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_일정 문제 있어?
1.
-2라운드 56초 만에 강해서 선수가 최창우 선수를 상대로 승리를 가져갑니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강해서 선수!
장내에 울리는 목소리에 승리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해서야! 잘했다! 잘했어!”
안 코치님을 필두로 팀 ‘피스트’의 코치진까지 올라와 날 부둥켜안고 소리를
질러댔고, 어느새 케이지 안으로 들어온 방송 카메라가 정신없이 주변을 맴돌
며 날 찍었댔다.
최창우는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자기 쪽 세컨 코너로 가서 얼굴에 묻은 피
를 닦고 있었다.
“강해서 선수! 오늘 최창우 선수와의 경기에서 1라운드 내내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는데요. 2라운드에는 분위기를 반전시켜 56초 만에 KO를 따내셨습니
다. 여기에 어떤 전략이 있었을까요?”
케이지 안으로 들어온 인터뷰어가 마이크를 건네며 질문을 던졌다.
안 코치님과 세컨진에게 어떻게 하면 되냐는 눈빛을 보내니 그저 어깨를 으쓱
할 뿐이었다.
그냥 내 마음대로 인터뷰하면 된다는 거겠지?
“오늘 제 코치님께서 당부하셨던 말씀이. 함부로 들어가지 마라. 였습니다.
그래서 틈이 있어도 꾹 참고 최창우 선수의 움직임을 그저 보기만 했습니다.”
“소극적이었던 게 아니라 최창우 선수의 움직임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 최창우 선수의 움직임에 익숙해지는데 1라운드밖에 안 걸린 겁니까?”
“어... 아뇨. 사실 익숙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
만 이게 함정인지. 일부러 틈을 보인 건 아닌지. 그걸 판단하는 데 오래 걸렸
습니다.”
“그 말씀은...”
“네. 1라운드 내내 참고 기다렸는데. 함정이 아닌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2라
운드는 시작과 함께 틈을 공략했고, 결국 최창우 선수는 공략당했습니다. 그
게 끝입니다.”
사실 지금 주위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았다.
관객들은 환호를 퍼부으며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정작 케이지
주변은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제가 듣기로는 격투기에 입문하신 지 이제 두 달 정도가 되었다고 들었습니
다. 정말인가요?”
“네. 스트리트 파이트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운동을 시작했고, 그 기간
이 딱 두 달 정도 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단 두 달 만에 스트릿 FC의 챔피언을 이기시다니. 마지막
으로 오늘 승리에 대해 한마디 하신다면?”
“오늘 제가 이겨도 챔피언 벨트는 계속 최창우 선수의 허리에 감겨 있을 겁니
다.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입니다. 저와 최두호 선수에 대한 최창우 선수의
진심 어린 사과입니다. 공약하신 게 있으니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생중계로 TV 송출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 최대한 순화해서 말을 하느라 힘들었다.
맘 같아서는 ‘무릎 꿇고 사과해 새끼야’라는 말을 시원하게 내뱉고 싶었지만,
괜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욕먹을 짓을 할 필요는 없겠지.
“고생했다! 오늘 정말 잘 싸웠어!”
승자 인터뷰까지 끝마치고 케이지에서 내려오자 안 코치님은 다시 한번 내 어
깨를 두드리며 웃어댔다.
“어쩔 거냐? 데미지도 별로 없고. 체력도 충분할 텐데. 밥이라도 먹을까?”
“아뇨. 어차피 안 코치님도 빨리 체육관 복귀해야 하지 않아요?”
“응? 어. 그렇지. 그래도 밥 먹고 갈 시간은 충분해. 시합도 빨리 끝나서.”
바로 다음 주면 두호 형의 랭킹전이 있다.
오늘 최창우와 나의 이벤트 시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요한 시합.
고작 이벤트 경기의 승리를 축하하자고 두호 형의 케어를 소홀히 할 수는 없
었다.
“어차피 코치님은 계산만 하고 갈 거잖아요. 음식 냄새 배면 안 돼서.”
“그렇긴 한데...”
“같이 가죠. 체육관. 두호 형도 체육관 있을 거 아녜요.”
“그럴래? 체육관 가면 뭐 못 먹을 텐데. 배 안 고프겠어?”
한창 막바지 수분 커팅 중인 두호 형 옆에서는 음식 냄새도 풍겨선 안 됐다.
아마 밥을 먹으러 갔더라도 안 코치님은 계산만 하시고 잽싸게 자리를 피하셨
겠지. 나머지 코치진은 바로 퇴근하셨을 테고.
“괜찮아요. 나중에 집 가서 밥 먹으면 되죠.”
무엇보다. 이번 시합의 결과를 두호 형에게 전하고, 또 인정을 받고 싶다...
라는 조금 낯간지러운 속내도 있었다.
날 격투기라는 세계로 억지로 잡아 끌어준 게 두호 형이었다.
이번 최창우와의 매치에서 도화선이 된 부분도 두호 형을 언급한 영상이었고.
이미 코치진들이 뒷정리를 마쳐둔 상태였기에 간단하게 몸을 씻고 옷만 갈아
입은 뒤 마포에 위치한 팀 ‘피스트’의 체육관으로 향했다.
철컥
“두호 형! 저희 왔어요!”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내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사무실 쪽에 계신가?
“두호 형 사무실...”
“아빠! 삼촌들 왔나 봐!”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들리는 낯선 목소리.
“어? 삼촌은 누구야?”
뭔가 작고 하얗고 귀여운 생명체가 크고 까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 어?”
내가 누군지 묻기 전에 네가 누군지부터 밝혀야 하는 거 아냐? 아니지. 애한
테 그런 걸 바라면 안 되나?
“어. 해서야. 왔냐.”
그때 아이의 뒤에서 들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
“두호 형!”
“유안아. 인사부터 해야지.”
“안녕하세요오. 최유안임미다!”
두호 형의 말에 공손히 배꼽 인사를 하는 유안이.
“형 딸이에요?”
“이쁘지?”
“...완전요.”
올해로 여섯 살이 되었다는 유안이는 다행히도 두호 형을 하나도 닮지 않았다.
“형수님을 닮아 다행... 켁!”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맞다. 요즘 이 양반 까칠하지.
암만 그래도 방금 시합 끝나고 온 사람을 때리다니. 너무하네.
“아! 아빠! 그래서 이 삼촌 누구냐구우!”
“유안이는 처음 보겠구나? 아빠가 이야기한 적 있었지? 아빠 다음으로 싸움
잘하는 아저씨 있다고.”
“아! 삼촌이 그 강한 삼촌이야?”
아빠 다음으로 싸움 잘하는 아저씨라니. 꼬마 숙녀한테 싸움이 뭐야 싸움이.
“안녕? 삼촌은 강해서 삼촌이야.”
“강해서 삼촌? 안 강하면 삼촌 아니야?”
“...”
이게 개그인지 아이의 천진함인지 모르겠다.
“푸하하. 됐다. 들어와. 문 앞에서 그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코치들은 다 퇴근하셨고. 안 코치님은 주차하고 올라오실 거예요.”
지금 두호 형은 훈련보다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휴식과 영상 시청이 하루 일
과의 대부분이었다.
안 코치님 외의 다른 코치들이 번잡스럽게 체육관으로 올 필요가 없었다.
“오늘 시합. 잘 봤다.”
“어? 진짜요?”
혹시라도 신경 쓰일까 봐 말도 안 했는데. 결과적으로 어렵지 않게 이겼지만,
시합 전까지만 해도 불안했었으니까.
“좋은 시합이었다. 1라운드에도 충분히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왜 질질 끌었던
거냐?”
“하하. 일부러 질질 끈 건 아니구요.”
그래도 국내 챔피언인데 그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어서 무슨 전략인가
싶었거든요.
“어쨌든. 내가 제대로 봤어. 넌 스트리트 파이트나 스트릿 FC에 담길 그릇이
아니야.”
“칭찬이죠?”
“그래. 아. 해서 너. 여권은 있지?”
“여권이요?”
갑자기 여권은 왜 물어보시지?
“안 코치가 말 안 했어? 이번 랭킹전. 해서 너도 같이 간다. 혹시 일정 있으
면 조정해둬.”
“...갑자기요?”
“오늘 시합 보고 확정한 거야. 모레 출국한다. 일정 문제 있어?”
“네? 아뇨. 뭐 없긴 한데.”
지금은 거의 반백수 상태라 일정에 무리는 없지만.
갑자기 출국이라니. 당황스럽긴 했다.
시합은 아직 일주일가량 남았지만, 시차 적응과 컨디션 조절 때문에 출국은
더 빨리한다고 듣긴 했다. 그런데 그 일정에 내가 끼게 될 줄이야.
“내가. 스트리트 파이트랑은 비교도 안 되는 좋은 무대 만들어준다고 했지?”
“어... 그랬죠?”
그래.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스트리트 파이트 하차하고 처음 운동 가자고 꼬시러 왔을 때.
-턱
어깨를 잡은 두호 형의 손바닥에 옷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감량으로 갈라진 손바닥과 수척해진 얼굴. 푸석한 피부.
그만큼 날카롭고 깊어진 눈이 날 올곧게 직시했다.
“너한테 국내는 좁아. 오늘 확실히 느꼈다. 따라와라. 세계를 보여주마.”
2.
-스트릿 FC의 악동 최창우! 떠오르는 신예 강해서에게 잡아먹히다?
-결국, 입심을 따라오지 못한 실력? 최창우 2라운드 56초 스탠딩 그로기 패배!
-국내 챔피언을 압도한 무서운 신인 강해서! 그의 차기 행보는?
“으아아아악!!!”
홀로 남은 스트릿 짐 라커룸에서 오늘 경기의 기사를 찾아보던 최창우는 온몸
의 장기를 쏟아내듯 악을 썼다.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유리했던 일 라운드 때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면 어땠을까. 타격보단 그라운드
로 끌고 갔으면 어땠을까. 클린치를 잡았을 때 조금만 더 단단히 조였으면 어
땠을까.
이미 끝나버린 시합에 대한 아쉬움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악을 써야지만 조금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창우야...”
그때 라커룸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윤성화 코치.
“...나가줘.”
“창우야.”
“나가라고!!!”
“...”
윤성화에게 화를 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최창우도 알고 있었다.
이번 시합은 자신이 먼저 원했고, 경기에서 패배한 것도 자신의 실력이 부족
해서였다.
하지만 당장의 이 울분을 돌릴 사람이 필요했다. 그걸 알기에 윤성화는 그저
최창우의 악다구니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애새끼들 눈빛 봤어? 크흐흐... 아주 꼬시다는 눈빛이더만.”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랬다고...”
“누가 그러긴! 내가 다 봤어!”
오늘 최창우의 경기는 SFC 062 시합 중에 꼽사리로 끼어있던 이벤트 매치였다.
최창우는 전두형이 총애하는 챔피언이자 스트릿 FC의 간판스타기도 했지만,
그만큼 적도 많았다.
트래쉬 토크가 심하고 다른 선수들에게 막말을 잘하는 최창우에게 반감을 가
진 스트릿 FC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
그런데 최창우가 이벤트 매치라고는 하지만 신인 격투기 선수에게 졌다.
그것도 2라운드 56초 만에. 그것도 타격에 의한 스탠딩 그로기상태로.
“사실. 일 라운드부터 느꼈어. 데미지가 제대로 박히지 않는다는 거.”
무겁게 가라앉은 최창우의 목소리.
“뭔 놈의 애새끼가. 대갈통을 두드리는데 목이 꿈쩍도 안 해. 첫 콤비네이션
에서 클린 히트를 넣었을 때 그놈 눈을 보고 알았어. 이 시합.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윤성화는 그런 최창우에게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경기 때도 그랬다. 최창우의 세컨에 서서 어떤 조언도 해줄 수가 없었다.
한 대를 맞던 두 대를 맞던. 한 대만 때리면 이긴다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목구멍까지 올라왔었다.
도망쳐라. 맞으면 안 된다. 섣불리 들어가지 마라. 철저하게 교전을 피하며
체력을 빼라. 후반을 노려라.
하지만 차마 챔피언인 최창우에게 그런 지시를 내릴 수가 없었다.
상대는 이제 갓 격투기를 시작한 풋내기였으니까.
“하. 당분간 시합 잡지 말아 달라고 대표님한테 좀 전해줘. 당분간 체육관이
나 보면서 좀 쉬어야겠어.”
“대표님이... 당분간 자숙하라시더라.”
“...무슨 말이야?”
“체육관... 운영 다른 사람 찾아본다시더라.”
“대표님이...?”
스트릿 짐의 대표는 최창우였다.
스트릿 FC 소속 체육관이자 챔피언 최창우가 운영하는 체육관.
하지만 실상은 전두형이 최창우에게 관리를 맡긴 체육관이었으니, 이번 시합
으로 이름값이 현저히 떨어진 최창우를 배제하고 새로운 선수에게 관리를 맡
기겠다는 말이었다.
“...미안하다.”
“나 아직 챔피언이야! 벨트! 나한테 있다고! 챔피언이 운영하는 체육관인데
대체 왜!”
“미안하다.”
“...씨바알!!!”
****************
후비적.
누가 내 욕을 하나.
귀가 간지럽네.
두호 형에게 랭킹전에 함께 갈 것을 제안받은 뒤, 안 코치님이 오시면서 절차
상의 전달사항까지 모두 전해 듣고 나서야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체육관에서 집까지는 별로 멀지 않았기에 설렁설렁 걸어가고 있는데.
“어? 저기요!”
낯선데 익숙한 목소리.
“저기요! 강해서 씨!”
또렷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또 보네요?”
손아름 님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