이야기하는 듯하더니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와. 안 코치님 영어 잘 하시나 봐요?”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 다 할 줄 알아. 괜히 메인 트레이너가 아니지.”

그렇게 안 봤는데. 안 코치님 인텔리였구나.

지능캐였어.

“미리 섭외 해둬서 문제 될 건 없다. 원래는 내일부터 시합 전날까지 우리가

통으로 빌린 건데, 오늘도 비워준다고 배려해줬어. 두호 네 팬이란다.”

“그래요? 감사하네요.”

짧은 영어로 체육관 담당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두호 형.

체육관 담당은 만족스런 얼굴로 주변을 정리하며 운동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

게 뭐라 뭐라 소리쳤는데, 아마 정리하고 나가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실제로 몇몇 사람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운동을 그만두고 짐

을 챙기기 시작했으니까.

후끈했던 열기도 한층 가라앉은 체육관.

두호 형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고 나는 체육관을 둘러보며 싱가포르도 한

국과 별반 다를 바 없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해서야.”

날 부르는 안 코치님.

“네. 코치님.”

“이 친구도 두호 팬이라는데. 두호 이야기하다가 널 알아보더라고. 한번 실력

좀 볼 수 있냐고 물어보네. 어쩔래?”

안 코치님 옆에는 아까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짐을 정리하던 현지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키는 나랑 비슷하려나. 체급도 나랑 비슷해 보였다.

“퍼스트 FC라고 들어봤지? FFC.”

“FFC요?”

FFC는 First Fighting Championship의 약자다.

WFC와 브로일러가 유럽을 석권한 명실상부 세계 탑 2의 격투기 단체라면 FFC

는 그 뒤를 바짝 쫓는 아시아 최대 격투기 단체였다.

“그래. 이 친구 이름은 조쉬. FFC 미들급 랭커인데. 마침 너랑 최창우 시합을

본 것 같아. 어때. 스파링 한번 해볼래?”

“갑자기요?”

“두호는 컨디션 챙겨야 하니 어렵고. 한국의 챔피언을 이긴 파이터의 실력을

보고 싶다는데.”

어우. 아직 몸이 찌뿌둥하고 어깨가 결리는데.

잠깐 고민을 하는 사이 안 코치님에게 또 뭐라 뭐라 말하는 조쉬.

“음...”

살짝 낯빛이 굳는 안 코치님.

“왜요? 뭐래요 쟤가?”

“어. 아냐. 그냥 비행기를 오래 타고 와서 컨디션이 안 좋은 거면. 자기가 봐

주면서 할 테니 부담가지지 말라네.”

“...”

봐줘?

최창우가 털리는 걸 봤다면서 한다는 말이 봐주면서 해?

“하죠.”

“할래?

”네.“

안 코치님도 은근히 내가 스파링을 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스파링을 승낙하자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거든.

”몸 풀 시간은?“

”괜찮아요. 날이 더워서 벌써 근육이 말랑말랑해요.“

가벼운 스파링에 뭐 워밍업까지.

-툭. 툭.

가방에서 전용 스파링 장갑을 꺼내서 끼고 케이지 안으로 들어서자 곧이어 따

라 들어오는 조쉬.

FFC 미들급 랭커라.

적어도 스트릿 FC보다는 확실히 한 단계 높은 단체에서 인정을 받은 선수의

기량에 내 재능은 과연 닿을 수 있을 것인지 시험해볼 좋은 기회가 될 것 같

았다.

-씨익.

꽤나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까딱까딱 손짓하는 조쉬.

네가 아직 한국의 매운맛을 못 봤지?

오늘 제대로 한번 맛보여줄게. 딱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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