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_Vs.최창우
1.
“그래서? 바로 다음 주라고?”
오랜만에 뭉친 친구 놈들과의 술자리.
웬만하면 일주일에 한 번은 얼굴 보는 놈들인데, 최근에는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만날 타이밍을 잡지 못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박기영 선수와의 시
합이 끝나고였던가?
“어.”
“미친 새끼. 해서야. 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준현아. 좀 말려 봐
인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톡으로는 다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던져댔고, 그 결
과 이런 격앙된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야. 시합이라는 게 그렇게 막 해도 되는 거야? 홍보도 하고 준비도 하고. 그
러려면 막 몇 달씩 걸리고 그런 거 아냐?”
“그래. 거기다 해서 너는 시간이 훨씬 더 필요할 거 아냐?”
친구들의 걱정이 절대 잘못된 건 아니었다.
실제로 WFC 선수들의 평균 시합 준비 기간은 3개월 정도가 된다고 들었다.
“체중 감량 없고. 이벤트성이거나 급하게 매치가 잡히는 경우. 짧게는 10일에
서 심하면 준비 기간 없이 매치가 성사되는 경우도 있긴 있음. 근데 확실히
이번 시합은 해서한테 불리한 것 같긴 함.”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준현이가 대신해줬다.
이번 이벤트 매치가 이토록 급하게 잡힌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표면
적인 이유로는 ‘일정이 이때밖에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최창우는 지난번 상대였던 박기영 선수와는 그 위치가 달랐기에 단
독 시합으로는 매치 성사가 어려웠다.
결국, 기존 스트릿 FC의 경기 일정에 편승해 시합을 치러야 했는데 그게 바로
다음 주 토요일이었다.
“너무 촉박하잖아? 차라리 다음 경기 일정에 맞추면 안 돼?”
“그때는 최창우가 일정이 안될 것 같대. 그리고 나도 그냥 빨리 해치우는 게
편하고.”
“지랄. 이길 가능성을 높이려면 뒤로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뤄야지!”
“뭐. 그렇긴 한데.”
표면적 이유가 스트릿 FC의 시합 일정이었다면, 속사정은 나와 최창우 측이
전혀 달랐다.
아마도 최창우와 전두형 대표가 시합 일정을 이토록 빨리 잡은 이유는 내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일 거다.
지금도 패배라는 두 글자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겠지만, 아주 약간의 가능성
마저도 최소화하겠다는 생각이겠지.
그런 스트릿 FC의 요청에 내가 군말 없이 응한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두호 형의 시합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는 것.
두호 형의 시합은 이제 보름 정도 남았다.
그 전에 최창우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시합 전까지 지속적으로 나와 두호
형을 걸고넘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경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불안 요소를 정리하는 건 당
연했다. 그 청소부 역할을 내가 맡았을 뿐.
“진짜. 현실인데도 믿기지가 않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구석 폐인이었던 놈
이 격투기라니. 그것도 당장 다음 주면 챔피언이랑 시합이고. 재현아. 어떻게
생각하냐?”
“어떻게 생각하긴. 미쳤다고 생각하지. 해서 저놈이 진짜 십 년만 빨리 격투
기를 접했으면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안주가 달라졌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기태와 재현이가 농담삼아 저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가장 실감이 나지
않는 건 나 스스로였다.
스트리트 파이트 출연 당시만 하더라도 그냥 취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주변에 떠밀려 시합을 갖게 되고, 또 승리를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매력을 느꼈는지. 아니면 내 안에서 무언가 변했는지.
어쨌든 지금은 꽤나 진지한 마음으로 격투기라는 스포츠에 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너 진짜 격투기 계속할 거야? 진지하게? 이제 글 안 쓰고?”
“음... 글이야 꼭 지금이 아니라도 쓸 수 있으니까. 모든 일에 타이밍이 있다
면, 격투기를 할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은 지금이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해보
고 싶은 마음이 있어.”
몇 안 되는 시합이었지만, 상대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미약하나마 내 어깨에
쌓여있다. 또, 두호 형이나 안 코치님. 그리고 맘모스까지. 짧지만 날 지지하
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까지.
과연 얼마나 오래. 어디까지 높이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기에는 충분한 동기부여였다. 무엇보다 격투기 자체가
너무 재밌었고.
“근데. 전문적으로 하기에는 나이가... 조금 많지 않냐? 서른이면 너무 아잰
데...”
거 치사하게. 우리 다 동갑이구만 나이 공격을 하네.
“노노. WFC 헤비급 상위 랭커들 평균 나이가 37세가 넘음. 격투기는 다른 운
동에 비해 선수 전성기가 긴 편이고, 오히려 30대 이후에 경기력 폭발하는 경
우가 많음.”
하. 준현아. 이번에도 니 말 내 맘이다.
나도 향후 몇 년간의 내 삶의 진로를 정하는 부분인데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하
지는 않았다.
여러 사례들과 격투기 시장에 대한 수요를 생각했고. 또 내 가능성과 앞으로
의 기대치까지 고려한 결과, ‘생각보다 할 만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격투기를 하겠다고 했겠어.
“근데. 그것보다 중요한 게 다음 주 최창우와의 경기지. 이기는 건 고사하고,
일단 준수한 경기력을 보여줘야 함. 지금 해서 꼬라지로 봤을 때 스트릿 FC에
서 뛰는 건 물 건너갔고. 일본이나 유럽 쪽 리그에 진출하려면 이번 시합 내
용이 중요함.”
에헤이.
우리 현자님마저 내 승리를 점치진 않는구나.
“왜 내가 이긴다는 가정은 없어?”
“가능성이야 있지. 가정이 없을 뿐. 사람도 벌에 쏘여 죽을 수 있으니까. 다
만 보편적으로 사람이랑 벌이 일대일로 싸운다고 했을 때 사람이 질 거라 생
각하지는 않잖아?”
“한마디로 내가 이긴다면. 그건 사고란 말이지?”
“뭐. 그렇지?”
그래.
사고지. 사고야.
그런데 사고 치는 건 내 전문이라서 말이야.
한국 격투기 판에. 아주 제대로 사고 한번 쳐 줘야겠네.
2.
최창우와의 시합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시합 제안서를 받고, 그날 저녁 유나tv에서 라방으로 승낙의 의사를 밝히면서
매치 일정 조율은 일사천리였다.
스트릿 FC는 유나tv에서 내가 했던 발언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철저하게 시합에 관련된 이야기만 전해왔으며, 최창우 또한 한 일간지에서
‘긴말은 필요하지 않다. 나를 보고 원숭이라 했는데, 철창에 들어온 새로운
원숭이에게 집단의 규칙을 알려주는 것도 우두머리 원숭이의 일이라면. 나는
기꺼이 우두머리 원숭이가 되겠다.’라는 인터뷰를 남긴 것이 끝이었다.
시합은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졌고, SFC 062 시합의 이벤트 경기로 확정되었다.
시합 순서는 기존의 6개 매치 중 마침 3번째 시합과 4번째 시합 사이.
“해서야. 특이점은? 없지?”
“네. 컨디션 좋고. 몸도 가뿐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SFC 062의 첫 번째 시합이 끝난 시점이었다.
난생처음 와 보는 장충체육관. 그리고 선수 대기실.
이제껏 경험했던 동네 체육관에서의 그런 경기가 아니라는 게 현장에 도착하
니 피부로 실감이 되었다.
중계 또한 파프리카 tv 같은 인터넷 방송이 아닌 ‘리얼 액션’이라는 TV 채널
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된다고 했다.
“경기장. 슬쩍 둘러보고 올래?”
“아까 들어오는 길에 봤어요.”
“쫄지 말고. 겁먹지 말고. 어차피 네가 서 있을 곳은 케이지 안이야. 알지?”
“넵!”
두호 형은 랭킹전을 코앞에 두고 있어 오늘 현장에 함께 오지 못했고, 대신
안 코치님과 팀 피스트 코치님들이 내 세컨을 봐주셨다.
“슬슬 워밍업 좀 해둘까?”
“벌써요?”
“천천히 데워두자. 작은 체육관이랑 다르게 이런 대형체육관은 공기가 차. 몸
이 금방 식을 거다. 그리고 넌 이런 체육관 경험이 없으니 막상 경기장에 나
가면 몸이 굳을 수도 있으니 충분히 근육을 풀어줘야 해.”
“알겠습니다.”
나는 군말 없이 안 코치님의 지시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확실하게. 천천히. 꼼꼼히 풀어줘. 몸 구석구석 기름칠한다는 생각
으로.”
“네!”
코치님의 지도에 따라 꾸욱 꾸욱 몸을 푸는데, 생각보다 근육이 뻣뻣했다.
머리로는 긴장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안 코치님의 말을 안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코치님! 슬슬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창 몸을 풀고 있는데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팀 피스트의 다른 코치님.
준비해야 한다는 말에 대기실 안에 있는 모니터를 보니 벌써 3번째 시합의 마
지막 라운드였다.
“오케이. 해서야. 몸 상태는?”
“최곱니다. 구석구석 기름칠 완벽하게 해 뒀습니다.”
“좋아! 준비해!”
-짝!
아. 왜 등짝을 때리고 그래요. 안 그래도 시합 시작하면 두들겨 맞을 텐데.
나는 따끔한 등짝을 벅벅 긁으며 스트레칭을 마무리하고 시합 준비를 끝마쳤다.
“강해서 선수. 입장 준비해주세요.”
곧이어 들어온 이벤트 시합 선수들의 스탠바이 콜.
“네!”
드디어 내 생에 첫 TV 시합이 시작되었다.
**************
-와!!!
-!!!!!!!!!!!!!!
“...”
어두운 조명과 그 속에서 정신없이 쏘아대는 레이저 빔.
나도 제목을 모르는 어느 요란한 입장곡에 맞추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자 처
음엔 환호성이. 그 이후엔 뭔가 멍할 정도로 먹먹한 소리들이 들렸다.
“정신 차려라. 해서야.”
경기장을 들어서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안 코치님
이 다시 한번 내 등짝을 때렸다.
“아... 넵!”
넓은 체육관은 관중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열기는 뜨거웠지만. 반대로 공기
는 서늘하리만치 차가웠다.
어둡게 불 꺼진 관중석과 반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케이지와, 그 위
의 거대한 전광판.
이래서 아까 코치님이 ‘어차피 네가 서 있을 곳은 케이지 안’이라고 하신 거
구나.
까딱하면 이 분위기와 공기에 짓눌려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었
겠다 싶었다.
“해서야. 이쪽으로.”
팀원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자 방송국 카메라들이 내 얼굴 앞까지 다가와서
날 촬영했고, 앞선 열의 관중들은 날 보며 뭐라 뭐라 떠들썩하게 환호하고 있
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팀 옷을 벗고 마우스피스를 물고 있으니 스트릿 FC
측 사람이 와서 얼굴에 바세린을 발라줬다.
“정신 차려! 해서야!”
“아. 넵!”
“이리 와. 파이팅 한번 하자.”
“““팀! 피스트! 파이팅!!!”””
케이지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팀원들의 기운을 받은 뒤 차가운 케이지를 열고 링 안으로 들어섰다.
‘아...’
여기구나.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애초에 내가 설 곳은 이곳이었다는 그런.
사람들의 환호. 오로지 케이지만 비추는 빛.
-꿈틀. 꿈틀.
조금 전까지 미약한 긴장으로 굳어있던 근육들이 사르르 녹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열광과는 달리 싸늘한 케이지 안의 공기처럼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
았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케이지 안을 가볍게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
아오자 뒤이어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케이지로 들어서는 상대 선수. 최창우가
보였다.
“양 선수. 중앙으로.”
내가 지금 얼마나 침착하냐면. 쭉쭉빵빵한 라운드 걸 누나들이 케이지 안팎으
로 돌아다니는데도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이건 준현이의 별명을 따서 현자모드라 칭해야겠다.
“자. 양 선수. 케이지 끝으로!”
심판의 주의사항 설명이 끝나고. 드디어 시합이 시작되는 순간.
케이지 양 끝으로 이동하며 최창우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문득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경기장 안까지 들어와 우리를 촬영하던 카메라마저 케이지 밖으로 나가고
“파이트!”
심판의 파이트 콜과 함께 빠르게 링 중앙에서 다시 만난 나와 최창우.
박기영이나 스트리트 파이트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절대고수들과는 전혀 다른
그의 몸이 한눈에 들어왔다.
굳이 비교하자면 두호 형이나 맘모스의 몸에 가까울 정도로 단련된 몸.
아직 군살이 많은 나와는 달랐다.
“후욱. 후욱.”
어느새 양팔 간격 정도로 좁혀진 거리에서 최창우의 호흡 소리가 선명하게 들
려왔다.
그리고 꿈틀거리는 최창우의 왼쪽 어깨 근육.
그 꿈틀거림은 전조였다는 듯 왼쪽 어깨가 앞으로 나오더니 휘두르듯 뻗어오
는 왼 주먹이 따라왔다.
-휙. 휙.
충분한 거리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 주먹을 피해내며 나도 레프트 잽으로
응수했고, 최창우 역시 어렵지 않게 잽을 피해내며 양팔 간격 안으로 달라붙
었다.
-퍽!
그에 맞춰 마중 나간 내 오른쪽 주먹은 어렵지 않게 내게 파고들던 최창우의
왼쪽 안면을 가격했지만
-휘익
좁혀진 간격 사이로 짧게 뻗어오는 최창우의 라이트를 피할 틈이 없었다.
‘좆됐네.’
빤히 보이지만 맞을 수밖에 없는 주먹.
-퍼억!
다행인 건 그 또한 충격이 있었기에 펀치에 큰 힘이 실리진 않은 듯했다.
-쩌억!
그리고 고개가 돌아간 아주 짧은 순간.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뻗어온 그의
오른쪽 로우킥까지 허용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첫 공방에서 이득을 봤다고 생각했는지 재수 없게 씨익 웃는 최창우.
왜 그렇게 웃냐?
설마.
너 이거 작정하고 때린 건 아니지?